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해내는 사람의 일의 공식 - 대체 불가능한 나로 성장하는 일잘러 사수의 인사이트
김영진(모두의 사수) 지음 / 코리아닷컴(Korea.com)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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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488쪽. 손에 얹으면 무게가 그대로 전해집니다. 표지는 흰 바탕 위에 노랑과 파랑만 써서 시원하게 트여 있고, 굵은 손글씨풍 레터링이 화면 밖으로 튀어나올 듯 배치되어 있어요. 목소리가 큰 선배가 문 앞에 서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첫 장을 펼쳤을 때 조금 의외였습니다. 들어가는 글의 제목이 '저는 당신보다 느린 사람이었습니다'였거든요.


김영진 저자는 디자이너로 첫 직장에 들어갔는데 포토샵을 다룰 줄 몰랐다고 밝힙니다. 두 번째 직장인 마케팅 대행사에서는 마케팅의 'ㅁ'자도 모르는 상태로 현장에 던져졌다고 하고요. 자기계발서의 서문이 대개 성취를 앞세우는 것과 반대편에서 문을 여는 셈입니다. 자신을 최고의 실력자가 아니라 해설자로 규정하는 대목에서, 이 두꺼운 도서가 훈계집은 아닐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결국 해내는 사람의 일의 공식>은 일머리를 다섯 계단으로 나눠 놓았습니다. 마음가짐과 태도에서 시작해 사회성, 실무 능력, 협업 능력을 거쳐 자기 확신에 이르고, 그 뒤에 패시브 스킬이라는 별도의 장을 붙여 사람 공부와 문제 정의, 인맥, 신뢰를 자산으로 정리합니다. 저연차든 고연차든 반드시 첫 단계부터 읽으라는 당부가 앞머리에 놓여 있고요. 저자는 이 책을 단숨에 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부탁합니다. 머리로 안다고 생각하지만 행동할 수 없다면 진짜 아는 것이 아니라는 이유였습니다. 두께가 부담스럽게 느껴졌던 마음이 그 문장 앞에서 조금 풀렸습니다.


제 나이대의 직장인이라면 이 책의 제목이 되는 단어 하나에 걸릴 겁니다. 사수요. 저자는 평사원으로 입사한 지 2년 만에 사수도 인수인계도 없이 팀장 자리에 올랐다고 씁니다. 리더십을 배워 본 적 없는 상태에서 타인을 관리하고 성과를 책임져야 했고, 임원진은 팀원을 관리하라고 지시했지만 방황하는 자신을 이끌어 줄 사람은 조직 안에 없었다는 서술이 이어집니다. 도움을 기다릴 수 없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는 흐름인데, 그 질문이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만약 나를 진심으로 돕는 멘토가 곁에 있다면, 지금 나에게 어떤 조언을 해줄까?"


챙김을 받아 본 기억은 희미한데 어느새 누군가를 챙겨야 하는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꽤 많을 거예요. 이 책이 사수를 빌려준다는 카피를 앞세운 이유가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습니다.


책의 뒷부분에 친구 이야기가 하나 나옵니다. 누구보다 성실하게 회사 생활을 했던 친구가 커리어 정체를 겪으며 저자에게 털어놓은 말이라고 해요.


"누구보다 열심히 할 자신은 있는데, 무엇을 열심히 해야 할지 그걸 못 정했어. 이걸 누가 정해줬으면 좋겠다."


성실함으로 버텨 온 세대의 곤란이 이 짧은 문장에 다 담겨 있습니다. 저자는 여기서 많은 사람이 성실하게 일할 준비는 되어 있지만 방향을 잡지 못해 방황한다고 정리하고, 친구가 갖지 못했던 역량을 자신을 경영하는 힘이라고 이름 붙입니다. 그 힘을 기르는 방법으로 제시하는 것이 셀프 피드백 루프고요. 한 달에 한 번, 딱 한 시간을 잡아 여섯 가지 질문에 답하는 방식입니다. 출근하는 원동력이 무엇인가, 회사에서 이루고 싶은 목표가 무엇인가, 인생에서 이루고 싶은 목표가 무엇인가로 이어지는 문답인데, 세 번째 질문의 설명이 오래 남았습니다. 직함과 명함을 걷어냈을 때 자신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지 묻는 자리라고 하더군요. 이 단계의 예시로 가족의 안정적인 생활 보장이나 건강하고 안정적인 노후 준비 같은 문장이 붙어 있는데, 어느 연차에서 이 문장을 적게 되는지 짐작이 갔습니다.


답이 금방 나오지 않아도 괜찮다는 안내가 붙어 있는 점도 마음에 들었어요. 저자 자신도 어떤 질문에는 수개월 동안 명확한 답을 적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그 한 줄이 있어서 여섯 질문이 과제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신뢰를 다루는 장은 이 책에서 가장 단단합니다. 급여를 일터에서 보낸 시간에 대한 대가로 보지 않고, 쌓아 올린 신뢰의 크기를 돈으로 환산한 결과물이라고 설명하거든요. 서문에서 돈을 지불하는 사람은 이유 없이 지갑을 열지 않는다고 던져 둔 이야기를 책의 끝자락에서 회수하는 구조라, 500쪽에 가까운 분량이 흩어지지 않고 한 방향을 향합니다. 특히 일관된 원칙과 문제 해결 능력을 조직 시스템을 벗어나는 순간에도 나에게 귀속되는 이동 가능한 자산이라고 부르는 대목은, 표지에 적힌 '대체 불가능한 나로 성장하는'이라는 부제와 정확히 맞물립니다. 회사 밖으로 무엇을 가지고 나갈 수 있는지 슬슬 계산이 시작되는 나이라서 이 문단이 유독 실감 나게 읽혔습니다.


같은 장에서 저자가 자기 인식을 되짚는 부분도 좋았습니다. 신입 시절 실수가 두려워 질문을 참고 상황을 모면하려 했던 행동을, 자신의 부족함을 타인이 눈치채지 못하게 감출 수 있다는 오만한 생각이었다고 적어요. 이어 내가 친절했으니 상대도 보상해야 한다고 여긴 계산적 태도 역시 상대를 통제하려는 오만이었다고 인정합니다. 위축과 오만을 한 뿌리에서 나온 것으로 묶는 관점인데, 잘 보이려는 마음과 마음대로 하려는 마음이 결국 같은 곳에서 자란다는 이야기로 읽혔습니다. 성취의 순간에도 내 말이 곧 정답이라고 믿는 순간 스스로가 도려내야 할 대상이 된다고 못 박는 대목에서는, 저자가 자기 성공 서사에 직접 브레이크를 걸어 두었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다만 끝까지 매끄럽게 동의만 하지는 못했습니다. 새벽 4시에 물류팀으로 출근해 제품을 적재하고 6시에 생산팀으로 옮겨 공정 시간을 재고 9시에 운영팀으로 돌아왔다는 하루의 동선, 탕비실 커피머신 청소부터 아무도 하지 않는 궂은일까지 먼저 손을 들었다는 진술은 분명 저자를 지금의 자리로 데려간 힘일 겁니다. 그런데 책 중간에 이런 일화가 나옵니다. 팀장 시절 한 동료가 왜 그렇게 아등바등 사냐, 그렇게 일하면 건강만 버린다며 적당히 일할 것을 권했다는 이야기요. 저자는 그 말을 들은 뒤 자기 일의 원동력이 돈이 아니었음을 확인했다고 쓰고 넘어갑니다. 건강만 버린다는 지적 자체에는 응답이 없었어요. 헌신의 강도를 성장의 조건으로 놓는 서술이 요즘의 노동 감각과 어디까지 나란히 갈 수 있을지, 그 대목에서 잠깐 걸음이 멈췄습니다. 신뢰를 깨는 태도는 교육이 아닌 배제의 대상이라는 단언도 방향으로는 옳지만, 인사권이 없는 중간 자리에서 실제로 얼마나 실행 가능한 조언인지는 조금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럼에도 이 책을 덮을 때 남는 것은 압박감이 아닙니다. 저자가 앞머리에 적어 둔 문장처럼, 남들보다 더 많이 헤매고 처절하게 넘어져 본 사람이 길목마다 표지판을 세워 둔 느낌에 가깝습니다. 신뢰의 첫 단추가 거창한 성과가 아니라 아주 사소한 마무리에 있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동료들의 기억에 "저 친구는 적어도 자기 몫은 해낸다"는 증거로 남는 것부터 시작하라고 하거든요. 이 정도의 출발선이라면 지금 어느 계단에 서 있든 다시 밟아 볼 수 있겠습니다. 후배에게 무엇을 어디서부터 알려 줘야 할지 막막했던 분들이라면 앞쪽 두 계단을 특히 천천히 읽어 보시길 권합니다. 조직에서 사람 문제로 소진된 시기를 지나고 있다면 신뢰를 다룬 장부터 펼쳐도 좋을 것 같아요.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만나다 보면 완독이 목표가 되는 순간이 오는데, 이번에는 반대로 읽는 속도를 늦추게 됐습니다. 단숨에 읽지 말라던 저자의 부탁을 지키고 싶어서였고, 실제로 그렇게 읽어야 남는 종류의 도서였습니다. 다 읽고 덮어 버릴 한 권이 아니라 책상 옆에 두고 한 달에 한 번 펼칠 자료로 남겨 두려 합니다.


처서를 앞둔 며칠, 낮의 열기는 여전한데 저녁 공기에서는 확실히 결이 달라진 것이 느껴집니다. 한 해의 절반을 넘긴 시점에 남은 넉 달을 어떻게 쓸지 정리하기에 나쁘지 않은 계절이에요. 하반기 목표를 다시 적어 보려는 분들에게, 여섯 가지 질문이 적힌 이 안내서가 조용한 동행이 되어 줄 것 같습니다.


사수 없이 여기까지 걸어온 사람에게, 지름길 대신 계단의 위치를 알려 주는 488쪽의 이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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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팝 데몬 헌터스 오리지널 주니어 스토리북 ㅣ 케이팝 데몬 헌터스 공식 시리즈
서울문화사 편집부 엮음 / 서울문화사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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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하드커버라 무게를 좀 각오했는데, 손에 올려 보니 두께가 딱 알맞습니다. 아이가 혼자 들고 다니기에도 무리가 없을 정도예요. 그리고 표지를 한참 들여다봤습니다. 이 한 장에 이야기가 거의 다 들어 있어요.


보랏빛으로 물든 서울의 밤, 오른쪽 끝에 작게 선 남산 타워, 그 앞을 채운 대형 전광판. 화면 안에는 무대용 얼굴을 한 세 사람이 있고, 화면 밑 실제 바닥에는 검은 전투복을 입고 무기를 든 같은 세 사람이 자리를 잡고 서 있습니다. 위쪽은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모습, 아래쪽은 밤이 되면 감당해야 하는 몫. 한 장면을 위아래로 나눠 놓은 이 구성이 마음에 들었어요. 맨 아래 어둠 속에 웅크린 악귀들까지 눈에 들어오면, 빛과 그늘이 늘 붙어 다닌다는 것도 함께 전해집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 오리지널 주니어 스토리북>은 넷플릭스 애니메이션을 어린 독자가 읽을 수 있는 산문으로 옮긴 책입니다. 헌트릭스는 공연장을 가득 채우는 아이돌이면서, 사람 사는 세상을 넘보는 악귀와 맞서는 헌터예요. 노래와 춤이 곧 무기인 이들 앞에 사자 보이즈라는 악귀 아이돌 그룹이 나타나고, 팬들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느냐에 따라 혼문의 힘이 흔들립니다. 싸움의 승패가 무기의 성능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으로 결정된다는 설정이 참 좋습니다.


애니메이션은 이미 봤습니다. 그것도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어요. 그래서 글로 옮기면 그 소리와 속도가 빠져 심심해지지 않을까 싶었는데, 읽어 보니 다른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화면에서는 음악과 화면 전환에 실려 흘러갔던 대사와 표정이, 문장 안에서는 제자리를 얻습니다. 무대 장면을 읽는 동안 머릿속에서 그 곡이 저절로 재생되고, 가사의 뜻이 오히려 또렷해졌어요. 팬이라면 이 겹쳐 읽기가 꽤 반가울 겁니다.


가장 오래 눌러 앉게 된 쪽은 루미입니다. 무대에서는 흔들림 없는 얼굴로 서 있어야 하고, 정작 자기 안에 있는 것은 누구에게도 꺼내지 못하는 상태. 아이들이 읽는 판타지의 문법 안에 담겨 있지만, 사십 대 후반의 독자가 읽으면 판타지의 옷이 벗겨집니다. 맡은 자리에서 멀쩡한 표정을 유지하는 일, 그 아래로 삼켜 둔 것을 혼자 감당하는 일. 어지간한 어른이라면 겪어 봤을 시간이지요. 그래서 이 이야기가 결국 도착하는 지점이 오래 남습니다. 감춘 것을 드러냈을 때 무너지지 않았고, 오히려 곁에 있던 사람들이 그 자리를 함께 받아 주었다는 결말. 어린 독자에게는 용기의 이야기로 읽힐 테고, 어른에게는 조용한 위로로 남을 겁니다.


홍보 이미지에 실린 "팬들이 좋으면 혼문도 좋다!"라는 문구를 처음 봤을 때는 그저 유쾌한 농담으로 읽었어요. 그런데 다 읽고 나니 이 말이 작품의 심장에 가깝습니다. 세상을 막아 주는 벽이 결국 나를 향한 누군가의 마음으로 세워진다는 이야기니까요. 친구를 지키고, 세상을 구하고, 자신의 마음과 마주하는 순서로 이 여정을 요약할 수 있겠는데, 저는 맨 마지막 것이 앞의 둘을 가능하게 했다고 봅니다.


컬러 화보 열여섯 페이지도 좋았습니다. 좋아하던 장면이 종이 위에 크게 인쇄되어 있으면, 그때 느낀 것이 되살아납니다. 화면은 흘러가 버리는데 인쇄된 장면은 손으로 붙잡을 수 있으니까요. 이 책을 소장하고 싶은 팬 마음이 어디서 오는지 알겠더군요.



책과 좀 멀어진 아이에게 권하기에 이보다 좋은 통로도 흔치 않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좋아하는 마음이 이미 있으면 문장을 읽어 내는 힘도 붙거든요. 애니메이션을 안 본 사람에게는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되고, 여러 번 본 사람에게는 되새기는 시간이 됩니다. 어른이 먼저 읽고 슬쩍 건네는 방식도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아이가 요즘 무엇에 빠져 있는지 알고 싶은데 대화의 실마리가 마땅치 않은 집이라면, 같이 읽는 것만으로 이야기가 시작될 겁니다.


서평단으로 받는 책들은 대개 무게가 있는 편인데, 이렇게 밝고 힘 있는 이야기가 사이에 섞여 들어오는 날은 결이 확 달라집니다. 아이들 책을 읽는 시간이 어른에게도 회복이 된다는 것을 이번에 다시 확인했어요.


여름이 마지막 힘을 쓰는 8월 중순입니다. 창을 열면 뜨거운 공기가 먼저 들어오는 시기인데, 이런 날에는 이렇게 반짝이는 한 권이 잘 넘어갑니다. 조금 뒤면 아침 공기가 서늘해질 텐데, 그 전에 좋아하는 세계 하나를 문장으로 다시 만나 보는 것도 괜찮은 여름의 마무리가 될 것 같습니다.


화면으로 사랑받은 이야기가 문장으로 자리를 옮겨, 감춘 것을 드러낼 용기와 그 곁을 지켜 주는 마음까지 어린 독자와 어른 독자 모두에게 건네주는 스토리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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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점프 - 포트폴리오를 버린 날, 부의 점프가 시작됐다
상승미소(이명로) 지음 / 스마트북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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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책 한가운데에 건물 그림이 하나 있습니다. 1층은 전력과 데이터센터와 통신, 2층은 칩과 하드웨어, 3층은 데이터와 전처리 인프라, 4층은 파운데이션 모델, 5층은 피지컬 AI, 6층은 서비스와 응용. 저자는 AI 산업 전체를 이렇게 여섯 층으로 쌓아 세우고, 그것을 세 개의 막으로 다시 묶습니다. 1막은 이미 부를 거두는 중, 2막은 빅테크의 영토, 3막은 아직 승자 미정. 그림 아래에 붙은 한 줄이 이 장의 요지를 미리 말해 줍니다. 지금 1막에 몰려 있다. 그러나 골드러시의 진짜 부는 항상 뒤쪽 막에서 났다.


<부의 점프>는 <월급쟁이 부자들>과 <돈의 감각>을 쓴 상승미소, 이명로 저자의 신작입니다. 해설자 자리에서 내려와 직접 시장에 들어간 6년의 기록이라는 소개가 붙어 있고, 잔고를 20배로 키웠다는 문장이 앞자리에 놓여 있습니다. 배수를 앞세운 책에 손이 잘 가지 않는 편인데, 표지의 원들을 보다가 마음이 조금 열렸습니다. 검정과 회색 사이에 연보라와 연청색이 섞인 점들이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위로 계단처럼 오르는데, 상승 그래프이기도 하고 흩어진 점 가운데 몇 개만 골라 한 줄로 세워둔 흔적처럼도 보였어요. 전략적 집중이라는 띠지 문구가 이미 표지에 그려져 있던 셈입니다.


4장의 층별 설명은 이 책에서 가장 손에 잡히는 부분입니다. 1층 이야기는 전기가 모자란다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미국 전체 전력 수요는 지난 20년간 거의 늘지 않았는데 AI 데이터센터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2030년까지의 증가폭이 지난 20년 변화량의 몇 배가 될 것으로 본다는 대목이죠. 데이터센터 한 곳이 100메가와트에서 500메가와트를 쓰고, 100메가와트면 일반 가정 10만 가구가 동시에 쓰는 양이라는 비교가 뒤따릅니다. 그래서 짓고 싶어도 짓지 못하는 상황이 되고, 대형 변압기 한 대 만드는 데 1년이 걸리며 그걸 만들 수 있는 회사는 전 세계에 손가락으로 꼽힌다고 해요. 저자는 이 지점에서 1막의 주인공을 광부가 아니라 광산 자체를 짓는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전기와 데이터가 흐르는 길, 그 길목마다 자리잡은 회사들이라는 정리가 명료했습니다.


2층으로 올라가면 엔비디아 이야기가 나오는데, 저자의 시선은 오히려 그 위아래를 훑습니다. 엔비디아는 GPU를 만드는 공장이 없고 회로도를 그리는 데까지만 하며, 그 설계도를 실제 실리콘에 새기는 일은 TSMC가 한다는 것. TSMC가 쓰는 EUV 노광 장비는 네덜란드 ASML 한 곳만 만들고 한 대 가격이 4천억 원을 넘는다는 것. 그러니까 시장이 엔비디아 하나만 보고 있을 때 그 위와 아래에 누가 있는지를 보는 것이 이 층을 읽는 방법이라고 저자는 씁니다. HBM에서 SK하이닉스가 세계 1위이고 그 뒤를 삼성전자가 따라간다는 대목, 학습 단계에서는 HBM이 핵심이지만 학습된 데이터를 쌓아두고 운영하는 단계로 들어가면 SSD 수요가 폭발한다는 관찰도 함께 놓여 있습니다. 냉각 쪽 이야기는 특히 새로웠어요. 엔비디아 H100 한 대의 발열이 노트북 수십 배라 공기로 식히는 방식은 한계에 도달했고, 액체를 칩에 직접 닿게 하는 냉각이 새 표준이 되고 있다는 설명입니다.


여기서 저자가 곧바로 브레이크를 거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1층 자리는 이미 시장이 알고 있고, 한국 변압기 3사는 지난 1~2년 사이 꽤 많이 올랐으니 추격 매수보다 조정 국면을 기다리는 인내가 더 필요할 때로 보인다는 대목. 2층도 마찬가지라며 이렇게 덧붙입니다. "가장 좋은 자리는 늘 시장의 시선이 다른 데로 한 번 옮겨갔다가, 다시 돌아오기 직전에 들어가는 자리입니다." AI 인프라가 중요하니 관련 기업은 모두 좋다는 생각을 착각이라고 짚으면서, 병목을 쥔 기업과 단순 납품 기업은 다르고 수주가 늘어도 이익률이 낮을 수 있다고 경고하는 문장도 있습니다.


다만 이 지도를 읽으며 남은 의문이 하나 있습니다. 층마다 회사 이름이 촘촘히 박혀 있어 지금은 지도로 유용한데, 이런 목록은 시간이 지날수록 빠르게 낡습니다. 이미 시장이 아는 자리라고 저자가 직접 말하는 층에 가장 많은 지면이 배정된 것도 조금 아쉬웠어요. 진짜 부가 뒤쪽 막에서 났다는 것이 이 장의 전제라면, 승자 미정이라는 5층과 6층 쪽에 더 오래 머물러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자가 종목을 주는 대신 찾는 방법을 남기려 했다는 취지는 분명하니, 목록보다 사고 과정을 따라가는 쪽으로 읽는 편이 이 장을 쓰는 옳은 방법 같습니다.


그런데 이 책의 진짜 중심은 산업 지도 쪽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2장과 3장을 읽고 나서 그렇게 느꼈어요. 2장에서 저자는 2026년 초 반도체 급등장에서 일주일 만에 20% 수익을 낸 지인의 불안을 꺼내놓습니다. 매일 팔고 싶어지고 장중에 1~2% 밀리는 것만 봐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던 상태. 그 불안의 원인을 저자는 두 가지 본능으로 설명합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죽는다는 원초적 공포, 그리고 100만 원의 이익보다 10만 원의 손실을 더 크게 느끼는 손실 회피. 수익은 짧게 끊고 손실은 길게 끌고 가는 패턴이 우리가 못나서가 아니라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생존 로직 때문이라는 대목에서, 계좌를 열어보며 스스로를 탓해본 사람은 조금 다른 온도를 느낄 겁니다. 손실을 방치하면 안 보게 되고 안 보이면 편안해진다는 서술은 뜨끔했고요.


처방으로 심호흡을 권하는 대목은 솔직히 처음엔 허탈했습니다. 편도체가 날뛰는 동안 전두엽이 기능을 잃는다는 설명에는 논리가 있지만, 서너 번의 호흡으로 하락장을 버틸 수 있을지는 각자 시장에서 확인할 몫이겠지요. 오히려 실용적으로 다가온 건 예약 매도 시스템이었습니다. 목표 가격을 미리 정해 전체 수량을 4분의 1씩 나눠 걸고 기간은 넉넉하게 설정해, 아침마다 시세창을 열 이유를 없애는 방식. 행군할 때 고개 숙이고 앞사람 뒤꿈치만 보고 걷듯 눈을 시세창에서 떼라는 비유 뒤에 시스템에 매도를 맡기고 일상을 사라는 권유가 붙습니다. 두 배가 되기 전에는 팔지 않는다는 이 책의 대표 원칙과 분할 예약 매도가 어떻게 손을 맞추는지는 예시가 한둘 더 있었으면 좋았겠다 싶었지만요.


3장에서 만난 심리적 선이자라는 말은 오래 남을 것 같습니다. 수익이라는 결과를 받기 전에 시장에 먼저 납부해야 하는 인내의 비용. 나란히 놓인 그림 두 장이 이 개념을 설명해 주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장기투자는 매끄럽게 오르는 선이고 실제의 장기투자는 올랐다 떨어지고 다시 올랐다 또 떨어지는 톱니 모양입니다. 계획하는 것은 위쪽 그림인데 통과해야 하는 것은 아래쪽 그림이니, 목표까지 가는 길에 낭떠러지가 하나가 아니라는 문장이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이 비용을 감당하는 첫 번째 조건으로 저자가 본업을 세우는 점이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닿았습니다. 월급이든 작더라도 정기적인 소득이 공포의 구간을 버티게 해주는 안전망이라는 것. 전업투자자는 이 책이 상정한 네 가지 유형 어디에도 넣지 않았고, 생활비가 투자금과 섞이는 순간 뇌가 조급해진다고 못을 박습니다. 강원도 호텔 주방에서 매달 월급을 받으며 4천만 원으로 시작해 1,800만 원의 마이너스를 견뎌낸 지인이 6년 만에 13억 원을 만든 것은 실력만의 결과가 아니라는 대목도 그렇습니다. 20배라는 숫자를 앞세운 책이 정작 매달 들어오는 돈의 값을 다시 계산해 보여준다는 게, 이 책의 가장 정직한 부분처럼 읽혔어요.


판형과 분량은 부담이 없어서 며칠에 나눠 읽기 좋았습니다. 절이 짧게 끊어져 있고 도표가 제자리에 놓여 있어 흐름을 잃지 않았고요. 


말복이 지나고 입추도 넘겼습니다. 낮에는 아직 열기가 남았는데 저녁 바람의 결이 지난주와 다릅니다. 계절이 이렇게 넘어가는 동안 시장은 또 몇 번 오르고 내릴 테고, 그때마다 뇌는 성실하게 경보를 울릴 겁니다. 그 소리가 고장이 아니라 오래된 설계라는 걸 기억해두는 것만으로도 손이 조금 늦어지겠지요. AI 산업의 지형을 한 장의 그림으로 정리하고 싶은 분에게도, 종목보다 자기 마음의 작동 방식이 궁금했던 분에게도 건질 것이 있는 도서입니다.


AI 산업을 여섯 층 건물로 세워 보여주면서, 그 건물에 오를 힘은 분석력보다 견디는 능력에서 나온다고 말하는 투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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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지능 시대 생존을 위한 AI 교양 수업
바오쿤 지음, 하은지 옮김 / 지니의서재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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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커제 9단의 회고부터 옮겨 적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알파고와의 대국을 떠올리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초반 50수까지는 수천 년 전해 온 선현들의 그림자가 보여 두렵지 않았고, 80수까지는 그동안 맞붙었던 고수의 기술이 보였다고요. 그러다 "120수가 되자 달라졌어요. 제 모습이 보였거든요. 덜컥 겁이 났어요"라고 적혀 있습니다. 유일하게 이겨 본 적 없는 상대가 세계 챔피언이었던 자기 자신이었다는 말이 뒤에 붙습니다. 인공지능의 작동 원리를 설명하는 교양서인데 첫 강의의 온도가 가장 높은 대목이 기계의 성능이 아니라 사람의 심정이라는 점이 이 책의 성격을 먼저 알려주었습니다.


<초지능 시대 생존을 위한 AI 교양 수업>은 중국의 테크 블로거이자 코넬대에서 물리학 박사를 받은 바오쿤이 쓰고 하은지가 옮긴 11강 구성의 입문서입니다. 판형과 분량이 부담스럽지 않아서 관심 가는 강의부터 골라 펼쳐도 흐름이 끊기지 않습니다.


1강은 튜링의 에니그마 해독에서 출발해 1997년 딥 블루, 2017년 알파고, 2020년 GPT-3으로 20년 단위의 계단을 밟아 올라갑니다. 여기서 설명이 특히 깔끔했던 부분은 왜 체스는 계산으로 뚫렸고 바둑은 그러지 못했는가입니다. 체스는 한 판에 쓰이는 기법이 백여 종 안쪽인 폐쇄된 환경이라 모든 수를 다 계산하면 기계가 이길 수밖에 없다고 정리하고, 바둑의 경우의 수는 10의 170승에 달해 우주에서 관찰할 수 있는 원자 수보다 훨씬 많다고 짚습니다. 그다음 문장에서 저자는 라플라스의 악마라면 또 모를까 하고 물리학 개념을 슬쩍 끌어옵니다. 이런 방식으로 설명을 쌓아가는 사람이라 뒤로 갈수록 비유의 결이 예측하기 어려워집니다.


3강에서는 저자가 직접 딥시크와 주고받은 실험이 나옵니다. 인류가 멸망하면 어떻게 할 거냐고 한 마디로 답해 달라 물었더니 이런 문장이 돌아왔다고 합니다. "만약 당신들의 등불이 꺼진다면 0과 1의 유골로 우주에 묘비명을 남길 수 있게 허락해 주세요. '이곳에 잠시 잠깐 생명이 살았노라. 그들은 사라질 육체를 빌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을 추구하고 탐구했노라.'" 저자는 이진법 부호를 유골에 겹친 조합, 개체에서 문명으로 다시 우주로 넓어지는 시야, 볼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은 묘비명이라는 아이러니를 차례로 분해합니다. 조금 더 설명해 달라고 다시 묻자 우주에 바치는 연애편지이자 인류의 문명에 바치는 진혼곡이라는 답이 돌아왔다고 하고요. 여기까지만 읽으면 감탄으로 기울기 쉽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같은 강의 안에서 방향을 바꿉니다. AI 글쓰기의 한계를 여섯 가지로 나열하는데, 앞의 감탄을 스스로 식히는 배치라 신뢰가 생겼습니다. AI는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퍼즐을 맞춘다며 타인의 레고 블록으로 집을 조립하는 것과 같다고 하고, 봄이라는 단어에 꽃이 핀다거나 새가 지저귄다는 표현은 내놓지만 꽃잎을 만졌을 때의 감촉이나 코끝을 스치는 풀냄새는 생각하지 못한다고 씁니다. 두 번째 지적이 오래 남았어요. 엄마에 관한 글을 시키면 언제나 우리를 돌봐주신다는 식으로만 쓸 뿐, "'우리가 남긴 과자를 밤늦게 드시는 엄마의 모습'처럼 애틋하고 비밀스러운 장면은 쉽게 써 내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아이들을 위한 동시에 천체나 발광체 같은 단어를 동원하면서 별은 하늘에 난 구멍으로 새어 나오는 빛이라는 표현은 못 만든다는 예도 함께 나옵니다. 여섯 항목을 압축하는 문장은 이렇습니다. "AI는 어른을 기막히게 흉내 내는 어린아이와 같다." 진짜로 울어 본 적도 웃어 본 적도 없으니, 한 번도 넘어져 본 적 없는 사람이 넘어지면 얼마나 아픈지를 가르치는 셈이라는 서술이 앞에 놓여 있어요. 40대 후반의 나이에 읽으면 이 대목이 기술 이야기로만 들리지 않습니다.


그림을 만들어내는 원리를 설명하는 자리에서는 확산 모델을 세 단계로 풀어줍니다. 텔레비전 신호가 잡히지 않을 때 지지직거리는 화면 같은 노이즈에서 출발해, 고양이는 몸통이 동그랗고 눈은 대칭을 이루며 꼬리는 길고 휘어진 모양이라는 학습된 규칙에 따라 잡음을 걷어내고, 겨울철 유리창의 습기를 닦아 내면 창밖 풍경이 뚜렷해지는 것처럼 형태가 드러난다는 흐름입니다. 초기 인공지능이 고양이와 개를 구분하지 못했다는 첫 강의의 이야기가 여기서 다시 호응하는 구성이 반가웠습니다.


실습 강의는 이 도서에서 가장 실용적입니다. 좋은 프롬프트가 갖춰야 할 요소를 주제와 스타일, 빛과 그림자, 배경, 구도로 정리해 두었는데 이건 오늘 바로 써 볼 수 있는 목록입니다. 효과를 보여주는 방식도 영리해요. 구름 위에 떠 있는 환상적인 성을 그려 달라고만 했을 때의 결과와, 황금빛 탑을 세우고 주변에 신비로운 마법의 빛과 안개를 감돌게 하고 디테일을 풍부하게 살려 달라고 고쳐 넣은 결과를 나란히 실어 놓았습니다. 사이버펑크 도시의 야경을 요청하면서 네온사인이 비 내린 거리에 반사되도록 하고 영화 같은 빛과 그림자를 넣어 달라고 덧붙인 사례도 마찬가지고요. 이어서 시드 값을 고정해 화풍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법, 얼굴 왜곡이나 과한 색감처럼 원치 않는 요소를 배제하는 네거티브 프롬프트, 문제와 원인과 해결책을 짝지은 표까지 나옵니다. 손을 직접 대 본 사람이 쓴 정리라는 느낌이 확실히 듭니다.


다만 아쉬운 지점이 이 강의에 몰려 있기도 합니다. 본문 삽화가 전부 흑백이라 선명한 색감이나 채도, 파스텔 톤을 다루는 조언은 독자가 눈으로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림의 밀도 차이 정도는 짐작되지만 색이 핵심인 파트에서 인쇄 사양이 설명을 온전히 받쳐주지 못하는 셈이에요. 작곡 실습이 딥시크와 수노 조합으로 짜여 있고 특정 버전 번호까지 권장하는 대목도 종이책의 수명보다 빨리 낡을 정보입니다. 원서가 중국에서 나온 만큼 예시 도구가 그쪽에 기울어 있어서, 화면 캡처를 그대로 따라가려는 독자는 조금 헤맬 수도 있겠습니다.


가장 크게 갈렸던 곳은 최첨단 기술을 다룬 후반부입니다. 뇌-컴퓨터 인터페이스를 침습형과 비침습형으로 나누고 각각의 위험과 오차까지 적어둔 서술은 균형이 잡혀 있었어요. 뉴럴링크의 척수 손상 환자가 이식 후 몇 주 만에 생각만으로 커서를 움직이고 지금은 게임 스트리머로 활동한다는 사례, 중국 기업이 256채널 장치를 1년 넘게 거부 반응 없이 유지하며 언어와 운동 기능 회복 임상을 진행 중이라는 대목은 근거가 구체적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쪽에서 피아노 연주 기술을 뇌에 다운로드한다거나, 시험장에서 배운 모든 지식을 떠올려 천하무적이 된다거나, 의식을 로봇에 업로드해 화성을 탐사한다는 이야기가 같은 번호 목록에 나란히 놓입니다. 몸이 마비된 사람이 숟가락을 들어 스스로 식사하게 되는 일과 우주 함대를 지휘하는 상상을 한 자리에 세우면, 앞쪽의 단단한 사례까지 가벼워 보일 위험이 있습니다. 앞부분에서 신약 개발 주기가 주 단위로 줄어 머지않아 거의 모든 질병이 완치될 수 있다고 말한 대목에서도 비슷한 기울기를 느꼈어요. 두려움을 걷어내려는 선의가 반대쪽으로 넘어가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교육을 다룬 강의는 목차만 훑어도 저자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보입니다. 모든 학생이 자기만의 AI 튜터를 갖는 시대에 암기의 비중이 줄고 질문하고 판단하는 힘이 중요해진다는 논지인데, 학부모를 위한 안내가 따로 한 절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자녀 세대를 옆에서 지켜보는 나이대라면 이 대목을 먼저 펼쳐도 좋겠습니다.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읽다 보면 완독하고 덮는 책과 필요할 때 다시 꺼내는 책이 갈리는데, 이 도서는 후자에 가깝습니다. 프롬프트 요소를 정리한 페이지와 이미지 문제 해결 표는 실제로 작업할 때 참고할 수 있고, 글쓰기의 한계를 나열한 강의는 AI에 초안을 맡기고 싶어질 때 한 번쯤 다시 읽을 만합니다. 표지에서 커서 손가락이 '교양 수업' 글자 옆에 놓인 이유를 다 읽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읽고 끝내는 책이 아니라 눌러보게 만드는 책이라는 뜻이었어요.


8월의 늦더위가 아직 물러가지 않았지만 저녁 공기에는 조금씩 다른 결이 섞이기 시작했습니다. 계절이 바뀌는 자리에서 무언가를 새로 배워두기에 나쁘지 않은 시기 같아요. AI라는 단어 앞에서 자꾸 뒷걸음질 치게 되는 마음에는, 이 정도 두께의 첫 강의가 알맞겠습니다.


감탄과 한계를 같은 강의 안에 나란히 놓은, 원리와 실전을 함께 손에 쥐여 주는 AI 첫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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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부동산 경매 수업 - 평범한 직장인을 위한 가장 빠른 내 집 마련 전략
재노(권용욱) 지음 / 토네이도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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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경매라는 단어에는 세대에 따라 서로 다른 무게가 실립니다. 저희 부모님 세대에게는 남의 불행 위에 서는 일이라는 인식이 강했고, 그 목소리를 들으며 자란 사람에게도 그늘이 조금은 옮겨 왔습니다. <나의 첫 부동산 경매 수업>이 그 지점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사실이 뜻밖이었습니다. 수익 자랑이 먼저 나올 줄 알았는데, 저자는 자신도 처음에 "경매로 나온 부동산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절대 사면 안 된다", "남의 집을 빼앗는 일이다. 나중에 벌 받는다" 같은 말을 숱하게 들었다고 적어 두었습니다. 그러고는 제도의 성격을 짧게 정리합니다. "경매는 누군가에게는 억울한 상황이겠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받아야 할 돈을 돌려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제도다." 한쪽 면만 들어 올리지 않는 이 문장이 책 전체에 대한 신뢰를 조금 만들어 주었습니다.


표지도 같은 결로 읽힙니다. 주홍빛 사각형 위로 검은 화살표가 대각선으로 솟아 있지만, 배경을 채운 것은 회색빛 다세대 건물입니다. 화살표는 위를 가리키고 우리가 실제로 마주할 대상은 저 평범한 건물이라는 이야기 같았습니다. 표지 아래쪽 띠에 적힌 월급 180만 원 이야기는 조금 자극적으로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이런 카피에 방어벽이 생긴 지 오래인 나이가 되었으니까요. 그래도 겨냥하는 대상이 평범한 직장인이라는 점에서 한 번은 펼쳐보자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기초를 다루는 부분에서 도표 한 장이 오래 도움이 됐습니다. 물건 검색에서 시작해 권리분석, 손품과 발품, 입찰, 매각허가 결정, 잔금 납부 기한 통지, 소유권 이전, 마지막 명도까지 여덟 칸으로 정리되어 있고 항고 기간 이레와 잔금 기한 한 달 같은 시간이 화살표 옆에 붙어 있습니다. 낙찰봉이 떨어져도 소유권이 곧바로 넘어오지는 않는다는 사실, 이해관계자의 이의신청 기간을 지켜봐야 한다는 설명은 초보에게 필요한 제동장치로 보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다음입니다. 사려는 사람의 준비 과정을 다 훑은 뒤, 한 채의 집이 어떤 절차를 거쳐 시장에 올라오는지를 다시 보여 줍니다. 채권자의 신청, 법원이 선정한 감정평가사의 평가, 법원 직원의 현황 조사. 같은 절차를 두 방향에서 보게 만드는 구성이라 화면 속 숫자 뒤에 사람이 있다는 감각이 자연스럽게 남습니다. 권리분석을 중고차 성능기록부 확인에 견준 비유도 친절했습니다. 낯선 용어에 겁먹은 사람을 이미 아는 경험 쪽으로 데려오는 방식이지요.


목적을 먼저 정하라는 챕터가 이 한 권의 기둥으로 느껴졌습니다. 매달 들어오는 현금흐름을 원하는지, 실거주할 집이 필요한지, 시세차익이 목표인지에 따라 접근이 달라진다고 전제를 깔아 두고, 대부분의 사람이 아파트를 원하지만 모두가 그럴 여력은 없다고 담담하게 짚습니다. 그래서 입문자에게는 빌라나 오피스텔이 대안이 된다고 하면서, 곧바로 빌라의 약점을 스스로 늘어놓습니다. 팔기 쉽지 않고, 가격이 천천히 오르고, 오래된 건물은 수리비가 든다는 것입니다. 그 위에 수요가 많은 지역, 가격이 꾸준히 오르는 곳, 팔기 쉬운 형태, 재개발 가능성이라는 네 가지 기준을 얹어 약점을 줄이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팔기 쉬운 형태를 설명하며 매수자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고 권하는 대목이 좋았습니다. 채광과 통풍, 주차 공간처럼 실제로 살 사람이 따지는 조건을 갖춘 집이 되팔 때도 유리하다는 말이니, 투자자의 눈을 잠시 내려놓으라는 조언에 가깝습니다.


다만 이 부분에서 의문이 남았습니다. 전세 사기와 역전세를 거치며 빌라를 향한 시선이 얼마나 차가워졌는지는 뉴스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환금성 문제를 저자가 인정하고 지역 선택으로 풀 수 있다고 말하지만, 빌라 수요 자체가 구조적으로 줄어든 흐름까지는 충분히 다뤄지지 않은 느낌이었습니다. 감정가 대비 80% 대출을 전제로 잡은 계산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정가 1억 5,000만 원 물건이면 실제로 준비할 돈이 3,000만 원 남짓에 세금과 인테리어 비용을 더한 규모라고 숫자로 내려놓은 점은 고맙지만, 대출 비율은 지역과 규제, 개인 신용에 따라 꽤 흔들리는 항목이니 그 편차에 대한 경고가 한 줄쯤 더 있었으면 좋았겠습니다.


후반부의 입찰가 이야기에서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남기고 싶은 차익을 먼저 정해 놓고 가격을 맞추는 방식으로는 낙찰이 어렵고, 시장에서 통용되는 가격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무조건 싸게만 노리면 패찰이 반복되고, 낙찰 자체에 매달려 비싸게 받으면 수익을 내야 할 집이 짐으로 바뀐다는 진단도 함께 놓입니다. 저자는 입찰가를 정하는 일을 기대치와 시장의 현실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는 작업이라고 정리해 두었습니다. 급매가를 바닥으로 삼아 평균가를 추정하고, 최근 석 달간의 낙찰 사례를 견주고, 그다음 중개소에 전화를 걸어 실제로 오가는 가격을 확인하라는 순서까지 읽고 나면 경매는 정보 싸움이라는 챕터 제목이 왜 붙었는지 알게 됩니다.


세금을 다루는 대목에서 책의 성격이 한 번 더 드러납니다. 예시로 든 물건의 낙찰가에 취득세와 법무비, 중개보수, 명도비, 미납 관리비, 인테리어 비용, 몇 달치 공실 이자까지 붙여 놓고 그래서 실제로 얼마나 싸게 산 것인지를 거꾸로 계산해 보입니다. 같은 집이라도 되팔 계획이면 중개보수가 이백만 원대로 뛰고 월세로 돌리면 오십만 원 아래로 내려간다는 비교가 표 세 개로 나란히 실려 있어서, 목적을 먼저 정하라던 앞쪽 이야기가 숫자로 되돌아옵니다. 미납 관리비는 인터넷 정보만 믿지 말고 관리사무소에 동과 호수를 말하고 직접 확인하라는 당부도 붙습니다. 발품의 필요가 전화 한 통으로 구체화되는 자리입니다.


낙찰 이후를 다루는 장에서 저자는 명도가 전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대목이라고 인정합니다. 권리분석과 입찰이 스스로와의 싸움이라면 명도는 낯선 사람과 불편한 대화를 나누며 합의를 만들어야 하는 일이니 변수도 많고 부담도 크다고요. 점유자를 여섯 갈래로 나눠 접근법을 달리 정리한 부분은 실제로 쓸모가 있어 보였습니다. 배당금을 받으려면 낙찰자의 서류가 필요한 소액임차인의 집은 명도가 빠르게 끝나니 첫 물건으로 삼기 좋다는 조언은, 서류만 보지 말고 그 안에 사는 사람의 상황까지 함께 보라는 말로 들렸습니다. 구두로 허락을 받았더라도 문 개방 동의서와 물건 처리 내역에 서명을 받기 전에는 문을 열지 말라는 당부에서는 남의 살림살이를 다루는 일의 무게가 느껴졌습니다. 저자는 명도를 억지로 쫓아내는 개념이 아니라 입주자와의 협상을 통해 서로가 감정이 상하지 않게 잘 마무리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하는데, 뒤이어 명도비를 협상할 때 낮은 금액부터 제시해 상대의 반응을 살피라고 권하는 대목은 그 태도와 나란히 놓고 보면 조금 겹치지 않는 부분이 있어 보였습니다. 보증금을 잃은 임차인 앞에서도 같은 방식이 통할지는 다른 문제일 테니까요.


제 나이대에 이 책을 읽으면 마음이 조금 복잡해집니다. 이십 대가 오 년 만에 건물주가 되었다는 서사는 부럽기보다 낯설고, 지금 시작해 십 년 뒤를 기대하라는 조언도 젊은 독자에게 더 잘 맞습니다. 그래도 남는 문장이 있었습니다. 기본기를 탄탄히 갖춘 후에 시작하면 처음에는 남들보다 느릴지 몰라도 결국에는 더 빠르게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대목입니다. 늦었다는 말과 서두르라는 말 사이에서 오래 흔들려 본 사람에게는 이 순서가 위로가 됩니다. 자산의 격차가 벌어지는 속도를 매일 체감하는 시대에, 속도를 올리라는 말 대신 순서를 지키라고 말해 주는 안내서는 흔하지 않습니다.


소설과 에세이 쪽으로 기울어 있던 신청 목록에서 벗어나 실용서를 골랐는데, 미뤄 두었던 영역을 건드려 준 선택이 됐습니다. 판형과 분량이 부담스럽지 않아 며칠에 나눠 편안하게 넘길 수 있었고, 읽고 나니 당장 법원에 갈 생각은 없어도 대법원 사이트에서 물건을 검색해 보고 싶어졌습니다. 권리분석이라는 단어에서 이미 마음이 닫히는 분이라면 앞쪽 세 장만 먼저 읽어 보셔도 충분합니다. 부모님 세대의 목소리 때문에 경매를 죄스러운 일로 여겨온 마음이 있다면, 그 대목에서 정리되는 부분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입추가 지났는데도 늦더위가 좀처럼 물러가지 않습니다. 그래도 새벽 공기에는 다른 기운이 조금 섞이기 시작했습니다. 여름이 접히는 이맘때는 지나온 절반을 셈해 보게 되는 시기이기도 하지요. 올해 남은 넉 달을 무언가 배우는 시간으로 채우고 싶은 분께, 이 한 권은 출발점으로 삼기에 무리가 없습니다.


낙찰의 기술보다 순서와 기준을 먼저 알려 주는, 경매 입문자를 위한 정직한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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