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범죄실록 - 조선을 뒤흔든 범죄, 수사, 재판 이야기
정명섭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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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표지가 먼저 말을 겁니다. 미색 한지 같은 바탕 위에 먹으로 그은 소나무 가지, 그 아래 갓을 쓰고 돌아선 흰 도포 차림의 뒷모습. 여기까지는 눈에 익은 사극 한 장면인데, 도포 자락 끝과 발치에 붉은 얼룩이 번져 있습니다. 표지 아래쪽 붉은 띠에는 범죄로 들추어낸 조선의 민낯이라는 문구가 박혀 있고요. 단정한 먹그림에 핏자국 하나를 얹어 놓은 셈이라, 정명섭 작가가 이 한 권으로 무엇을 하려는지 표지에서 대충 짐작이 됩니다.


구성은 다섯 갈래입니다. 포도청과 포교, 오작인과 검시, 의금부와 국문, 한양에서 벌어진 잔혹한 사건들, 그리고 범죄 언저리에서 살아간 사람들. 판형도 분량도 부담스럽지 않아서 읽는 호흡이 편했습니다. 다만 편하게 넘어가는 페이지 안에 담긴 이야기는 결코 편하지 않아요.


가장 오래 붙들려 있던 대목은 2부의 오작인이었습니다. 살인사건이 나면 시신을 살펴 사인을 밝히던 사람들인데, <경국대전>에는 이들의 직위나 녹봉 규정이 없습니다. 국가가 반드시 필요로 하면서도 법전 안에 자리 하나를 내주지 않은 직책이라는 뜻이지요. 검시는 수령이 직접 지휘해야 하는 중대한 공무였고, 아전에게 떠넘긴 사실이 드러나면 관직에서 영원히 추방될 만큼 무겁게 다뤄졌습니다. 그런데 현장에서 수령은 지휘봉만 쥐었고, 손을 움직인 쪽은 오작인이었어요.


저자는 여기에 담담한 한 줄을 얹습니다.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고 어렵고 힘든 일은 항상 가장 아랫사람에게 주어졌다."


시신을 만지는 일이라는 이유로 불결하다는 인식과 귀신이 붙는다는 미신에 시달렸고, 실록에도 승정원일기에도 이름이 거의 남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살인사건이 터질 때마다 수령이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은 오작인이었다고 하니, 천대받으면서도 없어서는 안 되는 자리에 서 있었던 셈입니다. 죽은 사람의 몸에 남은 흔적을 읽어 억울함을 풀어주는 일을, 정작 자기 억울함은 어디에도 적지 못한 이들이 감당했다는 사실이 오래 남았어요.


4부에서 만난 개춘의 이야기는 읽는 속도를 늦추게 합니다. 1533년 용산강에서 대여섯 살 여자아이가 두 발이 잘린 채 발견된 사건인데, 저자는 잔혹함을 전시하는 쪽으로 가지 않습니다. 아이가 전해 가을에 집을 나와 겨울을 어디서 났는지 알 수 없다는 것, 데려갔다가 도로 버린 사람이 한 명이 아니었다는 것, 조사가 끝내 미궁에 빠졌다는 것을 차례로 적을 뿐이에요. 억울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면 안 된다는 신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중종이 조사를 멈춥니다. 무고를 막으려던 신중함이 결과적으로 피해 아동을 놓아버린 자리인데, 저자는 이 충돌을 따로 지적하지 않고 지나갑니다. 대신 이렇게 닫아요.


"두 발목이 잘린 개춘이 이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기록으로 남겨지지 않았다."


같은 시대에 청계천 주변과 성문 근처에서 버려진 아이들이 여러 차례 발견되었다는 기록도 함께 실려 있습니다. 영조가 자휼전칙을 두어 국가가 거두려 했지만 실효는 제한적이었고요. 아이를 버린 부모의 사정으로 지목되는 것이 극심한 생활고와 신분입니다. 자신의 처지를 물려주느니 차라리, 라는 마음 앞에서는 뭐라 정리할 말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5부의 외지부 장은 결이 조금 다릅니다. 글을 모르거나 법에 어두운 백성을 대신해 소장을 써주고 소송을 대리하던 사설 법률가들인데, 조선은 이들을 단속했습니다. 명분은 소송을 조장한다는 것이었어요. 1478년에는 붙잡아 가족과 함께 변경으로 보냈다는 기록까지 남아 있는데도 몇 년 지나지 않아 다시 나타납니다. 법을 잘 아니 법망을 빠져나갔고, 소송이 계속되는 한 필요가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봅니다.


이 장에서 마음이 무거워지는 부분은 하의삼도 이야기입니다. 왕실과 연결된 가문이 섬 주민들의 땅에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시작된 다툼이 300년을 갔습니다. 1723년 주민들이 수백 장의 문서를 들고 한성부까지 올라갔지만 서류에 관아 인준이 없다는 이유로 패소했어요. 서류의 형식을 아는 사람이 곁에 없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저자가 붙인 문장은 짧습니다.


"법은 강한 자의 편이었다."


윤선도가 노비 소송에 직접 뛰어들어 상대편 외지부를 맹비난한 대목도 흥미롭게 읽힙니다. 어부사시사를 쓴 문인의 다른 얼굴이 거기 있어요.


읽으면서 갸웃했던 지점도 있습니다. 저자는 외지부의 후예가 훗날 독립운동가의 법정을 지키는 변호사로 이어졌다고 마무리하는데, 이야기로는 시원하지만 그 사이 갑오개혁 이후 근대 법제가 통째로 이식된 과정이 꽤 얇게 처리된 인상이었어요. 두 흐름을 곧장 하나로 잇기에는 건너뛴 계단이 있어 보입니다. 오작인 장도 비슷합니다. 하찮으나 존엄하다는 소제목을 걸어두었지만 실제로 인용된 실록 기록은 아이를 버리거나 신체 일부를 팔았다는 어두운 사례 쪽에 몰려 있어요. 기록 자체가 남지 않은 직업이니 저자로서도 어쩔 수 없었겠으나, 존엄이라는 단어를 받쳐줄 근거는 조금 더 있었으면 싶었습니다.


그런 아쉬움에도 이 책이 좋았던 이유는, 사건의 자극에서 멈추지 않고 그 뒤의 구조를 보려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염매 같은 이야기를 다룰 때도 성호사설은 관찬 사서가 아니어서 진위를 알 수 없다고 먼저 밝히고 넘어가요. 그런 태도가 있어서 뒤의 서술을 믿고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책을 덮고 나서 남은 건 사건 목록이 아니라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검시관, 이후의 삶이 적히지 않은 아이, 무뢰배로 불리며 쫓겨 다닌 대리인. 조선의 사법 체계가 제법 촘촘했다는 사실과, 그 촘촘한 그물이 끝내 건지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 나란히 놓입니다. 광화문역 8번 출구 근처 세종문화회관 뒤편에 장예원 표지석만 남아 있다는 대목을 읽고는, 오늘 지나다니는 길 아래에 그런 이야기가 깔려 있구나 싶어 잠깐 멈칫했어요.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읽다 보면 마음이 편해지는 책과 마음이 불편해지는 책이 있는데, 이 한 권은 후자였고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늦더위가 물러가려다 만 8월 끝자락에 읽기 좋은 책이었습니다. 서늘한 이야기들이 많은데도 이상하게 읽고 나면 마음이 차가워지지만은 않아요.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하라는 원칙을 지키려 애쓴 사람들이 그 안에 분명히 있었으니까요. 가을로 넘어가기 전, 역사책 한 권을 천천히 읽고 싶은 분이라면 목차 어느 부에서 시작해도 좋을 겁니다. 사극에서 본 조선과 실제 기록 속 조선의 간격이 궁금했던 분께도 잘 맞을 거예요.


조선의 범죄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기록에 이름을 남기지 못한 사람들의 얼굴이 남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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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을 읽는 40가지 이야기 - 중동으로의 첫 발걸음
박현도 외 지음 / 영진.com(영진닷컴)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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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책이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무게를 가늠하는 것이었습니다. 416쪽, 손바닥에 얹으면 제법 묵직합니다. 표지를 펼치기도 전에 며칠 만에 해치울 책은 아니겠다는 짐작이 들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읽었어요. 목차 순서를 지키기보다 눈에 걸리는 제목부터 펼치는 식으로, 여러 날에 나눠서요.


표지 이야기를 조금 하고 싶습니다. 중동을 다룬 도서라면 으레 모래빛이나 황토색을 떠올리게 되는데 <중동을 읽는 40가지 이야기>는 짙은 초록을 깔았습니다. 그 위에 아치형 창을 내고 흰 기둥과 금빛 장식, 물에 비친 반영을 담았어요. 열기가 아니라 그늘과 물의 서늘함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아래쪽에 적힌 '낯선 중동을 이해하는 가장 쉬운 안내서'라는 문구와도 결이 맞고요. 디자인 하나로 이미 한 가지 선입견을 건드리고 시작하는 셈입니다.


책의 앞머리, 중동을 보는 세 가지 시선이라는 대목에서 저자들은 뜻밖에도 축구로 문을 엽니다. 그라운드의 함성, 2002년의 기억, 국가대항전이 있는 날 치킨집 배달이 밀리고 아파트 곳곳에서 환호와 탄식이 흘러나오는 풍경. 그렇게 익숙한 자리로 독자를 데려다 놓은 다음, 방향을 틀어 극동과 중동이라는 말 자체를 뜯어봅니다. 극동은 동쪽의 끝, 중동은 동쪽의 중앙. 두 이름 모두 유럽이 기준점입니다. 함께 실린 지도에는 서양이 왼쪽에 있고 근동과 중동과 극동이 차례로 놓여 있는데, 캡션이 유럽 관점으로 본 극동과 중동이에요. 우리가 무심코 써온 지명이 실은 남의 자리에서 매긴 좌표라는 사실이 한 장으로 드러납니다.


여기서 저자들이 내놓는 설명이 이 챕터의 힘입니다. 언어도 종교도 민족도 다른 한국과 중국, 일본, 몽골, 시베리아를 한데 묶어 극동아시아라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는 겁니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위치가 바뀝니다. 설명을 듣는 쪽에서 같이 이름 붙여진 쪽으로요. 챕터를 닫는 두 문장이 그 감각을 그대로 받아냅니다. "중동은 멀지 않다. 중동이 멀다고 느끼는 것은 어쩌면, 우리 마음속 낯설음의 거리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대목도 있었습니다. 유럽 중심의 명칭임을 그렇게 분명히 짚어놓고 저자들은 "어쨌든 이 고착화된 표현을 우선 빌려 써 보자."라며 넘어갑니다. 입문서라는 성격을 생각하면 현실적인 선택이고, 대안을 만드는 일이 이 책의 몫도 아니겠지요. 그래도 문제를 제기한 손끝에서 바로 관용을 인정하고 지나가니 조금 아쉬운 마음이 남더군요. 초반부터 지명과 분류가 촘촘하게 몰려 있어 처음 읽는 사람에게는 다소 빡빡한 구간이기도 합니다.


중반을 넘어서면 석유가 더 이상 나지 않는다면이라는 물음이 나옵니다. 도입은 또 화려합니다. 39억 원짜리 하이퍼카를 경찰차로 굴린 아부다비, 3백조 원을 들여 치른 카타르 월드컵. 그러고 나서 그 부의 내부를 보여줍니다. GCC 산유국의 석유산업이 1930년대 이후에야 개발되기 시작했다는 것, 지금의 풍요가 백 년이 채 안 된 일이라는 것. 카타르는 총인구 311만 명 중 자국민이 10% 남짓이라 자원 수입이 고스란히 돌아가고, 대학원 학비까지 국가가 대줍니다. 반면 사우디는 인구가 크고 자국민 비율도 60% 수준이라 개인에게 돌아가는 몫이 적을 수밖에 없다고 적혀 있어요. 그래서 저자들은 상상할 수 없이 많은 부를 가진 사람부터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까지 있으니 다층적인 시선으로 아랍 산유국을 바라봐야 한다고 씁니다. 부자 나라라는 한 단어로 눌러놓았던 것이 여러 겹으로 갈라지는 순간입니다.


이 장에서 잠깐 손이 멈춘 곳은 따로 있었습니다. 1970년대 유가가 오르던 시절 우리나라에서도 중동 건설 붐을 따라 많은 노동자가 사막으로 떠났다는 문장이 지나갑니다. 그 이야기를 어른들 입을 통해 들으며 자란 세대라면 이 한 줄이 남의 나라 통계로만 읽히지는 않을 겁니다. 그때 그곳으로 갔던 사람들의 시간과, 지금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는 인도와 방글라데시와 필리핀 사람들의 시간이 한 문단 안에서 겹칩니다.


그 겹침을 정면으로 다루는 곳이 뒤쪽의 이주민 교차로 이야기입니다. 사막 위에 발자국이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문장으로 조용하게 시작해서, 떠나는 사람과 받아들이는 나라를 나란히 놓아요. 2011년 이후 시리아를 떠난 수백만 명, 2015년 바닷가에 떠밀려온 세 살배기 쿠르디의 사진, 2020년 베이루트 항구 폭발 이후 레바논을 빠져나간 의료진과 기술직들. 예멘 사람들의 긴 여정을 두고 저자들은 그것이 단순한 탈출이면서 동시에 자신과 가족의 미래를 다시 설계하려는 인간적인 결단이기도 하다고 적습니다. 떠나는 이를 피해자 자리에만 두지 않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사람으로 세우는 문장이라 오래 남았습니다.


받아들이는 쪽 이야기도 미화하지 않습니다. 걸프 산유국이 해외에서 공급받는 노동력은 약 2천 5백만 명 규모이고, 두바이와 아부다비는 외국인이 인구의 85% 이상입니다. 건설 현장부터 호텔과 가정 서비스까지 이들 없이는 나라가 돌아가지 않는다고 해놓고, 곧바로 열악한 숙소와 불안정한 고용, 출국을 제한하는 제도를 짚습니다. 경제적 풍요 뒤에 감춰진 이야기가 이주 구조의 또 다른 그림자라는 표현이 나오지요. 솔직히 말하면 이 부분은 한 문단으로 끝나는데, 앞에서 월드컵 개최 비용을 3백조 원이라고 그토록 구체적으로 적어둔 것에 비하면 저울이 조금 기울어 보였습니다. 네옴시티를 100% 재생에너지로 짓겠다는 계획이나 나라별 비전 연도를 발표 그대로 옮겨둔 대목도 마찬가지고요. 다만 40가지 이야기를 한 권에 담는 책에 그 이상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테고, 여기서 걸린 물음을 들고 다른 책으로 건너가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요르단과 레바논이 오랜 시간 난민 수용의 부담을 짊어져 왔고, 일부 국가에서는 국내 정치 갈등과 얽혀 난민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으로 변하기도 한다는 서술이 있습니다. 저자들은 한국을 언급하지 않지만, 최근 몇 해 사이 우리 사회가 통과해온 논쟁을 떠올리면 남의 이야기로 읽히지 않습니다. 이 책이 좋은 지점은 그런 연결을 독자에게 맡겨둔다는 데 있어요. 결론을 대신 내려주지 않고, 다층적으로 보라는 요구만 반복해서 남깁니다.


인용한 통계마다 퓨 리서치 센터와 유엔, OPEC, IMF 같은 출처를 각주로 밝혀둔 점도 신뢰가 갔습니다. 무슬림 인구 증가 그래프를 보여준 다음에 인구수 증가가 곧바로 절대적인 힘이나 헤게모니 장악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스스로 제동을 거는 문장에서는 저자들의 태도가 그대로 보였고요. 요즘 이슬람 인구 통계가 소비되는 방식을 생각하면 의도적으로 넣은 안전장치일 겁니다.


이번 한 권은 읽는 방식 자체를 바꿔놓았습니다. 마감에 맞춰 완독하고 정리하는 대신, 40개의 이야기를 며칠에 걸쳐 흩어 읽고 그중 몇 개를 다시 펼치는 쪽을 택하게 됐거든요. 두께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 챕터마다 다 아는 줄 알았던 것이 하나씩 흔들려서이기도 했습니다. 뉴스에서 중동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전쟁과 석유 두 글자만 떠올리던 분이라면 이 안내서가 그 두 글자 사이에 놓인 나머지를 꽤 넓게 채워줄 겁니다. 여행 계획이 있는 분에게도, 아이가 세계사를 배우기 시작해 같이 읽을 교양서를 찾는 집에도 어울리겠고요. 무엇보다 이름을 붙이는 쪽과 불리는 쪽이 다르다는 감각을 한번 겪어보고 싶은 사람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처서를 앞두고도 낮 볕은 아직 뜨겁습니다. 그래도 해가 지고 나면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의 온도가 며칠 전과 다르지요. 여름이 물러가는 자리에서 이 초록 표지를 다시 봅니다. 뜨거운 땅을 다룬 책인데 서늘한 물그림자를 앞세운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낯선 곳을 이해하는 일은 온도를 낮추고 천천히 들여다보는 데서 시작되니까요. 가을이 깊어질 때까지 곁에 두고 남은 이야기들을 마저 읽어볼 생각입니다.


사막과 석유라는 두 단어로 묶어두었던 곳을 40개의 이야기로 하나씩 풀어내는, 낯설음의 거리를 좁혀주는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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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그를 선택했는가 - 삼성 출신 면접관들이 공개한 ‘뽑히는 사람’의 결정적 차이
이재혁 외 지음 / 더난출판사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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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파란색 한 장으로 승부를 겁니다. 그 파랑이 어느 기업의 상징색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드물 테니, 제목을 읽기 전에 이미 어디 이야기인지 짐작하게 되는 표지예요. 네 귀퉁이에 작게 박힌 빛 반짝임이 없었다면 꽤 서늘했을 텐데, 그 작은 표시들 덕분에 누군가를 가만히 알아보려는 시선 같은 인상이 남습니다. 띠지에 적힌 "삼성에 합격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는 문장은 단호하고요. 이런 종류의 단호함은 대개 부담스럽지만, 30년 넘게 사람을 뽑아온 이들이 하는 말이라 일단 들어보게 됩니다.


<우리는 왜 그를 선택했는가>는 삼성에서 인사와 채용을 맡았던 네 분이 함께 쓴 책입니다. 자기소개서 쓰는 법에서 시작해 전문성 면접, PT, 토론, 비대면 면접을 지나 최종 임원 면접까지 이어지고, 부록에 실전 100문 100답이 붙어 있어요. 판형도 두께도 편안해서 며칠이면 넘어갑니다.


책장을 천천히 넘기게 된 곳은 3장 뒤쪽이었습니다. '탈락을 부르는 결정적 장면'이라는 제목 아래 실제 사례 열 건이 이어지는데, 그중 스펙이 모자라 떨어진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그날 지원자 가운데 가장 뛰어났던 사람, 수학과를 나와 금융공학 석사를 마친 사람, 퀀트 분석 실력이 발군이었던 사람이 각각 다른 지점에서 미끄러집니다. 지원 동기가 평이했고, 아는 것을 구조화해 상대를 설득하지 못했고, 분석 설명에 머물러 투자 판단까지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준비를 많이 한 사람이 그 준비를 전부 말하려다 핵심을 흐렸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저자들은 열 건을 관통하는 키워드로 자기중심적 사고의 함정을 꼽고, 이렇게 정리합니다. "결국 면접의 본질은 자신이 얼마나 뛰어난 사람인지를 증명하는 과정이 아니라, 이 조직에서 함께 일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설득하는 과정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 대목이 아프면서도 어딘가 힘이 되는 이유는, 떨어진 사람들이 부족한 사람으로 그려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들 충분히 애쓴 사람들이었고, 전달의 방향이 조금 어긋났을 뿐이라는 이야기예요. 밤새 스펙을 쌓아온 청년들에게 이 진단은 위로가 될 수도, 더 막막하게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


4장에는 반대편 장면도 실려 있습니다. 성적이 거의 최하위였던 지원자가 그 사실을 숨기지 않고 담담하게 인정한 뒤, 그 시간 동안 무엇을 했고 어떻게 자신을 바꾸려 했는지를 설명해 합격한 이야기가 나와요. 면접관들이 공통으로 받은 인상은 약점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선 사람이라는 점이었다고 합니다. 경험이 없다고 답해야 하는 순간에 대한 조언도 인상적입니다. "그런 경험은 없습니다. 다만 그런 상황이 온다면 이렇게 대응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가능성이 남아 있고, 없습니다로 끝내면 자신의 가능성까지 스스로 닫아버린다는 것.


같은 장 끝자락에서 저자는 가장 중요한 준비를 놓치는 지원자가 많다고 말합니다. 회사 정보를 외우고 예상 질문을 돌리는 일 이전에, 자기 자신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꿈이 무엇인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이 일이 어떤 의미인지에 스스로 답을 가진 사람은 외운 답이 아니기 때문에 꼬리 질문에도 흔들리지 않는다고요. 면접관도 그런 사람은 알아본다면서 "이 사람은 자신이 왜 이 자리에 왔는지 알고 있구나."라는 문장을 놓아둡니다. 취업 안내서를 펼쳤다가 삶의 방향을 묻는 질문지를 받아 든 기분이었어요.


물론 고개가 갸웃해지는 대목도 있었습니다. 초봉이나 근무지, 야근 여부부터 묻는 지원자를 두고 면접관 입장에서는 조금만 힘들어도 쉽게 이탈하겠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는 서술이 그렇습니다. 채용하는 쪽의 경험칙으로는 이해가 갑니다. 다만 근로조건을 확인하는 일이 예의 없는 행동으로 읽히지 않는 시대가 이미 왔고, 그런 질문을 삼가라는 조언이 앞으로도 유효할지는 물음표가 남더군요. 이 책이 조직 쪽에 서서 쓰인 기록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읽어야 하는 지점입니다.


그래서 6장이 더 반가웠습니다. '합격 이후가 진짜 시작이다'라는 제목 그대로, 입사한 다음의 이야기가 붙어 있어요. 저자 한 분이 12월 퇴근 무렵 승진 소식을 전화로 듣던 장면에서 시작해, 30년 넘게 지켜본 결론으로 넘어갑니다. 성장의 차이는 실력의 차이라기보다 태도와 신뢰의 차이였다는 문장입니다. 함께 일했던 후배 일곱 사람이 가명으로 등장하는데, 지시를 받으면 회의부터 길게 하지 않고 이미 첫 줄을 쓰고 있었다는 사람, 이 정도면 됐다는 말이 나올 때 분위기를 되돌려 세운 사람, 자기 역할이 아닌 빈틈을 먼저 메운 사람이 차례로 나옵니다.


여기서 저자가 스스로 브레이크를 밟는 대목이 좋았습니다. 신입사원 대부분은 꿈을 갖고 시작하지만 임원이 되는 사람은 1퍼센트에 불과하다면서, 꿈은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못 박아요. 성공담을 늘어놓고 끝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뒤이어 나오는 신언서판 이야기도 고전적인 훈계로 흐르지 않고 현장의 언어로 풀려 있고요. 잘 작성된 문서 한 장이 길게 설명한 말보다 강하다는 대목에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게 됐습니다.


네 분이 나눠 쓴 책이라 장마다 목소리의 결이 조금씩 다릅니다. 3장은 보고서에 가깝게 건조하고, 4장 후반은 조언에 가깝고, 6장은 회고에 가까워요. 통일감이 아쉬운 순간도 있지만, 면접장에 실제로 여러 사람이 앉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편차가 오히려 현장에 가깝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만나다 보면 읽고 나서 누구에게 건네야 할지 바로 떠오르는 책이 가끔 있는데, 이 한 권이 그랬어요. 하반기 공채를 앞두고 자기소개서 파일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청년이라면 3장과 4장만으로도 충분히 값을 합니다. 그리고 조직 안에서 몇 해를 보낸 사람에게는 6장이 다르게 읽힐 겁니다. 맡길 수 있는 사람이 되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서요.


늦더위가 아직 남아 있지만 아침 공기에는 서늘한 기운이 섞이기 시작했습니다. 9월이 오면 채용 공고가 다시 쏟아지고, 어느 집 식탁에는 말수가 줄어든 사람이 앉아 있을 테고요. 그런 계절에 이 파란 표지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뽑히는 요령보다는, 당신이 지나온 시간을 당신의 언어로 설명해보라는 권유에 가깝습니다. 그 정도의 조언이면 충분히 든든한 것 같아요.


합격의 기술을 알려주는 책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신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를 묻는 안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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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열의 교양 - 알고도 모른 척해야 하는 지위의 법칙 ㅣ 세계척학전집 7
이클립스 지음 / 모티브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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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표지를 한동안 들여다보게 만드는 책입니다. 짙은 자줏빛 바탕 정중앙에 개기일식이 걸려 있고, 둘레를 육각형 창처럼 나눈 칸마다 공작과 사자, 유니콘, 두루미가 들어앉아 있어요. 그리고 딱 한 칸에만 사람이 서 있습니다. 꼬리를 활짝 편 새와 문장(紋章) 속 맹수들 사이에 팔짱을 낀 채 어정쩡하게 서 있는 사람 하나. 저자 이름이 이클립스이고 그림도 일식이니, 빛이 가려진 다음에야 겨우 보이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겠구나 짐작하며 첫 장을 열었습니다.



<서열의 교양>은 모티브에서 펴낸 세계척학전집의 일곱 번째 권입니다. 시리즈 이름의 '척학'은 오타가 아니라 '알고도 모른 척'의 그 척을 노린 표기로 보여요. 부제가 알고도 모른 척해야 하는 지위의 법칙이니 앞뒤가 맞습니다. 400쪽에 손에 무리 없는 판형이고, 24명의 학자를 불러 모았다기에 학술서를 각오했는데 막상 읽어보면 사례 하나에 짧은 문장 서너 개로 끊어가는 리듬이라 진도가 수월했습니다.


1부에서 발이 묶인 자리는 사폴스키의 서열 스트레스였어요. 챕터 문을 여는 문장이 이미 서늘합니다. 영국 공무원 1만 8천 명을 수십 년 추적했더니, 흡연이며 운동 부족 같은 위험요인을 전부 보정하고도 직급에 따른 사망 위험 차이가 남았다는 겁니다. 이어지는 개코원숭이 이야기는 더 구체적이고요. 무리의 일인자였던 솔로몬은 매일 아침 덤벼드는 젊은 수컷을 매번 이겼는데, 이기는 쪽도 솔로몬이고 야위는 쪽도 솔로몬이었습니다. 살이 빠지고 얼굴에 상처가 늘다가 언젠가부터는 이기고도 먼저 물러났다고 해요.


이 챕터에서 가장 오래 남은 문장은 이겁니다. "배를 채우고도 남은 시간에 서로를 괴롭히는 짐승. 개코원숭이, 그리고 인간이다." 사폴스키가 개코원숭이를 연구 대상으로 고른 이유가 초원에 먹이가 넘쳐 하루 세 시간이면 배를 채우고 남는 시간을 서로 괴롭히는 데 쓰기 때문이었다는 대목에서, 저 문장은 비유가 아니라 관찰 기록에 가깝게 읽힙니다.


책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사자에게 쫓긴 얼룩말은 몇 분 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풀을 뜯는데, 인간을 덮치는 사자는 다음 달 실적이나 상사의 표정이나 통장 잔고라서 몇 분 만에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게다가 우리는 닥치지도 않은 마감과 일어나지도 않은 해고를 머릿속으로 미리 겪는 재주가 있어서 장치가 좀처럼 꺼지지 않습니다. 몸을 상하게 하는 것은 사자 쪽이 아니라 꺼지지 않는 스위치라는 설명이었어요.


그다음이 위로 쪽으로 방향을 트는 대목입니다. 쥐 두 마리에게 세기와 시간까지 완전히 같은 충격을 주는데 한쪽 우리에만 바퀴가 있었고, 바퀴를 돌릴 수 있었던 쥐는 멀쩡했고 아무것도 못 한 채 견딘 쥐만 위장이 상했다는 실험이 나옵니다. 뉴욕 횡단보도 버튼 천 개 중 구백 개가 아무 데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데도 아무도 떼어내지 않는 이유, 요양원에서 화분을 직접 고르고 물을 준 노인들이 3주 만에 더 활발해졌다는 관찰이 뒤를 잇고요. 저자가 정리한 변수는 두 가지입니다. 통제감과 예측 가능성. 자리를 바꾸기 어렵다면 마음대로 되는 구석 하나부터 만들어보라는 조언이 여기 붙어 있는데, 조직 생활을 오래 해온 사람에게는 꽤 현실적인 처방으로 들립니다.


3부의 켈트너 챕터는 방향이 정반대입니다. 앞에서 아래에 있는 몸을 다뤘다면 여기서는 위로 올라간 뇌를 봅니다. 모노폴리 실험이 인상적이었어요. 동전을 던져 부자 역할을 맡은 사람은 시작 자금도 주사위도 급여도 두 배를 받고, 두 참가자 모두 그 조건을 알고 게임을 시작합니다. 십오 분 뒤 부자로 배정된 사람은 목소리가 커지고 말을 판에 놓을 때 소리를 내고 프레첼 그릇으로 손이 자꾸 갔다고 해요. 게임이 끝난 뒤 왜 이겼느냐고 물으니 전략이 좋았고 판단이 빨랐다고 답합니다. 저자의 정리가 서늘합니다. "유리한 조건은 대답에서 사라진다."


삼십 분짜리 무작위 리더 역할을 맡은 사람이 남은 쿠키에 먼저 손을 뻗고 입을 벌린 채 씹더라는 관찰, 권력을 느끼도록 유도된 사람의 거울 뉴런 반응이 약해졌다는 실험까지 읽고 나면 켈트너가 말한 권력의 역설이 선명해집니다. 권력에 오르는 데 필요했던 특성이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서 가장 먼저 사라지고, 정작 본인은 자기가 변했다는 걸 알아채지 못한다는 겁니다. 마흔을 넘기면 누군가를 평가하고 결정하는 자리에 조금씩 서게 되니, 이 챕터는 남의 이야기로 넘기기가 어려웠습니다. 윗사람이 사정을 못 알아듣는다면 실제로 이해하는 회로가 약해진 것일 수 있으니 마음을 알아달라고 호소하기보다 알아들을 언어로 바꿔 말하라는 조언도 실무적이었고요.


다만 걸리는 대목도 있었습니다. 저자는 앞선 챕터에서 요양원 화분 연구의 사망률 수치를 소개한 뒤, 바로 다음 쪽에 그 통계값이 나중에 정정되어 통상적인 기준으로는 유의하지 않게 됐다는 단서를 스스로 달아둡니다. 대중 교양서에서 흔치 않은 태도라 신뢰가 갔어요. 그런데 3부의 고급차 관찰처럼 재현을 두고 말이 오간 연구에는 같은 수준의 단서가 붙어 있지 않습니다. 사례를 다루는 온도가 챕터마다 조금 다르게 느껴졌고, 앞에서 보여준 신중함을 끝까지 밀고 갔으면 더 단단했겠다 싶었습니다. 마키아벨리가 틀렸다고 잘라 말하는 부분도, 1부에서 두렵게 하는 길과 닮고 싶게 하는 길을 나란히 놓았던 서술과 완전히 포개지지는 않더군요. 강연에 가까운 리듬을 쓰는 저자라 의도된 단순화일 수도 있겠습니다.


4부에 이르면 책이 판 자체를 내려다봅니다. 브룩스의 두 이력서 챕터는 2011년 스티브 잡스의 추도식 장면으로 문을 여는데, 단상에 오른 여동생이 먼저 꺼낸 것은 애플의 부활도 아이폰도 아니었다고 해요. 오빠가 사랑을 진지하게 여긴 사람이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이력을 남긴 사람의 장례식에서 성취가 이력서처럼 낭독되지 않았다는 문장이 이 챕터의 출발점입니다.


브룩스는 덕목을 두 종류로 나눕니다. 이력서 덕목은 학위와 경력과 매출처럼 시장이 값을 매겨주는 것들이고, 조사 덕목은 친절했다거나 어려운 순간에 옆을 지켰다처럼 이력서에 적을 자리조차 없는 것들이에요. 앞의 문서는 오늘 밤에도 열어서 다듬을 수 있지만 뒤의 문서는 제가 쓰지 못하고 저를 오래 지켜본 누군가가 씁니다. 창세기의 두 인간을 아담 I과 아담 II로 나눈 랍비 솔로베이치크의 구분을 가져와, 한쪽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고 다른 한쪽은 나는 왜 여기 있는가를 묻는다고 정리한 대목도 오래 남았습니다.


이 챕터에서 제일 조용하게 아픈 문장은 이거였어요. "상황에 지친 사람은 상황이 바뀌면 회복된다. 자기 자신에게 지친 사람은 상황이 바뀌어도 회복되지 않는다." 이력서 쪽으로만 시간을 몰아쓴 사람의 피로는 대개 뒤쪽이라고 저자는 덧붙입니다. 성취해도 채워지지 않고 사다리는 끝없이 위로 이어지며 계단마다 자기존중감의 유효기간이 짧다는 진단이 앞에 깔려 있어서, 이 문장이 훈계처럼 들리지는 않았습니다. 브룩스 본인이 성공한 사람들의 삶을 매일 다뤄오면서 정작 자기 삶은 그 성공을 좇는 쪽으로 짜여 있었다고 먼저 자백해두었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한 가지 덧붙이자면, 자기 확대 문화에 대한 진단은 우리 사정과 그대로 포개지지는 않는 듯합니다. 당신은 특별하다는 말이 사방에서 반복되어 결함을 응시할 언어가 사라졌다는 관찰은 미국 사회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인데, 이곳은 오히려 스스로를 낮게 매기고 남과 비교하며 깎아내리는 말이 더 익숙한 편이니까요. 결함을 세 개 적어보라는 권유가 그런 독자에게 어떻게 가닿을지, 저자가 한국 상황에 맞춘 한 문단을 보태줬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만 좋은 삶이란 결함을 없앤 상태보다 평생 그것과 씨름해온 상태에 가깝다는 정의는, 완성이 아니라 지속을 말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따뜻했어요.


조사 덕목은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 사소한 결정이 쌓여 자란다고 책은 말합니다. 식당 직원에게 어떻게 말했는지, 아파트 경비원에게 인사를 했는지, 회의에서 말하지 못한 후배에게 나중에 의견을 물었는지. 한 번이면 무게가 없지만 매일 반복하는 방식이라면 그것이 십 년 뒤 사람들이 저를 기억하는 방식이 된다는 대목에서, 이 책이 왜 마지막 파트에 초연이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납득이 갔습니다. 확인은 늦게 올 뿐 언젠가는 반드시 온다고 저자는 썼어요.


띠지에는 교실에 두 명의 왕이 있었고 그 작은 교실은 첫 판에 불과했다는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학생회장과 일진이라는 두 갈래 왕좌가 성적표와 명함과 아파트 평수로 이름만 갈아입은 채 계속되고 있다는 뜻일 텐데, 이 책의 미덕은 그 판을 벗어나라고 다그치지 않는 데 있는 것 같아요. 대신 판의 구조를 보여주고, 어느 자리에 있든 몸이 상하는 지점이 어디인지 짚어줍니다. 인정 욕구에 지쳐 있으면서도 그런 게임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인정하기 싫었던 사람이라면, 읽는 내내 여러 번 걸음을 멈추게 될 겁니다. 조직에서 위로 올라가는 중인 사람에게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불편하게 읽힐 테고요.


서평단으로 만나는 책은 대개 정해진 기간 안에 읽고 감상을 정리해야 하는데, 이번 한 권은 마감을 의식하기 어려웠어요. 어느 대목에서는 밑줄을 긋다가 스스로를 변호하고 싶어지고, 어느 대목에서는 그냥 조용해졌습니다. 산에 오르는 동안은 산이 보이지 않는다는 저자의 문장이, 다 읽고 나서야 제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었어요.


처서가 지나면서 밤공기가 한 겹 식었습니다. 낮의 열기는 아직 남아 있지만 저녁이 확실히 짧아졌고, 이맘때는 한 해의 절기가 어디쯤 왔는지 세어보게 되죠. 올해 무엇을 이뤘는지 세는 목록과 어떤 사람이었는지 남는 목록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이 책이 알려준 셈입니다. 서늘해지는 계절에 읽기 알맞은 한 권이었습니다.


서열은 사라진 적이 없고, 이 책은 그 판을 벗어나라고 말하는 대신 판의 규칙을 읽는 눈을 쥐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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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귀여운 미니 일러스트 쉽게 그리는 방법
요모리 나리 지음, 콘텐츠 연구소 옮김 / 정보문화사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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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책이 손에 들어왔을 때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크기였습니다. 핸드북 판형에 두께도 얇아서 한 손에 잡히고, 가방 옆주머니에 꽂아 두어도 표가 나지 않아요. 그림 배우는 책이라고 하면 큼직한 판형에 종이도 도톰한 쪽을 떠올리게 되는데, <작고 귀여운 미니 일러스트 쉽게 그리는 방법>은 시작부터 부담을 덜어 놓고 문을 엽니다.


표지 이야기를 잠깐 하고 싶습니다. 민트빛 하늘색 바탕 위에 크림색 구름을 얹고, 그 둘레로 곰과 토끼, 알파카, 해파리, 케이크, 피아노가 둥글게 앉아 있어요. 가운데에는 아이 하나가 자기 키만 한 연필을 어깨에 걸치고 걸어갑니다. 저 정도 크기면 꽤 무거울 텐데 표정은 신이 나 있고요. 잘 그리는 일보다 일단 연필을 들고 나서는 일에 무게를 실은 그림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여는 자리에서 저자가 건네는 제안도 그 결과 같습니다. "실패해도 되는 낙서 노트부터 만들어보자"는 말인데요, 그림 앞에서 손이 굳는 이유가 실력 부족이 아니라 망칠까 봐 하는 걱정이라는 걸 저자는 알고 있는 듯합니다. 다 그리고 나서 마음에 안 들면 그만이라는 전제를 먼저 깔아 두니, 페이지를 넘기는 손이 한결 편해집니다.


첫 파트는 동물입니다. 강아지 지면에서 시바견, 치와와, 포메라니안, 토이푸들이 각각 세 단계로 완성되는데, 방식이 명쾌해요. 1단계는 연회색 가이드 도형, 2단계는 검은 선 정리, 3단계는 색을 얹어 마무리. 견종을 가르는 기준도 뼈대나 비율이 아니라 실루엣과 무늬 한두 개입니다. 시바견 옆에는 눈썹처럼 보이는 무늬라는 메모가, 포메라니안 옆에는 풍성한 털 속에 작은 발이라는 메모가 붙어 있어요. 그 한 줄만 지키면 그 개가 됩니다.


고양이로 넘어가면 접근이 또 달라집니다. 여기서는 색과 무늬가 종을 가르는 기준이 되고, 설명에 문자를 끌어옵니다. 머리 한가운데서 갈라지는 'ㅅ'자 무늬, 이마에 새겨진 'M'자 무늬 같은 식이에요. 그림을 글자로 기억하게 만드는 방법이라 잘 잊히지 않습니다. 곰과 판다가 사실상 같은 형태에서 색 배분만 달라지며 갈라지는 장면도 인상적이었고요. 형태를 하나 익히면 그걸로 여러 대상을 만들 수 있다는 감각이 여기서 잡힙니다.


기본형을 익힌 다음에는 동작이 이어집니다. 꼬리 흔드는 치와와, 자는 퍼그, 기지개 켜는 치즈 고양이처럼 그 종에 어울리는 몸짓을 붙여 놓았어요. 앉아 있는 그림 하나로 끝나지 않고 바로 쓸 데가 생기는 구조입니다.


일상 생활 파트는 결이 좀 다릅니다. 취미 지면에는 단계 안내 없이 완성된 아이콘들이 놓여 있어요. 독서와 영화, 게임, 쇼핑, 노래방, 드라이브. 자동차 옆에 붙은 메모 한 줄이 이 파트의 요령을 다 말해 줍니다. "더 귀엽게도 전체적으로 둥글게 표현하기". 사물을 귀엽게 만드는 기술이 결국 모서리를 둥글리는 데 있다는 정리인데, 앞 파트에서 익힌 도형 감각을 사물로 옮기는 다리 역할을 합니다.


도시락 지면에서는 주먹밥 옆에 "속재료는 취향에 따라"라고 적어 두었더군요. 정답을 정해 주지 않고 여백을 남기는 태도가 책 전체에 일관되게 흐릅니다. 동아리 지면의 배너 문구는 아예 용도를 못 박아 두었어요. 동아리 일지나 다이어리에 활용해 보라는 안내인데, 그리는 행위를 기록과 연결 짓겠다는 의도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계절 파트는 이 책에서 가장 오래 머물게 되는 구간이었습니다. 봄에는 부활절 달걀에서 나오는 토끼와 벚나무 아래 돗자리를 편 코알라가, 여름에는 물웅덩이 위에서 노래하는 개구리와 튜브를 낀 곰이 있어요. 가을 지면에는 차분한 색으로 계절 느낌을 살려 보라는 조언과 함께, 구름 모양에도 신경 써 보라는 말이 작게 적혀 있습니다. 계절감이라는 게 소재보다 색과 배경에서 나온다는 이야기라 실제로 도움이 됩니다. 겨울 지면 배너에는 크리스마스 카드나 연하장에도 추천이라고 쓰여 있고요.


다만 걸리는 대목도 있었습니다. 계절 파트로 갈수록 원서의 일본 연중행사가 그대로 남아 있어요. 코이노보리와 종이 투구, 란도셀, 테루테루보즈, 달맞이 경단과 참억새, 가가미모치와 다루마까지. 우리 달력과는 겹치지 않는 날들이라, 설날 지면을 보며 세배와 떡국을 그리려면 결국 스스로 응용해야 합니다. 안내 밀도가 파트마다 들쭉날쭉한 점도 조금 아쉬웠고요. 계절 파트는 지면마다 3단계를 꼬박 보여 주는데 일상 생활 파트는 완성형만 놓여 있어서, 700개를 모두 단계별로 배운다고 기대하면 어긋나는 구간이 생깁니다. 물론 사물은 형태가 이미 단순하니 단계를 나눌 실익이 적다는 판단이었을 테고, 도형으로 잡는 원리 자체는 어디에나 적용되니 출발점으로 삼기에는 충분합니다. 완성된 도안집으로 볼지, 응용의 재료로 볼지에 따라 평가가 갈릴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서평을 쓰려고 펼쳤다가 그냥 넘겨보게 되는 시간이 더 길었습니다. 마흔을 넘기고 나면 새로 시작하는 일 앞에서 자꾸 계산을 하게 됩니다. 이 나이에 이걸 배워서 뭘 하나 하는 생각이 먼저 오거든요. 이 책에는 그런 계산이 끼어들 자리가 없습니다. 원 하나 그리고 귀 붙이면 곰이 되니까요. 잘하게 될지를 묻기 전에 손부터 움직이게 만드는 힘이 이 얇은 책에 들어 있습니다.


여름이 물러가는 자리에 서 있는 지금, 이 책의 여름 지면과 가을 지면이 나란히 붙어 있는 게 공교롭게 느껴집니다. 빙수와 풍경 다음 장을 넘기면 그루터기에 앉아 책 읽는 다람쥐와 단풍잎이 기다리고 있어요. 계절이 바뀌는 걸 달력으로만 확인하고 지나쳐 왔는데, 올가을에는 다이어리 귀퉁이에 감 하나쯤 그려 넣어 봐도 좋겠다 싶습니다. 그림 실력이 늘지 않아도 상관없는 종류의 즐거움이 분명 있습니다.


잘 그리는 법이 아니라 계속 그리고 싶어지는 마음을 먼저 챙겨 주는, 가볍게 들고 다니며 아무 데나 펼치기 좋은 미니 일러스트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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