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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의 조각
이다 투르페이넨 지음, 정보람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10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딸꾹질에 남은 바다의 기억, 핀란드 소설 <숨의 조각> 서평
표지 한가운데가 하얗게 비어 있어요. 낡은 지도와 범선, 해초 그림을 찢어 붙인 콜라주 위에서 커다란 동물 모양만 가위로 도려낸 것처럼 보이거든요. 처음엔 물개인가 했는데, 지금은 지구 어디에도 없는 동물의 실루엣이라고 하더라고요. 비어 있는 그 자리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라는 걸 알고 나서 표지를 다시 들여다보게 됩니다.
이다 투르페이넨의 <숨의 조각>은 스텔러바다소 이야기예요. 1741년 베링 탐사대 앞에 나타났다가 27년 만에 자취를 감춘, 역사상 가장 빨리 멸종한 동물이라고 합니다. 핀란드 작가의 첫 장편인데 헬싱긴 사노맛 문학상을 받았고 핀란디아상 최종 후보에도 올랐대요. 29개국에 판권이 팔렸다니 데뷔작치고는 출발이 꽤 화려한 셈이죠.

11월 첫 화요일이에요. 월요일은 어찌어찌 넘겼는데 주말은 아직 멀게만 느껴지는, 딱 그런 요일이죠. 입동을 며칠 앞두고 바람 끝이 제법 차가워졌습니다. 예전 같으면 이런 날엔 유튜브나 틀어 놓고 잠들었을 텐데, 요즘은 새로 받은 책부터 집어 드는 걸 보면 저도 많이 달라진 거 같아요. 이번 책은 하드커버에 보통 소설책보다 제법 두툼한 편이라 손목에 힘이 좀 들어갑니다. 그래도 몸길이 9미터짜리 바다소에 비하면 이 정도 무게는 '소소'한 거겠죠.
1부는 박물학자 스텔러가 끌고 갑니다. 탐사를 떠나기 전 아바차만 원주민들에게 동물 이야기를 해 달라고 진저리가 나도록 조르고, 이야기가 바닥나 그들이 지어내기 시작해도 그마저 괜찮다고 여기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긁어모은 이야기 어디에도 고래만 한 바다소는 없었다고 하더군요.
"어떻게 이런 동물이, 인간에게 알려진 바닷가에, 언급되지 않은 채 남아 있을 수 있을까?"
배는 길을 잃고 선장은 앓아눕는데, 스텔러의 속마음은 이렇게 그려져요. "이제 그는 안다, 그들이 곤경에 처했다는 것을. 그러나 그의 마음속엔 공포와 기이한 희열이 한데 뒤섞인다, 이 발견은 오직 그만의 것이기에." 위기 한복판에서도 신기한 걸 보면 눈이 반짝이는 사람. 회사에도 꼭 한 명씩 있잖아요, 다들 비상인데 혼자 새 아이디어에 들떠 있는 사람.

베링 선장이 숨을 거두는 대목에서는 문장이 툭 끊기고 이름 셋이 한 줄씩 놓여요. 베링섬, 베링 해협, 베링해. 죽어서도 그 끔찍한 장소에서 달아나지 못한다는 문장 뒤에 이름만 덩그러니 남겨 두니, 지도 위 익숙한 지명이 갑자기 다르게 보이더라고요. 선원들이 언 땅에 무덤을 파고, 크리스마스에는 남은 밀가루와 물개 기름으로 케이크를 굽고, 찻잔을 와인잔처럼 들어 건배하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스텔러가 캐럴을 부르자 그들이 잠시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듯하다는 문장에서는 그 짧은 평온이 오히려 애틋하게 느껴졌어요.
<숨의 조각>이 다른 소설과 확실히 다르다고 느낀 건 그다음이에요. 무덤과 캐럴 장면이 지나가자마자 "생명은 원세포로부터" 시작된다며 이야기가 아득한 옛날로 훌쩍 건너뛰거든요. 세포가 두 배로, 두 배로 분열하고, 물고기가 웅덩이에서 몸을 일으키고, 포유류가 공룡 발치에서 눈치를 보며 번성합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인간과 바다소가 생명의 나무에서 서로 작별하게 되고요. 소설을 읽다가 자연 다큐멘터리 한 편이 통째로 끼어든 기분인데, 이게 또 술술 읽힙니다. 다큐 채널 즐겨 보시는 분이라면 이 대목에서 무릎을 치실 것 같아요.

진화사 대목에서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문장이 있어요. "인간의 반사 작용인 딸꾹질은 도롱뇽의 유생이 폐에서 아가미로, 아가미에서 폐로 숨을 옮기던 시절의 흔적이다." 바로 앞에는 "생명은 땅 위에 우뚝 서지만, 우리에겐 바다의 기억이 남아 있다"는 문장도 있고요. 제목이 왜 숨의 조각인지 조금은 알 것 같더라고요. 우리 몸 안에도 아주 오래전 숨의 흔적이 조각처럼 박혀 있다는 얘기니까요.
바다소의 조상인 프로라스토무스 소개도 재미있었어요. "크기가 돼지만 하고 겁이 많은, 바다를 향한 느린 그리움에 사로잡힌 생물"이래요. 겁은 많은데 마음은 자꾸 먼 데로 향하는 존재라니, 마흔 넘은 아저씨들 마음이 딱 이렇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고는 "이제 우리의 주인공, 스텔러바다소가 등장하지만, 아직 이 이름은 어색하다"며 능청스럽게 주인공을 불러내요. 추운 바다로 들어가 지방층을 늘리고 몸집이 코끼리만큼 커지면서, 동족 가운데 가장 거대하게 자란 "가문의 별종"이 됐다고 하고요.
가문의 별종이라니.
이 표현이 어쩐지 정겨웠어요. 친척들이 따뜻한 물을 그리워하다 하나둘 사라질 때 혼자 차가운 바람에도 끄떡없던 덩치 큰 녀석. 이 바다소가 배를 하늘로 향한 채 잠드는 모습이 짧게 나오는데, 그 그림이 오래 기억에 남더라고요. 그리고 한참 뒤, 백 년 가까이 아무도 바다소를 보지 못한 대목에서 그 모습이 다시 돌아옵니다. 사람들은 어딘가 춥고 조용한 곳에서 "어린 바다소는 여전히 하늘을 향해 배를 드러내고 두려움 없이 잠들 수 있을 것"이라 믿어요. 앞에서 본 장면이 이렇게 다시 겹쳐지니 마음 한쪽이 서늘해졌습니다.

스텔러라는 인물은 볼수록 정이 갑니다. 섬에서 살아남으려면 난파선을 뜯어 새 배를 지어야 하는데, 이 양반은 새와 풀과 광물을 분류할 일이 산더미라 배 짓는 일을 거절해요. 그래도 업무는 기어이 떨어지죠. 그때 터져 나오는 속마음이 "이 고통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것인가, 왜 그가 일을 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것인가!"입니다. 여기서 웃음이 났어요. 본업은 따로 있는데 회의와 보고에 치이는 직장인의 비명 그대로라서요. 꿈속에서 섬을 장갑처럼 접어 가방에 넣는 장면, 작업이 늦어진다는 욕을 들을 때 섬에 하루 더 있을 수 있어 가슴이 두근거린다는 대목은 귀엽기까지 하더군요.
아내 브리기타가 모스크바에서 더는 함께 가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스텔러는 격분하며 울고 기도하다 결국 혼자 떠나요. 공책에는 "내겐 더 이상 아내가 필요하지 않다, 내겐 큰까마귀들이 있으니까."라고 적고요. 큰소리는 쳤지만 그 문장이 허세처럼 들려서 짠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섬에서는 조수들에게 명령 대신 담배를 건네며 도움을 청하게 돼요. 섬이 그들에게 미친 영향이라는 설명이 짧게 지나가는데, 그 한 줄에 사람이 달라진 게 다 보이더라고요.
솔직히 마음에 계속 걸렸던 건 사냥 장면들이에요. 선원들은 카드 판돈으로 가죽을 걸고, 빚을 갚으려고 더 많이 사냥하다 2주 만에 해달 9백 마리의 가죽을 벗깁니다. 스텔러는 새끼 잃은 어미 해달이 어린아이처럼 울며 여위어 가는 걸 지켜보다가, 동물은 인간에게 쓰이는 게 신의 뜻이라며 그 감상을 마음에서 털어내고요. 바다소를 해부할 때도 해변까지 따라와 어미를 부르는 새끼의 울음을 외면합니다. 쉬운 답을 내놓지는 않는 거 같더라고요. 호기심 많고 다정한 사람이 동시에 칼을 드는 사람이기도 하니까요.
2부로 넘어가면 이야기는 바다소 고기 맛으로 이어져요. "버터이자 천국의 만나"였다는 증언까지 나오는데, 바로 그 맛 때문에 운명을 맞이했다니 입맛이 쓰더군요. 중간에 그래프 하나가 등장해서 사살된 바다소의 쓰임을 네 가지 가능성으로 한 줄씩 늘어놓아요. 금방 먹혔다, 먹힐 뻔했으나 버려졌다, 식량으로 보존되었다, 보존될 뻔했으나 버려졌다. 감정 하나 섞지 않고 건조하게 나열하니 오히려 더 아프게 읽혔습니다. 사냥꾼들에게는 늘 다음 섬이 있었다는 문장도요.
멸종을 뜻하는 단어를 언어마다 풀어 보는 대목도 있어요. 영어와 프랑스어로는 종이 꺼진다는 뜻이고 스웨덴어로는 뿌리째 뽑힌다는 뜻인데, 핀란드어 sukupuutto는 친족이 없다는 뜻이래요. 같은 종의 친구가 하나도 남지 않은 외로움. 원제 Elolliset가 살아 있는 자연 모두를 아우르는 오래된 과학 용어라는 걸 떠올리면, 작가가 붙들고 싶었던 게 결국 함께 살아 있다는 감각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2부에서 가장 정이 간 인물은 총독 함푸스의 여동생 콘스탄스예요. 함푸스는 아내 안나와 공모자처럼 미소를 주고받고는, 정작 콘스탄스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동물 수집품 관리를 맡겨 버립니다. 1부의 일등 항해사 히트로프에게도 "그의 의견도 물어야 했겠지만, 그들은 묻지 않는다"는 문장이 붙었는데, 백 년을 건너 같은 장면이 되풀이되는 게 재미있었어요. 회의실 한구석에 앉아 있어도 아무도 의견을 묻지 않는 자리, 직장 다니다 보면 한 번쯤은 다들 앉아 보잖아요.
그런데 콘스탄스는 그 어두운 방에서 비로소 숨을 쉬기 시작해요. 동물을 무서워하던 사람이 박제된 동물들의 위협은 덫과 총알로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는 걸 깨닫고, 코뿔바다오리를 들어 올려 물갈퀴를 보며 킬킬 웃습니다. "정말 그녀에게 어울리는 벗이다!" 오빠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없어서 이 일을 줬다는 걸 알면서도 기분 나빠하지 않는 대목, 매일 같은 순서로 수집품을 훑다가 회색곰 곁에까지 가면 그날 하루를 잘 보낸 거라며 곰의 앞발과 유리 눈을 닦아 주는 대목이 참 좋았어요.

재능 없는 아이는 가르칠 필요가 없다던 아버지가 틀렸다는 걸, 콘스탄스는 죽은 동물들 사이에서 깨달아요. 이제 그녀에겐 "자기만의 조용한 학교"가 있고, 읽는 속도는 더디지만 "그녀의 동물들은 참을성 있게 기다려 준다"고 하더군요. 괜히 옆에서 응원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굴뚝새 울음소리를 흉내 내 보지만 새소리처럼은 안 들린다는 대목에서는 피식 웃었고요.
새로 고용된 박제사 마틴 볼프도 남 일 같지 않았어요. 논문을 쓰겠다며 떠났다가 모아 둔 돈이 바닥나 비와 녹조가 지긋지긋한 싯카까지 흘러온 사람이거든요.
"볼프는 저녁마다 떠날 결심을 하지만, 아침이면 다시 다음 월급날까지는 남겠다고 결심한다."
19세기 알래스카 사람이 2026년 한국 직장인 속마음을 이렇게 정확히 대변해 줄 줄은 몰랐네요.
3부는 노르드만 교수와 그의 조수 힐다 올손의 이야기로 이어진다고 해요. 출판사 소개에 따르면 힐다 올손은 역사 속에 잊혔던 핀란드 최초의 여성 과학 일러스트레이터래요. 옮긴이의 말을 보니 2025년 헬싱키 자연사 박물관에서 그녀의 거미 그림 33점이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개됐고, 2026년 9월에는 이 소설이 헬싱키 시립 극장 무대에도 올랐다고 하더군요. 핀란드에서는 이 바다소 이야기가 꽤 큰 사랑을 받고 있는 거 같습니다.
옮긴이는 이 책을 "하루하루 지루한 일상의 노력이 모여 어떻게 아름다운 무늬를 이루게 되는가에 대한 이야기"라고도 소개해요. 작가가 7년에 걸쳐 쓰고, 지우고, 고쳐 쓴 작품이라고 하고요. 매일 출근해서 비슷한 일을 되풀이하는 입장에서는 이 말이 꽤 든든하게 들렸습니다.
소장 가치로 보면 일단 만듦새부터 마음에 들어요. 하드커버에 그 하얀 바다소 실루엣까지 더해져서, 책장에 꽂기보다 표지가 보이게 세워 두고 싶은 책이에요. 옮긴이는 번역하면서 책에 나온 박물관과 식물원을 찾아다니며 "엄마 아빠, 이것 좀 보세요!" 하고 외치는 아이처럼 발견의 기쁨에 들떴다고 하는데, 저도 다 읽고 나니 가까운 자연사 박물관이라도 한번 가 보고 싶어지더라고요. <숨의 조각>은 옆에 두고 생각날 때마다 아무 데나 펼쳐 봐도 좋은 책 같아요.
입동이 나흘 앞이라 이제 진짜 겨울 채비를 할 때네요. 저도 스텔러바다소처럼 지방층 두툼하게 쌓으면서 버텨 볼까 했는데, 거울을 보니 그건 이미 넉넉히 준비돼 있는 것 같습니다. <숨의 조각> 덕분에 늦가을 화요일이 한결 든든해졌어요. 좋은 책 만나서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하루입니다.
한순간에 사라진 바다소와 그 흔적을 붙든 사람들을 3세기에 걸쳐 따라가다 보면, 우리 몸속에 남은 숨의 조각까지 들여다보게 되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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