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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인문 기행 3 - 고전 들고 떠나는 그리스 문명과 사상 유랑기 ㅣ 그리스 인문 기행 3
남기환 지음 / 상상출판 / 2026년 9월
평점 :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주황빛 바탕 위에 검은 실루엣 몇 개가 전부인 표지였습니다. 월계관과 날개 달린 승리의 여신, 코린토스 투구와 도기, 신전 기둥. 유적 사진을 크게 걸어 두고 여기가 어디인지 알려 주는 책은 아니겠구나 싶었어요. 아래쪽 띠에 적힌 "신화와 역사, 삶의 이야기가 살아 숨 쉬는 곳!"이라는 문구도 요란하지 않게 읽혔습니다. 북유럽 카페를 통해 받은 책인데 판형도 두께도 부담이 없어서, 며칠에 걸쳐 천천히 넘기기에 알맞았습니다.
<그리스 인문 기행 3>은 델포이에서 출발합니다. 첫 장에서 저자가 오래 서 있는 곳은 아폴론 신전이 아니라 청동으로 감아올린 뱀의 기둥 앞이에요.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를 기념해 그리스 연합군이 봉헌한 물건인데, 나선형 몸통에는 함께 싸운 서른한 개 폴리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승리를 한 도시가 독차지하지 않고 여럿이 나눠 가졌던 흔적인 셈이죠. 지금 델포이에 서 있는 것은 복제품이고, 원본은 로마 시기에 옮겨졌으며 머리 파편은 다른 나라 박물관에 남아 있습니다.

그 앞에서 저자가 남긴 문장이 이 책의 시선을 잘 보여 줍니다.
"뱀의 머리가 없다. 문명의 폐허가 나를 보고, 나는 상처 난 문명을 본다."
보는 쪽과 보이는 쪽이 슬쩍 뒤집히는 대목이에요. 폐허를 구경하러 갔다가 오히려 폐허에게 읽히는 자리에 서게 됐다는 말로 들렸습니다. 이 장의 끝에는 델포이의 마지막 신탁이 실려 있는데, 그리스 전통을 되살리려던 로마 황제가 사절을 보내 받아 온 답이 예언이 아니라 통보였다는 점이 오래 남았어요. 아름답게 지어진 집은 무너졌고 그 안에는 아폴론도 신성한 월계수도 없으며 샘의 목소리는 이미 잠잠하다는 전언. 물어볼 곳이 사라진 뒤에 사람은 무엇을 붙들고 살아가는가, 책은 여기서부터 그 물음을 끌고 갑니다.
가장 두꺼운 장은 아테네입니다. 그리고 이번 권에서 제가 가장 오래 붙들려 있던 대목도 거기에 있었어요. 아크로폴리스 아래쪽, 관광객 동선에서 비껴난 절벽에 동굴 몇 개가 입을 벌리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감옥이라 불리는 곳인데 저자는 근거가 없다고 먼저 밝혀 둡니다. 문헌도 비문도 발굴 기록도 없다고요. 그러면서 이런 정의를 내놓습니다. 한 인간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에 대한 정서적 개연성이 만들어 낸 장소라고. 사실과 전승 사이의 거리를 감추지 않는 태도라 미더웠습니다.

페리클레스에게는 기념비가 있고 장군들에게는 묘역이 있는데 소크라테스에게는 없습니다. 아테네는 무엇을 기념하고 무엇을 기억할지 정확히 알던 도시였다는 서술이 칭찬처럼 시작했다가 이내 서늘해져요. 밝은 대리석 위에는 승리와 질서와 이성을 올려 두고 불편한 질문은 빛이 닿지 않는 곳으로 밀어냈다는 문장이 곧바로 뒤따르거든요. 그가 남긴 것은 교리도 체계도 아니었고, 당신이 옳다고 믿는 그것이 정말로 옳은가라는 물음 하나였다는 정리도 담담합니다.
법정에서의 변론은 가난을 걸고 이루어집니다. 나에게 죄가 없다는 것은 나의 가난이 증명하고 있다는 말. 저자는 이 대목을 청빈 예찬으로 읽지 않고, 재산을 모으는 데 삶을 쓰지 않았고 권력과 거래하지 않았다는 흔적으로 읽습니다. 그 계보를 마키아벨리와 카잔차키스까지 잇는데, 권력의 생리를 누구보다 냉정하게 들여다봤던 사람이 정작 자신은 그 대가를 받지 않았음을 빈손으로 증명하려 했다는 해석이 인상에 남았어요.
책의 한가운데를 지나면 아르기누사이 해전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는 이 부분이 이번 권에서 가장 단단하다고 느꼈습니다. 스파르타가 먼저 화평을 청할 만큼 큰 승리였는데, 폭풍으로 전사자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일이 문제가 됩니다. 민회는 승전의 의미보다 죽은 자에 대한 분노와 슬픔에 휩싸였고, 개별 심문을 건너뛴 채 장군 전원을 한꺼번에 재판에 넘기는 제안이 통과돼요. 크세노폰은 이를 두고 모두가 위법임을 깨달았던 결정이라 적었다고 합니다. 축제가 추도 집회로 변질되고, 정치 세력이 사람들을 전사자 친척으로 꾸며 슬픔을 키웠다는 서술까지 읽고 나면 결과가 예상됩니다. 여덟 명 가운데 여섯 명이 적법한 심리 없이 처형됐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민주정이 타락하면 가장 위험한 적은 폭군이 아니라 동조하지 않는 자라고 씁니다. 그 불법 표결에 끝까지 반대한 평의원이 제비뽑기로 선출된 소크라테스 한 사람뿐이었다는 기록이 뒤에 놓이고요. 다수의 분노가 법의 자리를 차지한 순간 혼자 남아 절차 편에 섰다는 문장이, 여론이 제도를 앞질러 달리는 장면을 익히 봐 온 사람에게는 남 이야기로 읽히지 않습니다. 법이 여론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는 진단도 그렇고요. 이 사건이 몇 해 뒤 또 다른 불편한 존재를 법정에 세우는 전조가 된다는 연결에 이르면, 앞서 읽은 무덤 없는 철학자 이야기가 다르게 보입니다.
다만 읽으면서 갸웃한 지점도 있었습니다. 뱀의 기둥을 다루는 앞부분은 사실 정보와 감상이 짧은 지면 안에서 빠르게 교차해서, 유물의 내력을 좀 더 붙들고 갔으면 어땠을까 싶었어요. 가난의 계보를 소크라테스에서 마키아벨리를 거쳐 현대 작가까지 잇는 대목도 매끄럽긴 한데 건너뛰는 폭이 큰 편입니다. 시대와 처지가 다른 세 사람의 가난을 한 줄로 꿰어도 되는지는 읽는 사람마다 생각이 갈릴 것 같아요. 유적 앞에서 고전을 먼저 펼치는 저자의 방식이 이 책의 장점이자 호불호가 나뉠 지점이라는 뜻이겠지요.

마지막 목적지는 메테오라입니다. 이 장의 안내자는 뜻밖에도 조르바예요. 나는 신을 믿지 않소, 그러나 그분을 사랑한다오, 라는 대사로 장이 열립니다. 저자는 자신이 이곳에 오게 된 것이 순전히 카잔차키스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솔직히 저는 이 대목에서 수도원이라는 실제 공간보다 문학의 렌즈가 앞선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계속 읽다 보니 그게 흠으로 남지는 않더군요. 저자가 절벽 위 수도원을 성지로만 그리지 않고, 신과 인간의 욕망이 충돌하는 모순의 경계 위에 서 있는 곳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성모승천 성화 앞에서 조르바가 다시 끼어듭니다. 저분은 신이 아니라 어머니라고, 그 눈빛 안에 신이 있다면 그건 우리가 아침마다 떠올리는 그리움 같은 거라고요. 그 말 뒤에 저자는 침묵 속에서 기도도 고백도 하지 않았다고 적습니다. 대신 기도를 이렇게 풀어요. 매일 흔들리는 마음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작은 움직임 같은 것이라고. 날마다 바람을 맞으며 돌계단을 오르는 노인의 걸음걸이,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 절벽 흙을 뚫고 올라온 풀잎 한 포기가 그 자리에 놓입니다. 세상의 끝이라 믿을 만한 높이가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침묵의 들머리였다는 문장은, 세 권을 걸어온 여정을 닫기에 알맞은 자리였습니다.
세 번째 권의 마지막은 완결이 아닙니다. 아직 못 쓴 이야기가 남았지만 카잔차키스의 고향으로 이어지는 몫은 남겨 두겠다고 저자는 적어요. 그리고 카잔차키스가 1937년 아테네에서 쓴 편지 한 대목을 빌려 옵니다.

"이제 나는 무슨 글을 써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그리스는 힘든 주제이니까요."
다 알았다고 선언하지 않고 어려웠다고 말하며 물러서는 마무리라, 오히려 믿음이 갔습니다. 무지를 인정한 채 한 걸음 더 가 보려는 태도가 이 여행의 결론이라는 소개 글과도 어긋나지 않고요. 오래 일하고 오래 살아 본 사람일수록 확신에 찬 문장보다 이런 여백에 마음이 놓이는 법이지요.
그러니 이 책은 그리스 여행을 준비하며 동선을 짜려는 손에는 조금 멀고, 고전을 제대로 읽어 본 적은 없지만 인간이 무엇을 두려워하며 무엇을 지키려 했는지 궁금한 사람 쪽에 가깝습니다. 신탁이 끊긴 자리에서 스스로 결정해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라, 답을 주는 목소리가 줄어든 자리에 서 본 적 있는 이라면 어느 장에서든 자기 물음을 하나쯤 건져 올릴 수 있을 거예요. 시리즈를 처음 접하는 경우에도 이 권부터 읽는 데 큰 무리는 없어 보입니다.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만나다 보면 읽고 나서 마음이 가벼워지는 책과 무언가를 남겨 두는 책이 나뉘는데, 이 한 권은 분명 뒤쪽에 속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서늘해지고 해가 짧아지는 무렵에 읽기 잘했다 싶었어요. 여름내 달아오른 것들이 식어 가고 한 해의 남은 자리가 눈에 들어오는 시기라, 무엇을 이루었는가보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묻는 책의 목소리가 계절과 잘 맞았습니다. 창을 조금 열어 두고 페이지를 넘기기에 지금만 한 때도 드물 것 같습니다.
머리 잘린 기둥과 무덤 없는 철학자, 절벽 위 수도원을 지나며 답 대신 태도를 건네받는 그리스 인문 기행의 마지막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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