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인데 왜 피곤할까 - 혈당 리듬을 되찾는 4주 실전 프로그램
양혁용 지음 / 작가의집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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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오늘은 수요일, 분리수거 날이라 플라스틱이랑 종이를 각각 다른 자루에 나눠 담고 왔습니다. 캔은 캔대로, 유리는 유리대로 꼼꼼히 갈라놓으면서 좀 웃겼어요. 밖에 내놓는 쓰레기는 이렇게 열심히 분류하면서, 정작 내 입으로 들어가는 건 순서도 시간도 없이 그냥 던져 넣고 살았구나 싶더라고요.


손 씻고 꺼내 든 책이 하필 이겁니다. <정상인데 왜 피곤할까>.

제목 앞에서 한 대 맞은 기분이었어요. 건강검진표에 '정상' 두 글자 찍혀 나오는데 오후 두세 시만 되면 눈꺼풀이 천근이고, 점심 먹고 두 시간이면 또 뭔가 단 게 당기는 그 상태. 저만 그런 줄 알았거든요.


책은 핸드북 사이즈로 얇고 가볍습니다. 가방에 넣어도 어깨에 티가 안 나는 정도예요. 요즘 벽돌 같은 책들 들고 다니느라 팔뚝만 단련되던 차에, 이런 책 만나면 반갑습니다. 근데 얇다고 만만한 건 아니고, 본문에 컬러 인포그래픽이 중간중간 들어가 있어서 눈으로 넘기는 속도가 생각보다 안 붙어요.

저자는 구독자 11만 명의 의학 유튜브 '양닥터'를 운영하는 의사이자, CGM 기반 혈당관리 서비스 글루코핏 대표인 양혁용 님입니다. 작가의집에서 올해 9월에 나왔고요.


이 책이 다른 혈당책이랑 갈라지는 지점은 1장에서 바로 나옵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당화혈색소라는 숫자가 사실은 '평균'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걸 가려준다는 얘기예요. 혈당이 70과 130 사이를 안정적으로 오가는 사람과, 50까지 떨어졌다가 200까지 치솟는 사람의 당화혈색소가 비슷하게 나올 수 있다는 대목.

여기서 연평균 기온이 같은 두 도시 비유가 나오는데, 이 부분을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습니다. 한 도시는 사계절 내내 온화하고, 다른 도시는 여름에 40도 겨울에 영하 20도를 오갑니다. 평균은 같은데 그 안에 사는 사람 경험은 완전히 다르다는 거죠. 우리 몸의 세포도 똑같다는 설명입니다.


평균으로 퉁쳐서 '정상'이라 불렸을 뿐, 몸은 매일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 그러니까 필요한 건 병명이 아니라 리듬의 회복이라는 문장이 책 초반에 박혀 있어요.


읽으면서 좀 놀랐던 건 근거를 다는 태도였습니다. 각주가 꽤 촘촘하게 붙어 있어요. 식후 혈당이 공복 혈당보다 심혈관 질환 발생을 더 강하게 예측한다는 논문, Time-in-Range를 핵심 지표로 제시한 국제 전문가 합의 같은 것들이 본문 아래에 정직하게 달려 있습니다.


그 TIR이라는 개념도 저는 이 책에서 처음 제대로 봤어요. 하루 중 혈당이 70~180mg/dL 범위 안에 머무는 시간 비율인데, 목표가 70% 이상입니다. 하루 24시간 중에 약 17시간을 건강한 범위 안에서 보낸다는 뜻이라고 풀어주는데, 이렇게 시간으로 환산해주니까 감이 확 오더군요. 점수가 아니라 출석률 같은 느낌이랄까.


실전 파트로 넘어가면 얘기가 더 현실적으로 바뀝니다.

제일 써먹을 만하다 싶었던 건 2주차 챕터였어요. 식후 15분에서 30분 사이에 가볍게 움직이면 포도당이 인슐린 도움 없이도 근육 세포로 흡수된다는 설명. 홍수 나기 직전에 댐 수문을 여는 것과 같은 원리라고 비유해놨는데, 그림까지 같이 보니까 이해가 쉽습니다. 핵심은 강도가 아니라 타이밍이라고 못을 박아요.


식후 가벼운 걷기가 혈당 피크를 약 12~22% 낮추는 경향이 보고됐고, 이게 고강도 운동을 식전에 하는 것보다 클 수도 있다는 대목에서는 솔직히 좀 반가웠습니다. 헬스장 끊어놓고 안 가는 중년에게 이만한 복음이 없거든요.

운동 종류별로 표가 정리돼 있는데, 가벼운 산책 10~15분, 계단 5층, 제자리 스쿼트, 제자리 걷기, 스트레칭. 그리고 설거지와 청소도 당당하게 한 줄 차지하고 있습니다. 운동이 어려운 상황이면 집안일도 충분한 효과가 있다는 문장 보고 살짝 웃었어요. 아내한테 이 페이지 보여주면 제 저녁 담당 구역이 늘어날 것 같아서 조용히 넘겼습니다.


회식에서 피자랑 파스타 먹었으면 식당에서 나와 한 정거장만 걸어도 차이가 난다는 말. 이게 참 우리 세대 얘기죠.

4주차 챕터는 결이 좀 다릅니다. 4주 동안 우리는 완벽할 수 없다고 대놓고 시작해요. 회식, 야식, 스트레스 폭식. 리듬이 깨지는 순간은 반드시 온다고. 그래서 4주차의 목표는 회복 탄력성을 기르는 거라고 말합니다. 혈당 관리의 고수는 한 번도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무너져도 빠르게 돌아오는 사람이라는 문장.


무너진 다음의 회복 루틴이 다섯 가지로 나오는데, 즉시 움직이기, 다음 끼니는 가볍게, 물 충분히, 식초 활용, 그리고 마지막이 자책하지 않기입니다. 이게 가장 중요하다고 저자가 직접 꼽아뒀어요. 한 번의 실패가 전체의 실패는 아니라고, 어쩔 수 없었다고,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스스로를 다독여주라는 말.

건강서에서 이런 문장 만나면 마음이 좀 놓입니다. 다이어트든 운동이든 몇 번씩 시작하고 접어본 사람 입장에서는, 완벽하게 하라는 말보다 이쪽이 훨씬 오래 갈 것 같거든요.


수면 파트도 제 나이대엔 남 얘기가 아니었습니다. 하룻밤만 못 자도 다음 날 인슐린 민감성이 약 25% 떨어질 수 있다는 연구가 인용돼 있고, 6시간 미만 잔 다음 날엔 식후 피크가 평소보다 높게 나타나는 경향이 회원 데이터에서도 관찰됐다고 합니다. 늦게까지 유튜브 보다 자는 습관이 그냥 피곤함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던 거예요.


외식 가이드랑 음주 표는 아주 실용적입니다. 한식 일식 중식 양식 카페별로 추천 메뉴와 피할 메뉴가 갈라져 있고, 술은 맥주가 높음, 와인이 보통, 소주가 낮음, 칵테일이 매우 높음으로 정리돼 있어요. 소주가 낮음으로 나와서 잠깐 기뻤는데 바로 옆 칸에 안주와 함께 먹는 게 문제라고 적혀 있습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네요.


솔직하게 걸렸던 부분도 있습니다.

저자가 CGM 기반 혈당관리 서비스 대표이다 보니, 본문에 등장하는 일부 제품이나 서비스와 이해관계가 있을 수 있다는 점. 이건 책이 저작권 고지면에 스스로 밝혀둔 내용이긴 해요. 밝혀뒀다는 게 오히려 신뢰가 가는 쪽이긴 한데,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CGM 관련 파트를 볼 때 한 번씩 그 사실을 떠올리게 되긴 합니다.


그리고 분량이 얇다 보니, 항목별로 깊게 파고들기보다 넓게 훑고 지나가는 느낌이 드는 대목이 있어요. 표로 정리된 수치들도 개인차가 있을 수 있다는 단서가 달려 있어서, 그대로 내 몸에 적용된다고 기대하면 안 되겠구나 싶었습니다. 어차피 이 책 자체가 정답을 주는 대신 각자 실험해보라고 설계된 책이라 이건 성격에 가깝긴 하지만요.


소장 가치는 있다고 봅니다. 두툼한 건강서는 한 번 읽고 꽂아두면 끝인데, 이건 얇고 가벼워서 사무실 서랍에 넣어두기 좋아요. 뒤쪽에 4주 루틴 기록표랑 혈당 안정 레시피가 붙어 있어서 실제로 펴놓고 쓰라고 만든 책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읽는 책보다 쓰는 책 쪽에 가깝겠다는 생각.

아침저녁으로 공기가 꽤 서늘해졌습니다. 이맘때가 식욕 올라오는 계절이라 더 위험한데, 마침 이런 책을 만났네요.


당장 오늘 저녁부터 밥 먹고 십오 분만 걸어보려고요. 분리수거하러 나가는 김에 한 바퀴 더 돌면 되겠다 싶습니다. 어차피 쓰레기도 나누는 김에 내 하루 리듬도 좀 나눠보자는 마음으로요.

읽고 나니 몸에 미안해지는 책이었습니다. 좋은 책 만난 거 같아 기분이 괜찮네요.


검진 결과는 정상인데 늘 피곤한 사람에게, 평균 수치 뒤에 숨은 하루치 혈당의 오르내림을 보여주고 4주 동안 직접 실험해보게 만드는 얇고 실용적인 안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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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세미녀가 알려주는 우리 아이 부자 세팅법 - 내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거대한 자산은 ‘돈’이 아니라 ‘세금을 다루는 지식’이다.
김희연 지음 / 모티브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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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세금 설계에서 가장 비싼 단어는 '나중에'였습니다 절세미녀 김희연 신간 읽고


수요일이라 분리수거부터 하고 왔습니다. 박스 접어 내놓고 손 씻고 들어와서 책상 위에 놓인 놈을 집었는데, 들자마자 손목이 먼저 알아채더군요. 보통 소설책보다 제법 두툼한 편이에요. 이거 다 읽기 전에는 종이류로 나갈 일이 없겠구나 싶었습니다.


《절세미녀가 알려주는 우리 아이 부자 세팅법》, 김희연 회계사가 쓰고 모티브에서 이번 달 초에 나온 신간이에요.


첫 장부터 숫자 하나가 훅 들어옵니다.


프롤로그에 저자 사무실을 찾아온 제조업 사장님 이야기가 나와요. 맨손으로 시작해서 100억 원짜리 회사를 일군 분. IMF도, 금융위기도, 코로나도 다 버텨낸 분이 어느 날 자식 이야기를 꺼내면서 묻습니다. 평생 일군 거 애들한테 온전히 물려주고 싶은데 얼마나 들겠냐고요. 저자가 계산기를 두드려 보여준 숫자가 상속세 약 45억이었다고 합니다. 평생 모은 것의 절반이 단 한 번에 사라지는 셈이죠. 한참 말이 없던 그분이 천천히 되물었다는 문장이 있습니다. "그럼… 내가 더 열심히 일할수록 자식한테 줄 게 줄어든다는 얘기네요?"


책의 첫 페이지가 이 질문으로 열립니다. 저는 여기서부터 자세를 고쳐 앉았어요.


책 제목만 보고는 솔직히 좀 삐딱했습니다. 부자 세팅법이라니, 있는 집 얘기겠구나 했거든요. 그런데 1장에 붙은 문답 하나가 그 생각을 슬쩍 건드립니다. 자산이 많지 않은데도 미리 알아야 하냐는 질문에, 설계의 효과는 시간에서 나오기 때문에 자산이 적을 때 시작할수록 유리하다고, 자산이 적다는 건 오히려 옮기는 비용이 가장 쌀 때라는 뜻이기도 하다고 답하더라고요. 뒤에서도 같은 말을 반복합니다. 작은 집은 작은 대로, 큰 집은 큰 대로 같은 원칙 위에서 설계가 이뤄진다고요.


물려받는 쪽도 당사자라는 대목도 걸리더군요. 주는 입장만 생각했지, 받는 입장에서 세금이랑 자금 출처를 알아야 손해를 안 본다는 건 미처 생각을 못 했어요.


다른 데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건 2장 끝의 네 가지 원칙이었습니다. 일찍, 나눠, 기록, 점검. 복잡한 세법 조문은 잊어도 이 네 단어만 기억하면 큰 방향은 안 잃는다고 저자가 정리해두는데요, 저처럼 세금 문외한한테는 이 네 글자가 지도 노릇을 합니다. 일찍은 옮기는 비용이 싸고 자녀 명의에서 불어난 상승분에는 세금이 안 따라붙는다는 얘기. 나눠는 한 번에 큰 덩어리로 옮기면 높은 세율 구간으로 직행하니 시점과 대상을 쪼개라는 얘기.


그중에 기록 파트가 제일 실용적으로 읽혔어요. 증여는 신고로, 차용은 차용증과 이자 이체로, 자금의 흐름은 이체 메모로 남기라고 합니다. 기록 없는 자산은 결정적인 순간에 출처 불명이라는 약점이 되고, 절세의 절반은 기록이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입증 책임이 납세자한테 있다는 설명이 붙으니까 수긍이 가더라고요. 억울해도 증명은 내가 해야 한다는 거죠.


"세금 설계에서 가장 비싼 단어는 '나중에'이고, 가장 값진 단어는 '지금'이다."


이 문장 앞에서 좀 찔렸습니다. 프롤로그에서도 저자가 14년간 배운 가장 비싼 단어로 '나중에'를 꼽거든요. 나중에 하자, 아직 정정하시니 천천히, 애가 좀 더 크면, 지금은 너무 바쁘니까. 제가 딱 그 말들로 살아온 사람이라서요.


제 나이대에 제일 아프게 읽힌 건 중장년기 챕터였습니다. 40~60대를 긴 세대, 샌드위치 세대라고 부르면서 세 개의 시계 이야기를 꺼내는데요. 위로는 부모 부양, 아래로는 자녀, 가운데는 내 노후. 이 세 시계가 서로 다른 속도로, 그런데 같은 통장에서 돌아간다는 표현이 나와요. 문제는 세 시계가 모두 '지금' 돈을 요구한다는 것.


읽으면서 저희 집 통장을 떠올렸습니다. 순서가 늘 헷갈렸거든요. 부모님 병원비, 아이 학비, 내 노후 적립. 이 책은 정답은 없다고 하면서도 원칙 하나는 분명히 합니다. 부모의 자산은 부모를 위해 먼저 쓴다는 것.


거기 붙은 현장 사례가 남 얘기 같지 않았어요. 50대 초반의 한 분이 부모님 요양 비용, 두 자녀 등록금, 본인 노후 적립을 각각의 통장으로 따로 관리하다가 늘 현금이 빠듯했다는 이야기. 정작 부모님 자산이 어떻게 구성돼 있는지는 한 번도 정리해본 적이 없었다고 하더군요. 세 시계를 하나의 큰 시계로 놓고 보니 그제서야 어디에 돈을 먼저 써야 할지 순서가 보이기 시작했다고요.


저희 부모님 자산 구성, 저도 모릅니다. 여쭤본 적도 없고요.


부모에게 받을 상속과 내가 자녀에게 줄 상속을 따로 보지 말고 세 세대의 호흡으로 보라는 대목이 이 책에서 제일 시야를 넓혀준 부분이었습니다. 같은 재산에 상속세가 두 번, 세 번 매겨지는 구조라는 설명을 들으니 그림이 그려지더라고요.


걸렸던 부분도 있어요. 뒤로 갈수록 규모가 훌쩍 커집니다. 꼬마빌딩, 가족법인, 패밀리오피스, 지주회사 같은 단어가 줄줄이 나오는데 저 같은 월급쟁이한테는 딴 세상 얘기처럼 느껴지는 구간이 분명 있습니다. 목차만 봐도 기가 좀 죽어요. 그리고 세법은 매년 바뀐다고 저자 스스로 점검 파트에서 말하고 있으니, 여기 나온 한도나 숫자들을 몇 년 뒤에도 그대로 믿으면 곤란하겠구나 싶었습니다. 실제로 한 꼭지에서는 예전에 가장 강력했던 특례의 문이 지금 닫히고 있다는 이야기도 하고요.


두께도 솔직히 부담스럽습니다. 앉은자리에서 쭉 읽는 책은 아니에요.


그런데 그게 단점만은 아닌 게, 목차가 0세부터 60세까지 나이순으로 짜여 있어서 내 위치를 찾아 펼치기가 편합니다. 저는 중장년기 챕터를 먼저 봤고, 아이 계좌 얘기가 나오는 앞쪽으로 되돌아갔어요. 저자도 처음부터 차근차근 따라오기를 권하긴 하는데, 급한 사람은 자기 나이부터 펴도 길을 잃진 않을 거 같아요. 이건 소장해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보는 쪽에 가깝습니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톤이에요. 세금 피하는 요령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라고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못을 박습니다. 정확하게 신고하고, 떳떳하게 기록을 남기고, 법이 열어둔 길을 제대로 밟는 합법적인 절세만 이야기하겠다고요. 편법은 잠깐의 이득처럼 보여도 결국 더 큰 대가로 돌아온다는 문장이 있는데, 회계사가 이렇게 쓰는 게 반가웠습니다.


14년간 수많은 가족의 희로애락을 지켜보고 내린 결론이 의외로 단순하다고 해요. 가장 완벽한 절세는 화려한 기술이 아니라 가족 간의 신뢰와 '미리 준비하는 사랑'이라는 것. 돈은 빼앗길 수 있어도 부모가 물려준 '세금을 보는 눈'은 평생 아이를 지켜준다는 말로 프롤로그를 닫습니다.


이 대목에서 잠깐 멍해졌어요. 저는 아이한테 물려줄 게 별로 없다는 생각으로 이 주제를 아예 안 쳐다보고 살았거든요. 근데 물려줄 게 통장 잔고만은 아니라는 거죠.


책 읽고 나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부모님께 전화 한 통 드려야겠다는 거였습니다. 자산 얘기를 대뜸 꺼내긴 어색하겠지만, 기억 또렷하실 때 여쭤보는 게 맞다는 걸 이 책이 계속 말하고 있어서요.


9월도 끝자락이라 아침저녁으로 공기가 제법 서늘해졌는데, 이런 책은 딱 이맘때 읽기 좋은 거 같습니다. 한 해 정리하는 기분도 들고, 내년엔 뭐부터 해볼까 셈도 서고요. 세금 책 읽고 기분이 좋아질 줄은 몰랐는데, 모르고 지나갈 뻔한 걸 알게 돼서 든든한 쪽에 가깝습니다. 저는 일단 기록부터 해보려고요. 지금부터.


물려줄 돈이 많든 적든, 부의 이전을 가르는 건 액수가 아니라 시작한 시점이라는 걸 알려주는 생애주기 절세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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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환의 아이 : 하
치넨 미키토 지음, 민경욱 옮김 / 더픽션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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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괜찮다는 말이 무기가 될 때. <몽환의 아이> 하권 서평

앞서 상권 서평을 먼저 올리고 이어서 하권을 쓰고 있어요. 상권 서평을 못 보신 분들은 그거 먼저 보고 오시면 이해하시기 편하실 거예요. 드라마도 막장 아닌 이상 재미있는 건 정주행하듯이요.



네 명의 환자, 같은 날 같은 지역에서 발병한 이레스, 도쿄 서부의 연쇄살인. 상권을 덮을 때만 해도 선이 다 보인다고 믿었어요. 그런데 하권 막바지에서 그 선들이 한 점으로 모이는 순간, 앞에서 읽은 장면들의 의미가 통째로 바뀌었습니다. 영화도 쉬었다가 다시 보면 앞부분이 잘 이해 안 돼서 두 번 보는 경우가 있잖아요. 이 소설도 연속으로 읽지 않는 이상 다시 읽거나 찾아보고 싶은 부분이 생기는 구간이 있습니다.

하권은 제3장 '몽환의 연주회'로 시작합니다. 조종석과 법정을 지나온 독자 앞에 이번엔 연주회장이 열려요. 잠든 사람의 내면이 만든 세계가 왜 하필 그 모양인지, 그가 살면서 무엇을 가장 붙들고 있었는지가 공간의 형태로 드러나는 설정인데, 세 번째에 이르면 이 규칙이 장난이 아니라는 게 확실해집니다. 작가는 무대를 지어놓고 그 무대의 문턱과 막힌 문을 전부 감정의 이름으로 부릅니다.



조종석, 법정, 연주회장. 세 곳을 차례로 지나고 나면 자기 안에는 어떤 방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어요. 저는 그게 좀 궁금했습니다.

제4장 '몽환의 부식'은 제목 그대로입니다. 앞 장들이 한 사람씩 구해내는 이야기였다면 여기서는 지켜온 게 조금씩 갉아먹혀요. 병원 안의 긴장, 특별 병실에 숨겨진 정체불명의 환자, 학대당한 채 실려 온 소년. 세 갈래가 동시에 조여드는 구간이라 읽는 속도가 저절로 빨라졌습니다.

그리고 막간 4.

이 소설에서 막간은 장식이 아닙니다. 분량은 짧은데, 다 읽고 나서 저는 앞으로 되돌아가 병실 장면들을 다시 확인했어요. 누가 말하고 있었는지, 왜 이 대목이 하필 여기 놓였는지가 드러나는 순간 앞의 이야기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늦은 시간이었는데 그 자리에서 잠이 달아났습니다. 이런 것 때문에 두꺼운 소설을 못 놓는 것 같아요.

제5장 '그리고, 몽환의 끝으로'는 해답의 장입니다. 독립된 사건처럼 굴러가던 환자들 이야기가 하나로 합쳐지고, 소설이 앞에서 세워둔 규칙을 하나도 어기지 않은 채 끝까지 밀고 갑니다. 저는 판타지가 섞인 미스터리를 읽을 때 늘 이 지점을 봅니다. 초자연적 설정을 깔아놓고 결말에서 편의대로 비틀어버리면 앞의 긴장이 전부 헛것이 되니까요. 치넨 미키토는 그러지 않습니다. 쿠쿠루, 마부이, 마부이구미가 마지막까지 자기 법칙대로 작동해요.



책을 보면서 이런 생각도 들더군요. 나를 살린 사람과 나를 부순 사람이 같은 사람일 때, 그다음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쉬운 답을 내놓지는 않는 거 같더라고요. 은인이면서 가해자인 존재를 끝까지 한 사람으로 그려낼 뿐이에요. 나이를 먹을수록 이게 남의 일이 아니게 됩니다. 나를 키운 방식과 나를 상하게 한 방식이 사실 같은 것이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는 일이 있잖아요. 미워하자니 내가 지워지고, 감사하자니 상처가 억울해지고. 그 사이에서 어느 쪽으로도 쉽게 기울지 않는, 그런 느낌이 들더군요.

상권에서 누군가를 안심시키던 "괜찮아"라는 말이, 하권에서는 방향이 정반대로 바뀌어 돌아옵니다. 같은 말이 위로도 되고 무기도 된다는 걸 두 권을 들여 보여줘요.



에필로그의 마지막 풍경은 꼭 천천히 보세요. 인물의 마음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작가가 한마디도 설명하지 않는데, 하늘 색이랑 바다 색만 보고 있으면 그게 전해집니다. 설명 없이 색으로만 마무리하는 방식이 저는 참 좋았어요.

옮긴이의 말도 빼놓지 마시고요. 민경욱 번역가는 원제 '무겐노아이(ムゲンのi)'를 처음 봤을 때 몽환의 세계에서 활약하는 주인공 아이의 이야기라서 '몽환의 아이'로 읽는 줄 알았는데, 마지막에 이르러 다른 의미를 발견했다고 밝혀둡니다. 무겐노아이는 무한한 사랑이기도 합니다. 제목이 두 번 읽히는 셈이에요. 이걸 본문 다 읽고 마주하면 감상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정주행하듯이 상권부터 하권까지 이어서 보시면 몰입감도 있고 재밌습니다.

감정을 아끼는 편은 아닌 거 같아요. 후반부로 갈수록 눈물의 밀도가 높아지고, 인물들이 자기 상처를 말로 풀어내는 장면이 꽤 깁니다. 절제된 미스터리를 좋아하시면 과하다 느끼실 수 있어요. 상권을 안 읽고 하권부터 집으면 거의 아무것도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도요. 두 권을 한 작품으로 보고 들어가셔야 합니다. 두께도 보통 소설책보다 제법 있는데, 저는 이 분량이 낭비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앞을 그만큼 쌓아뒀기 때문에 마지막이 성립하는 구조라서요.

저 같은 경우는 며칠 연속으로 틈틈이 시간 날 때 읽었는데, 그게 맞았던 것 같아요. 띄엄띄엄 읽으면 하권의 회수 장면들이 힘을 잃거든요. 주말 하나 끼워서 계획 잡으시면 리듬이 안 끊깁니다.

2020년 일본 서점대상 후보작이고 국내에는 이번에 처음 소개됐습니다. 상하권 표지가 이어지는 한 장의 하늘 그림이라 나란히 꽂아두면 그 자체로 그림이 되고요.

트릭이 어떻게 짜였나보다 저 사람은 왜 저럴 수밖에 없었을까가 더 궁금해지는 소설이었어요. 오래 붙들고 읽을 한 질이 필요하신 분한테도 좋을 것 같고요. 상권만 집어 들까 망설이고 계시면 두 권 같이 데려오시는 게 낫습니다. 상권 덮고 하권 사러 나가는 일은 생각보다 괴롭더라고요.

다 읽고 표지를 한참 들여다봤습니다. 제목이 처음과 다르게 읽히는 경험, 오랜만이었어요. 두 권 나란히 꽂아두고 나니 좋은 책을 만난 거 같아서 좋았습니다.

마지막 몇 장이 앞의 이야기를 통째로 다시 읽게 만듭니다. 제목까지 다시 읽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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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한 자는 가장 완벽한 노예가 된다 ㅣ 시대철학 3
그리고리 예피모비치 라스푸틴 지음 / 비원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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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에 적힌 지은이 이름을 두 번 봤습니다. 그리고리 예피모비치 라스푸틴. 출간일은 2026년 8월이고요. 인세는 어디로 송금하는 건지 잠깐 궁금해졌는데, 띠지에 박힌 문장을 읽고는 그런 농담이 쑥 들어가더군요. "사람들은 그를 믿은 것이 아니다. 자신들이 절망 속에서 붙잡고 싶은 기적을 믿은 것이다."


비원에서 나온 시대철학 시리즈의 세 번째 책입니다. 시리즈라고 해도 권마다 다루는 인물과 주제가 따로인 구성 같아서, 앞 권을 안 봤어도 이 책 하나로 읽는 데 걸리는 건 없었어요.


판형은 손에 쥐기 편한 작은 크기입니다. 가방에 넣어도 표 안 나는 핸드북두께인데 내용은 영 가볍지가 않아서, 무게중심이 좀 이상한 책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프롤로그 첫 단락에서 글쓴이는 라스푸틴을 악마라 부르는 기존의 말들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먼저 선을 긋습니다. 무너지는 제국 바깥에서 침입한 재앙이라기엔 이미 안에서부터 곪아 있던 자리에 스며든 하나의 증상에 가까웠다고요. 로마노프 왕조가 그를 불러들인 게 아니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그만둔 순간 그의 자리가 저절로 마련됐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문장이 나옵니다. 어떤 시대는 광인을 낳지 않는다, 다만 광인이 앉을 의자를 미리 비워둘 뿐이다.


의자를 미리 비워둔다는 말.


책의 논지는 여기서 거의 다 나온 셈인 거 같아요. 삼켜지는 자들에겐 공통점이 있는데 판단을 오래전에 멈췄다는 것이고, 판단이 멈춘 자리에 관습이, 관습이 무력해진 자리에 불안이, 불안이 임계점을 넘은 자리에 누군가의 확신에 찬 목소리가 들어선다는 흐름입니다. 그 목소리가 옳은지 그른지는 중요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지배가 시작된다고요. 흔들리는 자들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자는 언제나 신처럼 보이는 법이라는 문장이 뒤에 붙는데, 이건 궁정 얘기로만 읽히지가 않았습니다.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아스피린 대목이었어요. 황태자 알렉세이의 몸에서 피가 멎지 않을 때 궁정에 불려온 건 당대 유럽에서 가장 훈련된 의사들이었고, 1899년에 나온 아스피린은 근대 이성의 상징이었다고 합니다. 일부 의학 사학자들이 관절 통증을 호소하는 혈우병 환자에게 이 신약을 처방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는 서술이 이어지고, 사실이었다면 혈소판 응집을 억제하는 그 약이 출혈을 더 악화시키는 독이 되었을 것이라는 설명이 붙습니다. 당대 최고 지성들이 신뢰한 신약이 도리어 독약이 될 수도 있었던 셈이라고요.


낡은 정답을 신봉하는 자들은 그 정답이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채지 못한다는 문장으로 이 장면을 받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회사 생각이 좀 났습니다. 십 년 전에 만든 양식, 그때는 최선이었던 절차, 지금은 아무도 왜 그렇게 하는지 모르는데 아무도 안 건드리는 것들.


상식이 왜 이렇게 끈질기게 우리를 붙드는지에 대한 설명도 서늘했어요. 편하기 때문이라고요. 상식을 따르는 한 결과에 책임지지 않아도 되고, 다들 그렇게 한다고 말하면 되고 원래 그런 거라고 말하면 된다는 겁니다. 상식이 개인의 판단을 집단의 익명성 속으로 녹여준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잘못돼도 나 혼자 잘못한 게 아니고 실패해도 나 혼자 실패한 게 아니니까요.


책임은 나누고 판단은 없는 회의. 제가 앉아 있던 자리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렇다고 상식을 버리라는 얘기로 몰고 가지는 않습니다. 상식을 도구로 대하라고 권하는 쪽이에요. 도구란 필요할 때 꺼내 쓰고 어긋나면 내려놓고 다른 걸 찾는 것인데, 신봉은 도구를 목적으로 착각하는 태도라고요. 자신이 도구를 쥐고 있다고 믿지만 실은 도구가 그들의 정신을 쥐고 있다는 문장이 장 제목을 받아주는 식입니다. 이런 식으로 세게 밀어붙였다가 한 번 잡아주는 리듬이 책 전체에 깔려 있어서, 읽는 동안 멀미가 나지 않았습니다.


2장은 온도가 달라집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감추고 싶은 밑바닥이 하나씩 있고, 그 방을 지나치는 습관이 오래되면 어느 순간 방의 주인이 내가 아닌 그 방 자체가 되어버린다는 도입이에요.


로마노프 왕조의 가장 치명적인 비밀이 황태자의 혈우병이었다는 사실을 여기서 다시 꺼냅니다. 제국은 이 사실을 철저히 숨기려 했고, 은폐하려 할수록 비밀이 왕조의 심장을 더 강하게 조여왔다고요. 감추어진 결핍이 더는 의학의 문제가 아닌 제국 전체의 명운을 가르는 약점이 되었고, 결국 그 틈새로 한 사람이 스며들어 제국의 영혼을 거머쥐었다는 정리입니다. 감추는 자는 언제나 감춤의 대가를 치르고, 그 무게는 처음엔 작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나 결국 감춘 것보다 훨씬 큰 것을 무너뜨린다는 대목이 뒤따르고요.


걱정에는 겉으로 드러난 이유와 그보다 깊은 이유가 있다는 설명도 있었습니다. 돈이 걱정되면 정말 돈만의 문제인지, 관계가 불안하면 정말 그 사람만의 문제인지 한 겹 더 벗겨볼 필요가 있다고요. 그 아래엔 무너져도 돌아갈 곳이 없다는 두려움이나, 결국 아무도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않을 것이라는 오래된 예감이 있을 수 있다고 합니다. 걱정의 옷을 한 겹씩 벗겨보면 그 안에는 대개 훨씬 어리고 훨씬 상처받은 자신이 앉아 있다는 문장에서, 마흔 후반 아재도 별수 없이 조용해집니다.


여기서 결핍을 직시한다는 게 없애자는 뜻이 아니라고 분명히 해둡니다. 없앨 수 있는 게 아니고 없애려 애쓸수록 삶 전체를 지배하게 되니, 그 자리에 이름을 붙여주고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일이라고요. 인정하는 순간 결핍은 나를 뒤에서 조종하던 자리에서 물러나 내 앞에 놓인 하나의 사실이 되고, 사실 앞에서는 대응이 가능하다는 설명. 이 구분이 제일 쓸모 있었어요.


자신의 결핍을 아는 사람은 그걸 채워주겠다고 다가오는 얼굴 앞에서 조금 더 오래 머뭇거릴 수 있다고 합니다. 머뭇거림은 나약함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는 가장 조용한 근력이라고요.


권력을 정의하는 대목도 좋았습니다. 지위도 재산도 완력도 아니고 결핍의 지도를 손에 쥔 자에게 주어지는 조용한 특권이라는 것. 그런데 바로 브레이크를 걸어요. 이 지도가 타인을 지배하는 도구로만 쓰이는 걸 경계한다고, 지도의 진짜 쓸모는 자유에 있다고 못을 박습니다. 목차 어투만 보면 조종술 강의처럼 보이는데 본문은 계속 이런 식으로 방향을 되돌려놓습니다.


5장에 가면 아예 독자 쪽으로 몸을 돌립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 남에게 정답을 묻는다고, 타인의 시선에 부합하는 선택일까 세상이 정해둔 궤도에서 벗어나는 건 아닐까 홀로 걸으면 비웃지 않을까 하는 물음들 밑바닥에는 하나의 목소리가 흐른다고요. 누가 나 대신 결정해주었으면,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나 혼자 짊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목소리.


그리고 이 습관이 무서운 이유를 짚는데, 결과가 나쁠 때가 아니라 결과가 좋을 때라고 합니다. 결과가 나쁘면 상대를 원망하며 자기 자리로 돌아올 기회를 얻지만, 좋으면 그 결정을 내려준 사람의 안목에 더 매달리게 된다고요. 한 번의 성공적인 조언은 열 번의 예속을 부른다는 문장. 그다음부터는 스스로에게 묻는 대신 그 사람 얼굴을 먼저 떠올리고, 그 사람이 없는 자리에서는 결정을 미루거나 회피하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얹혀 가는 삶은 편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피로하다고요. 자기 자리가 아닌 곳에 앉아 있는 사람이 가장 오래 아프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붙습니다.


이 부분은 직장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얼굴 하나쯤 떠올릴 것 같습니다.


다만 정답을 구걸하지 않는다는 게 아무에게도 조언을 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라고 선을 그어둡니다. 여전히 묻고 책을 읽고 다른 사람 경험에 귀를 기울인다고요. 대신 물음의 성격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나 대신 답해달라는 물음이었고, 지금은 내가 놓치고 있는 각도를 알려달라는 물음이라고. 앞쪽은 결정권을 넘기고 뒤쪽은 결정권을 지킨 채 시야만 넓힌다는 구분인데, 사소해 보여도 삶에서는 엄청난 차이를 만든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어요.


오답을 견디는 근육 이야기도 기억에 남습니다. 우리가 정답을 구걸하는 건 게을러서가 아니라 오답이 무섭기 때문이고, 오답이 무섭지 않은 사람은 남의 답지를 훔쳐볼 이유가 없다고요. 그러니 훈련은 정답을 잘 찾는 능력을 기르는 쪽보다 오답을 담담하게 감당하는 태도를 기르는 쪽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합니다. 작은 오답을 자주 겪는 사람이 큰 정답에 가까이 가는 걸 여러 번 봤다는 문장도요.


의외로 마음에 들었던 건 이 책이 역사를 함부로 주무르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 러시아군을 다룰 때도 개전 초기의 혼선과 보급 문제를 짚은 다음, 전쟁 내내 낡은 전술만 고집한 건 아니라고 덧붙여요. 1915년 대후퇴 이후 전술과 조직을 다시 정비했고 1916년 브루실로프 공세에서는 새로운 전술로 커다란 성과를 거뒀다고요. 라스푸틴의 영향력을 말할 때도 그렇습니다. 황후가 그의 의견을 황제에게 전달한 건 사실이지만 니콜라이 2세가 군사적 결정마다 그의 축복을 구했던 건 아니고, 실제 작전 결정의 상당 부분은 참모총장 알렉세예프가 맡았으며 황제가 그의 뜻과 반대로 움직인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적어둡니다. 영적 위안을 구한 것과 군사적 판단권을 넘긴 것은 다른 이야기라고 구분하면서요.


이런 자리에서 슬쩍 과장하고 넘어가면 읽는 사람 입장에서 나머지 주장도 믿기 어려워지는데, 그걸 안 하네요.


솔직하게 걸린 부분도 있었습니다. 목차와 본문의 온도 차이예요. 목차는 온통 명령형입니다. 도덕이라는 족쇄를 끊어내라, 자비 없는 공포를 심어라, 더 미친 광기로 압도하라. 이것만 보면 라스푸틴의 수법을 따라 하라는 책인가 싶어지는데, 막상 본문은 자기 밑바닥을 들여다보라는 조용한 권유에 훨씬 가깝습니다. 프롤로그에서 이미 이 책은 라스푸틴을 옹호하려고 쓰이지 않았고 미화할 생각도 없다고 못을 박아두기까지 했고요. 서점에서 목차만 훑어본 사람은 이 책을 완전히 다른 책으로 오해할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지은이 표기도 계속 걸렸습니다. 본문의 화자는 라스푸틴을 바깥에서 들여다보며 "나는 그를 하나의 거울로 세워두고 싶다"고 말하는 시선이라, 인물 본인의 회고로 읽히지는 않아요. 콘셉트라는 건 알겠는데 저 같은 독자는 첫 페이지 열 때까지 좀 헷갈립니다.


그래도 프롤로그에서 제일 마음에 든 문장은 이거였어요. 이 여정의 끝에서 어떤 정답도 건네지 않을 것이라고, 정답을 건네는 순간 자신 역시 또 다른 라스푸틴이 되기 때문이라고요. 대신 함께 질문을 오래 붙들어보자고 청합니다. 질문을 오래 붙드는 힘, 그것이 결국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의 유일한 자산이라는 말.


자기계발 서가에 놓인 책이 정답을 안 주겠다고 선언하는 게 재미있었습니다.


소장 가치로 보면 책장에 꽂아두고 한 챕터씩 다시 꺼내 볼 만한 책 같아요. 챕터마다 독립적으로 끝나는 구성이라 순서대로 안 읽어도 되고, 무엇보다 문장이 짧고 단단해서 아무 데나 펼쳐도 읽힙니다. 다만 편안한 독서를 기대하고 집으면 좀 당황할 수 있습니다. 첫 페이지를 덮는 독자가 조금은 불편해지기를 조용히 바란다고 본인이 미리 경고를 해두는 책이니까요.


읽는 내내 재미있었습니다. 백 년 전 궁정 이야기가 회의실 이야기로 계속 번지는 게 신기했어요.


5장 끝에 이런 당부가 있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아주 작은 한 가지라도 좋으니 남에게 묻지 않고 스스로 정해보기를 바란다고, 그렇게 정한 밤은 어제와는 다른 잠으로 이어질 것이라고요. 대단한 결단도 아니고 저녁 메뉴 정도여도 된다는 뜻으로 읽혀서, 이건 해볼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바람이 제법 서늘해졌네요. 아침에 얇은 겉옷 하나 걸치게 되는 이맘때에, 남의 답지 훔쳐보던 습관 한 겹 벗겨보라는 책을 만난 건 나쁘지 않은 타이밍인 거 같습니다. 여기 나온 것들 하나씩 실천해 봐야겠어요. 일단 오늘 저녁부터 제가 정해보겠습니다. 물론 집에서 최종 승인은 따로 받아야겠지만요.


광인은 시대가 낳는 게 아니고 비워둔 의자에 앉을 뿐이라는 문장에서 출발해, 남의 정답에 기대는 내 습관까지 조용히 들춰내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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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환의 아이 : 상
치넨 미키토 지음, 민경욱 옮김 / 더픽션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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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잠든 사람의 꿈속으로 의사가 걸어 들어갑니다.


이 한 줄만 보고는 반신반의했어요. 이런 설정은 대개 결말에서 편의대로 비틀리니까요. 그런데 상권을 다 읽는 동안 이 소설은 한 번도 자기 규칙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원인도 치료법도 없는 희귀질환 '이레스'. 같은 날, 도쿄 서부에서, 네 명이 동시에 잠에 빠집니다. 일본 최대 규모의 신경·정신질환 전문병원에 근무하는 신경내과 의사 시키나 아이가 그중 세 명의 주치의를 맡아요. 세 명. 네 명이 아니라. 나머지 한 명은 왜 아이한테 오지 않는지, 그 질문이 상권 내내 따라다닙니다.


제1장 제목이 '드넓은 몽환의 하늘'입니다. 첫 번째 환자는 한쪽 눈을 잃은 여성이고, 그의 몽환 세계는 조종석이에요. 하늘을 향해 있던 사람이 하늘을 잃었을 때 그 사람 속에 남는 풍경이 어떤 모양인지를, 작가는 설명하지 않고 그냥 공간으로 보여줍니다. 저는 여기서 이 소설의 문법을 이해했습니다. 세계의 형태가 곧 그 사람이 가장 붙들고 있던 것이라는 문법. 그러니까 꿈속을 돌아다니는 일이 그대로 진료가 됩니다.


두 번째 환자는 변호사입니다. 살인 혐의를 받은 남자의 무죄를 주장했던 사람이고, 그의 세계는 당연하게도 법정이고요. 조종석 옆에 법정이 놓이니 규칙이 우연이 아니라는 게 분명해집니다. 게다가 이 변호사 쪽에서 현실의 연쇄살인으로 슬쩍 다리가 놓여요. 이때부터 소설이 두 겹으로 굴러가기 시작합니다. 안에서는 영혼을 찾고, 바깥에서는 범인을 찾고.


제가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면서 보았던 부분은 조종석이 나오는 대목이었어요.


사람이 잠들어 있는 동안 속에 남아 있는 게 결국 자기가 제일 잘하던 일의 풍경이라는 것. 그게 이상하게 오래 걸렸습니다. 마흔 몇 해쯤 살고 나면 주변에 자기 조종석에서 내려온 사람이 꽤 많아져요. 하던 일이 없어졌거나, 몸이 안 따라주게 됐거나, 자리에서 밀려났거나. 겉으로는 다들 멀쩡히 출근하는데 속에는 그 조종석이 아직 그대로 있겠구나 싶어서,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소설은 그걸 불쌍하다고 말하지 않아요. 그냥 그 사람 세계가 그렇게 생겼다고 보여줄 뿐인데.


세계관을 떠받치는 말들은 오키나와에서 왔습니다. 영혼을 뜻하는 마부이, 마부이를 몸으로 되돌리는 의식인 마부이구미, 그리고 몽환의 세계마다 나타나는 기묘한 존재 쿠쿠루. 이 단어들이 이국적인 장식으로만 쓰이지 않는 게 좋았어요. 주인공의 할머니가 오키나와의 영능력자 유타였다는 설정과 맞물리면서, 의학과 주술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같은 진료실 안에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아이라는 인물도 캐릭터 성격을 보면, 23년 전의 사건을 품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 기억이 환자의 꿈속을 걸을 때마다 발밑에서 올라와요. 남을 구하러 들어간 세계에서 자기 상처를 마주하게 되는 구조라, 진료 장면 하나하나가 그대로 주인공 이야기가 됩니다.


응원하는 마음 반, 답답한 마음 반이었습니다. 자기 것도 감당 안 되는 상태로 남부터 꺼내러 들어가는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그게 나무랄 일인가 싶기도 했고요. 저도 회사에서 제일 힘들 때 오히려 남의 일을 더 떠맡은 적이 있는데, 도망인 걸 알면서도 그 편이 버티기 쉬웠으니까. 아이한테 잔소리하고 싶다가도 결국은 이해하게 됩니다.


맛보기로 하나 꼽자면 잠든 환자 곁에 아무것도 못 하고 앉아 있는 장면들이에요. 화려한 꿈속 모험보다 이 정적인 장면들이 오래 남았습니다. 낫게 할 수 없는 사람 옆에 매일 앉는 일이 어떤 마음인지를, 소설이 상권 내내 조용히 묻는 거 같습니다.


후반부 끊김이 상당히 얄궂습니다. 하권을 빨리 보고 싶게 만드는, OTT 드라마 엔딩 같은 느낌이 들어요. 다음 편 궁금해서 결국 한 편 더 누르게 되는 그 기분 아시죠. 저는 상권 마지막 장을 덮자마자 그 밤에 하권을 폈습니다. 피곤에 쩔어 월요일병 생기지 않는 날이면 그래도 좀 더 늦게 자는 편이라서요. 그리고 인물들이 자기 감정을 말로 꽤 길게 풀어내는 편이라, 건조한 미스터리를 좋아하시면 촉촉하다고 느끼실 수 있습니다.


읽는 때는 여러 날 이어서 시간을 낼 수 있을 때가 좋습니다. 띄엄띄엄 읽으면 환자별 세계가 서로 겹쳐 보이기 시작하거든요.


치넨 미키토가 2020년 일본 서점대상 후보에 올린 작품이고, 국내에는 이번에 처음 나왔습니다. 두께는 보통 소설책보다 제법 두툼한 편이고 그게 상하권으로 두 권이에요. 받아 들었을 땐 좀 부담스러웠는데 막상 읽으면 속도가 붙습니다. 표지 두 장이 나란히 놓였을 때 한 장면으로 이어지도록 설계돼 있어서 꽂아두는 재미도 있고요.


범인이 누구인가보다 그 사람이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가 더 궁금한 분이라면 맞으실 겁니다. 설정을 끝까지 지키는 이야기를 좋아하시는 분도요. 서점에서 상권만 집을까 망설이고 계시다면, 그냥 두 권 다 데려오세요. 상권 마지막 장의 그 끊김은 생각보다 견디기 어렵습니다.


요즘처럼 밤공기가 선선해지면 두꺼운 책 한 질이 괜히 반갑더라고요. 창문 조금 열어두고 읽기 좋은 계절입니다. 하권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마저 풀어보겠습니다.


쉽게 무너지지 않는 꿈에 갇힌 사람들에게, 데리러 가겠다고 말하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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