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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가 불투명해도 괜찮아, 내가 선명하니까
릴리 지음 / 모티브 / 2026년 10월
평점 :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겨울왕국 50번 보고 떠난 8년 차 워홀러 이야기, 릴리 <미래가 불투명해도 괜찮아, 내가 선명하니까>
"나이를 먹는 것도 짜증 나는데, 나이에 따른 값도 치러야 한다니!"
이 문장에서 피식 웃었어요. 웃다가 살짝 찔리기도 했고요. 마흔 후반을 지나는 아재한테 '나잇값'이라는 말은 거의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단어거든요. 이번에 만난 책은 <미래가 불투명해도 괜찮아, 내가 선명하니까>입니다.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를 오가며 8년째 워킹홀리데이를 이어 가고 있는 릴리 작가의 에세이예요.
'8년 차 워홀러'라는 소개를 처음 봤을 땐 솔직히 월급 홀랑 날리는 이야기인가 했습니다. 워홀이 아재 귀엔 그렇게 들리더라고요. 막상 펼쳐 보니 정반대였어요. 스스로 짠순이라고 부르는 저자가 어학연수에 돈 한 푼 안 쓰고 영어를 붙잡는 이야기부터 나오거든요.
저자는 동생이 셋이나 있는 K-장녀예요. 어릴 때부터 '장녀가 잘되어야 동생들이 잘된다'는 말을 지긋지긋하게 들었고, '도리'라는 단어를 질색했다고 해요. 재수도 휴학도 없이 대학을 칼졸업하고 바로 취직했대요. 그런데 그다음엔 연애, 결혼, 출산, 육아로 이어지는 사회의 퀘스트가 끝도 없이 기다리고 있었고요. 저희 세대는 그 순서를 당연한 줄 알고 살아온 쪽이라 그런지, '남들이 다 하니까'라는 이유로는 그 길을 걷지 않겠다고 선을 긋는 대목이 꽤 시원하게 읽혔습니다.
<미래가 불투명해도 괜찮아, 내가 선명하니까>를 펼치면 꼭지 사이사이에 네 컷 만화가 끼어 있어요. 인스타툰을 그리는 저자답게 분홍 귀를 단 하얀 캐릭터가 나와서, 앞에서 한 이야기를 한 번 더 웃기게 풀어 줍니다. 영국 워홀에 번번이 떨어지던 시절을 그린 컷에선 합격자 명단에 '정×성, 정×진, 정×원'만 있고 내 이름은 없어요. 이름 가린 모양새까지 어찌나 현실적인지.
"퇴근하고 영어공부 하는 나, 좀 멋지잖아?"
만화 속 이 대사가 반가웠어요. 전화영어 레벨 테스트에서 500점 만점에 245점을 받고 "Umm… Like… You know…"만 반복하다 현타가 오는데, 거기서 생각을 휙 뒤집어 버리거든요. 결과보다 했다는 게 중요하다는 거죠. 직장 다니면서 뭐 하나 꾸준히 붙잡아 본 사람이라면 이 컷 앞에서 고개가 끄덕여질 거 같아요. "적절한 자기애는 인생의 윤활유!"라는 마지막 말풍선까지.
맛보기로 하나 꺼내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저자는 좋아하는 영화 하나를 질리도록 보는 방법을 골랐고, 그 영화가 디즈니의 (겨울왕국)이었대요. 처음 20번은 한글 자막으로 줄거리를 잡았고, 그다음부터는 영어 자막으로 봤다고 해요. 50번쯤 되니 화면 보는 것도 지루해져서 음성만 뽑아 출퇴근길에 음악 대신 들었다고 합니다.

"겨울왕국이라면 환장을 한다는 5~7살 여자아이들보다 내가 겨울왕국을 더 많이 봤을 거라고 자부할 수 있다."
이 자부심이 참 귀엽더라고요. 바로 뒤에 붙은 만화에선 "영어 공부가 아니라 최애 대사를 외우는겁니다만"이라고 하는데, 이쯤 되면 영락없는 덕후의 고백이에요.
읽으면서 살짝 걸렸던 꼭지도 있긴 해요. '허락보다 용서가 쉬우니까'입니다. 한국 나이 27살 장녀가 석 달 만난 영국인 남자 친구랑 호주 워홀을 같이 가겠다고 말하는 건, 저자 말로는 "내 손으로 수류탄 핀을 뽑아 안방에 던지는 일"이었대요. 그래서 남자 친구의 존재를 숨기고 일단 떠나는 쪽을 택하죠. 부모 쪽 나이에 더 가까운 저로서는 이 대목이 좀 뜨끔했습니다. 저자 마음도 이해가 가는데, 한국에 남은 부모님 마음이 자꾸 먼저 떠오르더군요. 제임스가 "왜 너는 나랑 만나는 것을 숨기는 거야?" 하고 서운해하는 장면에선 누구 편을 들어야 할지 모르겠고요.
그 마음은 호주 파트에 있는 '보수적인 부모님이 내 비정상적인 삶의 방식을 인정하게 된 일주일'에서 스르르 풀렸어요. 코로나 때문에 3년이나 미뤄졌던 부모님의 호주 방문 이야기예요. 'Welcome to Australia!' 종이를 들고 감동의 재회를 꿈꿨는데, 부모님은 이미 시드니에서 입국 절차를 마친 뒤였대요. 결국 짐 나오는 컨베이어벨트가 훤히 보이는 작은 국내선 공항에서 혼자 민망해졌다는 장면은 웃프기도 했습니다.

부모님 캐리어 안에 가득했던 보리차 티백, 건어물 오징어, 깻잎 통조림. 그리고 제임스가 좋아한다는 말을 지나가듯 들으시고 챙겨 오신 포카리스웨트 분말.
이런 건 설명이 없어도 무슨 마음인지 알 거 같아요. 펍에서 식사를 마친 제임스가 접시를 차곡차곡 쌓아 테이블 끝으로 밀어 두는 걸 보고 부모님이 "제임스는 예의가 참 바른 것 같아."라고 하셨다는 장면도 좋았어요. 아빠가 하신 "패키지여행 가면 이렇게 길거리를 걸을 일이 잘 없는데, 딸 덕분에 시드니 뒷골목도 걸어 다니고 참 신기하고 좋다."라는 말에선 괜히 제 마음까지 따뜻해지더라고요.
유독 천천히, 정독하듯 읽게 된 꼭지는 '매니저의 갑질에 절대 참지 않는 K-워홀러의 생존법'이었습니다. 버마구이 비치의 호텔에서 하우스키핑을 하던 저자한테 50대 중반의 호주 로컬 매니저가 자초지종도 묻지 않고 소리를 지르는데, 그 말이 이래요.

"나는 매니저고 너는 그냥 직원이야! 내 말을 듣기나 해!"
50대 중반이면 저랑 몇 살 차이 안 나는 나이죠. 그래서인지 저자 편에서 화가 나다가도 자꾸 제 쪽을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회사에서 나도 모르게 저런 목소리를 낸 적은 없었나 싶어서요. 알고 보니 그 매니저는 집안 불화로 스트레스가 쌓인 상태였고, 나중에 먼저 찾아와 사과하며 손을 내밀었다고 합니다. 사적인 일을 직장까지 끌고 와 화풀이한 셈이라는 저자의 말이 직장인 귀엔 꽤 아프게 들렸어요. 한국에서였다면 앞에서는 비위를 맞추고 뒤에서 욕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고백 끝에 "이 외국 땅에서 나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사실을 배웠다"는 문장이 이어지는데, 그래서 더 솔직하게 느껴졌습니다.
에필로그를 읽으면 <미래가 불투명해도 괜찮아, 내가 선명하니까>라는 제목이 어디서 왔는지 짐작이 가요. 저자는 워홀을 무작정 권하지 않아요. 워홀이 모두에게 맞지는 않고, 한국에서 커리어를 단단히 쌓아 온 사람일수록 기회비용이 크다고 담담하게 말해 주거든요. 그러면서 "삶의 질을 높이는 간단한 방법은 선택지를 늘리는 일"이라고 합니다. 태어난 나라가 사는 곳을 정하는 대신 내가 사는 곳을 결정한다는 이야기도 이어지고요. 워홀은 만 35세까지라니 저는 이미 훌쩍 넘긴 나이지만, 선택지를 하나라도 더 쥐고 산다는 말은 나이와 상관없이 들리더라고요.

이해 못 할 행동도 꾸준히, 일관되게 밀고 나가다 보면 결국 그 나름의 패턴이 된다는 말까지.
<미래가 불투명해도 괜찮아, 내가 선명하니까>는 에세이치고 제법 도톰한 편이에요. 그래도 꼭지가 짧게 끊기고 사이사이 만화가 있어서 책장이 술술 넘어가요. 목차에도 '렌트비 120만 원 내고 깨달은 내 방의 위대함', '이력서 70곳 광탈 끝에 알아낸 취업 프리패스의 비밀' 같은 제목이 줄줄이 있어요. 워홀을 꿈꾸는 사람한텐 현장 노트처럼 쓰일 거 같고, 저처럼 떠날 일 없는 아재한텐 남의 인생을 실컷 엿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무지갯빛 선이 터지는 가운데 모자를 들어 올려 인사하는 인물이 그려진 표지도 책장에 꽂아 두면 보기만 해도 기분이 밝아져서 소장하기 좋겠더라고요.

10월도 어느새 중순이고 아침저녁 공기가 제법 서늘해졌네요. 주말을 하루 앞둔 목요일이라 그런지, 이 계절에 <미래가 불투명해도 괜찮아, 내가 선명하니까> 같은 씩씩한 이야기를 만난 게 더 반갑습니다. 요즘 노안 때문에 글씨는 좀 불투명하게 보여도 마음만큼은 선명해진 기분이에요. 씩씩한 사람 이야기를 실컷 듣고 온 것 같아서 즐거웠습니다.
정해진 퀘스트를 이탈한 K-장녀가 8년 동안 세 나라를 오가며 하루하루 자기를 선명하게 만들어 간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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