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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한 돈키호테 ㅣ 메이트북스 청소년 4
미겔 데 세르반테스 지음, 강현규 엮음, 김성훈 옮김 / 메이트북스 / 2026년 9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풍차 너머에 산초가 있었다, <청소년을 위한 돈키호테> 서평
쉰 살 가까운 나이에 기사도 책을 사겠다고 밭까지 팔아 버린 남자가 있었답니다. 밤낮없이 읽다 보니 잠도 줄고 다른 일은 전부 뒷전이 됐다고 하더군요. 40대 후반인 저로서는 웃어야 할지 뜨끔해야 할지 애매한 첫인상이었어요. 요즘 서평단 책 오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제 모습이 살짝 겹쳐 보여서 그런 거 같아요.
그 남자의 이름은 다들 아실 겁니다. 돈키호테요.
이번에 만난 책은 메이트북스 청소년 시리즈 네 번째 권인 <청소년을 위한 돈키호테>입니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원작을 강현규 님이 엮고 김성훈 님이 옮겼어요. 주황빛 바탕에 풍차와 말 탄 두 사람의 실루엣이 서 있는 표지는 11월 들어 부쩍 색이 짙어진 늦가을 들판이랑 잘 어울리는 느낌이 듭니다. 두께는 보통 소설책보다 조금 두툼한 편이에요. 원작이 1부 52장, 2부 74장이나 된다는 걸 생각하면 돈키호테가 갑옷 무게를 확 덜어낸 버전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 정도면 로시난테도 덜 헐떡이며 달렸을 거 같습니다.

<청소년을 위한 돈키호테>는 풍차와 싸운 괴짜 기사 정도로만 알려진 이야기를 16장으로 다시 엮었는데, 유명한 장면만 오려 붙인 요약본과는 결이 좀 달라요. 엮은이의 글을 보면 실제로 일어난 일과 돈키호테가 그렇게 믿은 일, 다른 인물들이 일부러 꾸민 일을 분명히 나누어 썼다고 하더군요. 원작에 없는 사건이나 결말은 새로 만들지 않았다는 말도 있고요. 각 장 첫머리에는 그 장에서 벌어질 일을 짧게 알려주는 상자가 붙어 있어서 길 잃을 걱정 없이 따라가게 됩니다.
본문 앞에 붙은 '읽기 전에 알아야 할 것들' 코너도 쏠쏠했어요. 편력 기사가 뭔지, 종자는 어떤 일을 하는지, 스페인 길가 여관 '벤타'가 어떤 곳인지 차근차근 풀어 줍니다. 기사도 책 속 기사들은 돈이나 갈아입을 옷을 챙기는 장면이 없어서 돈키호테도 그걸 몰랐는데, 여관 주인이 실제 여행에는 그런 준비가 필요하다고 알려준다는 대목에서 웃음이 났습니다. 출장 가방 한 번이라도 싸 본 사람이라면 다 아는 진리인데 말이죠. 코너 끝에는 "처음부터 모든 이름과 사건을 외울 필요는 없습니다"라는 문장이 있는데, 고전 앞에서 괜히 주눅 드는 사람한테는 이 말이 꽤 든든하게 들리더라고요.
엮은이도 "고전은 처음부터 어렵게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써 두었더군요.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9장 (둘시네아는 어디에 있을까?)였어요. 돈키호테가 다음 모험에 앞서 둘시네아에게 축복을 받겠다며 토보소로 가자고 하는데, 정작 산초는 둘시네아의 집도 모르고 그녀를 만난 적도 없습니다. 예전에 주인에게 전한 이야기가 전부 꾸며낸 것이었거든요. 한밤중 골목을 이리저리 돌며 시간을 끄는 산초, 큰 문이나 높은 담만 보이면 걸음을 늦추는 돈키호테, 골목마다 번지는 개 짖는 소리와 멀리서 우는 당나귀. 그 사이에 이런 문장이 끼어 있습니다.

"찾는 집이 어디인지 몰랐으니, 틀린 길만큼은 얼마든지 골라 낼 수 있었습니다."
이 문장에서 피식 웃음이 나오더라고요. "여기는 아닙니다"를 몇 번이고 되풀이할 수 있는 비결이 바로 거기 있으니까요. 회사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처음 둘러댄 말 하나 때문에 다음 말을 또 얹어야 하는 순간이 오는데, 날이 밝으면 다 들통날 걸 알면서 길가에 주저앉아 머리를 굴리는 산초가 남 일 같지 않았습니다. 혼자 중얼거리는 속마음은 웃기면서도 좀 짠해요.
'주인 나리는 풍차도 거인으로 보신다. 평범한 여인을 보고도 공주라고 여기실 수 있겠지. 그렇지 않으면 마법에 걸렸다고 하면 돼.'
그렇게 당나귀를 탄 시골 여인 셋이 둘시네아 일행으로 둔갑합니다. 산초는 들일할 때 입는 치마를 비단옷이라 하고 흙먼지를 향기로운 구름이라 우기는데, 돈키호테 눈에는 거칠어진 손과 햇볕에 탄 얼굴, 생마늘 냄새까지 고스란히 들어오고요. 여기서 돈키호테가 고르는 길이 저는 좀 놀라웠어요. 산초가 거짓말을 한다고 몰아세우는 대신 자기 눈이 마법에 속았다고 받아들이거든요. "이 기사의 마음을 헤아려 주시오"라며 무릎 꿇은 이 양반을 보면 엉뚱하다는 말만으로는 다 담기지 않는 사람 같더라고요. 종자의 말을 끝까지 거짓으로 몰지 못하는 그 모습에서 사람 냄새가 났습니다.
산초도 마냥 영리한 조연은 아닌 거 같아요. 섬 하나를 다스리게 해 주겠다는 솔깃한 약속에 가족을 두고 당나귀에 올라탄 사람이니까요. 보상에 귀가 팔랑이는 모습이 저 같은 월급쟁이 눈에는 오히려 정겹습니다. 그러다 주인이 제일 자주 쓰는 '마법' 핑계를 슬쩍 빌려 쓰는 장면에서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물들어 가는 게 보이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 거짓말이 이후 여정에 어떻게 따라붙는지는 직접 확인해 보시는 편이 훨씬 재미있을 거예요.

맛보기로 하나 고르라면 11장 (동굴의 이야기와 부서진 인형들)의 몬테시노스 동굴 대목이에요. 산초는 주인 몸에 묶은 밧줄 매듭을 두 번이나 확인하는데, 정작 돈키호테는 땅속 위험보다 훗날 이 탐험이 어떻게 기록될지를 더 신경 쓰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끌어 올려 보니 잠들어 있었고, 깨우자마자 하는 말이 "왜 나를 데려왔는가? 나는 그토록 즐거운 곳에 있었는데"라니 이 양반 참 한결같구나 싶더라고요. 그러고는 수정으로 지은 듯한 궁전과 흰 수염 노인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이런 대화가 오갑니다.
"거기 얼마나 계셨는데요?" "사흘 밤낮일세." "한 시간 남짓밖에 안 지났습니다."
사흘 대 한 시간.
먹지도 자지도 않았다는 주인 앞에서 산초는 더 따지려다 고개를 젓고 맙니다. 그래도 그런 말은 제발 그만 믿으시라는 산초에게 돈키호테가 돌려주는 말이 꽤 근사했어요.
"나를 아껴서 하는 말인 줄 아네. 하지만 자네가 이해하기 어렵다고 일어나지 않은 일은 아니야."
재밌는 건 이야기를 기록한 시데 아메테마저 망설인다는 점이에요. 사실인지 아닌지 단정하지 않고 판단을 읽는 사람에게 맡겼다니, 400년 전 소설이 독자한테 슬쩍 공을 넘기는 모양새라 은근히 즐거웠습니다.
같은 장 뒷부분의 인형극 장면에서는 웃다가 조금 걸리더라고요. 방금까지 동굴 이야기를 사실이라고 우기던 사람이 인형극 속 교회 종소리가 맞지 않는다며 깐깐하게 따지는 대목까지는 배를 잡게 됩니다. 그러다 쫓기는 두 인물을 구하겠다며 칼을 뽑아 들고, 나무와 천으로 만든 병사들이 우수수 쓰러지죠. "그만두세요! 사람도 아니고 병사도 아닙니다! 그것들은 제 인형입니다!" 하는 인형극 주인의 외침이 나오고 나서는 웃음기가 쑥 빠졌어요. 이야기 속 사람을 구하려던 행동이 눈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생계를 부수고 있었다는 문장이 바로 뒤에 이어지거든요.

좋은 뜻으로 밀어붙인 일이 엉뚱한 사람 일을 늘려 놓는 경우, 직장 다니면서 한두 번쯤은 다들 보셨을 거예요. 그래도 산초가 "우리 주인님은 잘못한 줄 아시면 갚아 주실 분이오"라고 달래고, 돈키호테가 칼을 휘두른 사람이 자기니 값을 물겠다고 나서는 걸 보면 이 양반이 도무지 미워지지가 않습니다.
엉뚱해도 셈은 분명한 사람.
<청소년을 위한 돈키호테>를 그냥 줄거리 책으로 넘기기 아까운 이유는 책 뒤에 붙은 작품해설 (<돈키호테>를 읽는 다섯 가지 프리즘) 덕분인 거 같아요. 패러디, 관점의 차이, 변해 가는 두 인물, 자기 이야기가 실린 책을 알게 되는 주인공, 근대소설과의 관계까지 다섯 갈래로 풀어 주는데, 청소년 눈높이 문장이라 어른이 읽어도 술술 넘어갑니다. 같은 풍차를 두고 서로 다르게 보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사람마다 무엇이든 제멋대로 진실이 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라고 선을 긋는 부분이 특히 좋았어요. 풍차는 실제로 풍차이고, 돈키호테는 그걸 다르게 해석할 뿐이라는 거죠.

이어서 던지는 질문이 "나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지는 않을까?"입니다. 회의실에서 제 판단을 철석같이 확신하던 순간들이 줄줄이 떠오르는 질문이더라고요. 1614년에 실제로 나온 가짜 속편을 세르반테스가 이야기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는 대목도 처음 알게 된 거라 흥미로웠고요.
집에 중고등학생이 있다면 같이 읽고 해설 속 질문을 놓고 이야기 나누기 좋을 거 같아요. 저처럼 풍차 장면 하나로 돈키호테를 다 안다고 생각했던 어른한테도 <청소년을 위한 돈키호테>는 부담 없는 첫 입문서가 되어 줄 느낌이 듭니다. 이런 이야기는 다 읽고 나면 누구한테든 떠들고 싶어지더라고요.
11월 첫 화요일, 출근길 바람이 제법 매워졌네요. 노랗게 깔린 은행잎을 보니 라만차 들판도 이맘때면 이런 색이었을까 싶습니다. <청소년을 위한 돈키호테>를 덮고 나니 풍차 앞의 괴짜 기사 위에 산초랑 티격태격하며 같이 먹고 자고 다치던 길동무 얼굴이 한 겹 더 얹힌 기분이에요. 내일 아침에도 저는 지하철이라는 로시난테에 올라 편력 직장인으로 출정합니다. 회사 앞 환풍기만큼은 거인으로 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요. 좋은 고전 한 권 제대로 만난 거 같아서 기분 좋은 화요일입니다.
풍차만 알던 돈키호테를 산초와 함께 끝까지 따라가게 해 주는, 웃음으로 시작해서 질문을 남기는 고전 입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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