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사람의 그릇 - 사마천에게 듣는 인생 교훈 100가지
김영민 지음 / 아이콤마(주)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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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저는 어떤 사람입니까? 너는 그릇이다<사기, 사람의 그릇> 서평


"저는 어떤 사람입니까?" "너는 그릇이다."

<사기>의 (중니제자열전)에 나오는 문답이래요. 상세페이지 맨 위에 이 두 줄이 걸려 있는데 보자마자 웃음이 나더라고요. 그릇이라니, 칭찬인지 아닌지 한 번에 감이 안 오잖아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회사에서 제일 자주 듣고 또 제일 자주 하는 말이 "저 사람 그릇이 어떻다"는 얘기인 거 같아요.


솔직히 제목에 '사기'가 큼직하게 박혀 있어서 처음엔 요즘 흔한 문자 사기 예방 책인가 했습니다. 다행히 사마천 선생 쪽 사기였어요.

<사기, 사람의 그릇>은 사마천의 <사기>에서 일화 100편을 골라 열 가지 주제로 묶은 책입니다. 용기, 지혜, 인내, 포용, 겸손 같은 단어가 편마다 문패처럼 붙어 있고, 마지막 편 제목은 (애쓴다고 반드시 이루는 것은 아니다)예요. 인생 교훈 100가지를 늘어놓다가 끝에 가서 이런 제목을 내건 솔직함이 좋더라고요.


구성이 참 친절합니다. 제목 바로 아래 원전 한 줄이 출전과 함께 놓이고, 일화가 짧게 펼쳐지고, 연꽃 문양을 하나 지나면 파란 글씨로 저자의 한마디가 붙어요. 페이지 모서리에는 춘추시대, 전국시대 같은 시대 표시가 있어서 지금 어느 시절 이야기인지 놓칠 일이 없고요. 낯선 나라 이름이나 인물은 각주로 풀어줍니다.

예전 같으면 퇴근하고 쇼츠나 넘기다 잠들었을 텐데, 요즘은 이런 책이 먼저 손에 잡힙니다. 일화 한 편이 딱 쇼츠 몇 개 볼 시간이라 부담도 없고요. 책은 보통 책보다 제법 두툼한 편이에요. 그래도 100편으로 잘게 나뉘어 있으니 두께에 겁먹을 일은 없겠더군요.


서문부터 재미있습니다.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 고전이다"라는 농담으로 시작하는데, 저자 본인도 그랬다고 털어놓아요. 불혹에 해외연수를 갔다가 한가한 틈에 <사기열전>을 만났고, 그 뒤로는 동서양 고전을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 읽었다고 합니다. 저도 늦게 책 맛을 들인 쪽이라 이 대목이 괜히 반가웠어요.

그리고 서문 끝에 이 책은 처음부터 기획한 게 아니고, 두 아들을 위해 매일 한 편씩 쓰다 보니 책이 됐다는 고백이 나옵니다. 거기 이런 문장이 붙어 있어요.


"비록 엄마만큼은 아니겠지만 이 아빠도 아들들을 너무나 사랑한다는 것을, 우리 아이들이 꼭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엄마만큼은 아니겠지만"이라는 단서가 너무 아빠다워서 웃다가, 이내 조용해졌습니다. 아빠들은 사랑한다는 말이 서툴러서 고전 일화를 100편이나 빌려 와서야 겨우 그 말을 하는 거 같아요. 그렇게 보면 <사기, 사람의 그릇>은 아주 길게 쓴 편지 한 통이기도 하더라고요.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관중과 포숙의 이야기, (나를 알아준 벗이 있어 오늘의 내가 있다)였습니다. 관포지교야 누구나 아는 말이지만, 관중이 직접 늘어놓는 독백을 이렇게 통째로 읽어 본 건 처음이에요. 함께 장사하면서 이익을 더 가져가도 포숙은 그를 탐욕스럽다고 하지 않았고, 벼슬길에서 세 번 쫓겨나도, 싸움에서 세 번 달아나도 탓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때마다 이유가 붙어요. 가난한 걸 알았기 때문에, 때를 만나지 못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알았기 때문에.

이 말이 반복될수록 포숙이라는 사람이 점점 크게 보이더군요.

"나를 낳아준 이는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

직장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일이 꼬였을 때 사정부터 물어봐 주는 사람이 한 명만 있어도 얼마나 큰지 알게 되잖아요. 포숙은 관중을 추천해 놓고 자기는 그 아랫자리에 앉았다고 해요. 세상 사람들도 포숙의 사람 보는 눈을 더 높이 쳤다고 하고요. 이제는 저도 누군가를 알아봐 줘야 하는 나이라서 그런지, 포숙의 그릇이 자꾸 부럽더라고요.


직장인으로서 제일 뜨끔했던 편은 (공이 이루어지면 몸은 물러나야 한다)였어요. 말년에 처지가 불안해진 범저에게 채택이라는 사람이 찾아와 이렇게 말합니다.


"사계절이 순환하는 것처럼 공을 이룬 자는 때를 맞춰 떠나야 합니다."

채택은 상앙, 오기, 문종처럼 훌륭한 신하들도 공을 세우고 물러나지 않아서 불행하게 끝났다고 짚고, "해가 중천에 뜨면 기울고, 달도 차면 기운다"는 속담까지 꺼내요. 듣는 범저는 꽤 쓰렸을 거 같아요. 자기 자리를 노린다는 소문을 낸 사람한테서 그런 말을 듣는 거니까요. 그런데 범저는 깊이 탄식하더니 받아들입니다. "욕심이 그칠 줄 모르면 하고자 하는 것을 잃고, 가지고 있는데도 만족할 줄 모르면 가진 것을 잃는다"고 들었다면서, 채택을 후임으로 추천하고 재상 자리에서 물러나요.


40대 후반 직장인한테 이 대목은 옛날이야기로만 읽히지 않습니다. 언제까지 앞에 설지, 언제쯤 자리를 내줄지는 다들 입 밖에 내지 않을 뿐 속으로는 늘 하는 계산이거든요. 범저처럼 탄식 한 번으로 내려놓을 수 있을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고요.

마지막 편으로 가면 분위기가 달라져요. (하늘의 도는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에는 백이와 숙제가 나옵니다. 둘은 서로 왕위를 양보하다 함께 나라를 떠났고, 은나라를 치러 가는 무왕의 말고삐를 붙잡고 간언했어요.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다가 굶어 죽습니다. 이어서 사마천이 직접 묻는 목소리가 나와요. 학문을 좋아한 안연은 가난 속에 젊어서 죽었는데, 죄 없는 사람을 해친 도척은 천수를 누렸다고요.


"나는 매우 당혹스럽다. 만일 이러한 것이 하늘의 도라면 이것은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역사가가 당혹스럽다는 말을 그대로 적어 놓은 게 놀라웠습니다. 저자는 이 편 끝에, 사마천 자신도 억울하게 궁형의 치욕을 당했으니 비분강개를 억누를 수 없었을 거라고 덧붙여요. 교훈을 100가지나 모은 책인데도 이 질문 앞에서는 쉬운 답을 내놓지 않는 거 같더라고요. 저는 오히려 그래서 이 책에 믿음이 갔어요.


제가 솔직하게 걸렸던 건 이름이었어요. 범저, 채택, 정안평, 왕계, 상앙, 오기, 문종이 한 편 안에 줄줄이 나오니까 처음엔 누가 누군지 헷갈리더라고요. 한자가 같이 붙어 있고 각주도 있어서 따라가는 데 큰 무리는 없었습니다. 중국사에 약한 저 같은 사람은 이름을 한 번에 다 외우겠다는 욕심만 내려놓으면 마음이 편해요. 범저한테 배운 걸 바로 써먹은 셈이죠.

표지도 한몫합니다. 보랏빛 노을 아래 산 능선이 겹겹이 깔려 있고, 오자서, 관중, 포숙, 진시황, 유방, 한신, 소진, 항우의 이름이 가는 세로줄을 따라 내려와요. 펼쳐 놓기만 해도 서재 분위기가 납니다. 한 번 읽고 꽂아 둘 책이라기보다는 곁에 두고 필요할 때 한 편씩 꺼내 볼 책이라서, <사기, 사람의 그릇>은 소장할 이유가 충분한 거 같아요. 저자가 아들들에게 주려고 쓴 책이라 그런지, 다 읽고 나니 회사 막내한테도 한 권 슬쩍 건네고 싶어지더라고요.


목요일이라 주말까지 하루만 더 버티면 되는 날이네요. 아침저녁 바람이 제법 차가워진 10월 중순에 <사기, 사람의 그릇>을 만나서 제 그릇도 한 번 꺼내 들여다본 기분이에요. 크기는 아직 잘 모르겠고, 금 간 데는 없는지 살살 닦아 보는 중입니다.


나를 알아준 포숙부터 물러날 때를 안 범저까지, 3천 년 전 사람들에게서 지금 내 그릇을 비춰 본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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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 너머에는 사람이 있다
김프로(김동준) 지음 / 모티브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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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조회수 1은 누군가의 하루였다, 화면 너머에는 사람이 있다 서평


예전엔 퇴근하면 숏폼 몇 개 넘기다가 그대로 잠드는 게 하루의 마무리였어요. 서평단을 하면서 겨우 책 쪽으로 손이 가기 시작했는데, 이번에 받은 책이 하필 세계에서 조회수가 제일 많이 나온 유튜버의 책이더군요. 유튜브 끊고 책 본다더니 결국 유튜브로 돌아온 셈이라 혼자 피식 웃었습니다.


조회수 1은 지구 반대편 누군가가 자기 하루에서 3초든 5초든 떼어 내준 시간이라는 것.

이 책은 그 말에서 출발해요.

<화면 너머에는 사람이 있다>는 1억 3천만 구독자 채널을 운영하는 김프로(김동준)의 첫 책입니다. 표지에 '2025 전 세계 유튜브 조회수 1위'라는 문구가 큼직하게 박혀 있어서, 처음엔 알고리즘 공략법 같은 걸 기대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프롤로그를 펼치면 결이 좀 달라요. 숫자가 너무 커서 오히려 현실감이 없을 때도 있었다는 고백부터 나오거든요.


구독자 1억 3천만 명을 달성한 날 팀원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마음껏 축하했다고 해요. 그리고 바로 다음 날엔 어제와 똑같이 일했다고 하더라고요. 이 대목이 이상하게 반가웠어요. 회사 다니는 사람이라면 알 거예요. 큰 건 하나 끝내고 회식까지 했어도 다음 날 아침 메일함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똑같이 쌓여 있다는 걸요. 저자는 그때 "그다음에 우리는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붙들었다고 합니다. 규모는 비교도 안 되지만, 어쩐지 같은 사무실 선배 얘기를 듣는 기분이었어요.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에게 불안함은 매일 찾아온다는 말도 나와요. 오늘 올리는 영상이 잘될지, 사람들이 이 타이밍에서 반응해 줄지, 이 장면이 제대로 전달될지.

세계 1위도 그런 걱정을 하는구나 싶었습니다.

이 책에서 재미있는 단어 하나가 '뷰푸어(View-Poor)'와 '뷰리치(View-Rich)'예요. 조회수를 올리는 방법만 찾다가 사람의 마음을 놓쳐버린 상태를 숫자에 갇힌 뷰푸어라고 부르고, 사람의 마음을 얻는 쪽을 진짜 뷰리치라고 부르더군요. 귀에 쏙 들어오는 말이라 회의 시간에 슬쩍 써먹어 보고 싶어지는 단어였어요.


책 안쪽 디자인도 소소하게 즐거워요. <화면 너머에는 사람이 있다>는 장이 시작될 때마다 유튜브 재생바가 그려져 있는데, 앞쪽 장에선 재생 위치가 앞부분에 있다가 뒤로 갈수록 오른쪽으로 옮겨가는 것 같더라고요. 책 한 권을 영상 한 편처럼 틀어놓은 느낌. 두께는 보통 자기계발서 정도라 가방에 넣고 다니기 부담 없는 편입니다.

유독 속도를 늦춰 따라가게 된 쪽은 PART 2의 비언어 이야기였어요. 김프로 채널 영상은 대사와 자막을 최소화하고, 시선과 몸짓, 찰나의 표정, 행동의 타이밍으로 상황을 전한다고 해요. 출발점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언어와 상관없이 우리 영상을 편하게 즐길 수 있을까?"라는 단순한 고민이었다고 하고요. 메라비언의 법칙도 등장하는데, 모든 상황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고 저자가 먼저 선을 그어두는 게 좋았어요. 아는 척을 과하게 하지 않는 사람 같아서요.


연기를 디렉팅하는 대목에서는 문장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읽게 되더라고요.

"크게 소리치며 화를 내는 것보다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헛웃음을 짓는 찰나의 표정이 상황을 훨씬 더 정확하게 설명할 때가 있습니다."

이 문장을 보니 회사에서 마주치는 얼굴들이 떠올랐어요. 보고하러 들어갔을 때 부장님 눈썹 한쪽이 올라가면 그날 결재 분위기가 다 읽히잖아요. 저자는 선명함과 부자연스러움 사이의 경계를 찾으려고 현장에서 앵글을 바꾸고 표정의 크기를 여러 번 조율한다고 해요. 짧은 영상 하나에 그만한 공이 들어간다는 걸 알고 나니, 그냥 휙휙 넘기던 화면들이 조금 다르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인물 쪽으로는 유백합이라는 사람 이야기가 좋았어요. 김프로 채널의 중심축이자 하나의 IP로 영역을 넓혀가는 인물이래요. 주변 기획자들이 처음에 어떤 설정과 캐릭터를 부여했느냐고 묻곤 한다는데, 저자 대답은 늘 같다고 해요. 설정을 덧붙여 만들어낸 인물이 아니라고요. 본인이 원래 가진 밝고 순수한 에너지가 가장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 환경을 만들어준 게 기획의 핵심이었다고 하더군요.


노래방에서는 쉬지 않고 뛰어놀 만큼 생동감이 넘치는데, 촬영이 끝나면 혼자 공방에 가서 도자기를 빚거나 반려견을 돌보며 에너지를 다시 채우는 사람이래요. 저자는 그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자신이 어느 순간에 에너지가 줄어드는지, 무엇을 해야 다시 좋은 상태로 돌아올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스스로의 균형을 지켜가는 사람입니다."

이 나이가 되니 이게 제일 부럽더라고요. 저는 언제 방전되는지는 기가 막히게 아는데, 충전하는 법은 아직도 헤매는 중이거든요. 요즘은 책이 그 충전기 노릇을 조금 해주는 것 같긴 해요.

솔직하게 하나만 말하면, 채널을 잘 모르는 상태로 펼치면 유백합이라는 이름이 처음엔 살짝 낯설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도 어떤 사람인지 차근차근 풀어주니 금방 친근해집니다.

특별부록에는 영상 뒤의 인간 김프로가 나와요. 첫 영상부터 1억 조회수를 넘겼는데, 감사한 만큼 한 번의 우연으로 끝내지 않아야 한다는 책임감도 생겼다고 해요. 부담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 시간은 어디까지 해낼 수 있는지 넓혀가는 즐거운 시간이기도 했다는 고백도 있고요. 유튜브가 없었다면 무엇을 했을지 상상하는 대목도 재미있었어요. 요식업을 했다면 메뉴를 고르는 순간부터 식사를 마칠 때까지의 흐름을 고민했을 거래요. 듣다 보니 제가 쓰는 보고서나 기획서 너머에도 결국 누군가 앉아 있겠구나 싶어지더군요.


길이나 해외 행사장에서 우연히 마주친 팬이 "영상 정말 잘 보고 있습니다. 팬이에요"라고 건네는 짧은 한마디도 나와요. 그런 모습을 직접 마주하고 나면 다음 영상을 가볍게 만들 수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프롤로그의 조회수 1 이야기와 여기서 딱 맞물리는 느낌이었어요. 화면 속 숫자가 얼굴과 목소리가 되는 순간이라고 해야 할까요.

마지막 인사에서 저자는 AI가 아무리 빨라져도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덜어낼지 정하는 감각은 한 사람의 삶을 통해 만들어진다고 말해요. 그러면서 독자에게는 각자 자신만의 기준을 만들어가라고 당부하고요. 비법 공식을 손에 쥐여주는 대신 기준을 세워보라고 등을 떠미는 마무리라 담백해서 좋았습니다.


<화면 너머에는 사람이 있다>는 콘텐츠 만드는 분들한테는 책상 옆에 두고 가끔 펼쳐볼 만한 책 같아요. 저처럼 화면 앞에서 손가락만 바쁘던 사람이 읽어도 읽는 내내 재미있었고요. 이제 숏폼 하나 넘길 때마다 저 너머에서 표정 하나를 몇 번씩 다시 찍었을 누군가가 떠오를 것 같습니다. 소장해 두고 일이 숫자로만 보이기 시작할 때 다시 꺼내 볼 생각이에요.


10월도 어느새 중순이라 아침저녁 공기가 제법 차졌어요. 주말을 하루 앞둔 목요일, <화면 너머에는 사람이 있다> 덕분에 좋은 사람 이야기 한 편 들은 것 같아 기분 좋은 가을입니다. 뷰리치까지는 몰라도 북리치 정도는 한번 돼보고 싶네요. 다들 환절기 감기 조심하세요.


조회수 1을 누군가의 하루로 읽어낸 사람, 그 숫자 너머의 마음을 들려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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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가 불투명해도 괜찮아, 내가 선명하니까
릴리 지음 / 모티브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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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겨울왕국 50번 보고 떠난 8년 차 워홀러 이야기, 릴리 <미래가 불투명해도 괜찮아, 내가 선명하니까>


"나이를 먹는 것도 짜증 나는데, 나이에 따른 값도 치러야 한다니!"

이 문장에서 피식 웃었어요. 웃다가 살짝 찔리기도 했고요. 마흔 후반을 지나는 아재한테 '나잇값'이라는 말은 거의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단어거든요. 이번에 만난 책은 <미래가 불투명해도 괜찮아, 내가 선명하니까>입니다.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를 오가며 8년째 워킹홀리데이를 이어 가고 있는 릴리 작가의 에세이예요.


'8년 차 워홀러'라는 소개를 처음 봤을 땐 솔직히 월급 홀랑 날리는 이야기인가 했습니다. 워홀이 아재 귀엔 그렇게 들리더라고요. 막상 펼쳐 보니 정반대였어요. 스스로 짠순이라고 부르는 저자가 어학연수에 돈 한 푼 안 쓰고 영어를 붙잡는 이야기부터 나오거든요.

저자는 동생이 셋이나 있는 K-장녀예요. 어릴 때부터 '장녀가 잘되어야 동생들이 잘된다'는 말을 지긋지긋하게 들었고, '도리'라는 단어를 질색했다고 해요. 재수도 휴학도 없이 대학을 칼졸업하고 바로 취직했대요. 그런데 그다음엔 연애, 결혼, 출산, 육아로 이어지는 사회의 퀘스트가 끝도 없이 기다리고 있었고요. 저희 세대는 그 순서를 당연한 줄 알고 살아온 쪽이라 그런지, '남들이 다 하니까'라는 이유로는 그 길을 걷지 않겠다고 선을 긋는 대목이 꽤 시원하게 읽혔습니다.


<미래가 불투명해도 괜찮아, 내가 선명하니까>를 펼치면 꼭지 사이사이에 네 컷 만화가 끼어 있어요. 인스타툰을 그리는 저자답게 분홍 귀를 단 하얀 캐릭터가 나와서, 앞에서 한 이야기를 한 번 더 웃기게 풀어 줍니다. 영국 워홀에 번번이 떨어지던 시절을 그린 컷에선 합격자 명단에 '정×성, 정×진, 정×원'만 있고 내 이름은 없어요. 이름 가린 모양새까지 어찌나 현실적인지.


"퇴근하고 영어공부 하는 나, 좀 멋지잖아?"

만화 속 이 대사가 반가웠어요. 전화영어 레벨 테스트에서 500점 만점에 245점을 받고 "Umm… Like… You know…"만 반복하다 현타가 오는데, 거기서 생각을 휙 뒤집어 버리거든요. 결과보다 했다는 게 중요하다는 거죠. 직장 다니면서 뭐 하나 꾸준히 붙잡아 본 사람이라면 이 컷 앞에서 고개가 끄덕여질 거 같아요. "적절한 자기애는 인생의 윤활유!"라는 마지막 말풍선까지.

맛보기로 하나 꺼내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저자는 좋아하는 영화 하나를 질리도록 보는 방법을 골랐고, 그 영화가 디즈니의 (겨울왕국)이었대요. 처음 20번은 한글 자막으로 줄거리를 잡았고, 그다음부터는 영어 자막으로 봤다고 해요. 50번쯤 되니 화면 보는 것도 지루해져서 음성만 뽑아 출퇴근길에 음악 대신 들었다고 합니다.


"겨울왕국이라면 환장을 한다는 5~7살 여자아이들보다 내가 겨울왕국을 더 많이 봤을 거라고 자부할 수 있다."

이 자부심이 참 귀엽더라고요. 바로 뒤에 붙은 만화에선 "영어 공부가 아니라 최애 대사를 외우는겁니다만"이라고 하는데, 이쯤 되면 영락없는 덕후의 고백이에요.

읽으면서 살짝 걸렸던 꼭지도 있긴 해요. '허락보다 용서가 쉬우니까'입니다. 한국 나이 27살 장녀가 석 달 만난 영국인 남자 친구랑 호주 워홀을 같이 가겠다고 말하는 건, 저자 말로는 "내 손으로 수류탄 핀을 뽑아 안방에 던지는 일"이었대요. 그래서 남자 친구의 존재를 숨기고 일단 떠나는 쪽을 택하죠. 부모 쪽 나이에 더 가까운 저로서는 이 대목이 좀 뜨끔했습니다. 저자 마음도 이해가 가는데, 한국에 남은 부모님 마음이 자꾸 먼저 떠오르더군요. 제임스가 "왜 너는 나랑 만나는 것을 숨기는 거야?" 하고 서운해하는 장면에선 누구 편을 들어야 할지 모르겠고요.


그 마음은 호주 파트에 있는 '보수적인 부모님이 내 비정상적인 삶의 방식을 인정하게 된 일주일'에서 스르르 풀렸어요. 코로나 때문에 3년이나 미뤄졌던 부모님의 호주 방문 이야기예요. 'Welcome to Australia!' 종이를 들고 감동의 재회를 꿈꿨는데, 부모님은 이미 시드니에서 입국 절차를 마친 뒤였대요. 결국 짐 나오는 컨베이어벨트가 훤히 보이는 작은 국내선 공항에서 혼자 민망해졌다는 장면은 웃프기도 했습니다.


부모님 캐리어 안에 가득했던 보리차 티백, 건어물 오징어, 깻잎 통조림. 그리고 제임스가 좋아한다는 말을 지나가듯 들으시고 챙겨 오신 포카리스웨트 분말.

이런 건 설명이 없어도 무슨 마음인지 알 거 같아요. 펍에서 식사를 마친 제임스가 접시를 차곡차곡 쌓아 테이블 끝으로 밀어 두는 걸 보고 부모님이 "제임스는 예의가 참 바른 것 같아."라고 하셨다는 장면도 좋았어요. 아빠가 하신 "패키지여행 가면 이렇게 길거리를 걸을 일이 잘 없는데, 딸 덕분에 시드니 뒷골목도 걸어 다니고 참 신기하고 좋다."라는 말에선 괜히 제 마음까지 따뜻해지더라고요.

유독 천천히, 정독하듯 읽게 된 꼭지는 '매니저의 갑질에 절대 참지 않는 K-워홀러의 생존법'이었습니다. 버마구이 비치의 호텔에서 하우스키핑을 하던 저자한테 50대 중반의 호주 로컬 매니저가 자초지종도 묻지 않고 소리를 지르는데, 그 말이 이래요.


"나는 매니저고 너는 그냥 직원이야! 내 말을 듣기나 해!"

50대 중반이면 저랑 몇 살 차이 안 나는 나이죠. 그래서인지 저자 편에서 화가 나다가도 자꾸 제 쪽을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회사에서 나도 모르게 저런 목소리를 낸 적은 없었나 싶어서요. 알고 보니 그 매니저는 집안 불화로 스트레스가 쌓인 상태였고, 나중에 먼저 찾아와 사과하며 손을 내밀었다고 합니다. 사적인 일을 직장까지 끌고 와 화풀이한 셈이라는 저자의 말이 직장인 귀엔 꽤 아프게 들렸어요. 한국에서였다면 앞에서는 비위를 맞추고 뒤에서 욕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고백 끝에 "이 외국 땅에서 나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사실을 배웠다"는 문장이 이어지는데, 그래서 더 솔직하게 느껴졌습니다.


에필로그를 읽으면 <미래가 불투명해도 괜찮아, 내가 선명하니까>라는 제목이 어디서 왔는지 짐작이 가요. 저자는 워홀을 무작정 권하지 않아요. 워홀이 모두에게 맞지는 않고, 한국에서 커리어를 단단히 쌓아 온 사람일수록 기회비용이 크다고 담담하게 말해 주거든요. 그러면서 "삶의 질을 높이는 간단한 방법은 선택지를 늘리는 일"이라고 합니다. 태어난 나라가 사는 곳을 정하는 대신 내가 사는 곳을 결정한다는 이야기도 이어지고요. 워홀은 만 35세까지라니 저는 이미 훌쩍 넘긴 나이지만, 선택지를 하나라도 더 쥐고 산다는 말은 나이와 상관없이 들리더라고요.


이해 못 할 행동도 꾸준히, 일관되게 밀고 나가다 보면 결국 그 나름의 패턴이 된다는 말까지.

<미래가 불투명해도 괜찮아, 내가 선명하니까>는 에세이치고 제법 도톰한 편이에요. 그래도 꼭지가 짧게 끊기고 사이사이 만화가 있어서 책장이 술술 넘어가요. 목차에도 '렌트비 120만 원 내고 깨달은 내 방의 위대함', '이력서 70곳 광탈 끝에 알아낸 취업 프리패스의 비밀' 같은 제목이 줄줄이 있어요. 워홀을 꿈꾸는 사람한텐 현장 노트처럼 쓰일 거 같고, 저처럼 떠날 일 없는 아재한텐 남의 인생을 실컷 엿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무지갯빛 선이 터지는 가운데 모자를 들어 올려 인사하는 인물이 그려진 표지도 책장에 꽂아 두면 보기만 해도 기분이 밝아져서 소장하기 좋겠더라고요.


10월도 어느새 중순이고 아침저녁 공기가 제법 서늘해졌네요. 주말을 하루 앞둔 목요일이라 그런지, 이 계절에 <미래가 불투명해도 괜찮아, 내가 선명하니까> 같은 씩씩한 이야기를 만난 게 더 반갑습니다. 요즘 노안 때문에 글씨는 좀 불투명하게 보여도 마음만큼은 선명해진 기분이에요. 씩씩한 사람 이야기를 실컷 듣고 온 것 같아서 즐거웠습니다.


정해진 퀘스트를 이탈한 K-장녀가 8년 동안 세 나라를 오가며 하루하루 자기를 선명하게 만들어 간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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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한 오디세이 ㅣ 메이트북스 청소년 1
호메로스 지음, 정영훈 엮음, 이선미 옮김 / 메이트북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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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트로이에서 이타카까지, 스무 해 걸린 퇴근길 <청소년을 위한 오디세이> 서평


트로이에서 10년, 바닷길에서 또 10년.

합치면 스무 해예요. 갓난아이가 청년이 되고도 남는 시간이죠. 엮은이의 말 첫머리에 이 셈이 담담하게 놓여 있는데, 숫자 하나만으로 이 이야기가 괴물 나오는 모험담이면서 결국엔 집에 가고 싶은 한 남자의 이야기라는 게 확 들어오더라고요. 표지 아래쪽에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영화 (오디세이)의 원작이라는 문구를 큼직하게 달고 나온 <청소년을 위한 오디세이>는 그 스무 해를 청소년 눈높이에 맞춰 다시 엮은 책입니다.


10월도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아침저녁 바람이 제법 서늘해졌어요. 목요일이면 마음은 벌써 주말 항구를 향해 노를 젓는데 회사는 아직 닻을 안 풀어주는, 딱 그런 요일이죠. 제목에 '오디'가 들어가서 그런지, 이 양반이 지금 오디(어디)쯤 와 있나 궁금해서 자꾸 다음 장으로 손이 가는 책이었습니다.


<청소년을 위한 오디세이>가 친절하다고 느낀 건 본문에 들어가기 전부터예요. '(오디세이)가 시작되기 전에 있었던 일들'이라는 꼭지가 따로 있는데, 고대 그리스가 한 명의 왕이 다스리는 통일 국가가 아니었다는 얘기부터 꺼내더군요. 스파르타에는 메넬라오스, 미케네에는 그 형 아가멤논, 그리고 서쪽 바다의 작은 섬 이타카에는 오디세우스. 산이 많고 평지가 적은 땅이라 배로 다니는 게 편했고, 그래서 이 이야기에 배와 섬과 항구가 끊임없이 나온다는 설명이 이어집니다. 에리스의 황금 사과에서 파리스의 선택, 헬레네, 10년 전쟁과 목마까지 빠르게 훑은 뒤에 "(오디세이)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라며 본문에 바통을 넘기는데, 드라마 시작 전에 나오는 '지난 이야기' 같아서 좋았어요.


트로이 전쟁을 두고 "완전한 역사 기록도, 완전한 상상 이야기도 아닙니다"라고 정리하는 대목도 있어요. 튀르키예 히사를르크에서 발견된 유적 얘기까지 곁들여서요.

오디세우스는 한 문장으로 소개됩니다. "그의 강력한 무기는 머리였습니다." 아킬레우스처럼 힘으로 밀어붙이는 영웅과는 결이 다르다는 걸 처음부터 이렇게 박아두니까, 뒤에서 그가 꾀를 낼 때마다 '저 양반 또 머리 쓰는구나' 하고 신나게 따라가게 되는 거 같아요.


본문 앞에는 주요 등장인물 페이지도 있습니다. 첫 문장이 "모든 이름을 처음부터 기억할 필요는 없습니다"인데, 이 말에 어깨 힘이 좀 빠지더라고요. 오디세우스의 가족, 그를 돕거나 방해하는 신들, 귀향길에서 만나는 존재들, 이타카에서 기다리는 사람들까지 갈래를 나눠 인물마다 두세 줄씩 정리해 뒀어요.


솔직히 저는 이름에서 한 번씩 걸렸어요. 에우뤼로코스, 에우뤼알로스, 에우마이오스, 에우리클레이아. '에우'로 시작하는 이름이 이렇게 줄줄이 나올 줄은 몰랐거든요. 앞쪽 인물 페이지가 든든하게 느껴진 게 바로 이 대목에서였습니다.


<청소년을 위한 오디세이>는 생김새도 정이 가요. 보통 소설책보다 날씬한 편이라 손에 부담이 없고, 14권으로 나뉜 장마다 파도 무늬 테두리를 두른 표제 면이 따로 들어가 있습니다. 본문 첫머리에는 범선을 새긴 동그란 문양이 하나씩 찍혀 있어서, 장이 바뀔 때마다 배 한 척이 다시 출항하는 기분이 들더군요. 목차에서 제5권부터 제8권까지 제목 앞에 '회고'를 붙여둔 것도 눈에 띄었어요. 원작은 오디세우스가 지난 모험을 돌아보는 부분이 길어서 흐름을 따라가기 어렵다고들 하던데, 이렇게 표시해 두니 지금이 현재인지 옛이야기인지 헷갈릴 일이 없겠더라고요.


맛보기로 하나 꺼내보면 제4권 강가 장면이 좋습니다. 아테나가 친구 모습으로 나우시카아의 꿈에 나타나 빨래하러 가라고 권하고, 나우시카아가 시녀들과 공놀이를 하다 공이 물에 빠지면서 지른 소리에 근처에서 곯아떨어져 있던 오디세우스가 깨어나요. 입을 옷도 없어 나뭇가지로 몸을 가린 채, 어린 왕녀가 놀랄까 봐 일부러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말을 거는 모습. 시녀들은 다 달아났는데 나우시카아 혼자 남아 "당신은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 않습니다"라고 하죠. 그리고 몇 줄 뒤에 "오디세우스는 오랜만에 배불리 먹었습니다"라는 문장이 나와요. 이 짧은 한 줄이 이상하게 좋았어요. 고생한 사람한테 제일 먼저 필요한 게 밥이라는 걸 3천 년 전 사람들도 알았던 모양입니다.


궁전에서도 그래요. 아레테가 그 옷을 알아보고 알키노오스가 딸이 직접 데려왔어야 했다고 하자, 오디세우스가 "따님을 나무라지 마십시오"라며 나우시카아를 감싸요. 알키노오스는 딸과 혼인해 남아준다면 기쁘겠지만 원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억지로 붙잡지 않겠다고 하고요. 이 왕국 사람들, 참 점잖더군요.


잔치 자리에서 눈먼 음유시인 데모도코스가 트로이 전쟁을 노래하자 오디세우스가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우는 대목은 저절로 읽는 속도가 늦춰졌어요. 노래가 멈추면 눈물을 닦고, 다시 시작되면 또 얼굴을 가리고. 주변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했는데 알키노오스만 그걸 지켜봤다고 하죠. 나이 든 남자가 우는 방식이 딱 저렇지 싶어요. 소리는 안 내고, 들킬까 봐 옷자락부터 끌어당기는.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경기 장면에서 분위기가 확 뒤집힙니다. 라오다마스가 같이 겨뤄보자고 권하자 오디세우스는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지금은 하루라도 빨리 고향에 갈 생각뿐이라며 사양해요. 그러자 에우뤼알로스라는 젊은이가 운동은 해본 적도 없는 장사꾼처럼 보인다며 비웃습니다. 오디세우스의 눈빛이 달라지고 한마디가 나오죠. "그대는 사람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군." 그러고는 남들이 쓰던 것보다 크고 무거운 원반을 집어 기록을 훌쩍 넘겨 던진 뒤 "누가 더 던지고 싶다면 나와보시오."


이 대목에서 괜히 제 어깨가 펴졌습니다.

회사에서 마흔 줄을 넘기면 젊은 친구들 눈에 슬슬 한물간 아저씨로 비치는 순간이 오잖아요. 지쳐 보여도 아직 던질 원반 하나쯤은 남아 있다는 걸 보여주는 오디세우스가 3천 년을 건너 동년배처럼 느껴지더라고요.

텔레마코스 쪽 이야기도 좋았어요. 제1권에서 그는 이제 어린아이처럼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이 없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요. 아버지가 돌아오기만 기다리던 아들이 처음으로 제 발로 바다를 건너볼 생각을 하는 순간이죠.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제10권 오두막 장면이었습니다.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의 오두막에서 늙은 거지 행색의 오디세우스와 에우마이오스가 아침을 준비하는데, 개들이 짖지 않고 꼬리를 흔들며 길 쪽으로 달려나가요. "개들이 짖지 않고 반기고 있소." 문 앞에 나타난 건 텔레마코스였어요. 에우마이오스는 손에 든 잔을 떨어뜨린 채 달려가 "사랑하는 아이야"라며 끌어안는데, 정작 친아버지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합니다. 트로이로 떠날 때 갓난아이였던 아들을 스무 해 만에 처음 보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요.


텔레마코스는 처음 보는 노인에게 "손님이여, 그대로 앉아 계십시오. 전 다른 곳에 앉겠습니다"라며 자리를 내줘요. 아비 없이 큰 아들이 낯선 노인에게 이렇게 반듯한 걸 보면, 그 앞에 앉은 아버지 속이 어땠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더라고요.

아테나가 모습을 되돌려준 뒤에도 텔레마코스는 어떤 신이 자기를 속이는 거라며 쉽게 믿지 못해요. 오디세우스는 다른 오디세우스가 이곳에 오는 일은 없다고 말하고, 그 끝에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아버지는 갓난아이였던 아들을 스무 해 만에 끌어안았고, 아들은 평생 이야기로만 들어온 아버지를 처음으로 품에 안았습니다."


같은 포옹을 아버지 쪽에서 한 번, 아들 쪽에서 한 번 그려낸 문장이에요. 스무 해 동안 한쪽은 기억으로, 한쪽은 남이 들려준 이야기로만 서로를 붙들고 있었던 셈이죠. 40대 후반이 되니 이런 장면에서는 아버지 쪽 문장에 먼저 눈이 가는 거 같습니다.


엮은이 정영훈은 "고전은 처음부터 어렵게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말해요. 먼저 이야기에 빠지고 인물을 좋아하게 된 뒤에 원전에 도전해도 늦지 않다고요. 언젠가 완역본을 펼쳤을 때 폴리페모스와 키르케, 세이렌과 페넬로페가 오래전에 만난 인물처럼 반갑게 느껴진다면 이 책은 제 역할을 다한 셈이라는 대목에서 저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맨 뒤에는 '(오디세이)를 읽는 네 가지 프리즘'이라는 해설이 붙어 있어요. 작품이 생겨난 배경과 독특한 서사 구조, 고대 그리스의 문화와 세계관, 후대 문학과 문화에 미친 영향까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본편에 해설까지 읽고 나면 완역본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가 하나 놓이는 거라, 중학생 아이가 있는 집이라면 거실 책장에 꽂아두기 딱 좋겠더라고요. 어른인 저도 제목만 알고 내용은 가물가물했던 (오디세이)를 이 분량으로 한 바퀴 돌고 나니 속이 개운합니다. 제목에 '청소년'이 붙어 있다고 아재가 못 읽을 이유는 하나도 없는 거 같아요.


가을 전어 굽는 냄새에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온다는데, 오디세우스는 전어 한 마리 없이 그 바다를 건너 이타카까지 왔으니 집 생각이 어지간했던 모양입니다.

단풍이 슬슬 물드는 10월 중순에 <청소년을 위한 오디세이>를 끝까지 완주하고 나니 마음 한구석이 든든하네요. 다들 이번 주말엔 각자의 이타카로 무사히 귀향하시길 바랍니다.


스무 해를 돌아 집으로 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쉽고 다정하게 엮어, 청소년도 아재도 끝까지 완주하게 만드는 오디세이 입문서.


#청소년을위한오디세이 #오디세이 #호메로스 #정영훈 #이선미 #메이트북스 #청소년고전 #고전입문 #그리스신화 #오디세우스 #텔레마코스 #트로이전쟁 #놀란오디세이 #영화원작소설 #중학생추천도서 #가을독서 #서평 #책추천 #BOOKU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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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낭만, 일본 소도시 여행 - 소박한 멋과 맛, 낭만이 있는 일본의 작은 여행지 45곳, 최신 개정판
우승민 지음 / 꿈의지도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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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큰 도시 말고 작은 마을로, 서일본 소도시 45곳! 소소낭만, 일본 소도시 여행 리뷰


딱 우동 한 그릇 먹자고 바다를 건너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죠. 예전 같으면 유난이다 싶었을 텐데, 카가와현 우동집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니 그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손님이 들고 온 달걀 하나로 정식 메뉴가 생긴 집, 다시까지 싹 비우고 일어나는 손님이 많은 집, 자리가 12석뿐이라 공터에 서서 먹는 집까지 줄줄이 나오거든요. <소소낭만, 일본 소도시 여행>은 이런 가게와 마을들이 서일본 구석구석에서 쏟아져 나오는 책이더라고요.


10월도 벌써 중순이고, 오늘은 한 주의 한가운데인 수요일이에요. 주말은 아직 멀고 아침저녁 바람이 꽤 서늘해서 따끈한 국물이 당기는 철인데, 하필 이런 책 서평을 쓰고 있으니 배꼽시계가 쉴 틈이 없습니다.


45곳이에요. 시가현 비와코에서 출발해서 오키나와까지 내려갑니다.

<소소낭만, 일본 소도시 여행>은 보통 여행책보다 제법 두툼한 편이에요.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밝히길 킨키, 츄고쿠, 시코쿠, 큐슈, 오키나와를 13개 영역으로 나눠 약 45개 소도시를 담았다고 하니 이 두께가 이해되더라고요. 지역마다 첫 장에 '당일치기 여행'이나 '1박 2일 여행' 같은 여행 형태가 먼저 붙어 있고, 하카타역에서 어느 노선을 타고 어디서 내리는지까지 나와 있어요. 한쪽 구석엔 QR코드가 하나씩 박혀 있고, 가게마다 일본어 주소, 전화번호, 운영시간, 휴무일이 빠짐없이 따라붙습니다. 주소가 일본어 원문 그대로라서 현지에서 택시 기사님께 그냥 보여드려도 되겠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저자 우승민 씨 이력도 흥미롭습니다. 대기업 건설회사 연구소에서 10년을 일하다 후쿠오카로 건너가 2011년부터 그곳에 살고 있다고 해요. 같은 월급쟁이 입장에서 보면 그 결심 하나가 얼마나 큰일이었을지 대충 짐작이 가는 거 같습니다. 프롤로그를 보면 처음 기획하고 7년 만에 나온 책이고, 집필에만 3년이 걸렸다고 하더군요. 출판사에 "조만간 나온다는 거짓말을 일 년 넘게" 했다며 너스레를 떠는데, 그 문장에서 사람 냄새가 확 나서 웃음이 났어요.


취재하면서 겪은 일들도 몇 줄 털어놓습니다. 인적 드문 소도시에서는 "낯선 이에 대한 투철한 신고정신으로 경찰의 심문 및 카메라 검열은 예삿일"이었다고 해요. 그런가 하면 정 많은 현지 사람들과 술자리를 하다가, 부모님 이야기 끝에 서로 부둥켜안고 같이 울었던 노부부 이야기도 나옵니다. 가이드북 서문에 이런 장면이 들어 있을 줄은 몰랐는데, 뒤에 나오는 가게 하나하나가 그냥 정보로만 읽히지 않는 건 이런 대목 덕분인 것 같아요. 서문 끝에는 "오사카로 향하는 ANA 비행기 안에서"라는 서명이 붙어 있었고요.


다른 대목보다 유독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곳은 카가와현 우동 순례 쪽이었어요. 오카센이라는 집은 면을 발로 밟는 족타 작업을 4시간 동안 5번 하는데, 그날그날 온도와 습도를 보고 밟는 힘과 시간을 바꾼다고 합니다. 매일 같은 일을 하면서도 날씨까지 살핀다는 게, 20년 넘게 출근 도장 찍어 온 사람한테는 그냥 넘겨지지 않는 대목이더라고요.


타카마츠의 츠루마루는 밤 8시에 문을 열어 새벽 2시까지 하는 우동집이에요. 사장님이 "술 한잔 걸친 후 마무리로 먹을 수 있는 우동집이 있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가게를 열었대요. 일본에선 보통 술자리 끝을 라멘으로 맺는다는데, 우동현이라 불리는 카가와현 사람들은 우동으로 마무리한다는 거죠. 회식 끝나고 국물 한 그릇이 간절했던 밤이 한두 번이 아닌 아재 입장에선 이 사장님 마음이 참 고맙게 느껴집니다. 손님 90% 이상이 주문한다는 카레 우동은 남은 국물에 오니기리까지 말아 먹으면 더 좋다고 하고요.

남편은 우동을, 부인은 튀김을 맡아 1968년부터 꾸려 온 셀프 우동집 치쿠세이는 반숙 달걀튀김의 원조집으로 알려져 있대요. 설명이 이렇습니다.


"고온에서 튀겨낸 반숙 달걀튀김은 젓가락으로 반을 나누면 노른자가 주르륵 흘러내린다."

이걸 읽고 침 안 삼키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요.

야마고에 우동의 카마타마 유래도 재밌었어요. 1990년대 우동 붐 때 손님 한 분이 갓 삶은 우동에 자기가 가져온 달걀을 풀어 비벼 먹는 걸 보고 정식 메뉴로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손님 한 명이 먹던 방식이 가게 대표 메뉴가 되고 원조집 소리까지 듣게 됐다니, 그걸 알아본 가게의 안목도 대단한 거 같습니다. 젠츠지의 나가타 인 카노카는 큰 술병에 담긴 뜨거운 다시를 병목의 끈을 잡고 컵에 따라 먹는 집이고, 사카이데의 가모는 평온한 농촌 풍경을 보며 한 그릇 비우는 곳이에요.


큐슈로 넘어가면 분위기가 한결 차분해집니다. 표지에 그려진 벚꽃 마을이 아키즈키라는데, 그 근교로 소개된 우키하의 흰 벽 거리 시라카베노 마치나미가 눈에 들어왔어요. 1869년 대화재를 겪은 뒤 초가지붕을 기와로 바꾸고, 벽을 두껍게 해서 회반죽을 바른 집들이 들어서면서 지금의 거리가 됐다고 합니다. 불을 겪은 마을이 다시는 타지 않으려고 고친 모양새가 150년 넘게 남아서 동네의 얼굴이 됐다는 게, 사람 사는 일이랑 닮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계절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산기슭 카페 타네노 토나리는 철마다 한정 파르페를 내고 가을엔 무화과 파르페래요. 추운 날엔 야외 테라스에 코타츠와 난로를 놓아준다니, 날이 더 쌀쌀해지면 생각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고대미를 중심으로 13가지 쌀과 곡물을 섞은 밥에 반찬 10~12가지가 매달 바뀌어 나오는 토나리노 고항도 있고요. 근처의 히타야 후쿠토미는 1889년 오이타현 히타에서 시작해 1947년 우키하로 옮겨 온 과자점인데, 요시이 지하수와 아키즈키 칡으로 만든 두 층짜리 쿠즈 요캉이 대표 메뉴입니다.


오전파와 오후파.

쿠루메의 오키 쇼쿠도 단골들이 이렇게 나뉜다고 해요. 매일 5시간씩 끓이는 돼지뼈 스프가 오전엔 투박하고 진한데, 오후가 되면 부드러워진다나요. 같은 가게 같은 라멘인데 시간대를 골라서 간다니, 라멘도 하루를 사는 셈인가 싶더군요. 쿠루메가 인구 1만 명당 야키토리집이 약 8곳으로 일본에서 가장 많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어요. 호타루가와라는 집에선 돼지 내장 꼬치 다루무가 명물이고, 꼬치 메뉴만 60여 가지라고 합니다.


눈여겨본 게 하나 더 있습니다. 쿠루메 삼대식당을 소개하면서, 1931년에 문을 연 마츠오 쇼쿠도 옆에 '2021년 10월 폐업'이라고 분명히 표시해 뒀더라고요. 문 닫은 집을 슬쩍 빼 버릴 수도 있었을 텐데 그대로 밝혀 둔 걸 보니, 정보를 하나하나 다시 확인했겠구나 싶었어요. <소소낭만, 일본 소도시 여행>이 2018년 초판 이후 계속 손봐 온 책이라는데, 이런 데서 믿음이 생깁니다.

시마바라 근교 오바마온센 편에선 숫자 맞추기가 재밌었어요. 원천 최고 온도가 105도라서 족욕탕 홋토홋토 105도 길이를 105m로 만들었고, 덕분에 일본에서 가장 긴 족욕탕이 됐다고 합니다. 앉아서 발 담그고 타치바나만으로 지는 석양까지 볼 수 있는데 요금이 무료라니, 이건 족히 가볼 만한 곳 같아요. 명소 곳곳에 오바마 초등학교 졸업생들이 만든 설명 간판이 서 있다는 대목도 어쩐지 정겹더군요.


마지막 장은 오키나와 모토부와 나키진손이에요. 오키나와판 '아담과 이브' 신화가 남아 있어서 '사랑의 섬'으로 불린다는 코우리지마, 그 섬까지 차로 건너가는 코우리 대교, 옛 마을 모습이 남은 비세노 후쿠기 나미키 산책길까지.


솔직히 걸렸던 건 가게들 영업시간이었어요. 가모는 오전 8시 30분에 열어서 오후 1시 30분이면 닫고, 우키하의 마보야도 영업시간이 4시간 남짓이라니 욕심대로 하루에 몇 집씩 돌기는 쉽지 않겠더라고요. 츠루마루처럼 밤 8시에야 문을 여는 집도 있으니, 책에 붙은 시간표를 보면서 동선을 꽤 꼼꼼히 짜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거꾸로 생각하면 그런 집들이라서 더 가 보고 싶어지는 것도 같고요.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이번에 빠진 지역들 원고가 계속 눈에 밟힌다면서, 기회가 되면 동일본을 중심으로 홋카이도까지 새로 다뤄 보고 싶다고 했어요. 서쪽을 이만큼 훑어 놓았으니 다음 이야기가 벌써 기다려집니다. <소소낭만, 일본 소도시 여행>은 한 번 읽고 꽂아 두기보다 여행 계획을 세울 때마다 다시 펼치게 될 책 같아요. QR코드 하나 찍으면 지도가 바로 열리니 휴대폰이랑 같이 들고 다니기에도 좋겠고요.


10월 한가운데, 단풍 소식이 조금씩 들려오는 수요일입니다. 표지는 봄 벚꽃으로 가득한데 책 안에는 가을 무화과 파르페도 있고 코타츠 놓인 테라스도 있으니, 계절 가리지 않고 펼쳐 볼 만할 것 같아요. 덕분에 한 주 한가운데서 일본 작은 마을 골목을 한 바퀴 걷고 온 기분이라 좋았습니다.


천고마비의 계절이라더니, 우동이랑 라멘 이야기를 이렇게 읽고 나니 말보다 제가 먼저 살찌게 생겼네요.


우동 한 그릇, 흰 벽 골목 하나, 105m 족욕탕까지, 서일본 작은 마을 45곳을 발로 다니며 담은 정 많은 가이드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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