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제야 비로소 아버지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 딸이 기록한, 70세 원모씨 관찰 일기
정아름 지음 / 모티브 / 2026년 9월
평점 :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표지부터 짚고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연한 살구빛과 흰색이 위아래로 나뉜 바탕에 초록 글씨가 큼직하게 올라앉았고, 아래쪽에는 이불에 얼굴을 묻은 채 엎드린 남자가 몇 개의 선으로만 그려져 있어요. 띠지에 적힌 말은 "아 출근하지마까". 웃자고 고른 문구일 텐데, 아침마다 비슷한 소리를 속으로 삼켜본 사람에게는 그리 가볍게 읽히지 않습니다. 이 한 권의 성격이 표지에서 벌써 드러납니다. 웃기면서 동시에 목이 좀 뻐근해지는 쪽이요.

<이제야 비로소 아버지가 이해되기 시작했다>는 울산에서 오래 방송 일을 해온 정아름 작가가 1957년생 아버지 '원모씨'를 관찰해 적은 가족 에세이입니다. 판형도 두께도 평범한 편이라 손에 쥐고 술술 넘기기 좋았습니다.
첫 장은 새벽 5시에서 출발합니다. 올해 일흔인 아버지는 약 40년을 가구점 사장으로, 약 8년을 주상복합 경비원으로 살았고, 중학교를 마치자마자 일을 시작했으니 출근 경력만 어림잡아 50년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 매일 그만두고 싶다고 말합니다. 가구점 시절에는 다 때려치우고 싶다고, 경비원이 된 뒤에는 그만두고 싶다고요. 그러면서도 겁이 많아 진짜로는 못 그만두는 사나이라고 딸은 적어 둡니다. 이불 정리, 물통째 들이켜는 보리차, 세안과 세두, 성모마리아상 앞에 쪼그려 앉아 넘기는 명언 달력까지 이어지는 아침이 꽤 자세히 묘사되는데, 저자는 그 흐름을 "첫 블록만 건드리면 연이어 쓰러지는 도미노처럼, 아빠의 루틴은 시작과 동시에 모든 것이 물 흐르듯 연쇄적으로 반응한다."고 표현합니다. 이 챕터 끝에 놓인 한 줄, 가장 무서운 사람은 그냥 하는 사람이라고 했던가,에서 잠깐 속도가 느려졌습니다. 성실이라는 말이 이렇게 담백하게 쓰이는 걸 오랜만에 봤어요.

중간쯤 가면 결이 한 번 꺾입니다. 생방송을 앞두고 분주하던 어느 날, 딸에게 아버지의 문자가 한 통 날아옵니다. 평소에도 툭툭 던지던 종류의 말이었고, 그날은 딸도 화부터 났습니다. 분노 섞인 답을 보내놓고 스튜디오에 들어가 행복한 척을 했다고 솔직하게 써 놨더군요. 나중에야 그게 지금 마음이 힘드니 토닥여 달라는 신호였음을 알아차리는 장면에서, 이 책이 유머로만 굴러가는 기록이 아니라는 게 분명해집니다. 저자는 자신의 우울을 비에 젖은 무거운 솜옷에 비유하는데, 아버지와 딸이 같은 기질을 나눠 가졌다는 사실이 그 대목에서 조용히 확인됩니다. 결론이 거창하지 않은 점도 좋았습니다. 다음에 또 그런 연락이 오면 화내지 말고 회 한 접시 사 드려야겠다는 정도로 닫아요.

네 번째 장은 아예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우리 아빠는 알코올 중독자였다고, 이제는 말할 수 있다고요. 지금은 20년 가까이 술을 끊어낸 단주인이라는 문장이 바로 뒤에 붙습니다. 화목해 보인다는 댓글을 많이 받지만 사실 진작 찢어졌어야 할 가족이었다는 술회, 부모에게 이혼 서류를 직접 출력해 건넸던 청소년기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여기서 한 문장을 옮겨 둡니다. "화목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라 봤기에, 별일 없는 가정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안다. 서로를 향해 소리치지 않고, 눈치를 보지 않고, 아무 일 없이 하루를 마무리하는 평범한 저녁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안다." 회복의 방식을 기적이라 부르지 않는 태도도 인상적입니다. 아버지는 단주 모임에, 어머니는 성당에, 두 자매는 조금 일찍 독립해 부담을 덜면서 각자의 몫을 졌고, 그렇게 아주 조금씩 서서히 달라졌다고만 적습니다. 지금 힘든 시간을 지나는 누군가에게 서로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좀 나아진다고, 나도 그랬다고 건네는 말이 이 책에서 가장 단단한 위로였습니다.
후반부에는 2024년 8월, 40년 동안 지켜온 가구점을 접던 날이 나옵니다. 재고를 다 팔아야 문을 닫을 수 있는 업종이라 한 달간 매장 세일을 했고, 오래 함께한 가구들이 하나둘 주인을 찾아갔다고 해요. 뭘 먹고 살아야 하나 걱정하는 아내에게 남편이 답합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면 되는 거지." 작은 등에 장롱을 지고 이 집 저 집 다니던 세월이 그 한마디에 눌려 있습니다. 딸은 자신이 가구점 딸이자 부모의 치열한 삶의 수혜자였다고 뒤늦게 적고, 목구멍에 커다란 복숭아 씨앗이 걸린 것처럼 뻐근해진다는 말로 감정을 대신합니다. 그러고는 존댓말로 바꿔 감사 인사를 남기고 챕터를 닫아요.
아쉬운 점도 있었습니다. 원래 짧은 영상에서 출발한 이야기여서인지 한 꼭지가 두세 쪽에서 끝나는 경우가 많고, 더 들여다보고 싶은 대목이 금세 지나갑니다. 특히 알코올 중독을 지나온 시간이나 폐업을 결정하기까지의 망설임은 조금 더 길게 읽고 싶었어요. 아버지 본인의 목소리가 별지 인터뷰 정도로 한정된 것도 살짝 걸렸습니다. 관찰 일기라는 제목에 충실한 선택이긴 하지만, 원모씨가 직접 풀어낸 문장이 몇 편 섞였다면 입체감이 더 살았을 겁니다.

그럼에도 이 책이 하는 일은 분명합니다. 부모가 아직 곁에 있는데도 그 사람의 청춘을 한 번도 궁금해한 적 없는 자식들에게, 질문을 미루지 말라고 알려주는 쪽이에요. 명절에 안부 몇 마디로 끝나는 대화가 익숙한 분이라면, 서로 표현이 서툴러 오래 오해만 쌓인 집이라면 읽어볼 만합니다. 부모 세대의 성실을 답답함으로만 기억해온 사람에게도 마찬가지고요.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만나다 보면 읽고 덮는 것으로 정리되는 책이 많은데, 이 도서는 읽은 뒤에 전화를 한 통 걸게 만드는 쪽에 가까웠습니다.
9월 끝자락, 아침저녁 공기가 확실히 달라졌습니다. 이맘때가 되면 부모님 목소리가 전보다 자주 궁금해지는데, 그 마음을 미루지 말라고 등을 떠미는 책을 만난 셈입니다. 곧 찾아올 명절에 어른들과 마주 앉기 전에 읽어두면 대화의 결이 조금 달라질지도 모르겠어요.
하기 싫다고 말하면서 50년을 출근한 아버지의 뒷모습을 딸이 대신 기록해준, 웃다가 목이 뻐근해지는 가족 에세이.
#이제야비로소아버지가이해되기시작했다 #정아름 #모티브 #원모씨 #가족에세이 #에세이추천 #아버지 #부녀관계 #북유럽카페 #서평단 #책추천 #신간도서 #에세이신간 #가족이야기 #울산작가 #루틴의힘 #40대독서 #부모님선물책 #명절에읽기좋은책 #독서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