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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한 오디세이 ㅣ 메이트북스 청소년 1
호메로스 지음, 정영훈 엮음, 이선미 옮김 / 메이트북스 / 2026년 9월
평점 :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트로이에서 이타카까지, 스무 해 걸린 퇴근길 <청소년을 위한 오디세이> 서평
트로이에서 10년, 바닷길에서 또 10년.
합치면 스무 해예요. 갓난아이가 청년이 되고도 남는 시간이죠. 엮은이의 말 첫머리에 이 셈이 담담하게 놓여 있는데, 숫자 하나만으로 이 이야기가 괴물 나오는 모험담이면서 결국엔 집에 가고 싶은 한 남자의 이야기라는 게 확 들어오더라고요. 표지 아래쪽에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영화 (오디세이)의 원작이라는 문구를 큼직하게 달고 나온 <청소년을 위한 오디세이>는 그 스무 해를 청소년 눈높이에 맞춰 다시 엮은 책입니다.

10월도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아침저녁 바람이 제법 서늘해졌어요. 목요일이면 마음은 벌써 주말 항구를 향해 노를 젓는데 회사는 아직 닻을 안 풀어주는, 딱 그런 요일이죠. 제목에 '오디'가 들어가서 그런지, 이 양반이 지금 오디(어디)쯤 와 있나 궁금해서 자꾸 다음 장으로 손이 가는 책이었습니다.
<청소년을 위한 오디세이>가 친절하다고 느낀 건 본문에 들어가기 전부터예요. '(오디세이)가 시작되기 전에 있었던 일들'이라는 꼭지가 따로 있는데, 고대 그리스가 한 명의 왕이 다스리는 통일 국가가 아니었다는 얘기부터 꺼내더군요. 스파르타에는 메넬라오스, 미케네에는 그 형 아가멤논, 그리고 서쪽 바다의 작은 섬 이타카에는 오디세우스. 산이 많고 평지가 적은 땅이라 배로 다니는 게 편했고, 그래서 이 이야기에 배와 섬과 항구가 끊임없이 나온다는 설명이 이어집니다. 에리스의 황금 사과에서 파리스의 선택, 헬레네, 10년 전쟁과 목마까지 빠르게 훑은 뒤에 "(오디세이)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라며 본문에 바통을 넘기는데, 드라마 시작 전에 나오는 '지난 이야기' 같아서 좋았어요.
트로이 전쟁을 두고 "완전한 역사 기록도, 완전한 상상 이야기도 아닙니다"라고 정리하는 대목도 있어요. 튀르키예 히사를르크에서 발견된 유적 얘기까지 곁들여서요.
오디세우스는 한 문장으로 소개됩니다. "그의 강력한 무기는 머리였습니다." 아킬레우스처럼 힘으로 밀어붙이는 영웅과는 결이 다르다는 걸 처음부터 이렇게 박아두니까, 뒤에서 그가 꾀를 낼 때마다 '저 양반 또 머리 쓰는구나' 하고 신나게 따라가게 되는 거 같아요.

본문 앞에는 주요 등장인물 페이지도 있습니다. 첫 문장이 "모든 이름을 처음부터 기억할 필요는 없습니다"인데, 이 말에 어깨 힘이 좀 빠지더라고요. 오디세우스의 가족, 그를 돕거나 방해하는 신들, 귀향길에서 만나는 존재들, 이타카에서 기다리는 사람들까지 갈래를 나눠 인물마다 두세 줄씩 정리해 뒀어요.
솔직히 저는 이름에서 한 번씩 걸렸어요. 에우뤼로코스, 에우뤼알로스, 에우마이오스, 에우리클레이아. '에우'로 시작하는 이름이 이렇게 줄줄이 나올 줄은 몰랐거든요. 앞쪽 인물 페이지가 든든하게 느껴진 게 바로 이 대목에서였습니다.

<청소년을 위한 오디세이>는 생김새도 정이 가요. 보통 소설책보다 날씬한 편이라 손에 부담이 없고, 14권으로 나뉜 장마다 파도 무늬 테두리를 두른 표제 면이 따로 들어가 있습니다. 본문 첫머리에는 범선을 새긴 동그란 문양이 하나씩 찍혀 있어서, 장이 바뀔 때마다 배 한 척이 다시 출항하는 기분이 들더군요. 목차에서 제5권부터 제8권까지 제목 앞에 '회고'를 붙여둔 것도 눈에 띄었어요. 원작은 오디세우스가 지난 모험을 돌아보는 부분이 길어서 흐름을 따라가기 어렵다고들 하던데, 이렇게 표시해 두니 지금이 현재인지 옛이야기인지 헷갈릴 일이 없겠더라고요.
맛보기로 하나 꺼내보면 제4권 강가 장면이 좋습니다. 아테나가 친구 모습으로 나우시카아의 꿈에 나타나 빨래하러 가라고 권하고, 나우시카아가 시녀들과 공놀이를 하다 공이 물에 빠지면서 지른 소리에 근처에서 곯아떨어져 있던 오디세우스가 깨어나요. 입을 옷도 없어 나뭇가지로 몸을 가린 채, 어린 왕녀가 놀랄까 봐 일부러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말을 거는 모습. 시녀들은 다 달아났는데 나우시카아 혼자 남아 "당신은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 않습니다"라고 하죠. 그리고 몇 줄 뒤에 "오디세우스는 오랜만에 배불리 먹었습니다"라는 문장이 나와요. 이 짧은 한 줄이 이상하게 좋았어요. 고생한 사람한테 제일 먼저 필요한 게 밥이라는 걸 3천 년 전 사람들도 알았던 모양입니다.

궁전에서도 그래요. 아레테가 그 옷을 알아보고 알키노오스가 딸이 직접 데려왔어야 했다고 하자, 오디세우스가 "따님을 나무라지 마십시오"라며 나우시카아를 감싸요. 알키노오스는 딸과 혼인해 남아준다면 기쁘겠지만 원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억지로 붙잡지 않겠다고 하고요. 이 왕국 사람들, 참 점잖더군요.
잔치 자리에서 눈먼 음유시인 데모도코스가 트로이 전쟁을 노래하자 오디세우스가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우는 대목은 저절로 읽는 속도가 늦춰졌어요. 노래가 멈추면 눈물을 닦고, 다시 시작되면 또 얼굴을 가리고. 주변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했는데 알키노오스만 그걸 지켜봤다고 하죠. 나이 든 남자가 우는 방식이 딱 저렇지 싶어요. 소리는 안 내고, 들킬까 봐 옷자락부터 끌어당기는.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경기 장면에서 분위기가 확 뒤집힙니다. 라오다마스가 같이 겨뤄보자고 권하자 오디세우스는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지금은 하루라도 빨리 고향에 갈 생각뿐이라며 사양해요. 그러자 에우뤼알로스라는 젊은이가 운동은 해본 적도 없는 장사꾼처럼 보인다며 비웃습니다. 오디세우스의 눈빛이 달라지고 한마디가 나오죠. "그대는 사람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군." 그러고는 남들이 쓰던 것보다 크고 무거운 원반을 집어 기록을 훌쩍 넘겨 던진 뒤 "누가 더 던지고 싶다면 나와보시오."
이 대목에서 괜히 제 어깨가 펴졌습니다.
회사에서 마흔 줄을 넘기면 젊은 친구들 눈에 슬슬 한물간 아저씨로 비치는 순간이 오잖아요. 지쳐 보여도 아직 던질 원반 하나쯤은 남아 있다는 걸 보여주는 오디세우스가 3천 년을 건너 동년배처럼 느껴지더라고요.
텔레마코스 쪽 이야기도 좋았어요. 제1권에서 그는 이제 어린아이처럼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이 없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요. 아버지가 돌아오기만 기다리던 아들이 처음으로 제 발로 바다를 건너볼 생각을 하는 순간이죠.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제10권 오두막 장면이었습니다.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의 오두막에서 늙은 거지 행색의 오디세우스와 에우마이오스가 아침을 준비하는데, 개들이 짖지 않고 꼬리를 흔들며 길 쪽으로 달려나가요. "개들이 짖지 않고 반기고 있소." 문 앞에 나타난 건 텔레마코스였어요. 에우마이오스는 손에 든 잔을 떨어뜨린 채 달려가 "사랑하는 아이야"라며 끌어안는데, 정작 친아버지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합니다. 트로이로 떠날 때 갓난아이였던 아들을 스무 해 만에 처음 보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요.
텔레마코스는 처음 보는 노인에게 "손님이여, 그대로 앉아 계십시오. 전 다른 곳에 앉겠습니다"라며 자리를 내줘요. 아비 없이 큰 아들이 낯선 노인에게 이렇게 반듯한 걸 보면, 그 앞에 앉은 아버지 속이 어땠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더라고요.
아테나가 모습을 되돌려준 뒤에도 텔레마코스는 어떤 신이 자기를 속이는 거라며 쉽게 믿지 못해요. 오디세우스는 다른 오디세우스가 이곳에 오는 일은 없다고 말하고, 그 끝에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아버지는 갓난아이였던 아들을 스무 해 만에 끌어안았고, 아들은 평생 이야기로만 들어온 아버지를 처음으로 품에 안았습니다."
같은 포옹을 아버지 쪽에서 한 번, 아들 쪽에서 한 번 그려낸 문장이에요. 스무 해 동안 한쪽은 기억으로, 한쪽은 남이 들려준 이야기로만 서로를 붙들고 있었던 셈이죠. 40대 후반이 되니 이런 장면에서는 아버지 쪽 문장에 먼저 눈이 가는 거 같습니다.
엮은이 정영훈은 "고전은 처음부터 어렵게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말해요. 먼저 이야기에 빠지고 인물을 좋아하게 된 뒤에 원전에 도전해도 늦지 않다고요. 언젠가 완역본을 펼쳤을 때 폴리페모스와 키르케, 세이렌과 페넬로페가 오래전에 만난 인물처럼 반갑게 느껴진다면 이 책은 제 역할을 다한 셈이라는 대목에서 저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맨 뒤에는 '(오디세이)를 읽는 네 가지 프리즘'이라는 해설이 붙어 있어요. 작품이 생겨난 배경과 독특한 서사 구조, 고대 그리스의 문화와 세계관, 후대 문학과 문화에 미친 영향까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본편에 해설까지 읽고 나면 완역본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가 하나 놓이는 거라, 중학생 아이가 있는 집이라면 거실 책장에 꽂아두기 딱 좋겠더라고요. 어른인 저도 제목만 알고 내용은 가물가물했던 (오디세이)를 이 분량으로 한 바퀴 돌고 나니 속이 개운합니다. 제목에 '청소년'이 붙어 있다고 아재가 못 읽을 이유는 하나도 없는 거 같아요.
가을 전어 굽는 냄새에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온다는데, 오디세우스는 전어 한 마리 없이 그 바다를 건너 이타카까지 왔으니 집 생각이 어지간했던 모양입니다.
단풍이 슬슬 물드는 10월 중순에 <청소년을 위한 오디세이>를 끝까지 완주하고 나니 마음 한구석이 든든하네요. 다들 이번 주말엔 각자의 이타카로 무사히 귀향하시길 바랍니다.
스무 해를 돌아 집으로 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쉽고 다정하게 엮어, 청소년도 아재도 끝까지 완주하게 만드는 오디세이 입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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