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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하는 영어 필사 - 세네카, 흔들림 없는 삶의 태도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지음, 노윤기 옮김 / 베이직북스 / 2026년 10월
평점 :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이 일만 끝나면 쉴 수 있어" 2천 년 전 세네카가 답했다, <철학하는 영어 필사> 서평
'이 일만 끝나면 쉴 수 있어.'
이 말을 올해만 몇 번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2천 년 전 로마에도 이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걸 지켜보며 혀를 찬 철학자가 있었더라고요. 그 철학자가 세네카고, 그의 문장을 하루 한 장씩 영어로 따라 써 보는 책이 바로 <세네카, 흔들림 없는 삶의 태도 철학하는 영어 필사>예요.
10월도 어느새 중순이고, 아침저녁 공기가 제법 서늘해졌습니다. 월요일을 겨우 넘기고 나면 화요일은 한 주가 아직 한참 남은 것 같아서 은근히 버거운 날이잖아요. 이런 날 소개하기 딱 좋은 책 같습니다. 제목이 길어서 숨 한 번 고르고 읽어야 하지만 판형은 손에 쥐기 편한 크기예요. 철학책이라길래 묵직할 줄 알았는데, 들어 보니 무거운 건 책이 아니라 제 마음 쪽이더군요.

펼쳐 보니 술술 읽어 넘기는 책과는 결이 좀 달랐어요.
<철학하는 영어 필사>는 하루치가 펼친 두 면으로 짜여 있습니다. 왼쪽 면에는 세네카의 말을 영어로 옮긴 '오늘의 문장'과 한글 해석이 있고, 아래쪽에 주요 단어와 구문이 정리되어 있어요. 오른쪽 면은 날짜 칸과 줄만 그어진 필사 노트입니다. 노트 맨 아래에는 '사색의 시간'이라는 짧은 글이 붙어 있는데, 이게 의외로 좋았어요. 오늘의 문장을 지금 우리말 감각으로 한 번 더 풀어 주는 느낌이라, 영어 문장이 남의 나라 옛날이야기로만 들리지 않더라고요.
페이지 모서리마다 QR 코드가 하나씩 있습니다. 찍으면 출판사 홈페이지에서 원어민 낭독이 바로 재생되는데, 하루치가 40초 남짓이에요. 앱을 따로 깔라고 하지 않으니 아재 입장에서는 그게 제일 반갑더군요.
앞쪽에는 100 Day Challenge라는 페이지가 있어요. 1부터 100까지 동그라미가 줄을 맞춰 서 있고, 필사를 마친 날에는 그날 마음에 어울리는 색으로 하나씩 칠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릴 적 방학 때 벽에 붙여 두던 생활계획표가 떠오르기도 하고요. 하나씩 채워 가는 재미가 꽤 쏠쏠할 것 같은 페이지입니다.
사철노출제본이라 180도로 활짝 펼쳐지는 것도 필사책으로는 큰 장점 같아요. 필사하다가 책이 자꾸 덮이면 한 손으로 누르고 한 손으로 쓰느라 영 불편하잖아요. 책등의 실 제본이 훤히 드러나 있는 것도 나름대로 멋스럽고요.

서문은 바람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똑같이 바람이 불어도 폭풍 속에서 태연하게 서 있는 사람이 있고, 산들바람에도 털썩 쓰러지는 사람이 있다고요.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불어오는 가장 거센 돌풍은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외부의 요구와 무의미한 분주함"일 거라고 해요. 이리저리 휩쓸리다가 정작 '나의 시간'은 다 내어 주고, 빈손으로 하루를 마감하며 허무함을 느끼지는 않느냐는 질문이 이어지는데, 대답하기도 전에 고개부터 끄덕여지더라고요.
서문 끝자락에서 마음에 쏙 든 표현은 이거였습니다. 모진 바람이 불든 궂은비가 내리든 버티고 견디고 넘길 수 있는 마음가짐.
"그런가 보다, 그렇구나."
철학책에서 이렇게 소박한 말을 만날 줄은 몰랐어요. 그런데 이십 년 넘게 회사 생활을 하다 보니, 이만한 처세술이 또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스토아 철학과 세네카를 소개하는 짧은 글이 있는데, 철학을 잘 몰라도 부담 없이 읽힐 만큼 쉽게 풀려 있습니다. 스토아 철학의 핵심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분명히 구분하는 데 있다고 해요.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초연하고, 내 태도와 이성에만 집중하라는 거죠.

세네카의 삶은 생각보다 훨씬 굴곡이 깊었어요. 어려서부터 천식과 결핵에 시달렸고, 권력 다툼에 휘말려 코르시카에서 8년 동안 유배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그 뒤에는 네로 황제의 스승이자 최측근으로 권력의 정점에 섰지만, 서기 65년 암살 음모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자결 명령을 받고 생을 마감했어요. 그렇게 산 사람이 흔들리지 말라고 하니 말의 무게가 다르게 느껴지더군요. 책에서는 그의 철학을 치열한 자기 성찰의 결과물이라고 소개하는데, 그 말에 절로 수긍이 갔습니다. (인생의 짧음에 대하여), (화에 대하여) 같은 저술이 지금까지 읽히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DAY 01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To live happily is the desire of all men, but their minds are blinded to a clear vision of just what it is that makes life happy.
행복하게 사는 건 모든 사람의 소망인데, 정작 무엇이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지는 분명히 알지 못한다는 이야기예요. 뒤이어 길을 잘못 들었다면 애쓸수록 오히려 더 멀어진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 대목이 좀 아프게 들렸습니다. 열심히만 하면 된다고 믿고 달려온 세월이 있어서 그런가 봐요.
DAY 02 옆의 사색의 시간에는 "작은 칭찬에 우쭐해지고 작은 비난에 한없이 추락하는 마음으로는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라는 문장이 있어요. 회의 시간에 윗분 표정 하나로 하루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사람으로서는 딱히 할 말이 없더군요.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DAY 47, Endless Engrossments였어요.
Reasons for anxiety will never be lacking, whether born of prosperity or of wretchedness. Life pushes on in a succession of engrossments. We shall always pray for leisure, but never enjoy it.

번영에서 오든 비참함에서 오든 불안의 구실은 결코 마르지 않고, 우리는 언제나 여유를 갈구하지만 끝내 누리지 못할 거라는 말입니다. 맨 앞에 쓴 그 문장이 바로 이 페이지의 사색의 시간에 나와요. "이 일만 끝나면 쉴 수 있어." 그런데 과제 하나가 끝나면 또 다른 짐이 연달아 얹힌다고요. 그리고 마무리는 이렇습니다. 여유는 나중에 주어지는 보상이 아니라 지금 당장 스스로 마련하고 누려야 할 삶의 요소라는 것.
프로젝트만 끝나면, 이번 분기만 넘기면, 연말만 지나면. 저는 이런 '~만 하면'을 대체 몇 개나 쌓아 두고 사는 건지 모르겠어요.
DAY 54는 읽자마자 웃음이 났습니다.
A cultivates B and B cultivates C; no one is his own master.
A는 B에게 공을 들이고 B는 C에게 공을 들이느라, 결국 누구도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는 문장이에요. 이거 2천 년 전 로마 얘기 맞나요? 우리 회사 결재 라인을 그대로 옮겨 놓은 줄 알았습니다. 세네카 선생님, 혹시 대리부터 시작하셨나요.
웃고 나니 조금 씁쓸하기도 했어요. 가장 낮은 자부터 가장 높은 자까지 누구도 자신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지 못한다는 앞 구절이 계속 마음에 걸렸거든요.
솔직히 처음엔 영어가 살짝 낯설었습니다. shall이나 men, whether born of처럼 요즘 회화책에서는 보기 힘든 고풍스러운 표현이 꽤 나오거든요. 그래도 페이지마다 단어와 구문 풀이가 붙어 있어서 금방 따라갈 수 있었고, 이런 문장을 손으로 옮겨 보는 게 <철학하는 영어 필사>의 진짜 맛이겠다 싶더라고요. The + 비교급, the + 비교급 같은 구문을 실제 문장 속에서 다시 만나니, 학창 시절 손때 묻은 문법책이 떠오르기도 했고요. 영어 공부를 다시 해 볼까 하다가 번번이 접었던 분들한테 오히려 잘 맞을 것 같아요. 외우라고 다그치지 않고 하루 한 장만 쓰자고 하니까요.

맨 뒤에는 필기체 연습 페이지가 있습니다. "Life is brief even if we should strive day and night for sound wisdom." 같은 문장이 예쁜 필기체로 쓰여 있고, 그 아래에 회색으로 연하게 따라 쓸 수 있는 가이드가 깔려 있어요. 중학교 때 영어 공책에 필기체를 꼬불꼬불 연습하던 기억이 나서 반가웠습니다. 요즘은 필기체 쓰는 사람을 보기 드문데, 이걸 익혀 두면 카드 한 장을 써도 제법 폼이 날 것 같아요.
소장 가치는 100일을 다 채웠을 때 세상에 한 권뿐인 손글씨 책이 된다는 점에서 가장 크게 느껴집니다. 동그라미마다 그날그날의 색이 칠해져 있을 테니까요. 같은 책이어도 쓰는 사람마다 전혀 다른 모습으로 완성되는 셈이에요.

마지막 DAY 100의 제목은 The Wisdom to Seize Today입니다. 오늘을 붙잡지 않으면 달아나고, 붙잡아도 여전히 달아날 테니 시간이 흐르는 속도와 겨루듯 써야 한다는 문장이에요. 끝 구절은 급류처럼 흘러가지만 언제까지나 흐르지는 않으니 서둘러 마시라는 말입니다. you must drink quickly. 이 구절이 요즘 계절이랑 참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단풍도 딱 이맘때 잠깐이잖아요.
해가 부쩍 짧아졌습니다. 그만큼 저녁이 길어지는 계절이니, 하루 한 장쯤은 세네카 선생님과 나눠 써도 좋겠다 싶어요. <철학하는 영어 필사> 덕분에 좋은 문장을 한 바구니 얻은 기분이라, 올가을은 덜 허전할 것 같습니다. 다들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고, 남은 화요일도 "그런가 보다, 그렇구나" 하면서 가볍게 넘겨 보시길요.
"이 일만 끝나면 쉴 수 있어"라는 말에 2천 년 전 세네카가 건네는 대답을 하루 한 장씩 손으로 옮겨 쓰는 100일짜리 영어 필사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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