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지 애니에서 과학이 보인다
류상진 지음 / 도도서가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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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강백호 자유투부터 빗방울 모양까지, 괄호 속 농담이 더 재밌는 과학책 <어쩐지 애니에서 과학이 보인다>


장풍으로 모기를 잡을 수 있을까?

표지 아래쪽에 적힌 이 질문을 보자마자 웃음부터 나왔어요. 저는 두 손바닥을 맞부딪쳐도 모기를 번번이 놓치는 사람이라 장풍까진 꿈도 못 꾸거든요. 그런데 그 밑에 한 줄이 더 있습니다. 기계공학은 강백호를 도울 수 있을까? 이쯤 되면 안 펼쳐 보고는 못 배기는 거 같아요.

<어쩐지 애니에서 과학이 보인다>는 미국 브래들리대학교 기계공학과 류상진 교수가 쓴 과학 교양서예요. 스스로를 '프로페서 오타쿠'라고 부르는 분인데, 책 첫머리부터 이런 식입니다. 로봇 애니에는 꼭 박사가 나와야 사람들이 안심한다고 하더니 "이 책을 읽는 독자들께서도 안심하시라. 나도 공학박사에 교수이니 말이다." 시작부터 이렇게 능청을 떠니 과학책 앞에서 굳어 있던 어깨가 스르르 풀리더라고요.


(슬램덩크)로 시작해서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 (원피스), (원펀맨), (암살교실), (날씨의 아이)를 지나 (천공의 성 라퓨타)까지 이어지는 구성이에요. 장이 바뀔 때마다 새빨간 바탕에 톱니바퀴 일러스트를 얹은 장 표지가 한 장씩 끼어 있어서, 옛날 만화 잡지 넘기던 기분도 살짝 납니다. 보통 교양서보다 제법 두툼한 편인데 생각보다 술술 넘어가는 쪽이었어요.

첫 장은 저자의 인생 만화 (슬램덩크) 이야기로 문을 엽니다. 박사과정과 박사후 연구원 시절 노력한 만큼 커리어가 풀리지 않아 낙담할 때마다 이 만화를 펼쳤고, 채치수가 "난 잘못되지 않았다"고 혼잣말하는 장면에서 울컥했다고 해요. 스스로를 '극T'라 부르는 공학자가 이런 고백을 하니 괜히 마음이 가더군요. 직장 생활 20년 넘게 하다 보면 내 노력과 결과가 따로 노는 시기가 꼭 한 번씩 찾아오는데, 그럴 때 붙잡을 만화 한 권쯤 있는 사람이라면 이 대목에서 고개를 끄덕일 거 같아요.


바로 옆에는 채치수에게 감정이입한 이유가 "그저 '고릴라'여서일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붙어 있고, 하숙집 어머니가 TV 농구 중계에서 서장훈 선수를 보고 저자인 줄 알았다는 일화도 이어집니다. 그 덕에 한동안 '장훈'으로 불렸다나요. 진지한 고백 옆에 이런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놓아두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에요.

본론으로 들어가면 강백호의 첫 자유투가 나와요. 송태섭과 정대만이 림 앞쪽을 노리느냐 뒤쪽을 노리느냐로 티격태격하는 사이 5초가 지나 기회를 날려 버린 그 장면이요. 저자는 강백호의 엉거주춤한 언더핸드 폼이 실제로 쓰이는 방식이라며, NBA에서 이 폼으로 89.3%의 자유투 성공률을 기록한 릭 배리까지 데려옵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여요.


"기계공학은 참으로 쓸모가 많구나. 적어도 림의 어느 부분을 노려야 하는지로 설전을 벌이는 송태섭과 정대만보다는 말이다."

<어쩐지 애니에서 과학이 보인다>를 읽는 재미의 절반은 괄호 안에 숨어 있는 거 같아요. 진공 상태에서 농구공을 굴려 보자면서 "물론 우리는 숨을 쉬어야 하니 산소통을 등에 매고 있어야 한다"고 하더니, 그림 속 실험자가 정말로 산소통을 메고 있습니다. 갈릴레오의 낙하 실험을 따라 해 보자며 일리노이 나일즈에 있는 사탑을 고르고는 "(어차피 사고실험이면 피사의 사탑을 택해도 되잖아!)" 하고 혼자 받아치고요. 살생님 머리가 33% 커졌다는 대목에는 "(쓸데없이 정량적인 정보이다)"가, 구의 표면적이 가장 작다는 걸 수학적으로 증명할 깜냥은 없다는 대목에는 "(겸손이 아니다. 진짜 모른다)"가 붙어 있어요.


이런 교수님 수업이면 졸 틈이 없겠다 싶었습니다.

장끼리 서로 엮여 있다는 점도 재미있어요. 6장에서 빗방울의 종단속도를 구할 때 1장의 농구공 얘기가 다시 나오고, 2장의 항력계수와 3장 (원피스)의 고무밴드 실험도 슬쩍 끼어듭니다. 따로 노는 에피소드 모음이라기보다는 한 학기짜리 수업을 차례로 듣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기차 위에 꼿꼿이 서서 양팔까지 벌린 엔무를 두고 "역시 도깨비는 사람과는 다르다"고 한 줄 보태는 대목도 그렇고, 파리채 구멍이 크면 모기가 빠져나가고 작으면 바람이 일어 모기가 도망간다는 설명도 그렇고, 늘 보던 것들이 조금씩 다르게 보이게 만드는 책이에요.


<어쩐지 애니에서 과학이 보인다>에서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5장 (암살교실)이었어요. 지구를 파괴하겠다는 초생물 살생님이 열등생 반의 담임을 맡고, 학생들이 그 선생님을 암살하려고 애쓰는 설정이에요. 저자는 학생들이 살생님의 약점을 관찰하고, 가설을 세우고, 거대한 푸딩 속에 폭탄을 숨기는 작전을 짰다가 실패하면 다시 가설을 고치는 과정이 과학 연구의 절차와 다르지 않다고 말합니다. 리처드 파인만이 과학을 두고 "신들이 두는 체스게임을 보면서 그 게임의 규칙을 알아내는 것"이라고 했다는 말도 빌려 오고요. 처음 보는 보드게임을 친구들 옆에서 구경하며 규칙을 알아내는 과정에 빗대는데, 친구가 "아… 반은 맞고 반은 틀려"라고 하면 가설을 고쳐서 다시 물어보는 식이라 정말 쉽게 들어와요.


회사 다니다 보면 문제가 터졌을 때 원인부터 넘겨짚고 뛰어다니는 일이 참 많잖아요. 저자는 연구실 장비가 고장 났다고 보고하는 학생에게 먼저 무엇을 관찰했는지 묻고, 경험에서 나온 추측을 가설로 다듬게 한 다음 간단한 실험으로 확인하게 한다고 해요. 그 대목에서 회의실 풍경이 자꾸 겹쳐 보였습니다. 이 순서도 하나쯤 모니터 옆에 붙여 두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장을 여는 저자 자신의 이야기도 좋았어요. 연구에 집중해야 할 때도 학생들 일에 더 열을 올리게 되는데 "그냥 그게 더 재미있었다"고 해요. 학생 하나하나를 파악해서 칭찬하고 격려해 주는 살생님을 이상적인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는 "(이게 말이 쉽지 정말 하기 힘들다)"라는 괄호를 달아 둡니다. 후배 몇 명 챙겨 본 사람이면 저 괄호가 얼마나 진심인지 알 거 같아요. 살생님을 "살신성인을 마다하지 않는 위대한 연구 지도자"라고 추켜세우고는 "역시, 살생님!"으로 맺는 대목에는 존경과 장난이 반반쯤 섞여 있고요. 군사부일체를 꺼냈다가 "(아… 너무 옛날이야기인가?)" 하는 부분에서는, 저희 또래한테는 전혀 옛날이야기가 아니라서 혼자 웃었습니다.


6장 (날씨의 아이)는 비가 오는 날이면 학생들에게 "오늘은 비가 오니까 유체역학에 대해 생각해보기 좋다"고 말한다는 저자의 습관으로 시작해요. 학생들이 갸우뚱한다는데 그 표정이 눈에 선합니다. 물방울은 왜 동그랄까, 이 질문 하나로 부피가 같은 정육면체와 원기둥과 구의 표면적을 차례로 비교해 가요. 6mm²에서 5.54mm²로, 다시 4.84mm²로 줄어드는 숫자를 따라가다 보면, 정답이 동그라미라는 말장난까지 꽤 그럴듯하게 들리더군요. 표면장력을 설명할 때마다 도전의식을 느낀다면서 "(그냥 힘들다는 뜻이다)"라고 털어놓는 교수님이라니, 이런 솔직함이 오히려 믿음직스러웠어요.


솔직히 빗방울의 종단속도를 구하는 구간은 방정식이 꽤 이어져서 천천히 따라가야 했어요. 그래도 저자는 숫자부터 넣지 말고 변수로 끝까지 풀어 두라고 권합니다. 그래야 변수를 바꿔 가며 생각하는 재미가 생긴다고요. 빗방울이 크면 더 빨리 떨어지고, 수은 비가 내리면 재앙일 테고, 달에서 비가 온다면 종단속도는 41%로 줄어든다는 식이에요. 식을 다 따라가지 못해도 이 사고실험들만큼은 머리에 쏙쏙 들어왔습니다. 큰 틀부터 잡고 숫자는 맨 나중에 맞추라는 말은 보고서 쓰는 직장인한테도 그대로 통하는 얘기 같고요.


장풍과 모기 이야기의 답은 직접 확인하시는 걸로.

<어쩐지 애니에서 과학이 보인다>는 한 번 읽고 꽂아 두기보다는, 집에서 애니를 같이 보다가 "저거 진짜 가능해?" 소리가 나올 때마다 다시 꺼내 들기 좋은 책 같아요. 저자가 직접 그린 일러스트와 그림이 곳곳에 들어 있어서 수식이 부담스러우면 그림만 따라가도 감이 잡히게 되어 있고요. 과학이라면 손사래부터 치던 사람도 읽는 내내 재미있었다는 말이 절로 나올 책입니다.


10월 한가운데 수요일, 한 주의 허리쯤이에요. 이맘때 떨어지는 은행잎에도 종단속도가 있겠구나 싶어지는 걸 보면, 이 책 덕분에 머릿속에 공학 회로가 하나 새로 깔린 모양입니다. 은행잎이 저보다 가볍게 떨어진다는 건 계산 안 해 봐도 알겠고요. 덕업일치 교수님 수업을 한 학기 잘 듣고 나온 기분이라 뿌듯합니다. 깊어 가는 가을, 다들 감기 조심하세요.


덕후 공학교수가 애니 속 장면 위에 괄호 섞인 농담과 물리 법칙을 얹어 주는, 한 학기 교양수업 같은 과학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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