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정치학 - 예수님파가 걸어가야 할 길
권경희 지음 / 아마존북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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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정치 얘기는 금기라는 교회에 기자가 던진 질문, <하나님의 정치학> 서평


회사에서 정치 얘기 꺼내면 공기가 순식간에 싸해지는 거, 직장 생활 좀 해보신 분들은 다 아실 거예요. 교회 안도 사정이 비슷한가 봅니다. 예배가 끝나고 세금이나 선거 이야기가 나오면 "정치는 위험해요", "복음만 이야기합시다" 하면서 말문이 닫힌다는데, <하나님의 정치학>은 그 닫힌 말문을 정면으로 두드리는 책 같아요.


그것도 아주 대놓고요.

남색 바탕에 하얀 영문 제목이 큼직하게 박혀 있고 아래쪽엔 금색 띠가 둘러져 있어서, 첫인상부터 단단한 느낌이 들어요. 보통 교양서보다 제법 두툼한 편이라 손에 들면 무게부터 존재감이 있습니다. 한 표의 무게를 손목으로 먼저 실감하게 해주는 책이랄까요.

저자 권경희 님은 28년 차 기자라고 해요. 그래서인지 프롤로그부터 기자의 취재 수첩을 펼쳐 보는 기분이 들더군요. 2021년에 세상을 떠난 한 대학생의 억울한 죽음을 취재하다가, 기도 가운데 뜻밖의 인도를 받았다는 고백이 나옵니다. 부정선거를 살펴보라는 것이었는데, 정작 본인은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대요. "보수 언론조차 다루지 않는데, 부정선거가 정말 있기나 한가?" 하고 되물었다는 대목이 저는 좋았어요.


처음부터 확신에 찬 사람 이야기는 왠지 한 발 물러서서 듣게 되는데, 스스로 한 번 되물어 본 사람의 이야기에는 귀가 좀 더 열리는 것 같거든요. 저자는 취재 방향을 '음모가 아니라 공의'로 정했다고 합니다. 소문은 빼고, 공개된 자료로 설명되지 않으면 판단을 미루고, 반대편이 내세우는 근거부터 먼저 읽었다고요. 결론이 늦어져도 상관없었다는 말에서는 오래 현장을 다닌 사람 특유의 고집 같은 게 느껴졌어요.


<하나님의 정치학>만의 특이한 점을 하나 꼽으라면 프롤로그 뒤에 붙은 '이 책의 열 가지 약속'이에요. 하나님 나라와 대한민국은 같지 않다, 국가는 제한된 청지기다, 정치적 승리는 복음의 승리가 아니다. 이런 문장들을 먼저 깔아 두고 본론으로 들어가더라고요. 어느 진영이든 기준을 어기면 같은 잣대로 비판받는다는 약속도 있고요.

마지막 약속 끝에는 "이 책도 이 약속 아래 검증받는다. 어긋나는 대목이 있다면 누구든 수정을 요청해 주기 바란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회사로 치면 보고서 맨 끝에 '틀린 데 있으면 언제든 지적해 주세요'라고 써 둔 담당자 같아서 믿음이 갔어요.


이런 서문은 솔직히 처음 봤습니다.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Chapter 3의 신사참배 대목이에요. 1938년 9월 10일 오후 2시 30분,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 장면인데요. 시각까지 분 단위로 적혀 있어서 그런지 현장 기록을 읽는 느낌이 강했어요. 일본 경찰이 회의장을 둘러싼 가운데 표결이 시작됐고, 책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단 3분 만에 가결되었다." 그리고 "표결은 '가(可)'만 묻고 '부(否)'는 묻지 않았다. 항의하려던 선교사 총대들은 일본 경찰에 제지당했다." 결의문이 통과되자 일부 총대들은 울었지만 결의를 번복하지는 않았다고 해요.


단 3분.

규모도 무게도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일이지만, '부'를 묻지 않는 표결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어요. 반대 의견을 물을 틈도 없이 "이견 없으시죠?" 한마디로 넘어가는 회의를 오래 직장 생활 하면서 몇 번은 봤으니까요.

그날 총대들이 붙든 논리를 정리한 대목도 오래 눈에 들어왔습니다. 신사참배는 국가 의례일 뿐이라는 논리, 지금은 참고 교회를 지켜야 한다는 생존 논리, 정치와 신앙은 별개라는 논리, 조금씩 양보하며 시간을 벌자는 점진적 타협까지 네 가지예요. 저자는 그 핵심을 "진리보다 현실, 양심보다 안전, 하나님보다 생존"이라는 말로 묶더군요.

그중에서도 마음에 남은 건 합리화가 습관이 되어 가는 과정이었어요. 처음엔 죄책감이 있었는데 매주 반복하다 보니 무뎌졌고,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다들 하는데 우리만 안 할 수 없지 않은가"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대요. 나중엔 거부하는 사람들을 극단주의자라고 비난하게 됐다고요. 저자는 이 대목을 "희생자가 가해자가 되고, 순교자가 문제아가 되었다"는 문장으로 맺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다들 하는데'라는 말이 얼마나 편리한지 알게 되는 터라, 남의 이야기로만 읽히지는 않더라고요.


해방 이후 이야기도 이어집니다. 1946년 총회가 신사참배 결의 무효를 선언했지만, 가담한 목회자들에게는 아무 조치도 하지 않았대요. 1954년에 내린 2년 목회 정지 결의도 실제로는 시행되지 않았고, 공식 기록상 치리받은 사람은 5명뿐이었다고 하고요. 저자는 이걸 "결의는 무효지만 사람은 책임지지 않는다"는 모순이라고 부르더군요.


사과문은 나오는데 책임지는 사람은 없는 장면. 중년이 되고 보니 그런 장면을 뉴스에서도 회사에서도 꽤 자주 마주치게 되는데, 그 뿌리를 이렇게 오래된 기록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어요.

인물 이야기로 넘어가면 주기철 목사가 먼저 떠오릅니다. "내 몸이 가루가 되어도 우상에게 무릎 꿇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1944년 4월 21일 평양형무소에서 47세의 나이로 순교했다고 해요. 6년간 옥고를 치른 한상동 목사, 일제에 투옥되었다가 6.25 때 북한군에게 총살당한 이기선 목사 이야기도 함께 실려 있습니다. 공식 기록으로만 약 2,000명이 투옥되었다는 숫자 앞에서는 저절로 말을 아끼게 되더군요.


의외였던 건 박형규 목사와 문익환 목사가 등장한다는 점이었어요. 1970년대에 유신 비판 설교로 투옥되었던 박형규 목사는, 정교분리를 지키라는 충고에 "나는 정치를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를 말한 것입니다. 독재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라고 답했대요. 광주를 방문해 증언했던 문익환 목사가 '정교분리를 어긴 정치 목사'라는 비난을 받았던 일도 나오고요. 우파를 논증하겠다는 책에서 이 두 분 이야기를 읽으니, 열 가지 약속에서 말한 '같은 잣대'가 빈말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정교분리라는 말도 <하나님의 정치학> 덕분에 새로 알게 된 게 많아요. 저도 막연히 '교회는 정치에 끼지 말라'는 뜻 정도로 알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뿌리를 따라가 보면 1791년 미국 수정헌법 제1조와, 1636년 로드아일랜드에 정착지를 세운 청교도 목사 로저 윌리엄스가 나옵니다. "국가가 교회를 통제하면 신앙의 자유가 없다"는 그의 말처럼, 원래는 국가 권력이 종교에 간섭하지 못하게 막는 원리였다는 설명이에요. 1948년 제헌헌법 제12조의 "종교는 정치로부터 분리된다"는 문장도 처음엔 같은 뜻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종교인은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는 뜻으로 비틀어졌다고 저자는 보더라고요.


"교회는 영적 일만 하십시오. 정치는 우리가 알아서 합니다." 1960년대부터 교회 안에 스며들었다는 이 메시지가 생각보다 오래 귓가에 맴돌았어요.

솔직히 조심스러웠던 대목도 있습니다. 선거 의혹을 다루는 부분인데, 사람마다 생각이 크게 갈리는 주제다 보니 한 문장 한 문장 따져 가며 천천히 읽었어요. 광화문에는 110만 명이 모이는데 선거 의혹에는 왜 교회가 침묵하느냐는 저자의 질문도, 읽는 사람에 따라 받아들이는 온도가 꽤 다를 것 같고요. 그래도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먼저 딱지를 붙이지 말고, 사실부터 봐 달라"고 부탁해 두었으니, 그 부탁만큼은 들어주는 마음으로 따라갔습니다.

<하나님의 정치학>은 곁에 두고 꺼내 보기 좋은 책 같아요. 신사참배부터 해방, 군사정권 시절까지 한국 교회의 굵직한 장면이 연도와 날짜까지 꼼꼼하게 정리되어 있고, 뒤쪽에는 참고문헌과 출처도 따로 모아 두었거든요. 신앙이 있든 없든 한국 현대사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들여다보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학교에서 배운 기억이 별로 없는 이야기가 많아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10월도 어느새 중순, 한 주의 한가운데 수요일이에요. 아침저녁 바람이 제법 차가워져서 따뜻한 커피가 자꾸 당기는 계절인데, <하나님의 정치학>은 이런 가을에 어울리게 생각할 거리를 한 아름 안겨 준 책이었습니다. 가을 타는 줄 알았더니 요즘 저는 책을 타고 있나 봐요. 좋은 질문 하나 품고 남은 한 주도 힘내 보겠습니다.


교회가 정치 앞에서 왜 말을 잃었는지, 28년 차 기자가 1938년의 3분부터 거슬러 올라가며 묻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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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애니에서 과학이 보인다
류상진 지음 / 도도서가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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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강백호 자유투부터 빗방울 모양까지, 괄호 속 농담이 더 재밌는 과학책 <어쩐지 애니에서 과학이 보인다>


장풍으로 모기를 잡을 수 있을까?

표지 아래쪽에 적힌 이 질문을 보자마자 웃음부터 나왔어요. 저는 두 손바닥을 맞부딪쳐도 모기를 번번이 놓치는 사람이라 장풍까진 꿈도 못 꾸거든요. 그런데 그 밑에 한 줄이 더 있습니다. 기계공학은 강백호를 도울 수 있을까? 이쯤 되면 안 펼쳐 보고는 못 배기는 거 같아요.

<어쩐지 애니에서 과학이 보인다>는 미국 브래들리대학교 기계공학과 류상진 교수가 쓴 과학 교양서예요. 스스로를 '프로페서 오타쿠'라고 부르는 분인데, 책 첫머리부터 이런 식입니다. 로봇 애니에는 꼭 박사가 나와야 사람들이 안심한다고 하더니 "이 책을 읽는 독자들께서도 안심하시라. 나도 공학박사에 교수이니 말이다." 시작부터 이렇게 능청을 떠니 과학책 앞에서 굳어 있던 어깨가 스르르 풀리더라고요.


(슬램덩크)로 시작해서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 (원피스), (원펀맨), (암살교실), (날씨의 아이)를 지나 (천공의 성 라퓨타)까지 이어지는 구성이에요. 장이 바뀔 때마다 새빨간 바탕에 톱니바퀴 일러스트를 얹은 장 표지가 한 장씩 끼어 있어서, 옛날 만화 잡지 넘기던 기분도 살짝 납니다. 보통 교양서보다 제법 두툼한 편인데 생각보다 술술 넘어가는 쪽이었어요.

첫 장은 저자의 인생 만화 (슬램덩크) 이야기로 문을 엽니다. 박사과정과 박사후 연구원 시절 노력한 만큼 커리어가 풀리지 않아 낙담할 때마다 이 만화를 펼쳤고, 채치수가 "난 잘못되지 않았다"고 혼잣말하는 장면에서 울컥했다고 해요. 스스로를 '극T'라 부르는 공학자가 이런 고백을 하니 괜히 마음이 가더군요. 직장 생활 20년 넘게 하다 보면 내 노력과 결과가 따로 노는 시기가 꼭 한 번씩 찾아오는데, 그럴 때 붙잡을 만화 한 권쯤 있는 사람이라면 이 대목에서 고개를 끄덕일 거 같아요.


바로 옆에는 채치수에게 감정이입한 이유가 "그저 '고릴라'여서일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붙어 있고, 하숙집 어머니가 TV 농구 중계에서 서장훈 선수를 보고 저자인 줄 알았다는 일화도 이어집니다. 그 덕에 한동안 '장훈'으로 불렸다나요. 진지한 고백 옆에 이런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놓아두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에요.

본론으로 들어가면 강백호의 첫 자유투가 나와요. 송태섭과 정대만이 림 앞쪽을 노리느냐 뒤쪽을 노리느냐로 티격태격하는 사이 5초가 지나 기회를 날려 버린 그 장면이요. 저자는 강백호의 엉거주춤한 언더핸드 폼이 실제로 쓰이는 방식이라며, NBA에서 이 폼으로 89.3%의 자유투 성공률을 기록한 릭 배리까지 데려옵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여요.


"기계공학은 참으로 쓸모가 많구나. 적어도 림의 어느 부분을 노려야 하는지로 설전을 벌이는 송태섭과 정대만보다는 말이다."

<어쩐지 애니에서 과학이 보인다>를 읽는 재미의 절반은 괄호 안에 숨어 있는 거 같아요. 진공 상태에서 농구공을 굴려 보자면서 "물론 우리는 숨을 쉬어야 하니 산소통을 등에 매고 있어야 한다"고 하더니, 그림 속 실험자가 정말로 산소통을 메고 있습니다. 갈릴레오의 낙하 실험을 따라 해 보자며 일리노이 나일즈에 있는 사탑을 고르고는 "(어차피 사고실험이면 피사의 사탑을 택해도 되잖아!)" 하고 혼자 받아치고요. 살생님 머리가 33% 커졌다는 대목에는 "(쓸데없이 정량적인 정보이다)"가, 구의 표면적이 가장 작다는 걸 수학적으로 증명할 깜냥은 없다는 대목에는 "(겸손이 아니다. 진짜 모른다)"가 붙어 있어요.


이런 교수님 수업이면 졸 틈이 없겠다 싶었습니다.

장끼리 서로 엮여 있다는 점도 재미있어요. 6장에서 빗방울의 종단속도를 구할 때 1장의 농구공 얘기가 다시 나오고, 2장의 항력계수와 3장 (원피스)의 고무밴드 실험도 슬쩍 끼어듭니다. 따로 노는 에피소드 모음이라기보다는 한 학기짜리 수업을 차례로 듣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기차 위에 꼿꼿이 서서 양팔까지 벌린 엔무를 두고 "역시 도깨비는 사람과는 다르다"고 한 줄 보태는 대목도 그렇고, 파리채 구멍이 크면 모기가 빠져나가고 작으면 바람이 일어 모기가 도망간다는 설명도 그렇고, 늘 보던 것들이 조금씩 다르게 보이게 만드는 책이에요.


<어쩐지 애니에서 과학이 보인다>에서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5장 (암살교실)이었어요. 지구를 파괴하겠다는 초생물 살생님이 열등생 반의 담임을 맡고, 학생들이 그 선생님을 암살하려고 애쓰는 설정이에요. 저자는 학생들이 살생님의 약점을 관찰하고, 가설을 세우고, 거대한 푸딩 속에 폭탄을 숨기는 작전을 짰다가 실패하면 다시 가설을 고치는 과정이 과학 연구의 절차와 다르지 않다고 말합니다. 리처드 파인만이 과학을 두고 "신들이 두는 체스게임을 보면서 그 게임의 규칙을 알아내는 것"이라고 했다는 말도 빌려 오고요. 처음 보는 보드게임을 친구들 옆에서 구경하며 규칙을 알아내는 과정에 빗대는데, 친구가 "아… 반은 맞고 반은 틀려"라고 하면 가설을 고쳐서 다시 물어보는 식이라 정말 쉽게 들어와요.


회사 다니다 보면 문제가 터졌을 때 원인부터 넘겨짚고 뛰어다니는 일이 참 많잖아요. 저자는 연구실 장비가 고장 났다고 보고하는 학생에게 먼저 무엇을 관찰했는지 묻고, 경험에서 나온 추측을 가설로 다듬게 한 다음 간단한 실험으로 확인하게 한다고 해요. 그 대목에서 회의실 풍경이 자꾸 겹쳐 보였습니다. 이 순서도 하나쯤 모니터 옆에 붙여 두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장을 여는 저자 자신의 이야기도 좋았어요. 연구에 집중해야 할 때도 학생들 일에 더 열을 올리게 되는데 "그냥 그게 더 재미있었다"고 해요. 학생 하나하나를 파악해서 칭찬하고 격려해 주는 살생님을 이상적인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는 "(이게 말이 쉽지 정말 하기 힘들다)"라는 괄호를 달아 둡니다. 후배 몇 명 챙겨 본 사람이면 저 괄호가 얼마나 진심인지 알 거 같아요. 살생님을 "살신성인을 마다하지 않는 위대한 연구 지도자"라고 추켜세우고는 "역시, 살생님!"으로 맺는 대목에는 존경과 장난이 반반쯤 섞여 있고요. 군사부일체를 꺼냈다가 "(아… 너무 옛날이야기인가?)" 하는 부분에서는, 저희 또래한테는 전혀 옛날이야기가 아니라서 혼자 웃었습니다.


6장 (날씨의 아이)는 비가 오는 날이면 학생들에게 "오늘은 비가 오니까 유체역학에 대해 생각해보기 좋다"고 말한다는 저자의 습관으로 시작해요. 학생들이 갸우뚱한다는데 그 표정이 눈에 선합니다. 물방울은 왜 동그랄까, 이 질문 하나로 부피가 같은 정육면체와 원기둥과 구의 표면적을 차례로 비교해 가요. 6mm²에서 5.54mm²로, 다시 4.84mm²로 줄어드는 숫자를 따라가다 보면, 정답이 동그라미라는 말장난까지 꽤 그럴듯하게 들리더군요. 표면장력을 설명할 때마다 도전의식을 느낀다면서 "(그냥 힘들다는 뜻이다)"라고 털어놓는 교수님이라니, 이런 솔직함이 오히려 믿음직스러웠어요.


솔직히 빗방울의 종단속도를 구하는 구간은 방정식이 꽤 이어져서 천천히 따라가야 했어요. 그래도 저자는 숫자부터 넣지 말고 변수로 끝까지 풀어 두라고 권합니다. 그래야 변수를 바꿔 가며 생각하는 재미가 생긴다고요. 빗방울이 크면 더 빨리 떨어지고, 수은 비가 내리면 재앙일 테고, 달에서 비가 온다면 종단속도는 41%로 줄어든다는 식이에요. 식을 다 따라가지 못해도 이 사고실험들만큼은 머리에 쏙쏙 들어왔습니다. 큰 틀부터 잡고 숫자는 맨 나중에 맞추라는 말은 보고서 쓰는 직장인한테도 그대로 통하는 얘기 같고요.


장풍과 모기 이야기의 답은 직접 확인하시는 걸로.

<어쩐지 애니에서 과학이 보인다>는 한 번 읽고 꽂아 두기보다는, 집에서 애니를 같이 보다가 "저거 진짜 가능해?" 소리가 나올 때마다 다시 꺼내 들기 좋은 책 같아요. 저자가 직접 그린 일러스트와 그림이 곳곳에 들어 있어서 수식이 부담스러우면 그림만 따라가도 감이 잡히게 되어 있고요. 과학이라면 손사래부터 치던 사람도 읽는 내내 재미있었다는 말이 절로 나올 책입니다.


10월 한가운데 수요일, 한 주의 허리쯤이에요. 이맘때 떨어지는 은행잎에도 종단속도가 있겠구나 싶어지는 걸 보면, 이 책 덕분에 머릿속에 공학 회로가 하나 새로 깔린 모양입니다. 은행잎이 저보다 가볍게 떨어진다는 건 계산 안 해 봐도 알겠고요. 덕업일치 교수님 수업을 한 학기 잘 듣고 나온 기분이라 뿌듯합니다. 깊어 가는 가을, 다들 감기 조심하세요.


덕후 공학교수가 애니 속 장면 위에 괄호 섞인 농담과 물리 법칙을 얹어 주는, 한 학기 교양수업 같은 과학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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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in! 뒤집어본 영문법 - 전면 개정판
오성호 지음 / 김영사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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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극I 영문법과 다시 친해지는 법, 오성호 <Again! 뒤집어본 영문법> 서평


go off와 explode, 둘 중 어느 쪽이 더 친숙하세요?

저는 고민할 것도 없이 explode였어요. '폭발하다' 하면 단어장에서 바로 튀어나오던 단어요. 그런데 <Again! 뒤집어본 영문법>은 첫 장부터 실제로 더 보편적이고 자연스럽게 쓰이는 표현은 go off라고 하더군요. 펼치자마자 알던 영어가 한 번 뒤집히니까 제목 참 정직하게 지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10월 중순의 수요일입니다. 한 주의 허리쯤이라 몸은 슬슬 무거워지는데, 이 책 얘기는 누구라도 붙잡고 하고 싶어지네요. 예전엔 퇴근하면 유튜브 보다 잠드는 게 일이었어요. 서평단 활동을 하면서부터 책을 먼저 집는 사람이 됐는데, 그 책이 영문법 책이 될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Again! 뒤집어본 영문법>은 1998년에 처음 나왔고 2006년에 한 번 다듬어졌다가 2026년 9월에 전면 개정판으로 돌아왔어요. 30만 부를 넘긴 책인데, 오성호 선생님은 '들어가며'에서 "이 책과 함께한 지난 30년은 곧 저의 삶 그 자체였습니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이미 한 번 개정했다는 사실 때문에 다시 쓰고 싶은 마음을 오래 눌러두었다고 해요. 그러다 출판사에서 개정판 의사를 묻는 메일이 오자 "망설임 없이 아내에게 달려가 소식을 전했습니다"라고 하더군요.


이 대목이 참 좋았어요. 30년을 붙들고 있던 일인데 메일 한 통에 아내부터 찾는 모습이라니요. 직장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묵혀둔 기획 하나에 드디어 불이 들어오는 날이 있잖아요. 그럴 때 제일 먼저 누구한테 말하고 싶어지는지 그런 게 떠오르더라고요.

이번 판에서 제일 눈에 띄는 건 전치사가 맨 앞에 나온다는 점이에요. 저자 말로는 전치사가 문법책에서 늘 '깍두기' 신세였다고 합니다. 넣기도 하고 빼기도 하고, 넣더라도 한 챕터 슬쩍 끼워주는 정도였대요. 이전 책에서 전치사를 아예 다루지 않은 게 늘 마음에 걸렸다면서 "전치사도 섭섭했을 거예요"라고 덧붙이는데, 단어 하나한테도 미안해하는 선생님이라니 좀 귀엽다는 느낌이 듭니다.


영어를 몸에 빗댄 설명도 재밌어요. 동사는 뼈와 근육, 명사는 살, 전치사는 관절이래요. book table room처럼 명사만 늘어놓으면 아무 느낌이 없는데, put이 들어오면 '뭔가 할 것 같은데' 싶어지고 on과 in이 붙으면서 비로소 문장이 완성됩니다. 전치사가 어색한 문장은 관절염에 걸린 몸 같다는데, 계단 내려갈 때마다 무릎이 먼저 인사하는 나이가 되고 보니 이 비유만큼은 남 얘기 같지가 않더군요.

영문법을 '극I'에 빗댄 대목도 기억에 남아요.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가되 너무 급하게 말고 천천히 다가가라고 해요. 그러면 책을 다 읽을 즈음엔 '극E'로 바뀐 친구가 두 팔 벌리고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요. 시험 때만 친한 척하거나 단번에 '정복'하겠다고 달려드는 사람에게는 영어도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는 말이 함께 나오는데, 사람 사이도 크게 다르지 않은 거 같아요.


<Again! 뒤집어본 영문법>의 1장 전치사 사전 가운데 off 편은 읽는 내내 재미있었습니다. off의 기본 그림은 '분리'예요. 의자에서 떨어질 뻔하고, 젖은 옷을 벗고, 엔진을 끄는 게 물리적인 분리예요. 다이어트를 그만둔 He is off his diet나 컨디션이 별로인 I'm off my game은 추상적인 분리고요. I'm off my game은 우리가 게임하면서 "오늘 게임 안 되네" 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하더군요. 상한 우유를 두고 This milk is slightly off라고 하는 것도 정상적인 상태에서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라고 해요.

직장인 눈에 쏙 들어오는 예문도 많아요. 회의가 취소됐다는 Sorry, but the meeting's off, 8월에 2주 휴가를 냈다는 He took two weeks off in August, 그리고 I'm off today. 근무 중은 on duty, 비번이면 off duty라는 설명까지 이어지니 off라는 단어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더라고요.


어느 분야든 실력자는 쉬워 보이는 것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라는 문장도 이 근처에 나와요. 폭발하다, 연기하다, 포기하다 같은 말을 구동사로 자연스럽게 쓸 수 있으면 진정한 실력자라는 얘기인데, 회사에서 일 잘한다는 소리 듣는 사람들을 떠올려보면 영어 얘기만은 아닌 거 같기도 하고요.

동사는 바뀌지만 off는 자기 자리를 꿋꿋이 지킨다는 문장에는 괜히 밑줄을 긋고 싶어지더라고요.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5장 가정법이 시작되는 대목이에요. 문법책인데 첫머리가 기계와 나누는 대화로 열립니다. 인간 언어에서 가장 배우기 힘든 게 뭐냐고 묻자 기계가 이렇게 답해요.


"인간은 불가능한 것도 말로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어.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다시 볼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겠네' 이러잖아."

문법책에서 이런 문장을 만날 줄은 몰랐어요. 나이가 들수록 '그때 그랬더라면' 하는 말이 조금씩 늘어나는데, 그게 다 가정법이었구나 싶더군요. 이어서 저자는 "앞으로 그러지 마!"와 "난 네가 앞으로 안 그랬으면 좋겠어"를 나란히 놓습니다. 앞의 말은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고 결론이 뚜렷한데, 뒤의 말은 감정을 포장해서 여운을 남기고 상대를 머뭇거리게 만든다고요.


회사에서 후배한테 한마디 할 일이 생길 때 저는 주로 어느 쪽이었는지.

"고작 알파벳 두 개로 이루어진 if. 그 안에서는 엄청난 세상이 펼쳐집니다." 그리고 "가정법에서 '여운'을 느껴보세요"로 끝나는 도입부는 문법책이라기보다 짧은 산문 같았어요.

본문으로 들어가면 if가 들어간 문장 네 개가 나란히 나와요. 물을 끓이면 기체가 된다는 보편적 사실, 내일 비 오면 집에 있겠다는 단순 추측, 더 가까이 살면 매일 보러 갈 텐데 하는 현재 사실의 반대, 더 열심히 공부했더라면 합격했을 텐데 하는 과거 사실의 반대예요. 이 중 사실을 반대로 정해놓고 말하는 뒤의 두 개만 가정법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가정법 공식이 기억 안 난다면 오히려 잘됐습니다. 필요 없으니까요"라고 하는데, 이 문장에서는 좀 억울했어요. 그 공식, 저는 아직 기억하거든요. 아직 기억하는 분이라면 애써 기억하려 들지 말라고, 책 읽는 데 방해만 될 뿐이라고 하는데, 머리를 비우는 게 생각보다 쉽지는 않겠더라고요.


제일 많이 웃은 건 if와 when을 비교하는 대목이에요. if의 기본 속성은 '불확실', when은 '확실'이래요. 그래서 학교 가는 아이에게 엄마가 If you come back from school, call me라고 하면, 이 아이는 집에 올지 안 올지 모르는, 가출을 밥 먹듯 하는 아이처럼 보일 수 있다고 하더군요.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뭘 하냐고 물을 때 when 대신 if를 쓰면, 듣는 사람은 졸지에 죽지 않고 깨어나면 다행인 사람이 되고요. '~라면', '~할 때'라는 번역에만 기대면 왜 곤란한지 이렇게 보여주니 한 번에 들어옵니다.


유학을 떠난 여자 친구 이야기도 있어요. 남자는 반지까지 사놓고 돌아오면 청혼하겠다며 when she returns라고 하는데, 친구들은 You mean if she returns라고 받아칩니다. 뉴욕 같은 대도시엔 ifs가 많다면서요. 여기서 if가 명사로 나와 '변수'라는 뜻이 된다는데, 짧은 대화 하나에 when과 if 사이의 거리가 다 담겨 있는 거 같았어요.

그 뒤에 나오는 문장이 I don't need your ifs and buts. I need a clear answer. 만약이나 하지만 같은 소리는 그만하고 분명하게 대답하라는 뜻이래요. 부장님들이 회의실에서 제일 하고 싶은 말을 영어로 옮기면 딱 이 문장이 아닐까 싶더라고요.


if 하나에 이렇게 할 말이 많았다니요.

'책을 끝내며'에서는 저자가 오랫동안 들어왔다는 말 한마디를 붙잡고 이야기를 풀어가요. "독해는 어느 정도 하는데 문법이 약해요. 문법책 추천해주세요." 저자는 이 말이 문법을 배우는 목적을 착각한 데서 나온다고 봅니다. 해외여행 가서 쇼핑하는 데는 손짓 발짓으로도 충분하대요. 하지만 말 한마디가 협상의 성패를 좌우하고 글 한 줄이 나를 돋보이게 해야 하는 자리라면 영어를 '제대로' 하는 능력이 절대적이라고 하죠. 바로 뒤에 "('제대로'가 도대체 몇 번 나오는지 모르겠네요)"라는 괄호가 붙어 있는데, 이런 데서 저자 특유의 말투가 살아 있어서 좋았어요.


커피가 너무 써서 소금을 조금 넣었더니 놀랍게도 효과가 있었다는 문장도 나옵니다. He tried to add a pinch of salt, and surprisingly, it worked. 저도 아무렇지 않게 읽고 넘어갔는데, 맥락상 tried adding이어야 말이 된다는 설명을 보고서야 고개를 끄덕였어요. 단어 뜻만 이어 붙여 짐작으로 읽는 버릇이 딱 제 얘기였던 거죠.

반가운 얼굴도 하나 나와요. The news made her cry, She found the movie boring 같은 문장을 늘어놓고 형식이 다른 하나를 고르라는 문장 5형식 문제예요. 저자는 자기가 학교 다니던 시절에도 나왔던 문제라고 하면서, 그때는 '문법 지식 = 영어 실력'이었다고 해요. 제 또래라면 다들 이 대목에서 할 말이 좀 있을 거 같아요. 이야기는 형태 위주에서 의미 위주로 바뀌어야 문장 하나를 읽어도 제대로 이해하고, 그래야 재미가 생겨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영어 글을 읽게 된다는 말로 이어집니다.


솔직하게 걸렸던 건 속도예요. 보통 소설책보다 제법 두툼한 편이고 예문이 쉬지 않고 이어져서 휙휙 넘기며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더라고요. 그런데 저자도 '들어가며'에서 이 책을 한 번에 끝내려 하지 말고 조금씩 꾸준히 책장을 넘겨달라고 부탁하고 있더군요. 급하게 덤비면 극I 친구가 마음을 닫는다는 걸 알고 나니 천천히 가는 게 맞는 길 같았습니다.


<Again! 뒤집어본 영문법>은 한 번 읽고 꽂아두기보다 곁에 두고 들춰보는 쪽이 어울리는 책 같아요. 맨 앞의 전치사 사전은 off, up, with처럼 헷갈리는 전치사가 나올 때마다 찾아보기 좋겠고요. 예전에 외운 공식만 머릿속에 남아 있는 저 같은 사람한테는 특히 반가운 책입니다. 판을 세 번 거듭하며 30만 부를 넘긴 데는 다 이유가 있었구나 싶더라고요.


'책을 끝내며'에서 저자는 들어가며에 썼던 문장을 다시 꺼내 보여주고는, 여러분이 갖고 있던 오해가 얼마나 많이 풀렸는지 궁금하다고 묻습니다. 저는 꽤 풀렸다고 답하고 싶네요. 적어도 explode보다 go off를 먼저 떠올릴 정도는 됐으니까요.


은행잎이 하루가 다르게 노래지는 10월 한복판이에요. 주말까지 아직 이틀이나 남은 수요일인데도 마음은 한결 가볍습니다. <Again! 뒤집어본 영문법> 덕분에 오래 어색하게 지내던 친구와 다시 말을 튼 기분이라, 좋은 책 제대로 만났다 싶어요. 올가을엔 if 하나, off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반갑게 인사해볼 생각입니다.


외우기만 하던 영문법을 '왜'로 다시 만나게 해준, 극I 친구와 말을 트는 기분이 드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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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 코리아 2027 - 2027 대한민국 소비트렌드 전망
김난도 외 지음 / 미래의창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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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트렌드 코리아 2027 중년 직장인이 하프시그널 장에서 속도를 늦춘 이유


올해 옷 색깔은 코발트 블루에 탠저린이에요.

매년 가을이면 돌아오는 <트렌드 코리아 2027>이 짙은 파랑 바탕에 주황 글씨를 얹고 나왔습니다. 서문을 보니 파란색은 AI 기술이 퍼져 나가는 흐름을, 주황색은 인간의 창의성과 영감을 담은 색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막상 열 개 키워드를 훑어보면 AI라는 글자가 한 번도 안 나와요. 표지엔 AI를 깔아 놓고 키워드에선 쏙 빼버린 셈이라 첫 장부터 궁금증이 생기더라고요.



해마다 나오는 시리즈라 앞 권 서평 먼저 보고 오시면 편해요. 작년 키워드들이 이번 책 곳곳에 다시 불려 나오거든요.

AI가 빠진 이유는 서문에 친절하게 나와 있습니다. <트렌드 코리아> 팀이 2007년엔 '무선통신의 진화', 2008년엔 '울트라 모바일'을 뽑았는데, 스마트폰이 일상이 된 뒤로는 그 영향이 오히려 커졌는데도 따로 키워드로 세우지 않았다고 해요. 너무 일반화돼서 뽑는 의미가 없어졌다는 거죠. 지금 AI가 딱 그 자리에 와 있다는 설명이었어요.


공기를 올해의 키워드로 뽑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슬로건은 ALPHA SHEEP입니다. 2027년이 정미년, 그러니까 '붉은 양'의 해라서 양 이야기가 꽤 길게 이어지는데 이게 의외로 재밌었어요. 양은 무리에서 떨어지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털을 깎아주지 않으면 그 무게와 더위를 못 견딘다고 하더군요. 순하고 아름다운 동물이면서 방향 없이 휩쓸리는 무리의 이미지도 같이 지녔다는 대목에선 괜히 뜨끔했습니다. 회의 시간에 다들 고개만 끄덕이다 끝나는 풍경이 겹쳐 보여서요. 그러다 이 문장에서 기분이 확 바뀌었어요.


"양은 순한 것 같아도, 매우 고집 세고 공격적인 동물이다. 순종이 곧 무력은 아닐 것이다."

무리 속에서 오래 버텨온 중년 직장인한테 이만한 응원이 또 있을까 싶어요. 알파독, 알파걸처럼 맨 먼저 움직이는 존재가 되자는 뜻이라는데, 무리를 이끄는 대장까지 갈 것도 없이 일단 먼저 해보는 한 마리 정도면 저도 도전해 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올해 주인공이 양이라 그런지 분량도 양껏 담았습니다. 보통 경제서보다 제법 두툼한 편이에요.


숫자, 숫자, 또 숫자.

서문 첫머리가 그렇게 시작해요. 2026년 7월 마지막 주 화요일과 수요일 이틀 만에 코스피가 16.17% 빠지면서 서킷브레이커가 걸렸다가, 금요일엔 17.91% 치솟았다는 이야기요. 디저트 시장에선 두쫀쿠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를 버터떡이 꿰차고, 얼마 안 가 우베가 업계를 보라색으로 물들였다고 하고요. 같은 경남인데 거제엔 1,000mm 가까운 폭우가, 거창엔 50mm가 내렸다는 대목까지 오니 변동성이라는 말이 숫자로 실감 납니다.


그중 귀에 딱 붙은 단어는 '바이브세션'이었어요. 분위기를 뜻하는 바이브와 경기 침체를 뜻하는 리세션을 합친 말이고, 지표는 좋은데 막상 내가 느끼는 경기는 바닥인 현상을 가리킨다고 해요. 수출은 역대 최고라는데 장사는 안 되고 살림살이는 팍팍하다는 문장이 나와요. 다른 회사는 AI로 날아갈 듯 변신하는데 우리 회사 AI 도입은 더디다는 대목도 있고요. 거기서 웃음이 나오다가 말았습니다.


<트렌드 코리아 2027>의 열 개 키워드는 개인의 변화, 조직의 변화, 그리고 우리의 대응이라는 세 덩어리로 나뉘어 있어요. 자극이 넘쳐서 오히려 지루한 '바쁜 권태'를 담은 권태사회, 사람이고 일이고 손익을 따지는 라이프 ROI, 별 목적 없이 '일단' 찍고 녹음해 두는 저장인류가 개인 쪽입니다. 바이브 워킹은 다들 AI 전환에 힘쓰는데 생산성은 왜 그만큼 안 오르는지를 묻고 있고요. 폼팩터 시프트에는 입에 넣는 파우치가 된 담배, 코에 뿌리는 스프레이가 된 주사제 같은 사례가 나오더군요. 휴먼엣지 설명에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디세이)가 등장한 것도 반가웠어요. 트럭을 뒤집고 비행기를 충돌시키며 컴퓨터그래픽을 최소화하는 감독으로 유명하다는 얘기 말이죠.


해봄경제 쪽엔 영어 한 줄이 붙어 있습니다. "Done is better than perfect." 완벽하게 하려다 손도 못 대고 미뤄둔 일이 쌓인 직장인이라면 모니터 옆에 붙여두고 싶을 문장 같아요.

<트렌드 코리아 2027>에서 제일 속도를 늦춰 읽은 장은 하프시그널이었습니다. 축구 경기에서 전반전이 끝났음을 알리는 휘슬처럼, 갱년기를 인생의 반환점에서 울리는 신호로 다시 읽자는 키워드예요. 올해 심층 분석 대상이 갱년기이고 남녀를 모두 포함한다는 점이 먼저 눈에 들어왔어요.


장을 여는 세 사람의 이야기가 있어요. 초등학교 6학년 아들 게임기를 빼앗다가 자기도 놀랄 만큼 큰소리를 낸 51세 A씨가 있고, 수업 중에 단어가 혀끝에서 맴돌다 사라져 겁이 난 46세 교사 B씨가 있습니다. 세 번째 C씨는 55세 남성인데, 평범한 수요일 저녁 퇴근 후 주차장에 차를 대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노래 한 곡에 갑자기 눈물을 쏟았다고 해요. 그날 밤 AI에게 물어보고 나서야 "내가 미쳐가는 게 아니구나. 이유가 있는 거였어"라며 안도했다는데, 그 담담한 한마디가 오히려 마음을 건드리더라고요. 오늘이 마침 수요일이라 그런지 이 장면이 유난히 가깝게 느껴집니다.


남성 갱년기 꼭지는 아재 입장에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어요. 남성호르몬은 30대부터 해마다 1%씩 줄어든다고 하고, 뚜렷한 시작점이 없어서 성욕 감소나 감정 변화, 무기력 같은 정신적 증상으로 먼저 찾아온다고 해요. 남성 갱년기가 여성보다 말하기 더 어렵다는 문항에 응답자의 68.3%가 그렇다고 답했다는 설문도 실려 있습니다. 성공한 CEO에게 갱년기 같다고 말하면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경우가 많다는 상담가의 이야기도 함께 나오더군요. 그래도 진료를 받은 남성이 4년 만에 2배 가까이 늘었다고 하니, 말은 안 해도 속으로는 다들 챙기고 있었던 거 같아요.


"이것은 어딘가 고장 났다는 경고음이 아니라 후반전이 곧 시작된다는 알림이다."

이 문장에서 어깨가 조금 풀렸습니다. 사진 설명에 X세대를 두고 "사용 설명서도 없는 시대를 항상 몸으로 부딪혀 살아야 했던 세대"라고 써둔 표현도 좋았어요. 참는 게 미덕이던 부모 세대와 달리 이 세대는 묻고, 진단받고, 관리한다는 설명이 뒤따르고요. 갱년기를 먼저 겪은 선배들이 알려준 목록대로 석류, 콩, 홍삼을 챙긴다는 대목은 너무 현실적이라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더군요.


맛보기로는 책 앞쪽의 2026년 10대 트렌드 상품만 한 게 없어요. 1위가 코스피 9,000 돌파와 함께 달아오른 반도체 주식, 2위가 두쫀쿠입니다. 서문에서 롤러코스터처럼 그려졌던 증시와 디저트 유행이 상품표 맨 위에 나란히 서 있는 게 재밌더라고요. 그 뒤로 국내 소도시 여행, GLP-1 비만치료제가 이어져요. 말랑이와 키캡 같은 촉감 완구, 무알코올·논알코올 음료, 스킨부스터도 들어 있습니다. 동묘시장과 구형 카메라로 대표되는 빈티지 아이템, 도서전과 불교 박람회 같은 박람회, 사주·운세·풍수지리 서비스까지 줄줄이 나옵니다. 한 해치 앨범을 휘리릭 넘겨보는 기분이에요.


뽑는 과정도 생각보다 꼼꼼했어요. 트렌드헌터 모임 '트렌더스날' 86명이 추천한 183개 후보를 24개로 줄인 다음, 2,000명에게 설문을 돌렸다고 합니다. 보기 순서가 결과에 영향을 주지 않게 무작위로 섞었다고 하고요. 응답자 가운데 40대가 402명, 50대가 461명이라 제 또래 목소리도 꽤 들어가 있는 셈입니다.


솔직히 마음에 걸렸던 건 10위의 사주·운세였어요. 처음엔 피식 웃었어요. 그런데 이게 불확실한 시대에 미래를 대비하고 심리적 안정을 얻으려는 소비로 묶인 걸 보니 웃음이 쏙 들어가더라고요. 반도체 주식과 사주에서 출발한 화살표가 똑같이 '불확실성 대응 소비'로 향하는 그림을 보고 있으면, 다들 내일이 불안하긴 매한가지인가 싶습니다.


김난도 대표저자의 서문은 강의실 맨 앞줄에서 듣는 이야기 같았어요. 물이 98도, 99도까지는 액체로 있다가 100도에 닿는 순간 기체로 바뀐다는 '상전이'로 변화가 불연속적이라는 걸 설명하고, 엔비디아와 테슬라, 작은 드러그스토어에서 출발한 올리브영까지 사례를 줄줄이 꺼내 놓더군요. 마지막엔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의 "미래가 우리를 향해 돌진하고 있어요, 폼페이의 용암처럼"이라는 대사가 나와요. 19년째 이 책을 내온 사람의 긴장감이 전해지는 대목이었습니다. "날씨마저 종잡을 수 없었던 변화의 한복판에서"라는 맺음 인사도 멋졌고요.


<트렌드 코리아 2027>은 한 해가 지나고 다시 펼칠 때 진짜 재미가 나올 책 같아요. 이번 책 1부가 2026년을 돌아보듯이, 내년 이맘때 2027년 키워드를 하나씩 맞춰보는 맛이 있을 테니까요. 내년 업무계획을 앞둔 직장인이라면 책상 한쪽에 두고 수시로 들춰보기 좋겠고, 해마다 모아두면 그 자체로 우리 사회 연대기가 될 것 같습니다.


10월 중순, 아침저녁 바람이 제법 서늘해진 수요일이에요. 붉은 양의 해를 두 달 반쯤 앞두고 내년 일기예보를 미리 들은 기분입니다. 알파쉽까지는 몰라도, 무리 맨 뒤에서 헉헉대는 양은 면하게 한 발 먼저 움직여 보렵니다. 양심 있게요. 좋은 책 만나서 한 주 허리가 든든해진 느낌이네요.


AI가 공기처럼 스며든 2027년, 무리에서 한 발 먼저 나서는 '붉은 양'이 되자는 트렌드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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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하는 영어 필사 - 세네카, 흔들림 없는 삶의 태도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지음, 노윤기 옮김 / 베이직북스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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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이 일만 끝나면 쉴 수 있어" 2천 년 전 세네카가 답했다, <철학하는 영어 필사> 서평


'이 일만 끝나면 쉴 수 있어.'

이 말을 올해만 몇 번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2천 년 전 로마에도 이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걸 지켜보며 혀를 찬 철학자가 있었더라고요. 그 철학자가 세네카고, 그의 문장을 하루 한 장씩 영어로 따라 써 보는 책이 바로 <세네카, 흔들림 없는 삶의 태도 철학하는 영어 필사>예요.


10월도 어느새 중순이고, 아침저녁 공기가 제법 서늘해졌습니다. 월요일을 겨우 넘기고 나면 화요일은 한 주가 아직 한참 남은 것 같아서 은근히 버거운 날이잖아요. 이런 날 소개하기 딱 좋은 책 같습니다. 제목이 길어서 숨 한 번 고르고 읽어야 하지만 판형은 손에 쥐기 편한 크기예요. 철학책이라길래 묵직할 줄 알았는데, 들어 보니 무거운 건 책이 아니라 제 마음 쪽이더군요.


펼쳐 보니 술술 읽어 넘기는 책과는 결이 좀 달랐어요.

<철학하는 영어 필사>는 하루치가 펼친 두 면으로 짜여 있습니다. 왼쪽 면에는 세네카의 말을 영어로 옮긴 '오늘의 문장'과 한글 해석이 있고, 아래쪽에 주요 단어와 구문이 정리되어 있어요. 오른쪽 면은 날짜 칸과 줄만 그어진 필사 노트입니다. 노트 맨 아래에는 '사색의 시간'이라는 짧은 글이 붙어 있는데, 이게 의외로 좋았어요. 오늘의 문장을 지금 우리말 감각으로 한 번 더 풀어 주는 느낌이라, 영어 문장이 남의 나라 옛날이야기로만 들리지 않더라고요.


페이지 모서리마다 QR 코드가 하나씩 있습니다. 찍으면 출판사 홈페이지에서 원어민 낭독이 바로 재생되는데, 하루치가 40초 남짓이에요. 앱을 따로 깔라고 하지 않으니 아재 입장에서는 그게 제일 반갑더군요.


앞쪽에는 100 Day Challenge라는 페이지가 있어요. 1부터 100까지 동그라미가 줄을 맞춰 서 있고, 필사를 마친 날에는 그날 마음에 어울리는 색으로 하나씩 칠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릴 적 방학 때 벽에 붙여 두던 생활계획표가 떠오르기도 하고요. 하나씩 채워 가는 재미가 꽤 쏠쏠할 것 같은 페이지입니다.


사철노출제본이라 180도로 활짝 펼쳐지는 것도 필사책으로는 큰 장점 같아요. 필사하다가 책이 자꾸 덮이면 한 손으로 누르고 한 손으로 쓰느라 영 불편하잖아요. 책등의 실 제본이 훤히 드러나 있는 것도 나름대로 멋스럽고요.


서문은 바람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똑같이 바람이 불어도 폭풍 속에서 태연하게 서 있는 사람이 있고, 산들바람에도 털썩 쓰러지는 사람이 있다고요.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불어오는 가장 거센 돌풍은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외부의 요구와 무의미한 분주함"일 거라고 해요. 이리저리 휩쓸리다가 정작 '나의 시간'은 다 내어 주고, 빈손으로 하루를 마감하며 허무함을 느끼지는 않느냐는 질문이 이어지는데, 대답하기도 전에 고개부터 끄덕여지더라고요.


서문 끝자락에서 마음에 쏙 든 표현은 이거였습니다. 모진 바람이 불든 궂은비가 내리든 버티고 견디고 넘길 수 있는 마음가짐.


"그런가 보다, 그렇구나."

철학책에서 이렇게 소박한 말을 만날 줄은 몰랐어요. 그런데 이십 년 넘게 회사 생활을 하다 보니, 이만한 처세술이 또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스토아 철학과 세네카를 소개하는 짧은 글이 있는데, 철학을 잘 몰라도 부담 없이 읽힐 만큼 쉽게 풀려 있습니다. 스토아 철학의 핵심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분명히 구분하는 데 있다고 해요.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초연하고, 내 태도와 이성에만 집중하라는 거죠.


세네카의 삶은 생각보다 훨씬 굴곡이 깊었어요. 어려서부터 천식과 결핵에 시달렸고, 권력 다툼에 휘말려 코르시카에서 8년 동안 유배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그 뒤에는 네로 황제의 스승이자 최측근으로 권력의 정점에 섰지만, 서기 65년 암살 음모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자결 명령을 받고 생을 마감했어요. 그렇게 산 사람이 흔들리지 말라고 하니 말의 무게가 다르게 느껴지더군요. 책에서는 그의 철학을 치열한 자기 성찰의 결과물이라고 소개하는데, 그 말에 절로 수긍이 갔습니다. (인생의 짧음에 대하여), (화에 대하여) 같은 저술이 지금까지 읽히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DAY 01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To live happily is the desire of all men, but their minds are blinded to a clear vision of just what it is that makes life happy.

행복하게 사는 건 모든 사람의 소망인데, 정작 무엇이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지는 분명히 알지 못한다는 이야기예요. 뒤이어 길을 잘못 들었다면 애쓸수록 오히려 더 멀어진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 대목이 좀 아프게 들렸습니다. 열심히만 하면 된다고 믿고 달려온 세월이 있어서 그런가 봐요.


DAY 02 옆의 사색의 시간에는 "작은 칭찬에 우쭐해지고 작은 비난에 한없이 추락하는 마음으로는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라는 문장이 있어요. 회의 시간에 윗분 표정 하나로 하루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사람으로서는 딱히 할 말이 없더군요.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DAY 47, Endless Engrossments였어요.

Reasons for anxiety will never be lacking, whether born of prosperity or of wretchedness. Life pushes on in a succession of engrossments. We shall always pray for leisure, but never enjoy it.


번영에서 오든 비참함에서 오든 불안의 구실은 결코 마르지 않고, 우리는 언제나 여유를 갈구하지만 끝내 누리지 못할 거라는 말입니다. 맨 앞에 쓴 그 문장이 바로 이 페이지의 사색의 시간에 나와요. "이 일만 끝나면 쉴 수 있어." 그런데 과제 하나가 끝나면 또 다른 짐이 연달아 얹힌다고요. 그리고 마무리는 이렇습니다. 여유는 나중에 주어지는 보상이 아니라 지금 당장 스스로 마련하고 누려야 할 삶의 요소라는 것.


프로젝트만 끝나면, 이번 분기만 넘기면, 연말만 지나면. 저는 이런 '~만 하면'을 대체 몇 개나 쌓아 두고 사는 건지 모르겠어요.


DAY 54는 읽자마자 웃음이 났습니다.

A cultivates B and B cultivates C; no one is his own master.

A는 B에게 공을 들이고 B는 C에게 공을 들이느라, 결국 누구도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는 문장이에요. 이거 2천 년 전 로마 얘기 맞나요? 우리 회사 결재 라인을 그대로 옮겨 놓은 줄 알았습니다. 세네카 선생님, 혹시 대리부터 시작하셨나요.

웃고 나니 조금 씁쓸하기도 했어요. 가장 낮은 자부터 가장 높은 자까지 누구도 자신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지 못한다는 앞 구절이 계속 마음에 걸렸거든요.


솔직히 처음엔 영어가 살짝 낯설었습니다. shall이나 men, whether born of처럼 요즘 회화책에서는 보기 힘든 고풍스러운 표현이 꽤 나오거든요. 그래도 페이지마다 단어와 구문 풀이가 붙어 있어서 금방 따라갈 수 있었고, 이런 문장을 손으로 옮겨 보는 게 <철학하는 영어 필사>의 진짜 맛이겠다 싶더라고요. The + 비교급, the + 비교급 같은 구문을 실제 문장 속에서 다시 만나니, 학창 시절 손때 묻은 문법책이 떠오르기도 했고요. 영어 공부를 다시 해 볼까 하다가 번번이 접었던 분들한테 오히려 잘 맞을 것 같아요. 외우라고 다그치지 않고 하루 한 장만 쓰자고 하니까요.


맨 뒤에는 필기체 연습 페이지가 있습니다. "Life is brief even if we should strive day and night for sound wisdom." 같은 문장이 예쁜 필기체로 쓰여 있고, 그 아래에 회색으로 연하게 따라 쓸 수 있는 가이드가 깔려 있어요. 중학교 때 영어 공책에 필기체를 꼬불꼬불 연습하던 기억이 나서 반가웠습니다. 요즘은 필기체 쓰는 사람을 보기 드문데, 이걸 익혀 두면 카드 한 장을 써도 제법 폼이 날 것 같아요.


소장 가치는 100일을 다 채웠을 때 세상에 한 권뿐인 손글씨 책이 된다는 점에서 가장 크게 느껴집니다. 동그라미마다 그날그날의 색이 칠해져 있을 테니까요. 같은 책이어도 쓰는 사람마다 전혀 다른 모습으로 완성되는 셈이에요.


마지막 DAY 100의 제목은 The Wisdom to Seize Today입니다. 오늘을 붙잡지 않으면 달아나고, 붙잡아도 여전히 달아날 테니 시간이 흐르는 속도와 겨루듯 써야 한다는 문장이에요. 끝 구절은 급류처럼 흘러가지만 언제까지나 흐르지는 않으니 서둘러 마시라는 말입니다. you must drink quickly. 이 구절이 요즘 계절이랑 참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단풍도 딱 이맘때 잠깐이잖아요.


해가 부쩍 짧아졌습니다. 그만큼 저녁이 길어지는 계절이니, 하루 한 장쯤은 세네카 선생님과 나눠 써도 좋겠다 싶어요. <철학하는 영어 필사> 덕분에 좋은 문장을 한 바구니 얻은 기분이라, 올가을은 덜 허전할 것 같습니다. 다들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고, 남은 화요일도 "그런가 보다, 그렇구나" 하면서 가볍게 넘겨 보시길요.


"이 일만 끝나면 쉴 수 있어"라는 말에 2천 년 전 세네카가 건네는 대답을 하루 한 장씩 손으로 옮겨 쓰는 100일짜리 영어 필사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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