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을 위한 돈키호테 ㅣ 메이트북스 청소년 4
미겔 데 세르반테스 지음, 강현규 엮음, 김성훈 옮김 / 메이트북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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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풍차 너머에 산초가 있었다, <청소년을 위한 돈키호테> 서평

쉰 살 가까운 나이에 기사도 책을 사겠다고 밭까지 팔아 버린 남자가 있었답니다. 밤낮없이 읽다 보니 잠도 줄고 다른 일은 전부 뒷전이 됐다고 하더군요. 40대 후반인 저로서는 웃어야 할지 뜨끔해야 할지 애매한 첫인상이었어요. 요즘 서평단 책 오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제 모습이 살짝 겹쳐 보여서 그런 거 같아요.


그 남자의 이름은 다들 아실 겁니다. 돈키호테요.

이번에 만난 책은 메이트북스 청소년 시리즈 네 번째 권인 <청소년을 위한 돈키호테>입니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원작을 강현규 님이 엮고 김성훈 님이 옮겼어요. 주황빛 바탕에 풍차와 말 탄 두 사람의 실루엣이 서 있는 표지는 11월 들어 부쩍 색이 짙어진 늦가을 들판이랑 잘 어울리는 느낌이 듭니다. 두께는 보통 소설책보다 조금 두툼한 편이에요. 원작이 1부 52장, 2부 74장이나 된다는 걸 생각하면 돈키호테가 갑옷 무게를 확 덜어낸 버전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 정도면 로시난테도 덜 헐떡이며 달렸을 거 같습니다.


<청소년을 위한 돈키호테>는 풍차와 싸운 괴짜 기사 정도로만 알려진 이야기를 16장으로 다시 엮었는데, 유명한 장면만 오려 붙인 요약본과는 결이 좀 달라요. 엮은이의 글을 보면 실제로 일어난 일과 돈키호테가 그렇게 믿은 일, 다른 인물들이 일부러 꾸민 일을 분명히 나누어 썼다고 하더군요. 원작에 없는 사건이나 결말은 새로 만들지 않았다는 말도 있고요. 각 장 첫머리에는 그 장에서 벌어질 일을 짧게 알려주는 상자가 붙어 있어서 길 잃을 걱정 없이 따라가게 됩니다.


본문 앞에 붙은 '읽기 전에 알아야 할 것들' 코너도 쏠쏠했어요. 편력 기사가 뭔지, 종자는 어떤 일을 하는지, 스페인 길가 여관 '벤타'가 어떤 곳인지 차근차근 풀어 줍니다. 기사도 책 속 기사들은 돈이나 갈아입을 옷을 챙기는 장면이 없어서 돈키호테도 그걸 몰랐는데, 여관 주인이 실제 여행에는 그런 준비가 필요하다고 알려준다는 대목에서 웃음이 났습니다. 출장 가방 한 번이라도 싸 본 사람이라면 다 아는 진리인데 말이죠. 코너 끝에는 "처음부터 모든 이름과 사건을 외울 필요는 없습니다"라는 문장이 있는데, 고전 앞에서 괜히 주눅 드는 사람한테는 이 말이 꽤 든든하게 들리더라고요.


엮은이도 "고전은 처음부터 어렵게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써 두었더군요.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9장 (둘시네아는 어디에 있을까?)였어요. 돈키호테가 다음 모험에 앞서 둘시네아에게 축복을 받겠다며 토보소로 가자고 하는데, 정작 산초는 둘시네아의 집도 모르고 그녀를 만난 적도 없습니다. 예전에 주인에게 전한 이야기가 전부 꾸며낸 것이었거든요. 한밤중 골목을 이리저리 돌며 시간을 끄는 산초, 큰 문이나 높은 담만 보이면 걸음을 늦추는 돈키호테, 골목마다 번지는 개 짖는 소리와 멀리서 우는 당나귀. 그 사이에 이런 문장이 끼어 있습니다.


"찾는 집이 어디인지 몰랐으니, 틀린 길만큼은 얼마든지 골라 낼 수 있었습니다."

이 문장에서 피식 웃음이 나오더라고요. "여기는 아닙니다"를 몇 번이고 되풀이할 수 있는 비결이 바로 거기 있으니까요. 회사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처음 둘러댄 말 하나 때문에 다음 말을 또 얹어야 하는 순간이 오는데, 날이 밝으면 다 들통날 걸 알면서 길가에 주저앉아 머리를 굴리는 산초가 남 일 같지 않았습니다. 혼자 중얼거리는 속마음은 웃기면서도 좀 짠해요.


'주인 나리는 풍차도 거인으로 보신다. 평범한 여인을 보고도 공주라고 여기실 수 있겠지. 그렇지 않으면 마법에 걸렸다고 하면 돼.'

그렇게 당나귀를 탄 시골 여인 셋이 둘시네아 일행으로 둔갑합니다. 산초는 들일할 때 입는 치마를 비단옷이라 하고 흙먼지를 향기로운 구름이라 우기는데, 돈키호테 눈에는 거칠어진 손과 햇볕에 탄 얼굴, 생마늘 냄새까지 고스란히 들어오고요. 여기서 돈키호테가 고르는 길이 저는 좀 놀라웠어요. 산초가 거짓말을 한다고 몰아세우는 대신 자기 눈이 마법에 속았다고 받아들이거든요. "이 기사의 마음을 헤아려 주시오"라며 무릎 꿇은 이 양반을 보면 엉뚱하다는 말만으로는 다 담기지 않는 사람 같더라고요. 종자의 말을 끝까지 거짓으로 몰지 못하는 그 모습에서 사람 냄새가 났습니다.


산초도 마냥 영리한 조연은 아닌 거 같아요. 섬 하나를 다스리게 해 주겠다는 솔깃한 약속에 가족을 두고 당나귀에 올라탄 사람이니까요. 보상에 귀가 팔랑이는 모습이 저 같은 월급쟁이 눈에는 오히려 정겹습니다. 그러다 주인이 제일 자주 쓰는 '마법' 핑계를 슬쩍 빌려 쓰는 장면에서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물들어 가는 게 보이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 거짓말이 이후 여정에 어떻게 따라붙는지는 직접 확인해 보시는 편이 훨씬 재미있을 거예요.


맛보기로 하나 고르라면 11장 (동굴의 이야기와 부서진 인형들)의 몬테시노스 동굴 대목이에요. 산초는 주인 몸에 묶은 밧줄 매듭을 두 번이나 확인하는데, 정작 돈키호테는 땅속 위험보다 훗날 이 탐험이 어떻게 기록될지를 더 신경 쓰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끌어 올려 보니 잠들어 있었고, 깨우자마자 하는 말이 "왜 나를 데려왔는가? 나는 그토록 즐거운 곳에 있었는데"라니 이 양반 참 한결같구나 싶더라고요. 그러고는 수정으로 지은 듯한 궁전과 흰 수염 노인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이런 대화가 오갑니다.


"거기 얼마나 계셨는데요?" "사흘 밤낮일세." "한 시간 남짓밖에 안 지났습니다."

사흘 대 한 시간.

먹지도 자지도 않았다는 주인 앞에서 산초는 더 따지려다 고개를 젓고 맙니다. 그래도 그런 말은 제발 그만 믿으시라는 산초에게 돈키호테가 돌려주는 말이 꽤 근사했어요.


"나를 아껴서 하는 말인 줄 아네. 하지만 자네가 이해하기 어렵다고 일어나지 않은 일은 아니야."

재밌는 건 이야기를 기록한 시데 아메테마저 망설인다는 점이에요. 사실인지 아닌지 단정하지 않고 판단을 읽는 사람에게 맡겼다니, 400년 전 소설이 독자한테 슬쩍 공을 넘기는 모양새라 은근히 즐거웠습니다.


같은 장 뒷부분의 인형극 장면에서는 웃다가 조금 걸리더라고요. 방금까지 동굴 이야기를 사실이라고 우기던 사람이 인형극 속 교회 종소리가 맞지 않는다며 깐깐하게 따지는 대목까지는 배를 잡게 됩니다. 그러다 쫓기는 두 인물을 구하겠다며 칼을 뽑아 들고, 나무와 천으로 만든 병사들이 우수수 쓰러지죠. "그만두세요! 사람도 아니고 병사도 아닙니다! 그것들은 제 인형입니다!" 하는 인형극 주인의 외침이 나오고 나서는 웃음기가 쑥 빠졌어요. 이야기 속 사람을 구하려던 행동이 눈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생계를 부수고 있었다는 문장이 바로 뒤에 이어지거든요.


좋은 뜻으로 밀어붙인 일이 엉뚱한 사람 일을 늘려 놓는 경우, 직장 다니면서 한두 번쯤은 다들 보셨을 거예요. 그래도 산초가 "우리 주인님은 잘못한 줄 아시면 갚아 주실 분이오"라고 달래고, 돈키호테가 칼을 휘두른 사람이 자기니 값을 물겠다고 나서는 걸 보면 이 양반이 도무지 미워지지가 않습니다.


엉뚱해도 셈은 분명한 사람.

<청소년을 위한 돈키호테>를 그냥 줄거리 책으로 넘기기 아까운 이유는 책 뒤에 붙은 작품해설 (<돈키호테>를 읽는 다섯 가지 프리즘) 덕분인 거 같아요. 패러디, 관점의 차이, 변해 가는 두 인물, 자기 이야기가 실린 책을 알게 되는 주인공, 근대소설과의 관계까지 다섯 갈래로 풀어 주는데, 청소년 눈높이 문장이라 어른이 읽어도 술술 넘어갑니다. 같은 풍차를 두고 서로 다르게 보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사람마다 무엇이든 제멋대로 진실이 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라고 선을 긋는 부분이 특히 좋았어요. 풍차는 실제로 풍차이고, 돈키호테는 그걸 다르게 해석할 뿐이라는 거죠.


이어서 던지는 질문이 "나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지는 않을까?"입니다. 회의실에서 제 판단을 철석같이 확신하던 순간들이 줄줄이 떠오르는 질문이더라고요. 1614년에 실제로 나온 가짜 속편을 세르반테스가 이야기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는 대목도 처음 알게 된 거라 흥미로웠고요.

집에 중고등학생이 있다면 같이 읽고 해설 속 질문을 놓고 이야기 나누기 좋을 거 같아요. 저처럼 풍차 장면 하나로 돈키호테를 다 안다고 생각했던 어른한테도 <청소년을 위한 돈키호테>는 부담 없는 첫 입문서가 되어 줄 느낌이 듭니다. 이런 이야기는 다 읽고 나면 누구한테든 떠들고 싶어지더라고요.


11월 첫 화요일, 출근길 바람이 제법 매워졌네요. 노랗게 깔린 은행잎을 보니 라만차 들판도 이맘때면 이런 색이었을까 싶습니다. <청소년을 위한 돈키호테>를 덮고 나니 풍차 앞의 괴짜 기사 위에 산초랑 티격태격하며 같이 먹고 자고 다치던 길동무 얼굴이 한 겹 더 얹힌 기분이에요. 내일 아침에도 저는 지하철이라는 로시난테에 올라 편력 직장인으로 출정합니다. 회사 앞 환풍기만큼은 거인으로 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요. 좋은 고전 한 권 제대로 만난 거 같아서 기분 좋은 화요일입니다.


풍차만 알던 돈키호테를 산초와 함께 끝까지 따라가게 해 주는, 웃음으로 시작해서 질문을 남기는 고전 입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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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은 하고 싶은 직장인들을 위한 말하기 수업
김진우 지음 / 모티브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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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제가 할게요" 대신 조건 한 줄, 할 말은 하고 싶은 직장인들을 위한 말하기 수업 서평

"이거 누가 좀 맡아 줄 사람?"

회의가 끝나 갈 무렵 이 말이 나오면 공기가 잠깐 멈추잖아요. 그 침묵이 어색해서 손이 먼저 올라가고, 자리에 돌아와 할 일 목록을 열어 보면 오늘도 야근 확정. 이 장면으로 시작하는 꼭지가 있는데, 첫 문단부터 뜨끔하더라고요.


<할 말은 하고 싶은 직장인들을 위한 말하기 수업>은 김진우 작가가 쓰고 모티브에서 지난 10월에 나온 책이에요. 표지가 아주 샛노랗습니다. 말풍선이 여기저기 붙어 있고, 안경 쓴 직장인 캐릭터들이 만화 컷처럼 들어가 있어요. 책상 위에 올려 두면 형광펜을 한 자루 더 꺼내 놓은 줄 알겠더라고요. 판형은 보통 단행본보다 조금 아담해서 가방 한쪽에 쏙 들어가는 크기예요.


11월 첫 주 화요일입니다. 월요일 주간 회의에서 받아 온 일들이 슬슬 책상 위에 쌓이기 시작하는 요일이죠. 창밖 은행잎도 노랗고 책 표지도 노래서, 계절이랑 색을 맞춘 책을 만난 기분이에요.


프롤로그는 저자의 고백으로 시작해요. 말 잘하는 법을 다룬 책을 여러 권 사서 밑줄도 긋고 형광펜도 칠했대요. 그런데 다음 날 아침 팀장님이 "그거 어떻게 됐어요?" 하고 물으시니 머릿속이 하얘지더라는 거예요. 책에는 분명 결론부터 말하라고 쓰여 있었는데, 정작 그 결론이 뭔지 몰랐다고요. 이어지는 비유가 재미있어요.


"배고픈 사람한테 요리 이론을 설명해 주는 것과 비슷하달까요. 지금 필요한 건 숟가락에 얹힌 밥 한 술이잖아요."

이 대목에서 피식 웃음이 났습니다. 밑줄만 잔뜩 긋고 끝난 말하기 책이 저 혼자 겪은 일은 아니었던 거 같아요.


그래서 이 책은 정말로 떠먹여 줍니다. 꼭지마다 따옴표 안에 그대로 따라 말하면 되는 대본이 들어 있어요. 꼭지 끝에는 '떠먹여 주는 한 줄'이 붙어 있어서, 바쁜 날엔 그 한 줄만 챙겨도 되고요. 저자가 처음엔 토씨 하나 바꾸지 말고 따라 하라고 하는데, 운전 배울 때 "거울 보고, 깜빡이 켜고, 핸들 돌리고"를 속으로 중얼거리는 것과 같다는 설명이 꽤 그럴듯했어요. 대신 호칭 같은 단어는 회사에 맞게 바꾸고 순서만 지키라고 해요. 이 책을 관통하는 문장은 아마 이거인 것 같습니다.


"말 잘하는 사람은 타고난 사람이 아니더라고요. 순서를 아는 사람이었어요."

저자 이야기를 조금 더 하고 싶어요. 스스로를 말 한마디 잘못해서 이불을 걷어찬 횟수로는 어디 가서 안 지는 평범한 회사원이라고 소개합니다. 첫 출근 날 자기소개에서 "잘 부탁드립니다"만 반복했고, 전화벨이 울리면 누가 대신 받아 주길 바라며 모니터만 쳐다봤대요. 선배에게 질문 하나 하려고 메신저 창에 문장을 썼다 지웠다 하다 보면 점심시간이 되어 있었다고요. 이런 사람이 가르치니까 높은 데서 내려다보는 말투가 없어요. 같은 층, 같은 줄 책상에 앉은 동료가 건네는 메모 같은 느낌이 들더군요.


다른 꼭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건 17장 "'제가 할게요'를 줄이는 법"이었어요.

저자의 입사 동기 이야기가 나와요. 손이 빠르고 뭐든 맡아 주니 처음엔 칭찬을 많이 들었는데, 몇 달 지나자 '걔한테 주면 다 하더라'는 말이 돌았대요. 반년쯤 지나서는 팀에서 제일 바쁜 사람이 되어 있었고요. 그런데 평가는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남의 일을 받느라 자기 일을 제때 못 끝냈으니까요. 더 속상한 건 팀장님이 그 친구가 그렇게 많은 일을 들고 있는 줄도 몰랐다는 대목이었어요.


회사 밥을 꽤 오래 먹은 나이가 되니 이 부분은 반대편 자리에서도 읽히더라고요. 혹시 지금 우리 팀에도 아무 말 없이 일을 끌어안고 있는 사람이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요. 퇴근길에 그 동기가 "나 왜 이렇게 됐지?" 했을 때, 저자는 떡볶이를 사면서도 남 얘기 같지 않았다고 해요. 본인도 손이 먼저 올라가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책이 내놓는 해법은 거창하지 않아요. 대답 끝에 조건 한 줄을 붙이라는 거예요. 맛보기로 대본 하나 옮겨 볼게요.


"맡고 싶은데 지금 ○○ 건이랑 △△ 건이 이번 주 마감이라서요. 다음 주 월요일부터 시작해도 괜찮으면 제가 할게요."

이렇게 말하면 거절처럼 들리지 않으면서 내 상황이 드러나고, 판단은 상대에게 넘어간다고 해요. 그래도 손이 먼저 올라갔을 때는 "제 일정 한번 확인해 보고 30분 안에 말씀드릴게요"로 시간을 벌라고 하고요. 이미 받아 버렸다면 빨리 다시 말하는 게 낫다고 합니다. 말을 꺼내기 민망하다고 하루 이틀 버티면 그 민망함이 이자처럼 불어난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건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마감 전날 밤에 몰아서 갚아 본 이자일 거예요.


저자는 지금도 가끔 손이 먼저 올라간대요. 그럴 땐 올라간 손을 슬그머니 귀 뒤로 넘기며 머리를 정리하는 척한다고요. 다들 봤을 텐데 모른 척해 주더라는 말에 소리 내서 웃었습니다. 그 동기는 요즘 회의 때 손을 들기 전에 다이어리부터 펼친대요. 펼치는 소리가 꽤 커서, 이제는 팀장님도 그 소리가 나면 잠깐 기다려 주신다고 해요.


21장 "선 넘는 농담에 억지로 웃지 않는 법"은 결이 조금 달라요. 점심 먹고 들어오는 엘리베이터에서 과장님이 던진 농담에 옆 사람들이 킥킥 웃고, 나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가 자리에 앉아서 기분이 묘하게 나빠지는 장면이 나와요. 과장님보다 웃은 내 얼굴이 더 얄밉다는 문장이 아프게 정확합니다. 책은 그 웃음이 상대에게 '이 정도는 괜찮구나'라는 신호로 읽힌다고 설명해요. 그래서 권하는 건 담담한 표정으로 짧게 한마디 하는 거예요. "음, 그건 좀 웃기 어렵네요." 그리고 바로 원래 얘기로 돌아가는 거죠. 끝에 "하하"를 붙이면 앞 문장의 힘이 싹 빠진다는 조언도 있어요.


이 꼭지는 요령에서 끝나지도 않아요. 농담이 반복되거나 성적인 말, 인격을 깎아내리는 말로 번진다면 말하기로 풀 문제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선을 그어 줍니다. 기록을 챙겨 회사 신고 창구나 고용노동부 고객상담센터(1350)에 도움을 청하라고 안내까지 해 주고요. 저는 이 부분이 이 책을 믿고 볼 수 있게 해 주는 대목 같았어요.


솔직히 마음에 걸린 건 이 꼭지에 나오는 농담 예시들이었어요. "살 좀 붙었네? 요즘 행복한가 봐." 같은 말이요. 제 나이쯤 되면 농담을 듣는 쪽보다 하는 쪽에 서 있을 때가 더 많잖아요. 분위기 좀 풀어 보겠다고 던진 말이 누군가에겐 퇴근길 지하철까지 따라갔을 수도 있겠다 싶으니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말하기 책인데 말을 아끼는 법까지 배우고 가는 셈이에요.


에필로그에도 좋은 이야기가 많아요.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지인이 전화 꼭지의 대본을 옮겨 적고 며칠 뒤 "처음으로 전화를 한 번에 끝냈어요"라는 메시지를 보냈대요. 저자는 그날 저녁이 이 책을 쓰면서 제일 뿌듯했다고 해요. 말수 적던 동기가 회의 끝에 떨리는 목소리로 "저… 하나만요. 일정에서 검수 기간이 빠진 것 같아서요" 하고 꺼낸 덕분에 터질 뻔한 문제를 막았다는 이야기도 나와요. 메모지에 문장을 세 번이나 고쳐 썼는데, 정작 입에서 나온 건 전혀 다른 문장이었다고 하더라고요.


"서툰 말은 다음에 고치면 되지만, 꺼내지 않은 말은 고칠 기회조차 없더라고요."

그리고 이 에필로그도 첫 문장을 몇 번이나 고쳐 썼다는 고백. 말하기 책을 쓴 사람도 첫마디는 여전히 어렵다는 거죠.


소장 가치는 넉넉하다고 생각해요. 차례가 보고, 부탁, 거절, 회의, 일상처럼 상황별로 나뉘어 있어서, 내일 막힐 것 같은 장면만 골라 펼쳐 보기 좋습니다. 저자도 이 책을 너무 열심히 읽지 말고 가방에 넣어 다니다가 막히는 날 한 꼭지씩 꺼내 보라고 하더라고요. <할 말은 하고 싶은 직장인들을 위한 말하기 수업>은 이제 막 첫 출근을 앞둔 조카나 새로 들어온 후배 책상에 슬쩍 올려 주고 싶은 책이기도 해요. 읽어 보니 오래 다닌 사람한테도 잘 맞았어요. 순서를 몰라서 삼켰던 말이 연차와 상관없이 다들 있잖아요.


말 잘하는 법을 배우러 들어갔다가, 말 때문에 오래 헤맨 사람의 메모를 한 장씩 넘겨 본 느낌이었습니다. 무겁지 않고, 읽는 내내 재미있었어요.

바람 끝이 제법 차가워진 11월이에요. 이 서평도 따지고 보면 '제가 할게요' 하고 손 번쩍 든 일이었는데, 이번만큼은 조건 한 줄 안 붙여도 남는 장사였네요. <할 말은 하고 싶은 직장인들을 위한 말하기 수업> 덕분에 내일은 저도 한 번, 먼저 말해 볼 용기가 조금 생겼습니다. 다들 감기 조심하시고, 오늘도 수고 많으셨어요.


할 말은 늘 있었는데 순서를 몰랐던 직장인에게, 퇴근길 지하철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꺼낼 첫 문장을 숟가락째 떠먹여 주는 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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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의 조각
이다 투르페이넨 지음, 정보람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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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꾹질에 남은 바다의 기억, 핀란드 소설 <숨의 조각> 서평


표지 한가운데가 하얗게 비어 있어요. 낡은 지도와 범선, 해초 그림을 찢어 붙인 콜라주 위에서 커다란 동물 모양만 가위로 도려낸 것처럼 보이거든요. 처음엔 물개인가 했는데, 지금은 지구 어디에도 없는 동물의 실루엣이라고 하더라고요. 비어 있는 그 자리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라는 걸 알고 나서 표지를 다시 들여다보게 됩니다.


이다 투르페이넨의 <숨의 조각>은 스텔러바다소 이야기예요. 1741년 베링 탐사대 앞에 나타났다가 27년 만에 자취를 감춘, 역사상 가장 빨리 멸종한 동물이라고 합니다. 핀란드 작가의 첫 장편인데 헬싱긴 사노맛 문학상을 받았고 핀란디아상 최종 후보에도 올랐대요. 29개국에 판권이 팔렸다니 데뷔작치고는 출발이 꽤 화려한 셈이죠.


11월 첫 화요일이에요. 월요일은 어찌어찌 넘겼는데 주말은 아직 멀게만 느껴지는, 딱 그런 요일이죠. 입동을 며칠 앞두고 바람 끝이 제법 차가워졌습니다. 예전 같으면 이런 날엔 유튜브나 틀어 놓고 잠들었을 텐데, 요즘은 새로 받은 책부터 집어 드는 걸 보면 저도 많이 달라진 거 같아요. 이번 책은 하드커버에 보통 소설책보다 제법 두툼한 편이라 손목에 힘이 좀 들어갑니다. 그래도 몸길이 9미터짜리 바다소에 비하면 이 정도 무게는 '소소'한 거겠죠.


1부는 박물학자 스텔러가 끌고 갑니다. 탐사를 떠나기 전 아바차만 원주민들에게 동물 이야기를 해 달라고 진저리가 나도록 조르고, 이야기가 바닥나 그들이 지어내기 시작해도 그마저 괜찮다고 여기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긁어모은 이야기 어디에도 고래만 한 바다소는 없었다고 하더군요.

"어떻게 이런 동물이, 인간에게 알려진 바닷가에, 언급되지 않은 채 남아 있을 수 있을까?"

배는 길을 잃고 선장은 앓아눕는데, 스텔러의 속마음은 이렇게 그려져요. "이제 그는 안다, 그들이 곤경에 처했다는 것을. 그러나 그의 마음속엔 공포와 기이한 희열이 한데 뒤섞인다, 이 발견은 오직 그만의 것이기에." 위기 한복판에서도 신기한 걸 보면 눈이 반짝이는 사람. 회사에도 꼭 한 명씩 있잖아요, 다들 비상인데 혼자 새 아이디어에 들떠 있는 사람.


베링 선장이 숨을 거두는 대목에서는 문장이 툭 끊기고 이름 셋이 한 줄씩 놓여요. 베링섬, 베링 해협, 베링해. 죽어서도 그 끔찍한 장소에서 달아나지 못한다는 문장 뒤에 이름만 덩그러니 남겨 두니, 지도 위 익숙한 지명이 갑자기 다르게 보이더라고요. 선원들이 언 땅에 무덤을 파고, 크리스마스에는 남은 밀가루와 물개 기름으로 케이크를 굽고, 찻잔을 와인잔처럼 들어 건배하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스텔러가 캐럴을 부르자 그들이 잠시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듯하다는 문장에서는 그 짧은 평온이 오히려 애틋하게 느껴졌어요.


<숨의 조각>이 다른 소설과 확실히 다르다고 느낀 건 그다음이에요. 무덤과 캐럴 장면이 지나가자마자 "생명은 원세포로부터" 시작된다며 이야기가 아득한 옛날로 훌쩍 건너뛰거든요. 세포가 두 배로, 두 배로 분열하고, 물고기가 웅덩이에서 몸을 일으키고, 포유류가 공룡 발치에서 눈치를 보며 번성합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인간과 바다소가 생명의 나무에서 서로 작별하게 되고요. 소설을 읽다가 자연 다큐멘터리 한 편이 통째로 끼어든 기분인데, 이게 또 술술 읽힙니다. 다큐 채널 즐겨 보시는 분이라면 이 대목에서 무릎을 치실 것 같아요.


진화사 대목에서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문장이 있어요. "인간의 반사 작용인 딸꾹질은 도롱뇽의 유생이 폐에서 아가미로, 아가미에서 폐로 숨을 옮기던 시절의 흔적이다." 바로 앞에는 "생명은 땅 위에 우뚝 서지만, 우리에겐 바다의 기억이 남아 있다"는 문장도 있고요. 제목이 왜 숨의 조각인지 조금은 알 것 같더라고요. 우리 몸 안에도 아주 오래전 숨의 흔적이 조각처럼 박혀 있다는 얘기니까요.


바다소의 조상인 프로라스토무스 소개도 재미있었어요. "크기가 돼지만 하고 겁이 많은, 바다를 향한 느린 그리움에 사로잡힌 생물"이래요. 겁은 많은데 마음은 자꾸 먼 데로 향하는 존재라니, 마흔 넘은 아저씨들 마음이 딱 이렇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고는 "이제 우리의 주인공, 스텔러바다소가 등장하지만, 아직 이 이름은 어색하다"며 능청스럽게 주인공을 불러내요. 추운 바다로 들어가 지방층을 늘리고 몸집이 코끼리만큼 커지면서, 동족 가운데 가장 거대하게 자란 "가문의 별종"이 됐다고 하고요.


가문의 별종이라니.

이 표현이 어쩐지 정겨웠어요. 친척들이 따뜻한 물을 그리워하다 하나둘 사라질 때 혼자 차가운 바람에도 끄떡없던 덩치 큰 녀석. 이 바다소가 배를 하늘로 향한 채 잠드는 모습이 짧게 나오는데, 그 그림이 오래 기억에 남더라고요. 그리고 한참 뒤, 백 년 가까이 아무도 바다소를 보지 못한 대목에서 그 모습이 다시 돌아옵니다. 사람들은 어딘가 춥고 조용한 곳에서 "어린 바다소는 여전히 하늘을 향해 배를 드러내고 두려움 없이 잠들 수 있을 것"이라 믿어요. 앞에서 본 장면이 이렇게 다시 겹쳐지니 마음 한쪽이 서늘해졌습니다.


스텔러라는 인물은 볼수록 정이 갑니다. 섬에서 살아남으려면 난파선을 뜯어 새 배를 지어야 하는데, 이 양반은 새와 풀과 광물을 분류할 일이 산더미라 배 짓는 일을 거절해요. 그래도 업무는 기어이 떨어지죠. 그때 터져 나오는 속마음이 "이 고통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것인가, 왜 그가 일을 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것인가!"입니다. 여기서 웃음이 났어요. 본업은 따로 있는데 회의와 보고에 치이는 직장인의 비명 그대로라서요. 꿈속에서 섬을 장갑처럼 접어 가방에 넣는 장면, 작업이 늦어진다는 욕을 들을 때 섬에 하루 더 있을 수 있어 가슴이 두근거린다는 대목은 귀엽기까지 하더군요.


아내 브리기타가 모스크바에서 더는 함께 가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스텔러는 격분하며 울고 기도하다 결국 혼자 떠나요. 공책에는 "내겐 더 이상 아내가 필요하지 않다, 내겐 큰까마귀들이 있으니까."라고 적고요. 큰소리는 쳤지만 그 문장이 허세처럼 들려서 짠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섬에서는 조수들에게 명령 대신 담배를 건네며 도움을 청하게 돼요. 섬이 그들에게 미친 영향이라는 설명이 짧게 지나가는데, 그 한 줄에 사람이 달라진 게 다 보이더라고요.


솔직히 마음에 계속 걸렸던 건 사냥 장면들이에요. 선원들은 카드 판돈으로 가죽을 걸고, 빚을 갚으려고 더 많이 사냥하다 2주 만에 해달 9백 마리의 가죽을 벗깁니다. 스텔러는 새끼 잃은 어미 해달이 어린아이처럼 울며 여위어 가는 걸 지켜보다가, 동물은 인간에게 쓰이는 게 신의 뜻이라며 그 감상을 마음에서 털어내고요. 바다소를 해부할 때도 해변까지 따라와 어미를 부르는 새끼의 울음을 외면합니다. 쉬운 답을 내놓지는 않는 거 같더라고요. 호기심 많고 다정한 사람이 동시에 칼을 드는 사람이기도 하니까요.


2부로 넘어가면 이야기는 바다소 고기 맛으로 이어져요. "버터이자 천국의 만나"였다는 증언까지 나오는데, 바로 그 맛 때문에 운명을 맞이했다니 입맛이 쓰더군요. 중간에 그래프 하나가 등장해서 사살된 바다소의 쓰임을 네 가지 가능성으로 한 줄씩 늘어놓아요. 금방 먹혔다, 먹힐 뻔했으나 버려졌다, 식량으로 보존되었다, 보존될 뻔했으나 버려졌다. 감정 하나 섞지 않고 건조하게 나열하니 오히려 더 아프게 읽혔습니다. 사냥꾼들에게는 늘 다음 섬이 있었다는 문장도요.


멸종을 뜻하는 단어를 언어마다 풀어 보는 대목도 있어요. 영어와 프랑스어로는 종이 꺼진다는 뜻이고 스웨덴어로는 뿌리째 뽑힌다는 뜻인데, 핀란드어 sukupuutto는 친족이 없다는 뜻이래요. 같은 종의 친구가 하나도 남지 않은 외로움. 원제 Elolliset가 살아 있는 자연 모두를 아우르는 오래된 과학 용어라는 걸 떠올리면, 작가가 붙들고 싶었던 게 결국 함께 살아 있다는 감각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2부에서 가장 정이 간 인물은 총독 함푸스의 여동생 콘스탄스예요. 함푸스는 아내 안나와 공모자처럼 미소를 주고받고는, 정작 콘스탄스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동물 수집품 관리를 맡겨 버립니다. 1부의 일등 항해사 히트로프에게도 "그의 의견도 물어야 했겠지만, 그들은 묻지 않는다"는 문장이 붙었는데, 백 년을 건너 같은 장면이 되풀이되는 게 재미있었어요. 회의실 한구석에 앉아 있어도 아무도 의견을 묻지 않는 자리, 직장 다니다 보면 한 번쯤은 다들 앉아 보잖아요.


그런데 콘스탄스는 그 어두운 방에서 비로소 숨을 쉬기 시작해요. 동물을 무서워하던 사람이 박제된 동물들의 위협은 덫과 총알로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는 걸 깨닫고, 코뿔바다오리를 들어 올려 물갈퀴를 보며 킬킬 웃습니다. "정말 그녀에게 어울리는 벗이다!" 오빠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없어서 이 일을 줬다는 걸 알면서도 기분 나빠하지 않는 대목, 매일 같은 순서로 수집품을 훑다가 회색곰 곁에까지 가면 그날 하루를 잘 보낸 거라며 곰의 앞발과 유리 눈을 닦아 주는 대목이 참 좋았어요.


재능 없는 아이는 가르칠 필요가 없다던 아버지가 틀렸다는 걸, 콘스탄스는 죽은 동물들 사이에서 깨달아요. 이제 그녀에겐 "자기만의 조용한 학교"가 있고, 읽는 속도는 더디지만 "그녀의 동물들은 참을성 있게 기다려 준다"고 하더군요. 괜히 옆에서 응원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굴뚝새 울음소리를 흉내 내 보지만 새소리처럼은 안 들린다는 대목에서는 피식 웃었고요.


새로 고용된 박제사 마틴 볼프도 남 일 같지 않았어요. 논문을 쓰겠다며 떠났다가 모아 둔 돈이 바닥나 비와 녹조가 지긋지긋한 싯카까지 흘러온 사람이거든요.

"볼프는 저녁마다 떠날 결심을 하지만, 아침이면 다시 다음 월급날까지는 남겠다고 결심한다."

19세기 알래스카 사람이 2026년 한국 직장인 속마음을 이렇게 정확히 대변해 줄 줄은 몰랐네요.

3부는 노르드만 교수와 그의 조수 힐다 올손의 이야기로 이어진다고 해요. 출판사 소개에 따르면 힐다 올손은 역사 속에 잊혔던 핀란드 최초의 여성 과학 일러스트레이터래요. 옮긴이의 말을 보니 2025년 헬싱키 자연사 박물관에서 그녀의 거미 그림 33점이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개됐고, 2026년 9월에는 이 소설이 헬싱키 시립 극장 무대에도 올랐다고 하더군요. 핀란드에서는 이 바다소 이야기가 꽤 큰 사랑을 받고 있는 거 같습니다.


옮긴이는 이 책을 "하루하루 지루한 일상의 노력이 모여 어떻게 아름다운 무늬를 이루게 되는가에 대한 이야기"라고도 소개해요. 작가가 7년에 걸쳐 쓰고, 지우고, 고쳐 쓴 작품이라고 하고요. 매일 출근해서 비슷한 일을 되풀이하는 입장에서는 이 말이 꽤 든든하게 들렸습니다.


소장 가치로 보면 일단 만듦새부터 마음에 들어요. 하드커버에 그 하얀 바다소 실루엣까지 더해져서, 책장에 꽂기보다 표지가 보이게 세워 두고 싶은 책이에요. 옮긴이는 번역하면서 책에 나온 박물관과 식물원을 찾아다니며 "엄마 아빠, 이것 좀 보세요!" 하고 외치는 아이처럼 발견의 기쁨에 들떴다고 하는데, 저도 다 읽고 나니 가까운 자연사 박물관이라도 한번 가 보고 싶어지더라고요. <숨의 조각>은 옆에 두고 생각날 때마다 아무 데나 펼쳐 봐도 좋은 책 같아요.


입동이 나흘 앞이라 이제 진짜 겨울 채비를 할 때네요. 저도 스텔러바다소처럼 지방층 두툼하게 쌓으면서 버텨 볼까 했는데, 거울을 보니 그건 이미 넉넉히 준비돼 있는 것 같습니다. <숨의 조각> 덕분에 늦가을 화요일이 한결 든든해졌어요. 좋은 책 만나서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하루입니다.



한순간에 사라진 바다소와 그 흔적을 붙든 사람들을 3세기에 걸쳐 따라가다 보면, 우리 몸속에 남은 숨의 조각까지 들여다보게 되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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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OP - 작지만 위대한 변화를 만드는 네 가지 원리
전대진 지음 / 모티브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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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양재역 화장실에서 시작된 한 방울, 전대진


크림색 바탕에 남색 글자, 그리고 한가운데 물방울 하나. 표지만 보면 참 맑고 단정한 책이에요. 그런데 첫 장을 열면 전혀 다른 풍경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겨울 새벽, 양재역 2번 출구 아래 화장실 변기에 앉아 휴대전화로 글을 쓰는 청년이 나오거든요. 은 그 청년이 11년 뒤에 내놓은 책이더군요.


11월 첫 화요일, 아침저녁 바람이 제법 매워졌어요. 제목은 한 방울인데 책은 보통 자기계발서보다 제법 두툼한 편이에요. 손에 들면 한 방울을 훌쩍 넘어 한 바가지는 되는 느낌이 듭니다. 물론 바가지는 긁지 않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저자는 2015년 11월 27일, 새벽 1시 30분 심야버스를 타고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왔다고 해요. 경기도의 한 연수원에서 열리는 1박 2일 교육과정에 가려고, 숙박비를 아끼느라 일찍 도착한 날이었대요. 그런데 연구소 문은 잠겨 있었고, 몸을 녹이려 들어간 편의점에서는 컵라면을 먹다가 나가 달라는 말을 듣습니다. 문 열린 빌딩을 찾아 경비원에게 부탁했지만 그마저 거절당하고, 한 시간 가까이 헤매다 들어간 곳이 그 화장실이었다고 하더라고요.


거기서 쓴 글 가운데 이런 문장이 있어요.


"냉장고 안에 들어온 것 같은 날씨인데, 비전 찾기 참 좋은 날씨다."


처지를 생각하면 짠한 장면인데, 이 문장에서는 피식 웃음이 나더군요. 손은 시려도 가슴은 뜨거웠다는 청년이 끝에 "P.S. 별을 보려면 어둠이 꼭 필요하다"까지 덧붙여 놓았거든요. 그 추위 속에서 이런 너스레를 떨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 사람 얘기는 좀 들어봐도 되겠다 싶었습니다.


제목 DROP은 네 문장의 첫 글자를 모은 거예요. Do it daily 매일 해낸다, Repeat the right things 옳은 일을 반복한다, Offer value first 먼저 가치를 준다, Prove with your life 삶으로 증명한다. 저자는 이 원리를 삶으로 살아내는 사람을 '드로피언(DROPIAN)'이라고 부릅니다. 특별한 재능이나 큰 성과를 요구하지도 않아요. 오늘 선 자리에서 한 방울 같은 행동을 이어가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하더군요.


이 좀 특이하다 싶었던 건 읽는 방법까지 알려준다는 점이에요. 처음부터 끝까지 다 실천할 필요 없이, 지금 나한테 가장 필요한 장을 펼쳐 질문 하나에 답하고 오늘 할 행동 하나를 정하면 된대요. 실행한 다음엔 결과를 적고, 기대만큼 안 됐으면 무엇을 바꿀지 살펴보고 다시 시작하라고요. 10CORE 체크리스트, ARK NOTE, ASK NOTE, 가치노트 같은 도구도 곳곳에 들어 있어서 펜 하나 옆에 두고 읽기 좋은 책 같습니다.


솔직히 뜨끔했던 대목도 있어요.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책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책을 읽은 뒤 삶이 달라지는 건 전혀 다른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만나고 싶은 독자는 읽다가 무언가를 시작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고요.


서평단 활동을 시작하고 새 책 오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저로서는 좀 찔렸습니다. 예전엔 퇴근하면 유튜브만 보다 잠들던 사람이 책을 먼저 집게 된 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이라고 혼자 뿌듯해하던 참이었거든요. 그런데 2-1장에 가면 더 아픈 데를 건드립니다. 집에는 펼쳐보지도 않은 책이 가득하고, 컴퓨터에는 한 번도 다시 열지 않은 교육 자료와 양식이 쌓여 있다는 대목에서 괜히 제 책장이 떠오르더라고요.


"배운 것은 많다. 그런데 삶은 좀처럼 달라지지 않는다."


2-1장 '최고의 나를 만나라'는 이 나이에 읽으니 더 크게 들리는 장이었어요. 저자가 만난 수강생 중에는 자기계발에 시간과 돈을 상당히 쓴 사람이 많았대요. 무엇을 배웠냐고 물으면 막힘없이 답하던 사람들이 자신이 누구인지 물으면 오래 대답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교육과 컨설팅에 약 3,000만 원을 쓰고 누구보다 성실하게 루틴을 따랐는데 결국 번아웃이 찾아온 고객 이야기도 나오고요.


"번아웃은 일을 많이 해서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자신과 맞지 않는 삶을 너무 성실하게 살아낼 때도 찾아온다."


회사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이 문장이 꽤 아프게 읽힐 수밖에 없는 거 같아요. 남들이 좋다는 목표, 위에서 정해준 목표를 열심히 따라가다 보면 그게 정말 내가 고른 건지 헷갈릴 때가 있잖아요. 저자는 이걸 '목표의 소유권'이라고 부르더군요. 성격검사 이야기도 재미있었어요. MBTI나 강점검사는 자신을 비춰보는 거울일 뿐이라면서 "검사 결과가 나 대신 삶을 살아주지는 않는다"고 딱 잘라 말하는데, 요즘은 회사에서도 MBTI 얘기가 빠지지 않는 터라 웃음이 나더라고요.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한 줄씩 따라가며 읽은 건 1-3장 '중요한 일에 시간을 먼저 주어라'였어요. 중간에 이런 문장들이 짧게 끊겨 나옵니다.


"전화가 울린다. 메시지가 도착한다. 누군가 답을 기다린다."


직장인이라면 이 세 줄에서 자기 하루가 그대로 보일 거 같아요. 급한 메시지에 답하고 자잘한 일을 연달아 해치우고 나면 부지런히 살았다는 만족감이 드는데, 정작 깊이 생각해야 할 일은 계속 뒤로 밀린다는 거죠. 사람들이 중요한 일을 두고도 급해 보이는 일에 먼저 끌리는 현상을 '단순 긴급성 효과'라고 부른다는 것도 이 장에서 처음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 문장이 정곡을 찌르더라고요.


"결국 내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보다 내 시간표가 더 솔직하다."


제 시간표요? 할 말이 없습니다.


인생을 80년으로 잡으면 약 30,000일, 주 단위로는 약 4,000주라는 계산도 나와요. 저자가 읽은 책이 4,000권이 넘는다던데 인생도 4,000주라니, 숫자가 겹치는 게 재미있더라고요. 올리버 버크먼의 <4000주>를 끌어오며 저자가 묻는 건 결국 하나예요. 내게 주어진 시간 가운데 무엇에 먼저 시간을 줄 것인가.


PART 4에서는 여러 사람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집니다. 작곡가 겸 피아노 연주가 하은지 씨는 열일곱 살에 부모님 앞에 A4 용지 열 장을 내놓았대요. 학교를 떠나려는 이유부터 공부와 음악을 이어갈 방법, 필요한 비용 마련 계획까지 적은 문서였다고 해요. 악보 그리는 법을 몰라 음 이름과 느낌을 한글로 적어가며 곡을 썼고, 그렇게 열일곱에 만든 곡이 (황야를 달리다)였다고 하더군요. "먼저 시작했고, 부족함이 드러날 때마다 배웠다"는 문장이 은지 씨를 제일 잘 설명하는 거 같았어요.


5년 몸담았던 소속사의 관련 부서가 사라지고 새로 준비하던 팀마저 해체되는 시기도 있었대요. 다시 혼자가 된 뒤에도 곡을 썼고, 그때 나온 곡이 (요셉의 기도)라고 합니다. 오래 품어온 꿈이 그 뒤로 어떻게 이어지는지는 책에서 직접 만나보시면 좋겠어요.


"끊어진 것은 선로였지 선율이 아니었다."


티앤북클래스 대표 박지연 작가 이야기는 좀 더 생활 가까이에 있는 느낌이었어요. 약 10년 동안 KTX 승무원으로 일하다 두 아들을 스무 달 간격으로 낳으면서 일을 그만뒀고, 생활 반경은 집과 놀이터로 좁아졌대요. 매달 조금씩 모아 방학마다 떠나던 아이들과의 여행마저 코로나로 멈췄다고 하고요. 그러다 독서모임에 들어가 아침 필사부터 시작했고, 하루 20분씩 읽고 쓰는 일을 반복했다고 합니다.


지연 씨 이야기에서 자꾸 떠오르는 건 주방 식탁 장면이에요. 따로 작업실이 없어서 식탁에 앉으면 집안일이 자꾸 눈에 들어오니까, 반대편으로 자리를 옮겨 벽을 보고 앉았대요. 시야를 가로막는 벽 덕분에 오히려 글에 집중할 수 있었다고요. 한 작가가 책으로 써보라고 권했을 때는 "나는 책을 쓸 사람이 아닌데 왜 자꾸 글을 쓰라고 하지?" 했다는데, 그 말이 참 사람 냄새 나서 좋았어요. 그렇게 한 문장씩 쌓인 글이 에세이집 <역마살 엄마의 신호등 육아>가 됐다고 합니다. 승무원 시절 몸에 밴 관찰과 배려가 차와 글을 나누는 수업으로 이어지는 대목에서는, 먼저 가치를 준다는 이 책의 세 번째 원리가 이런 얼굴이구나 싶더군요.


단절(斷絶)과 계절(季節)이 같은 '절'로 끝나지만 한자가 다르다는 얘기도 이 장에 나와요. 끊어질 絶과 마디 節. 저자는 경제적으로 가장 힘들던 시절 목장갑을 끼고 공사 현장에서 일하던 사진을 지금도 강의안에 넣어둔대요. 어떻게 그런 사진을 남길 생각을 했냐고 사업가들이 물으면 이렇게 답한다고 해요.


"이 시간은 결국 지나갈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냥 흘려보내고 싶지는 않았어요."


양재역 화장실에서 휴대전화로 글을 쓰던 청년과 이 사진 속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는 게, 책을 다 읽고 나니 자연스럽게 이어지더라고요. 직장 다니면서 나이를 먹다 보면 누구나 끊어졌다 싶은 시기를 한 번쯤 지나잖아요. 그 시간을 마디로 볼 수 있다면 조금은 덜 억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은 한 번 읽고 꽂아두기엔 좀 아까운 책 같아요. 지금 내 상태에 맞는 장을 골라 펼치는 구조라서, 연말을 앞두고 내년 계획을 세울 때 다시 꺼내 들기 좋겠더라고요. 열심히는 사는데 어딘가 방향이 흐릿하다고 느끼는 직장인이라면 읽는 내내 내 얘기 같아서 재미있을 거예요.


11월이 되니 해가 부쩍 짧아졌어요. 4-2장 첫머리에는 헬 볼랜드의 이런 문장이 실려 있습니다.


"어떤 겨울도 영원하지 않고, 어떤 봄도 제 차례를 건너뛰지 않는다."


의 프롤로그 끝에는 오늘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일은 무엇이냐는 질문이 놓여 있어요. 저는 일단 내일 시간표 맨 앞에 중요한 일 하나부터 적어 넣어 볼 생각입니다. 제목이 DROP이라고 중간에 드롭할 순 없으니까요. 좋은 책이었다는 말로만 끝내면 저자한테 한 소리 들을 것 같지만, 오늘만큼은 이 말을 하고 싶네요. 좋은 책 만나서 쌀쌀한 화요일이 한결 든든합니다.


양재역 화장실에서 떨어뜨린 한 방울로 시작해, 내 시간표와 목표가 정말 내 것인지 다시 들여다보게 만드는 실천형 자기계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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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의 인생 수업 ㅣ 메이트북스 클래식 33
애덤 스미스 지음, 강현규 엮음, 최민철 옮김 / 메이트북스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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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보이지 않는 손 말고, 마음속 관찰자 이야기 <애덤 스미스의 인생 수업> 서평

건강하고 빚이 없고 양심이 편하면 충분하다.

목차를 훑어보다가 이 꼭지 제목에서 피식 웃음이 났어요. 저 세 가지를 다 갖춘 40대 후반 직장인이 주변에 몇이나 될까 싶더라고요. 건강은 검진 결과지가, 빚은 매달 오는 대출 이자 문자가 알아서 챙겨주니, 제가 신경 쓸 건 양심 하나뿐인 거 같습니다.


그런데 이 문장을 남긴 사람이 애덤 스미스예요. 경제 교과서 첫머리에 '보이지 않는 손'이랑 같이 나오던 바로 그 이름이요.


11월 첫 화요일, 아침 공기가 제법 차고 길가 은행잎도 거의 다 떨어졌습니다. 한 해가 두 달 남짓 남은 이맘때면 지나온 길을 자꾸 돌아보게 되는데, <애덤 스미스의 인생 수업>은 그런 계절 기분이랑 꽤 잘 맞는 책 같아요. 메이트북스 클래식 시리즈 33번째 책이고, 강현규 님이 엮고 최민철 님이 옮겼습니다. 10월 초에 나온 신간이라 소식부터 반갑더라고요. 예전 같으면 유튜브 알고리즘한테 저녁을 통째로 맡겼을 아재가 요즘은 서평단 책 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으니, 사람 일 정말 모를 일입니다.


표지는 가발 쓴 스미스 초상 아래로 민트색이 시원하게 깔려 있어요. 겉모습은 점잖은 고전인데, 펼쳐보면 글의 호흡이 의외로 짧습니다. 한 꼭지가 문단 서너 개 남짓이고 제목이 곧 요지라서, 목차만 읽어도 무슨 얘기인지 대충 감이 오더군요. 손에 쥐기에도 부담 없는 두께라 가방에 넣어 다니기 좋은 편이에요.


이 책만의 특이한 점은 엮은이의 말에서 먼저 보였어요. 강현규 님이 이 책을 엮으면서 가장 먼저 다시 읽은 게 <도덕감정론>이었다고 합니다. <국부론>보다 17년 먼저 나온 책이라는데, 저는 순서가 그렇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네요. <애덤 스미스의 인생 수업>도 이 흐름을 따라 앞쪽에 <도덕감정론> 이야기를 많이 담았고, 뒤로 가면 <국부론>은 물론 수사학과 문학 강의, 예술과 음악에 관한 글까지 이어집니다.


더 마음에 든 건 엮은이가 스스로 선을 그은 대목이었어요. 여러 저작을 한 권으로 묶으면서 가장 경계한 게 스미스의 말을 오늘의 자기계발 언어로 지나치게 바꾸는 일이었다고 하더군요. 이 책은 완역본이 아니니 원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싶으면 완역본을 보라는 말도 솔직하게 합니다. 요즘 서점에 '인생 한 줄' 책이 넘쳐나는데, 그 사이에서 이렇게 말해주니 오히려 믿음이 가는 느낌이었어요.

1장 첫 꼭지는 동감(sympathy)에서 출발합니다. 우리는 남의 감정을 직접 느낄 수 없고, 그 사람 자리에 나를 놓아보는 상상으로만 짐작할 수 있다는 거죠. 예로 드는 장면이 재미있어요. 누군가의 팔이나 다리에 타격이 가해지려는 순간 보는 사람이 저도 모르게 자기 팔다리를 움츠린다는 것. 줄 위에서 위태롭게 움직이는 곡예사를 보며 관객이 같이 몸을 이리저리 움직인다는 것.


회의실에서 후배가 크게 깨질 때 괜히 내 어깨가 움츠러드는 거, 직장인이라면 다들 알 거예요.

2장으로 넘어가면 이 책의 중심 개념인 공정한 관찰자가 나와요. 나를 '행동하는 사람'과 '그 행동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사람'으로 나눠 보라는 이야기입니다. 내 이해관계와 감정을 잠시 내려놓고, 아무 관계 없는 사람이 이 상황을 어떻게 볼지 상상해서 내 행동과 견줘보는 거죠. 엮은이 말대로 사람은 남의 잘못에는 쉽게 눈을 뜨면서 자기 잘못에는 놀라울 만큼 너그러워지니까요. 남이 실수하면 "저건 좀 그렇지" 하다가 내가 실수하면 "사정이 있었잖아" 하게 되는 거, 회사 다니는 사람이면 다들 한 번쯤 찔릴 대목 같습니다.


솔직히 마음에 걸렸던 건 바로 다음 꼭지였어요. 사람들은 상황을 잘못 알고 우리를 칭찬하거나 비난할 수 있어서, 세상의 실제 평가와 마음속 관찰자의 판단이 늘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대목입니다. 억울했던 평가들이 떠오르면서 위로가 되다가도, 그중 몇 개는 제 마음속 관찰자가 슬쩍 제 편을 들어준 건 아니었을까 싶어 마음이 좀 불편해지더라고요. 공정한 관찰자를 세우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는 않겠구나 싶기도 하고.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4장 초반이에요.


사람이 부를 원하는 데는 잘 먹고 편하게 살고 싶은 마음 말고도, 남들 관심을 받고 싶은 마음이 함께 들어 있다고 하더군요. 부자가 되면 자기 처지가 주는 기쁨에 다른 사람도 함께해 줄 거라 믿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차 바꿀 때 주차장에서 받을 눈길부터 떠올리는 마음, 이 나이쯤 되면 한 번쯤 품어봤을 거 같습니다.

이어지는 '젊을 때는 부와 지위가 행복처럼 보인다'에는 이런 문장이 나와요.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기 위해 공부하고 일하며,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잘 보이려 하고, 높은 사람의 호의를 얻기 위해 자신을 낮추기도 한다."


18세기 글인데 우리 사무실 풍경이랑 크게 다르지 않아요. 엮은이가 어떤 글은 스미스가 지금 우리 주변 사람들을 관찰하고 쓴 것 같은 느낌을 줄 거라고 했는데, 딱 이 대목에서 그 말이 실감 나더라고요. 바로 다음 꼭지에는 이미 누릴 수 있었던 건강과 마음의 평온을 먼 훗날의 더 편리한 생활과 바꾸기도 한다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20대, 30대를 지나 여기까지 와보니 그 거래가 늘 남는 장사는 아니었다는 걸 몸으로 알게 되는 거 같아요. 그러고 나니 4장 첫 꼭지의 질문이 다르게 들렸습니다. 건강하고 빚에 시달리지 않으며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의 행복에 무엇을 더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스미스가 부를 좇는 마음을 어리석다고 몰아붙이지는 않아요. 이기심과 선의, 허영과 신중함을 단순한 대립으로 보지 않는 게 스미스 글의 매력이라고 엮은이도 말하더군요. "애덤 스미스의 글에는 인간을 이상적인 존재로 만들려는 조급함이 적다"는 문장도 있는데, 읽다 보면 정말 그렇습니다. <애덤 스미스의 인생 수업>에서 만난 스미스는 훈계하는 교장 선생님보다는, 사람 구경을 오래 해온 동네 어르신이 "다들 그렇게 살더라" 하고 툭 던지는 말투에 가까운 느낌이었어요.


7장에는 이게 정말 18세기 사람이 쓴 글인가 싶은 꼭지도 있습니다. 고용주가 과도한 노동을 억제할 필요도 있고, 적당히 꾸준하게 일하는 사람이 건강도 오래 지키고 한 해 전체로 보면 더 많은 일을 해낸다는 이야기예요. 그다음 꼭지에는 이런 문장이 나오고요. "나흘 동안 지나치게 일한 것이 나머지 사흘을 쉬게 만드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휴식 욕구를 계속 무시하면 직업 특유의 질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말에는 웃음기가 싹 가시더군요. 거북목이랑 손목 통증을 달고 사는 사무직한테는 남 얘기 같지가 않습니다.


목차를 보면 6장에 '들을 가치가 있는 수업은 출석을 강요할 필요 없다'는 꼭지가 있어요. <애덤 스미스의 인생 수업>이 딱 그런 수업 같습니다. 아무도 출석을 안 불러도 자꾸 제 발로 찾아 들어가게 되는 수업이요. 꼭지가 짧아서 아무 데나 펼쳐 한 꼭지씩 읽기 좋고, 그날 기분 따라 2장을 폈다가 4장으로 건너뛰어도 흐름이 크게 끊기지 않아요. <도덕감정론> 완역본은 엄두가 안 나지만 경제학자 말고 사람 애덤 스미스가 궁금했던 분께는 첫 책으로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들고요. 책상 한쪽에 꽂아두고, 사람 때문에 속 시끄러운 날 한 꼭지씩 꺼내 읽으면 좋을 책 같습니다.


은행잎 다 떨어진 11월, 한 해를 슬슬 정리할 무렵에 좋은 책을 만나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마음속에 공정한 관찰자 하나 들여놓은 것 같아 든든하네요. 건강, 빚, 양심 셋 중에 돈 안 드는 양심부터 잘 챙겨보려고요. 다들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고, 따뜻한 차 한 잔이랑 같이 넉넉한 늦가을 보내세요.


경제학의 아버지가 아니라 사람 구경을 오래 해온 철학자 애덤 스미스가 남의 시선과 부, 양심과 휴식에 대해 들려주는, 짧게 끊어 읽기 좋은 인생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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