이제야 비로소 아버지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 딸이 기록한, 70세 원모씨 관찰 일기
정아름 지음 / 모티브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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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표지부터 짚고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연한 살구빛과 흰색이 위아래로 나뉜 바탕에 초록 글씨가 큼직하게 올라앉았고, 아래쪽에는 이불에 얼굴을 묻은 채 엎드린 남자가 몇 개의 선으로만 그려져 있어요. 띠지에 적힌 말은 "아 출근하지마까". 웃자고 고른 문구일 텐데, 아침마다 비슷한 소리를 속으로 삼켜본 사람에게는 그리 가볍게 읽히지 않습니다. 이 한 권의 성격이 표지에서 벌써 드러납니다. 웃기면서 동시에 목이 좀 뻐근해지는 쪽이요.


<이제야 비로소 아버지가 이해되기 시작했다>는 울산에서 오래 방송 일을 해온 정아름 작가가 1957년생 아버지 '원모씨'를 관찰해 적은 가족 에세이입니다. 판형도 두께도 평범한 편이라 손에 쥐고 술술 넘기기 좋았습니다.


첫 장은 새벽 5시에서 출발합니다. 올해 일흔인 아버지는 약 40년을 가구점 사장으로, 약 8년을 주상복합 경비원으로 살았고, 중학교를 마치자마자 일을 시작했으니 출근 경력만 어림잡아 50년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 매일 그만두고 싶다고 말합니다. 가구점 시절에는 다 때려치우고 싶다고, 경비원이 된 뒤에는 그만두고 싶다고요. 그러면서도 겁이 많아 진짜로는 못 그만두는 사나이라고 딸은 적어 둡니다. 이불 정리, 물통째 들이켜는 보리차, 세안과 세두, 성모마리아상 앞에 쪼그려 앉아 넘기는 명언 달력까지 이어지는 아침이 꽤 자세히 묘사되는데, 저자는 그 흐름을 "첫 블록만 건드리면 연이어 쓰러지는 도미노처럼, 아빠의 루틴은 시작과 동시에 모든 것이 물 흐르듯 연쇄적으로 반응한다."고 표현합니다. 이 챕터 끝에 놓인 한 줄, 가장 무서운 사람은 그냥 하는 사람이라고 했던가,에서 잠깐 속도가 느려졌습니다. 성실이라는 말이 이렇게 담백하게 쓰이는 걸 오랜만에 봤어요.


중간쯤 가면 결이 한 번 꺾입니다. 생방송을 앞두고 분주하던 어느 날, 딸에게 아버지의 문자가 한 통 날아옵니다. 평소에도 툭툭 던지던 종류의 말이었고, 그날은 딸도 화부터 났습니다. 분노 섞인 답을 보내놓고 스튜디오에 들어가 행복한 척을 했다고 솔직하게 써 놨더군요. 나중에야 그게 지금 마음이 힘드니 토닥여 달라는 신호였음을 알아차리는 장면에서, 이 책이 유머로만 굴러가는 기록이 아니라는 게 분명해집니다. 저자는 자신의 우울을 비에 젖은 무거운 솜옷에 비유하는데, 아버지와 딸이 같은 기질을 나눠 가졌다는 사실이 그 대목에서 조용히 확인됩니다. 결론이 거창하지 않은 점도 좋았습니다. 다음에 또 그런 연락이 오면 화내지 말고 회 한 접시 사 드려야겠다는 정도로 닫아요.


네 번째 장은 아예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우리 아빠는 알코올 중독자였다고, 이제는 말할 수 있다고요. 지금은 20년 가까이 술을 끊어낸 단주인이라는 문장이 바로 뒤에 붙습니다. 화목해 보인다는 댓글을 많이 받지만 사실 진작 찢어졌어야 할 가족이었다는 술회, 부모에게 이혼 서류를 직접 출력해 건넸던 청소년기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여기서 한 문장을 옮겨 둡니다. "화목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라 봤기에, 별일 없는 가정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안다. 서로를 향해 소리치지 않고, 눈치를 보지 않고, 아무 일 없이 하루를 마무리하는 평범한 저녁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안다." 회복의 방식을 기적이라 부르지 않는 태도도 인상적입니다. 아버지는 단주 모임에, 어머니는 성당에, 두 자매는 조금 일찍 독립해 부담을 덜면서 각자의 몫을 졌고, 그렇게 아주 조금씩 서서히 달라졌다고만 적습니다. 지금 힘든 시간을 지나는 누군가에게 서로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좀 나아진다고, 나도 그랬다고 건네는 말이 이 책에서 가장 단단한 위로였습니다.

후반부에는 2024년 8월, 40년 동안 지켜온 가구점을 접던 날이 나옵니다. 재고를 다 팔아야 문을 닫을 수 있는 업종이라 한 달간 매장 세일을 했고, 오래 함께한 가구들이 하나둘 주인을 찾아갔다고 해요. 뭘 먹고 살아야 하나 걱정하는 아내에게 남편이 답합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면 되는 거지." 작은 등에 장롱을 지고 이 집 저 집 다니던 세월이 그 한마디에 눌려 있습니다. 딸은 자신이 가구점 딸이자 부모의 치열한 삶의 수혜자였다고 뒤늦게 적고, 목구멍에 커다란 복숭아 씨앗이 걸린 것처럼 뻐근해진다는 말로 감정을 대신합니다. 그러고는 존댓말로 바꿔 감사 인사를 남기고 챕터를 닫아요.


아쉬운 점도 있었습니다. 원래 짧은 영상에서 출발한 이야기여서인지 한 꼭지가 두세 쪽에서 끝나는 경우가 많고, 더 들여다보고 싶은 대목이 금세 지나갑니다. 특히 알코올 중독을 지나온 시간이나 폐업을 결정하기까지의 망설임은 조금 더 길게 읽고 싶었어요. 아버지 본인의 목소리가 별지 인터뷰 정도로 한정된 것도 살짝 걸렸습니다. 관찰 일기라는 제목에 충실한 선택이긴 하지만, 원모씨가 직접 풀어낸 문장이 몇 편 섞였다면 입체감이 더 살았을 겁니다.


그럼에도 이 책이 하는 일은 분명합니다. 부모가 아직 곁에 있는데도 그 사람의 청춘을 한 번도 궁금해한 적 없는 자식들에게, 질문을 미루지 말라고 알려주는 쪽이에요. 명절에 안부 몇 마디로 끝나는 대화가 익숙한 분이라면, 서로 표현이 서툴러 오래 오해만 쌓인 집이라면 읽어볼 만합니다. 부모 세대의 성실을 답답함으로만 기억해온 사람에게도 마찬가지고요.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만나다 보면 읽고 덮는 것으로 정리되는 책이 많은데, 이 도서는 읽은 뒤에 전화를 한 통 걸게 만드는 쪽에 가까웠습니다.


9월 끝자락, 아침저녁 공기가 확실히 달라졌습니다. 이맘때가 되면 부모님 목소리가 전보다 자주 궁금해지는데, 그 마음을 미루지 말라고 등을 떠미는 책을 만난 셈입니다. 곧 찾아올 명절에 어른들과 마주 앉기 전에 읽어두면 대화의 결이 조금 달라질지도 모르겠어요.


하기 싫다고 말하면서 50년을 출근한 아버지의 뒷모습을 딸이 대신 기록해준, 웃다가 목이 뻐근해지는 가족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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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에 전부를 걸어보세요 - 내 인생을 완전히 바꾸는 유일한 길
박가을 지음, 김윤지 그림 / 체인지업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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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파란색이 이렇게 선명한 표지는 오랜만입니다. 채도 높은 바탕 위로 연둣빛 책등이 비스듬히 겹쳐 있고, 초록 동그라미가 여기저기 튀어 있어요. 서점 매대에 놓이면 멀리서도 눈에 들어올 디자인입니다. 그런데 아래쪽 띠에 적힌 "아는 것이 적으면 사랑하는 것도 적다"라는 한 줄과 7년이라는 숫자를 마주하고 나면, 안에 담긴 이야기가 이 밝기와는 다른 온도겠구나 싶어집니다. 판형은 손에 부담 없이 들어오는 보통 크기고 두께도 편안해서, 표지가 주는 인상과 달리 읽는 속도는 꽤 순합니다.


<독서에 전부를 걸어보세요>는 박가을 작가가 스물여섯에 갑작스러운 병으로 멈춰 선 뒤 7년을 책으로 건너온 기록입니다. 중환자실과 응급실을 열 번 넘게 오갔고, 혼자서는 먹지도 걷지도 못하던 시절에 붙잡은 것이 책이었다고 해요. 그림은 김윤지 작가가 맡았고 체인지업북스에서 나왔습니다.


읽는 내내 마음이 오래 머문 곳은 1장의 한 꼭지였습니다. 오랜 친구가 보내온 카톡이 이렇게 적혀 있어요. "가을아, 건강 괜찮아? 만나자. 너희 집으로 갈게. 잠깐이라도 보자." 저자는 몸이 안 좋다며 거절하고, 그 답장을 보내고도 한참 휴대폰을 내려놓지 못합니다. 친구 이름이 화면에 뜨면 반가움보다 두려움이 앞섰다는 문장, 연락처를 몇 사람만 남기고 다 지워버렸다는 문장이 담담하게 이어집니다. 아픈 사람이 세상과 끊기는 과정은 대개 이렇게 조용하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같은 꼭지 후반부가 뒤집힙니다. 소식이 끊기자 어머니에게, 동생 SNS에까지 안부를 물은 친구가 있었고, 저자보다 더 많이 운 친구가 있었습니다. 아버지 장례식 날 출국해야 했던 친구는 울면서 전화를 걸었고, 다음 날 그 어머니가 대신 빈소를 찾아와 손을 잡으며 "C가 꼭 가달라고 해서 왔어. 힘내렴."이라고 말합니다. 앞쪽에서 사람을 피하던 사람이 뒤쪽에서는 사람 때문에 버텼다고 적어요. 이 낙차가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럽게 읽히는 것이 이 책의 힘인 것 같습니다.


방법론은 3장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원 북, 원 액션'. 한 권을 읽으면 실천할 한 가지를 정해 삶에 적용하는 방식이에요. 솔직히 이런 이름이 붙은 독서법에는 조금 심드렁한 편인데, 저자가 실패담을 먼저 적어둔 대목에서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처음에는 완독하고 나면 좋은 구절을 전부 실천하려 했다가 금방 지쳐 오래가지 못했고, 그 뒤로는 욕심을 덜어내고 한 권에서 한 가지만 확실하게 했다는 것. 잘된 이야기보다 이런 문장이 더 미덥습니다.


예시도 구체적입니다. <사피엔스>에서 뽑은 구절을 저자는 '어제 경험한 일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 한 가지만 기록하기'라는 한 줄 행동으로 바꿔 놓습니다. 거대한 통찰이 손에 잡히는 크기로 내려오는 장면이라 설득력이 있었어요. 같은 장에는 앙드레 지드의 말도 놓여 있습니다. "나는 한 권의 책을 책꽂이에서 뽑아 읽었다. 그리고 그 책을 꽂아 놓았다. 그러나 나는 이미 조금 전의 내가 아니다." 저자가 하려는 말이 여기에 다 들어 있다고 봅니다.


어머니가 건넨 "너는 책을 가슴으로 읽었잖아."라는 말도 기억에 남습니다. 자기 독서를 스스로 치켜세우는 대신 늘 곁 사람의 입을 빌려 오는 화법이라, 자기계발서 특유의 들뜬 기운이 적어요.


오래 일해 온 사람으로서 눈길이 가장 오래 간 곳은 4장의 병실 장면이었습니다. 회진 때 주치의 뒤를 따르던 전임의가, 회진이 끝난 뒤 혼자 다시 찾아와 환자의 상태와 마음을 물었다고 합니다. 저자는 조직에서는 환자 한 사람보다 윗사람의 지시를 따르는 쪽이 더 자연스럽다고 적어 두었어요. 그 문장이 병원에만 해당되지 않는다는 걸 아는 독자라면 여기서 잠깐 숨을 고르게 됩니다. 이어서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가 나오고,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말이 무기력한 체념처럼 보여도 실은 강한 의지라는 해석이 붙습니다. 저자는 바틀비가 특정한 일이 싫었다기보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구조 자체를 거부한 인물에 가깝다고 읽어냅니다.


같은 꼭지 뒤쪽에 실무적인 제안이 두 가지 나옵니다. A와 B 중 고르라는 조건 앞에서 "혹시 C라는 방법은 가능할까요?"라고 묻는 것, 규칙 밖에 예외가 있는지 확인해 보는 것. 다만 이 대목에서는 생각이 조금 갈렸습니다. 같은 문장이라도 묻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에 쌓인 시간이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 결과가 전혀 달라지거든요. 신뢰가 없는 자리에서 꺼낸 예외 요청은 종종 더 좁은 답으로 돌아옵니다. 저자는 용기의 문제로 정리했는데, 조직 안에서는 타이밍과 관계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은 책이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래도 물어볼 문장을 미리 갖고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분명히 있겠다 싶었어요.


김윤지 작가의 그림도 이 책에서 몫이 큽니다. 파란 이불을 뒤집어쓴 인물이 고양이와 앉아 "이불 밖은 위험해."라고 말하는 장면이 앞쪽에 있고, 뒤쪽에는 물가에 발을 담근 채 책을 펼친 인물 곁에 "내년에는 사랑하는 사람이랑 꼭 같이 와서 읽어야지"라는 한 줄이 놓입니다. 닫힌 방에서 열린 물가로 나오기까지의 거리가 그림만 따라가도 보입니다.


한 가지 더 짚자면, 소개된 마흔 권의 해석이 대체로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기를 세운다는 쪽으로 모입니다. 고전을 오래 읽어온 분께는 다소 빠르게 느껴질 수 있어요. 대신 이 책은 작품 해설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살아남기 위해 책을 어떻게 썼는지를 보여주려는 쪽이라, 그 목적에는 맞게 쓰였다고 생각합니다.


서평단 활동을 하다 보면 읽고 정리하는 일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릴 때가 있는데, 이 책은 읽은 뒤에 무엇을 바꿨는지를 계속 되물어 오더군요. 각 꼭지 끝에 독자가 직접 채우도록 비워둔 빈 줄이 그 질문을 대신합니다. 그 줄을 빈칸으로 남겨둔 채 책장을 덮는다면, 저자가 가장 아쉬워할 독법이 될 것 같습니다.


아침 공기가 서늘해지고 해가 짧아지는 요즘입니다. 두꺼운 책을 붙들기에는 어쩐지 마음이 분주하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읽지 않기에는 저녁이 길어진 계절이에요. 이런 시기에 한 권에서 한 가지만 가져가자는 제안은 부담 없이 받아들일 만합니다. 올해가 석 달쯤 남았으니, 남은 시간에 문장 하나씩만 삶으로 옮겨봐도 꽤 달라져 있을 겁니다.


많이 읽었는지를 묻는 대신 오늘 무엇을 바꿨는지를 묻는 책, 7년의 공백을 건너온 사람이 건네는 조용한 독서 안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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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 ㅣ 열린책들 테마 컬렉션 : 호러
에드거 앨런 포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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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검은 바탕에 금색 선이 한 바퀴 둘러져 있고, 가운데 해골 하나가 놓여 있습니다. 그 둘레를 까마귀들이 맴돌아요. 옆쪽으로 깃털과 열쇠와 눈이 작게 박혀 있는데, 겁을 주려고 만든 표지 같지는 않았습니다. 무언가를 조용히 잠가 둔 상자에 가까웠어요. 판형은 한 손에 들어올 만큼 작은데 하드커버라 손목에 제법 실립니다. 이 조합이 묘했습니다. 서둘러 넘기기 어렵게 만들어 둔 물건 같아요.


열린책들에서 내놓은 <테마 컬렉션>의 호러 편입니다. <드라큘라>, <프랑켄슈타인>과 함께 묶여 나왔고 번역은 김석희 선생이 맡았어요. 아서 래컴의 삽화가 곳곳에 들어가 있는데, 「구덩이와 진자」에 붙은 재판관들과 촛불 그림은 본문보다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수록작은 열두 편이고, 역자는 후기에서 이 책의 취향이 공포 쪽과 논리 쪽으로 갈린다고 적어 두었습니다. 읽어 가다 보면 그 말이 맞다 싶으면서도, 두 갈래의 뿌리가 같은 자리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셔가의 붕괴」는 사건이 시작되기까지 꽤 오래 걸립니다. 서술자는 친구의 저택 앞에 서서 기분이 가라앉는 것을 느끼고, 그 이유를 붙들고 늘어져요. 창문 몇 개의 위치를 달리 배치하면 이 느낌이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호수에 비친 저택을 내려다보며 확인까지 해 봅니다. 결과는 반대였습니다. 더 가라앉았지요. 그러면서 이런 문장을 적어 둡니다. 공포에 바탕을 둔 감정에는 그런 역설적인 법칙이 적용된다는 것을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다. 첫 장에서 이미 답을 내놓은 셈입니다. 무서움의 출처가 저 집 바깥에 있지 않다는 뜻이지요.


뒤로 가면 어셔가라는 말이 건물과 핏줄을 함께 가리킨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그러니 집이 무너진다는 말은 처음부터 사람이 무너진다는 뜻이었어요. 정면 지붕에서 시작된 균열이 벽을 타고 지그재그로 내려와 탁한 물속으로 사라진다는 대목은 두 번 읽었습니다. 다시 만난 로더릭을 그리는 장면에서는 거미줄처럼 성긴 머리카락과 이상하게 빛나는 눈이 먼저 나오고, 반가워하다가 금세 식어 버리는 태도가 이어집니다.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인데 처음 보는 사람 같다는 감각을 포는 정확하게 붙잡아 냈어요.


「구덩이와 진자」는 첫 문장부터 결이 다릅니다. 나는 아팠다, 로 시작해요. 앞의 작품이 여러 장을 들여 만든 분위기를 이 작품은 한 문장으로 지나갑니다. 종교재판의 선고를 듣는 장면에서 출발해 감각이 하나씩 꺼져 가는 과정이 이어지는데, 재판관들의 얇고 흰 입술 같은 것이 잠깐 남았다가 그것마저 흐려집니다. 정신을 잃었다가 돌아오는 대목을 이 소설의 중심으로 봤습니다. 돌아오는 과정 자체가 고통이어서, 그는 차라리 무감각 쪽으로 다시 내려가고 싶어 해요.


눈을 떴을 때 이 사람을 붙든 두려움의 정체가 공백이라는 점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볼 것이 아무것도 없을지 모른다는 짐작이 그를 떨게 만들어요. 이어지는 장면에서 그는 완전한 어둠 속에서 벽에 표시를 하고 걸음을 세어 감방 둘레를 재기 시작합니다.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잽니다. 나중에 그 계산이 두 배 가까이 틀렸다는 사실이 드러나는데, 왼쪽에 벽을 두고 출발했다가 오른쪽에 두고 끝냈기 때문이었어요. 어둠이 사람의 감각을 어떻게 비틀어 놓는지를 포는 이런 방식으로 증명합니다.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가 갇힌 공간의 크기를 끝까지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 이 책에서 가장 사람다운 자리라고 느꼈습니다.


「검은 고양이」의 서술자는 내일 죽습니다. 믿어 달라고 부탁하지 않겠다며 먼저 선을 긋고, 훗날 자기보다 냉정한 누군가가 이 일을 평범한 인과로 정리해 버릴 거라고 예고해요. 실제로 그런 인물이 책 뒤쪽의 「모르그가의 살인」과 「도둑맞은 편지」에 등장하니, 열두 편이 서로 손을 잡고 있는 구성입니다. 어린 시절 동물을 유난히 아꼈다는 회상으로 시작해 술과 함께 무너지는 과정이 이어지는데, 사건 자체는 옮기기 어려운 내용이라 여기서는 접어 둘게요.


다만 한 대목은 적어 두고 싶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면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오히려 하게 되는 충동이 사람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금지가 동기가 되는 마음이지요. 이 논리는 「구덩이와 진자」에서 희망이 고통을 키우던 구조와 같은 자리에서 나옵니다. 불이 난 집 벽에 남은 고양이 형상을 두고 화학적인 설명을 붙이는 장면도 결이 비슷해요. 머리로는 납득이 되는데 마음이 따라가지 않습니다.


아쉬운 점도 적어 둡니다. 서술자들이 지나치게 많이 설명해요. 감각을 전부 잃었다고 해 놓고 그 상태를 아주 정밀하게 묘사하는 식이라, 논리를 따지며 읽으면 걸리는 자리가 생깁니다. 1840년대 문장이라 수식도 길고요. 속도가 붙는 책은 아닙니다.


이 도서는 북유럽 카페를 통해 받았습니다. 서평단으로 신간을 여러 권 만나다 보면 빠르게 읽고 정리하는 습관이 붙는데, 이 한 권에는 그 방식이 통하지 않았어요. 무게와 두께가 먼저 속도를 늦추라고 말하는 쪽에 가까웠습니다.


바람이 서늘해지고 해가 일찍 떨어지는 계절에 잘 맞는 책이었어요. 요란하게 겁을 주는 이야기들이 아니어서, 조용한 시간에 한 편씩 꺼내 읽기에 알맞습니다. 다 읽고 나면 금색 테두리를 한 번 쓸어 보게 되는 마감이기도 하고요.


무서운 이야기를 기대하고 펼쳤다가, 자기 마음을 끝까지 들여다보려 한 사람들의 기록을 읽게 되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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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읽는 수능 고전시가 - 2022 개정 교육과정 반영
이가영(seri) 지음 / 꿈을담는틀(학습)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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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유튜브에 올라온 짧은 영상 하나가 이 책의 이름을 여러 번 듣게 만든 계기였습니다. 서울대 나민애 교수가 자녀에게 읽히는 책으로 꼽은 세 권 가운데 하나로 <만화로 읽는 수능 고전시가>가 소개됐고, 그 뒤로 예비 고1 자녀를 둔 집들 사이에서 제목이 돌기 시작했어요. 학습서가 이런 식으로 입소문을 타는 경우는 흔치 않아서, 실물이 궁금했습니다.


먼저 한 가지만 짚고 가겠습니다. 표지와 제목이 비슷한 다른 책들이 있어서 검색창에서 헷갈리기 쉬워요. 제가 본 도서는 꿈을담는틀에서 나온 이가영(seri) 작가의 <만화로 읽는 수능 고전시가>입니다. 노란 바탕에 검은 박스로 제목을 앉히고 '최신 개정판' 딱지가 붙은 판본이고, 아래쪽 파란 띠에 "학생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고전시가, 이 책을 미리 읽으면 수업이 100배 쉬워집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주문하실 때 출판사까지 한 번 확인하시면 좋겠습니다.


손에 들고 놀란 건 부피였어요. 학습서라고 하면 두껍고 묵직한 물건을 예상하게 되는데, 판형도 두께도 가볍습니다. 책상 앞에 각 잡고 앉지 않아도 펼칠 수 있다는 점이 이 종류의 책에서는 꽤 큰 장점입니다.


작가 이력이 이 한 권의 성격을 거의 설명해 줍니다. 서울대 국어교육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같은 과 대학원 석사 과정을 수료한 뒤 국어 교사로 일했고, 임용 준비 시절을 그린 <고시생툰>을 네이버에 연재했던 분이에요. 지금도 현역입니다. 네이버 웹툰 <내가 키운 S급들>의 각색을 맡아 연재 중이니, 취미로 그림을 곁들인 교사가 아니라 그림으로 밥을 먹는 사람이 교단에서 필요하다고 느껴 만든 책인 셈입니다. 저자의 말에 이런 문장이 있어요. "고전시가에는 여러분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재미있고 신기한 이야기가 가득 담겨 있습니다." 교사의 문제의식과 만화가의 기술이 한 사람 안에 있다는 게 페이지마다 드러납니다.


학습 만화는 글 작가와 그림 작가가 나뉘는 경우가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설명은 정확한데 그림이 겉돌거나, 그림은 재미있는데 정작 짚어야 할 대목을 비껴가는 일이 그래서 생기죠. 이 도서는 구상과 작화를 한 사람이 했고, 그 덕에 컷의 리듬과 설명의 밀도가 어긋나지 않습니다. 10년 넘게 학습서 분야에서 자리를 지켜온 이유가 이쯤에 있지 않나 싶었어요.




지면은 세 층입니다. 위에 만화, 아래에 원문과 현대어 풀이. 개정판에서 새로 들어간 <관동별곡>을 보면 구성의 의도가 선명합니다. 관찰사 임명 장면에서 캐릭터가 "너 강원도 도지사 임명!"이라고 던져 버려요. 직책을 설명하느라 몇 줄을 쓰는 대신 대사 한 줄로 끝냅니다. 폭포를 그린 대목도 좋았습니다. 멀리서 들을 때는 우레 같더니 가까이서 보니 눈 같다는 구절이 컷 두 개로 갈라져 있어서, 청각에서 시각으로 옮겨 가는 이동이 그림으로 그대로 보입니다. 봉우리를 세다가 9897, 9898 하고 넘어가는 장면에서는 웃음이 났어요. 일만 이천 봉이라는 숫자가 머리로만 알던 것에서 몸으로 느껴지는 것으로 바뀌더군요.


오래 머문 자리는 화룡소였습니다. 저 늙은 용이 비를 뿌려 그늘에서 시든 풀을 다 살려 냈으면 한다는 대목인데, 여기서 만화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농담을 거두고 캐릭터가 칠판 앞에 서서 풀이 백성을 뜻한다고 알려줘요. 음애예 이온 플을 다 살와 내여사라. 수백 년 전 지방으로 내려가던 관리가 품었던 마음을 그냥 지나치게 두지 않겠다는 편집자의 판단으로 보였습니다.


향가로 넘어가면 지면 짜임이 바뀝니다. 노래가 짧으니 앞뒤를 배경 설화로 감싸고, 해설면에서 갈래와 성격과 의의를 정리하는 방식이에요. 갈래에 따라 설계를 다르게 가져간 점이 꼼꼼합니다. <제망매가>가 특히 그랬습니다. 한 나뭇가지에 잎을 그려 놓고 각각에 Me, Sister, Parents를 붙인 컷이 있는데, 가을바람에 흩어지는 잎이 곧 한 부모에게서 난 형제라는 비유가 설명 없이 전달됩니다. 끝은 "아야 미타찰아 맛보올 나 도 닷가 기드리고다"로 닫히고요. 학창 시절에는 10구체 향가라는 갈래 이름으로만 외웠던 작품인데, 마흔을 훌쩍 넘겨 다시 보니 읽히는 결이 달랐습니다.



시조 파트는 배열이 인상적입니다. 이존오의 구름, 이색의 백설과 매화, 정몽주 어머니의 까마귀, 박팽년의 까마귀가 연달아 놓여 있어서, 같은 새가 한쪽에서는 어울리지 말아야 할 무리로, 다른 쪽에서는 겉과 속이 다른 존재로 쓰이는 차이가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와요. 이색의 작품에 붉은 하늘 아래 늙은 선비가 홀로 선 그림이 있는데, 석양에 홀로 서서 갈 곳을 몰라 한다는 종장이 그 한 컷에 다 담겨 있었습니다.


그동안 받아 본 목록에 학습서는 드물어서 오히려 더 들여다보게 됐어요. 고전시가를 재미있게 만드는 일이 가능한가 싶던 의심이 페이지를 넘기면서 줄어들었습니다.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아이가 있는 집이라면 거실 탁자에 올려 두기 좋고, 어른이 먼저 펼쳐도 아깝지 않습니다. 뜻도 모르고 외웠던 노래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 뒤늦게 알게 되는 대목이 분명 있으니까요.



9월도 하순으로 접어들어 아침저녁 공기가 선선해졌습니다. 중간고사가 멀지 않아 아이들 책상에 문제집이 쌓여 갈 시기인데, 그 사이에 만화책 얼굴을 한 노란 표지가 한 권쯤 섞여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잎이 지기 시작하는 계절이라 <제망매가>의 그 구절이 더 오래 남습니다.


웹툰으로 현업을 이어가는 국어 교사가 혼자 쓰고 그려, 어렵다고 소문난 옛 노래를 시험 대비와 작품 감상 양쪽에 걸쳐 놓은 학습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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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인문 기행 3 - 고전 들고 떠나는 그리스 문명과 사상 유랑기 ㅣ 그리스 인문 기행 3
남기환 지음 / 상상출판 / 2026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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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주황빛 바탕 위에 검은 실루엣 몇 개가 전부인 표지였습니다. 월계관과 날개 달린 승리의 여신, 코린토스 투구와 도기, 신전 기둥. 유적 사진을 크게 걸어 두고 여기가 어디인지 알려 주는 책은 아니겠구나 싶었어요. 아래쪽 띠에 적힌 "신화와 역사, 삶의 이야기가 살아 숨 쉬는 곳!"이라는 문구도 요란하지 않게 읽혔습니다. 북유럽 카페를 통해 받은 책인데 판형도 두께도 부담이 없어서, 며칠에 걸쳐 천천히 넘기기에 알맞았습니다.


<그리스 인문 기행 3>은 델포이에서 출발합니다. 첫 장에서 저자가 오래 서 있는 곳은 아폴론 신전이 아니라 청동으로 감아올린 뱀의 기둥 앞이에요.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를 기념해 그리스 연합군이 봉헌한 물건인데, 나선형 몸통에는 함께 싸운 서른한 개 폴리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승리를 한 도시가 독차지하지 않고 여럿이 나눠 가졌던 흔적인 셈이죠. 지금 델포이에 서 있는 것은 복제품이고, 원본은 로마 시기에 옮겨졌으며 머리 파편은 다른 나라 박물관에 남아 있습니다.


그 앞에서 저자가 남긴 문장이 이 책의 시선을 잘 보여 줍니다.


"뱀의 머리가 없다. 문명의 폐허가 나를 보고, 나는 상처 난 문명을 본다."


보는 쪽과 보이는 쪽이 슬쩍 뒤집히는 대목이에요. 폐허를 구경하러 갔다가 오히려 폐허에게 읽히는 자리에 서게 됐다는 말로 들렸습니다. 이 장의 끝에는 델포이의 마지막 신탁이 실려 있는데, 그리스 전통을 되살리려던 로마 황제가 사절을 보내 받아 온 답이 예언이 아니라 통보였다는 점이 오래 남았어요. 아름답게 지어진 집은 무너졌고 그 안에는 아폴론도 신성한 월계수도 없으며 샘의 목소리는 이미 잠잠하다는 전언. 물어볼 곳이 사라진 뒤에 사람은 무엇을 붙들고 살아가는가, 책은 여기서부터 그 물음을 끌고 갑니다.


가장 두꺼운 장은 아테네입니다. 그리고 이번 권에서 제가 가장 오래 붙들려 있던 대목도 거기에 있었어요. 아크로폴리스 아래쪽, 관광객 동선에서 비껴난 절벽에 동굴 몇 개가 입을 벌리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감옥이라 불리는 곳인데 저자는 근거가 없다고 먼저 밝혀 둡니다. 문헌도 비문도 발굴 기록도 없다고요. 그러면서 이런 정의를 내놓습니다. 한 인간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에 대한 정서적 개연성이 만들어 낸 장소라고. 사실과 전승 사이의 거리를 감추지 않는 태도라 미더웠습니다.


페리클레스에게는 기념비가 있고 장군들에게는 묘역이 있는데 소크라테스에게는 없습니다. 아테네는 무엇을 기념하고 무엇을 기억할지 정확히 알던 도시였다는 서술이 칭찬처럼 시작했다가 이내 서늘해져요. 밝은 대리석 위에는 승리와 질서와 이성을 올려 두고 불편한 질문은 빛이 닿지 않는 곳으로 밀어냈다는 문장이 곧바로 뒤따르거든요. 그가 남긴 것은 교리도 체계도 아니었고, 당신이 옳다고 믿는 그것이 정말로 옳은가라는 물음 하나였다는 정리도 담담합니다.


법정에서의 변론은 가난을 걸고 이루어집니다. 나에게 죄가 없다는 것은 나의 가난이 증명하고 있다는 말. 저자는 이 대목을 청빈 예찬으로 읽지 않고, 재산을 모으는 데 삶을 쓰지 않았고 권력과 거래하지 않았다는 흔적으로 읽습니다. 그 계보를 마키아벨리와 카잔차키스까지 잇는데, 권력의 생리를 누구보다 냉정하게 들여다봤던 사람이 정작 자신은 그 대가를 받지 않았음을 빈손으로 증명하려 했다는 해석이 인상에 남았어요.


책의 한가운데를 지나면 아르기누사이 해전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는 이 부분이 이번 권에서 가장 단단하다고 느꼈습니다. 스파르타가 먼저 화평을 청할 만큼 큰 승리였는데, 폭풍으로 전사자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일이 문제가 됩니다. 민회는 승전의 의미보다 죽은 자에 대한 분노와 슬픔에 휩싸였고, 개별 심문을 건너뛴 채 장군 전원을 한꺼번에 재판에 넘기는 제안이 통과돼요. 크세노폰은 이를 두고 모두가 위법임을 깨달았던 결정이라 적었다고 합니다. 축제가 추도 집회로 변질되고, 정치 세력이 사람들을 전사자 친척으로 꾸며 슬픔을 키웠다는 서술까지 읽고 나면 결과가 예상됩니다. 여덟 명 가운데 여섯 명이 적법한 심리 없이 처형됐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민주정이 타락하면 가장 위험한 적은 폭군이 아니라 동조하지 않는 자라고 씁니다. 그 불법 표결에 끝까지 반대한 평의원이 제비뽑기로 선출된 소크라테스 한 사람뿐이었다는 기록이 뒤에 놓이고요. 다수의 분노가 법의 자리를 차지한 순간 혼자 남아 절차 편에 섰다는 문장이, 여론이 제도를 앞질러 달리는 장면을 익히 봐 온 사람에게는 남 이야기로 읽히지 않습니다. 법이 여론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는 진단도 그렇고요. 이 사건이 몇 해 뒤 또 다른 불편한 존재를 법정에 세우는 전조가 된다는 연결에 이르면, 앞서 읽은 무덤 없는 철학자 이야기가 다르게 보입니다.


다만 읽으면서 갸웃한 지점도 있었습니다. 뱀의 기둥을 다루는 앞부분은 사실 정보와 감상이 짧은 지면 안에서 빠르게 교차해서, 유물의 내력을 좀 더 붙들고 갔으면 어땠을까 싶었어요. 가난의 계보를 소크라테스에서 마키아벨리를 거쳐 현대 작가까지 잇는 대목도 매끄럽긴 한데 건너뛰는 폭이 큰 편입니다. 시대와 처지가 다른 세 사람의 가난을 한 줄로 꿰어도 되는지는 읽는 사람마다 생각이 갈릴 것 같아요. 유적 앞에서 고전을 먼저 펼치는 저자의 방식이 이 책의 장점이자 호불호가 나뉠 지점이라는 뜻이겠지요.


마지막 목적지는 메테오라입니다. 이 장의 안내자는 뜻밖에도 조르바예요. 나는 신을 믿지 않소, 그러나 그분을 사랑한다오, 라는 대사로 장이 열립니다. 저자는 자신이 이곳에 오게 된 것이 순전히 카잔차키스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솔직히 저는 이 대목에서 수도원이라는 실제 공간보다 문학의 렌즈가 앞선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계속 읽다 보니 그게 흠으로 남지는 않더군요. 저자가 절벽 위 수도원을 성지로만 그리지 않고, 신과 인간의 욕망이 충돌하는 모순의 경계 위에 서 있는 곳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성모승천 성화 앞에서 조르바가 다시 끼어듭니다. 저분은 신이 아니라 어머니라고, 그 눈빛 안에 신이 있다면 그건 우리가 아침마다 떠올리는 그리움 같은 거라고요. 그 말 뒤에 저자는 침묵 속에서 기도도 고백도 하지 않았다고 적습니다. 대신 기도를 이렇게 풀어요. 매일 흔들리는 마음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작은 움직임 같은 것이라고. 날마다 바람을 맞으며 돌계단을 오르는 노인의 걸음걸이,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 절벽 흙을 뚫고 올라온 풀잎 한 포기가 그 자리에 놓입니다. 세상의 끝이라 믿을 만한 높이가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침묵의 들머리였다는 문장은, 세 권을 걸어온 여정을 닫기에 알맞은 자리였습니다.


세 번째 권의 마지막은 완결이 아닙니다. 아직 못 쓴 이야기가 남았지만 카잔차키스의 고향으로 이어지는 몫은 남겨 두겠다고 저자는 적어요. 그리고 카잔차키스가 1937년 아테네에서 쓴 편지 한 대목을 빌려 옵니다.


"이제 나는 무슨 글을 써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그리스는 힘든 주제이니까요."


다 알았다고 선언하지 않고 어려웠다고 말하며 물러서는 마무리라, 오히려 믿음이 갔습니다. 무지를 인정한 채 한 걸음 더 가 보려는 태도가 이 여행의 결론이라는 소개 글과도 어긋나지 않고요. 오래 일하고 오래 살아 본 사람일수록 확신에 찬 문장보다 이런 여백에 마음이 놓이는 법이지요.


그러니 이 책은 그리스 여행을 준비하며 동선을 짜려는 손에는 조금 멀고, 고전을 제대로 읽어 본 적은 없지만 인간이 무엇을 두려워하며 무엇을 지키려 했는지 궁금한 사람 쪽에 가깝습니다. 신탁이 끊긴 자리에서 스스로 결정해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라, 답을 주는 목소리가 줄어든 자리에 서 본 적 있는 이라면 어느 장에서든 자기 물음을 하나쯤 건져 올릴 수 있을 거예요. 시리즈를 처음 접하는 경우에도 이 권부터 읽는 데 큰 무리는 없어 보입니다.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만나다 보면 읽고 나서 마음이 가벼워지는 책과 무언가를 남겨 두는 책이 나뉘는데, 이 한 권은 분명 뒤쪽에 속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서늘해지고 해가 짧아지는 무렵에 읽기 잘했다 싶었어요. 여름내 달아오른 것들이 식어 가고 한 해의 남은 자리가 눈에 들어오는 시기라, 무엇을 이루었는가보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묻는 책의 목소리가 계절과 잘 맞았습니다. 창을 조금 열어 두고 페이지를 넘기기에 지금만 한 때도 드물 것 같습니다.


머리 잘린 기둥과 무덤 없는 철학자, 절벽 위 수도원을 지나며 답 대신 태도를 건네받는 그리스 인문 기행의 마지막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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