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읽는 수능 고전시가 - 2022 개정 교육과정 반영
이가영(seri) 지음 / 꿈을담는틀(학습)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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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유튜브에 올라온 짧은 영상 하나가 이 책의 이름을 여러 번 듣게 만든 계기였습니다. 서울대 나민애 교수가 자녀에게 읽히는 책으로 꼽은 세 권 가운데 하나로 <만화로 읽는 수능 고전시가>가 소개됐고, 그 뒤로 예비 고1 자녀를 둔 집들 사이에서 제목이 돌기 시작했어요. 학습서가 이런 식으로 입소문을 타는 경우는 흔치 않아서, 실물이 궁금했습니다.


먼저 한 가지만 짚고 가겠습니다. 표지와 제목이 비슷한 다른 책들이 있어서 검색창에서 헷갈리기 쉬워요. 제가 본 도서는 꿈을담는틀에서 나온 이가영(seri) 작가의 <만화로 읽는 수능 고전시가>입니다. 노란 바탕에 검은 박스로 제목을 앉히고 '최신 개정판' 딱지가 붙은 판본이고, 아래쪽 파란 띠에 "학생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고전시가, 이 책을 미리 읽으면 수업이 100배 쉬워집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주문하실 때 출판사까지 한 번 확인하시면 좋겠습니다.


손에 들고 놀란 건 부피였어요. 학습서라고 하면 두껍고 묵직한 물건을 예상하게 되는데, 판형도 두께도 가볍습니다. 책상 앞에 각 잡고 앉지 않아도 펼칠 수 있다는 점이 이 종류의 책에서는 꽤 큰 장점입니다.


작가 이력이 이 한 권의 성격을 거의 설명해 줍니다. 서울대 국어교육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같은 과 대학원 석사 과정을 수료한 뒤 국어 교사로 일했고, 임용 준비 시절을 그린 <고시생툰>을 네이버에 연재했던 분이에요. 지금도 현역입니다. 네이버 웹툰 <내가 키운 S급들>의 각색을 맡아 연재 중이니, 취미로 그림을 곁들인 교사가 아니라 그림으로 밥을 먹는 사람이 교단에서 필요하다고 느껴 만든 책인 셈입니다. 저자의 말에 이런 문장이 있어요. "고전시가에는 여러분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재미있고 신기한 이야기가 가득 담겨 있습니다." 교사의 문제의식과 만화가의 기술이 한 사람 안에 있다는 게 페이지마다 드러납니다.


학습 만화는 글 작가와 그림 작가가 나뉘는 경우가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설명은 정확한데 그림이 겉돌거나, 그림은 재미있는데 정작 짚어야 할 대목을 비껴가는 일이 그래서 생기죠. 이 도서는 구상과 작화를 한 사람이 했고, 그 덕에 컷의 리듬과 설명의 밀도가 어긋나지 않습니다. 10년 넘게 학습서 분야에서 자리를 지켜온 이유가 이쯤에 있지 않나 싶었어요.




지면은 세 층입니다. 위에 만화, 아래에 원문과 현대어 풀이. 개정판에서 새로 들어간 <관동별곡>을 보면 구성의 의도가 선명합니다. 관찰사 임명 장면에서 캐릭터가 "너 강원도 도지사 임명!"이라고 던져 버려요. 직책을 설명하느라 몇 줄을 쓰는 대신 대사 한 줄로 끝냅니다. 폭포를 그린 대목도 좋았습니다. 멀리서 들을 때는 우레 같더니 가까이서 보니 눈 같다는 구절이 컷 두 개로 갈라져 있어서, 청각에서 시각으로 옮겨 가는 이동이 그림으로 그대로 보입니다. 봉우리를 세다가 9897, 9898 하고 넘어가는 장면에서는 웃음이 났어요. 일만 이천 봉이라는 숫자가 머리로만 알던 것에서 몸으로 느껴지는 것으로 바뀌더군요.


오래 머문 자리는 화룡소였습니다. 저 늙은 용이 비를 뿌려 그늘에서 시든 풀을 다 살려 냈으면 한다는 대목인데, 여기서 만화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농담을 거두고 캐릭터가 칠판 앞에 서서 풀이 백성을 뜻한다고 알려줘요. 음애예 이온 플을 다 살와 내여사라. 수백 년 전 지방으로 내려가던 관리가 품었던 마음을 그냥 지나치게 두지 않겠다는 편집자의 판단으로 보였습니다.


향가로 넘어가면 지면 짜임이 바뀝니다. 노래가 짧으니 앞뒤를 배경 설화로 감싸고, 해설면에서 갈래와 성격과 의의를 정리하는 방식이에요. 갈래에 따라 설계를 다르게 가져간 점이 꼼꼼합니다. <제망매가>가 특히 그랬습니다. 한 나뭇가지에 잎을 그려 놓고 각각에 Me, Sister, Parents를 붙인 컷이 있는데, 가을바람에 흩어지는 잎이 곧 한 부모에게서 난 형제라는 비유가 설명 없이 전달됩니다. 끝은 "아야 미타찰아 맛보올 나 도 닷가 기드리고다"로 닫히고요. 학창 시절에는 10구체 향가라는 갈래 이름으로만 외웠던 작품인데, 마흔을 훌쩍 넘겨 다시 보니 읽히는 결이 달랐습니다.



시조 파트는 배열이 인상적입니다. 이존오의 구름, 이색의 백설과 매화, 정몽주 어머니의 까마귀, 박팽년의 까마귀가 연달아 놓여 있어서, 같은 새가 한쪽에서는 어울리지 말아야 할 무리로, 다른 쪽에서는 겉과 속이 다른 존재로 쓰이는 차이가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와요. 이색의 작품에 붉은 하늘 아래 늙은 선비가 홀로 선 그림이 있는데, 석양에 홀로 서서 갈 곳을 몰라 한다는 종장이 그 한 컷에 다 담겨 있었습니다.


그동안 받아 본 목록에 학습서는 드물어서 오히려 더 들여다보게 됐어요. 고전시가를 재미있게 만드는 일이 가능한가 싶던 의심이 페이지를 넘기면서 줄어들었습니다.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아이가 있는 집이라면 거실 탁자에 올려 두기 좋고, 어른이 먼저 펼쳐도 아깝지 않습니다. 뜻도 모르고 외웠던 노래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 뒤늦게 알게 되는 대목이 분명 있으니까요.



9월도 하순으로 접어들어 아침저녁 공기가 선선해졌습니다. 중간고사가 멀지 않아 아이들 책상에 문제집이 쌓여 갈 시기인데, 그 사이에 만화책 얼굴을 한 노란 표지가 한 권쯤 섞여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잎이 지기 시작하는 계절이라 <제망매가>의 그 구절이 더 오래 남습니다.


웹툰으로 현업을 이어가는 국어 교사가 혼자 쓰고 그려, 어렵다고 소문난 옛 노래를 시험 대비와 작품 감상 양쪽에 걸쳐 놓은 학습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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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인문 기행 3 - 고전 들고 떠나는 그리스 문명과 사상 유랑기 ㅣ 그리스 인문 기행 3
남기환 지음 / 상상출판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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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주황빛 바탕 위에 검은 실루엣 몇 개가 전부인 표지였습니다. 월계관과 날개 달린 승리의 여신, 코린토스 투구와 도기, 신전 기둥. 유적 사진을 크게 걸어 두고 여기가 어디인지 알려 주는 책은 아니겠구나 싶었어요. 아래쪽 띠에 적힌 "신화와 역사, 삶의 이야기가 살아 숨 쉬는 곳!"이라는 문구도 요란하지 않게 읽혔습니다. 북유럽 카페를 통해 받은 책인데 판형도 두께도 부담이 없어서, 며칠에 걸쳐 천천히 넘기기에 알맞았습니다.


<그리스 인문 기행 3>은 델포이에서 출발합니다. 첫 장에서 저자가 오래 서 있는 곳은 아폴론 신전이 아니라 청동으로 감아올린 뱀의 기둥 앞이에요.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를 기념해 그리스 연합군이 봉헌한 물건인데, 나선형 몸통에는 함께 싸운 서른한 개 폴리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승리를 한 도시가 독차지하지 않고 여럿이 나눠 가졌던 흔적인 셈이죠. 지금 델포이에 서 있는 것은 복제품이고, 원본은 로마 시기에 옮겨졌으며 머리 파편은 다른 나라 박물관에 남아 있습니다.


그 앞에서 저자가 남긴 문장이 이 책의 시선을 잘 보여 줍니다.


"뱀의 머리가 없다. 문명의 폐허가 나를 보고, 나는 상처 난 문명을 본다."


보는 쪽과 보이는 쪽이 슬쩍 뒤집히는 대목이에요. 폐허를 구경하러 갔다가 오히려 폐허에게 읽히는 자리에 서게 됐다는 말로 들렸습니다. 이 장의 끝에는 델포이의 마지막 신탁이 실려 있는데, 그리스 전통을 되살리려던 로마 황제가 사절을 보내 받아 온 답이 예언이 아니라 통보였다는 점이 오래 남았어요. 아름답게 지어진 집은 무너졌고 그 안에는 아폴론도 신성한 월계수도 없으며 샘의 목소리는 이미 잠잠하다는 전언. 물어볼 곳이 사라진 뒤에 사람은 무엇을 붙들고 살아가는가, 책은 여기서부터 그 물음을 끌고 갑니다.


가장 두꺼운 장은 아테네입니다. 그리고 이번 권에서 제가 가장 오래 붙들려 있던 대목도 거기에 있었어요. 아크로폴리스 아래쪽, 관광객 동선에서 비껴난 절벽에 동굴 몇 개가 입을 벌리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감옥이라 불리는 곳인데 저자는 근거가 없다고 먼저 밝혀 둡니다. 문헌도 비문도 발굴 기록도 없다고요. 그러면서 이런 정의를 내놓습니다. 한 인간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에 대한 정서적 개연성이 만들어 낸 장소라고. 사실과 전승 사이의 거리를 감추지 않는 태도라 미더웠습니다.


페리클레스에게는 기념비가 있고 장군들에게는 묘역이 있는데 소크라테스에게는 없습니다. 아테네는 무엇을 기념하고 무엇을 기억할지 정확히 알던 도시였다는 서술이 칭찬처럼 시작했다가 이내 서늘해져요. 밝은 대리석 위에는 승리와 질서와 이성을 올려 두고 불편한 질문은 빛이 닿지 않는 곳으로 밀어냈다는 문장이 곧바로 뒤따르거든요. 그가 남긴 것은 교리도 체계도 아니었고, 당신이 옳다고 믿는 그것이 정말로 옳은가라는 물음 하나였다는 정리도 담담합니다.


법정에서의 변론은 가난을 걸고 이루어집니다. 나에게 죄가 없다는 것은 나의 가난이 증명하고 있다는 말. 저자는 이 대목을 청빈 예찬으로 읽지 않고, 재산을 모으는 데 삶을 쓰지 않았고 권력과 거래하지 않았다는 흔적으로 읽습니다. 그 계보를 마키아벨리와 카잔차키스까지 잇는데, 권력의 생리를 누구보다 냉정하게 들여다봤던 사람이 정작 자신은 그 대가를 받지 않았음을 빈손으로 증명하려 했다는 해석이 인상에 남았어요.


책의 한가운데를 지나면 아르기누사이 해전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는 이 부분이 이번 권에서 가장 단단하다고 느꼈습니다. 스파르타가 먼저 화평을 청할 만큼 큰 승리였는데, 폭풍으로 전사자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일이 문제가 됩니다. 민회는 승전의 의미보다 죽은 자에 대한 분노와 슬픔에 휩싸였고, 개별 심문을 건너뛴 채 장군 전원을 한꺼번에 재판에 넘기는 제안이 통과돼요. 크세노폰은 이를 두고 모두가 위법임을 깨달았던 결정이라 적었다고 합니다. 축제가 추도 집회로 변질되고, 정치 세력이 사람들을 전사자 친척으로 꾸며 슬픔을 키웠다는 서술까지 읽고 나면 결과가 예상됩니다. 여덟 명 가운데 여섯 명이 적법한 심리 없이 처형됐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민주정이 타락하면 가장 위험한 적은 폭군이 아니라 동조하지 않는 자라고 씁니다. 그 불법 표결에 끝까지 반대한 평의원이 제비뽑기로 선출된 소크라테스 한 사람뿐이었다는 기록이 뒤에 놓이고요. 다수의 분노가 법의 자리를 차지한 순간 혼자 남아 절차 편에 섰다는 문장이, 여론이 제도를 앞질러 달리는 장면을 익히 봐 온 사람에게는 남 이야기로 읽히지 않습니다. 법이 여론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는 진단도 그렇고요. 이 사건이 몇 해 뒤 또 다른 불편한 존재를 법정에 세우는 전조가 된다는 연결에 이르면, 앞서 읽은 무덤 없는 철학자 이야기가 다르게 보입니다.


다만 읽으면서 갸웃한 지점도 있었습니다. 뱀의 기둥을 다루는 앞부분은 사실 정보와 감상이 짧은 지면 안에서 빠르게 교차해서, 유물의 내력을 좀 더 붙들고 갔으면 어땠을까 싶었어요. 가난의 계보를 소크라테스에서 마키아벨리를 거쳐 현대 작가까지 잇는 대목도 매끄럽긴 한데 건너뛰는 폭이 큰 편입니다. 시대와 처지가 다른 세 사람의 가난을 한 줄로 꿰어도 되는지는 읽는 사람마다 생각이 갈릴 것 같아요. 유적 앞에서 고전을 먼저 펼치는 저자의 방식이 이 책의 장점이자 호불호가 나뉠 지점이라는 뜻이겠지요.


마지막 목적지는 메테오라입니다. 이 장의 안내자는 뜻밖에도 조르바예요. 나는 신을 믿지 않소, 그러나 그분을 사랑한다오, 라는 대사로 장이 열립니다. 저자는 자신이 이곳에 오게 된 것이 순전히 카잔차키스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솔직히 저는 이 대목에서 수도원이라는 실제 공간보다 문학의 렌즈가 앞선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계속 읽다 보니 그게 흠으로 남지는 않더군요. 저자가 절벽 위 수도원을 성지로만 그리지 않고, 신과 인간의 욕망이 충돌하는 모순의 경계 위에 서 있는 곳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성모승천 성화 앞에서 조르바가 다시 끼어듭니다. 저분은 신이 아니라 어머니라고, 그 눈빛 안에 신이 있다면 그건 우리가 아침마다 떠올리는 그리움 같은 거라고요. 그 말 뒤에 저자는 침묵 속에서 기도도 고백도 하지 않았다고 적습니다. 대신 기도를 이렇게 풀어요. 매일 흔들리는 마음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작은 움직임 같은 것이라고. 날마다 바람을 맞으며 돌계단을 오르는 노인의 걸음걸이,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 절벽 흙을 뚫고 올라온 풀잎 한 포기가 그 자리에 놓입니다. 세상의 끝이라 믿을 만한 높이가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침묵의 들머리였다는 문장은, 세 권을 걸어온 여정을 닫기에 알맞은 자리였습니다.


세 번째 권의 마지막은 완결이 아닙니다. 아직 못 쓴 이야기가 남았지만 카잔차키스의 고향으로 이어지는 몫은 남겨 두겠다고 저자는 적어요. 그리고 카잔차키스가 1937년 아테네에서 쓴 편지 한 대목을 빌려 옵니다.


"이제 나는 무슨 글을 써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그리스는 힘든 주제이니까요."


다 알았다고 선언하지 않고 어려웠다고 말하며 물러서는 마무리라, 오히려 믿음이 갔습니다. 무지를 인정한 채 한 걸음 더 가 보려는 태도가 이 여행의 결론이라는 소개 글과도 어긋나지 않고요. 오래 일하고 오래 살아 본 사람일수록 확신에 찬 문장보다 이런 여백에 마음이 놓이는 법이지요.


그러니 이 책은 그리스 여행을 준비하며 동선을 짜려는 손에는 조금 멀고, 고전을 제대로 읽어 본 적은 없지만 인간이 무엇을 두려워하며 무엇을 지키려 했는지 궁금한 사람 쪽에 가깝습니다. 신탁이 끊긴 자리에서 스스로 결정해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라, 답을 주는 목소리가 줄어든 자리에 서 본 적 있는 이라면 어느 장에서든 자기 물음을 하나쯤 건져 올릴 수 있을 거예요. 시리즈를 처음 접하는 경우에도 이 권부터 읽는 데 큰 무리는 없어 보입니다.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만나다 보면 읽고 나서 마음이 가벼워지는 책과 무언가를 남겨 두는 책이 나뉘는데, 이 한 권은 분명 뒤쪽에 속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서늘해지고 해가 짧아지는 무렵에 읽기 잘했다 싶었어요. 여름내 달아오른 것들이 식어 가고 한 해의 남은 자리가 눈에 들어오는 시기라, 무엇을 이루었는가보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묻는 책의 목소리가 계절과 잘 맞았습니다. 창을 조금 열어 두고 페이지를 넘기기에 지금만 한 때도 드물 것 같습니다.


머리 잘린 기둥과 무덤 없는 철학자, 절벽 위 수도원을 지나며 답 대신 태도를 건네받는 그리스 인문 기행의 마지막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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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인 수면법 - 잠까지 완벽할 필요는 없다
메레인 판더라르 지음, 고현석 옮김 / 21세기북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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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표지를 먼저 보게 되는 책이 있습니다. <원시인 수면법>이 그랬어요. 잠을 다룬 책이라면 보송한 침구나 달빛 정도를 떠올리게 되는데, 이 도서의 얼굴은 청록빛이 도는 밤의 숲입니다. 물기 어린 잎사귀 사이로 흰 글씨가 두껍게 박혀 있고, '시'자 안쪽에 사람 하나가 서 있어요. 누워 있지 않고 서 있다는 점이 눈에 남았습니다. 아래쪽 띠지에 적힌 "완벽한 잠을 목표로 삼는 순간, 잠은 휴식이 아니라 과제가 된다!"라는 한 줄은 이 책이 하려는 말을 거의 다 담고 있고요. 손에 쥐면 좁은 판형에 제법 도톰해서, 오래 붙들고 읽기에 편안한 두께였습니다.


저자 메레인 판더라르는 네덜란드 수면의학센터에서 오래 일한 수면 치료사입니다. 동시에 이십 대에 심각한 불면을 겪은 환자이기도 했어요. 책 안에서 그 시절을 숨기지 않고 꺼내 놓는데, 무용 공연을 준비하며 스무 명에게 안무를 가르치던 무렵 음악과 동작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고 합니다. 건강도 관계도 일도 안정적이었는데 잠만 자지 못했고, 수면치료사로서 스스로에게 숙면을 선물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고 적어 두었습니다. 치료사가 자기 침대를 먼저 고백하고 시작하는 책이라, 첫인상부터 경계심이 좀 풀렸어요.


첫 장은 예상과 다른 곳에서 출발합니다. 잠을 잘 자는 법이 아니라 우리 몸이 어떤 밤에 맞춰 만들어졌는지를 먼저 훑어요. 조상들의 조상은 나무 위 둥지에서 잤고, 이유는 명확합니다. 높은 곳에 있으면 포식자를 피할 수 있으니까요. 졸다가 갑자기 떨어지는 느낌에 깜짝 놀라 깨는 근육 수축, 이른바 수면놀람증이 그 시절의 흔적일 수 있다는 설명이 나오는데 이 대목에서 책이 확 가까워졌습니다. 따분하지만 중요한 회의 중에 고개가 꺾이는 장면을 저자가 예로 드는데, 그 민망한 순간조차 나무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던 반응의 잔재라는 이야기니까요.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침대는 이십만 년쯤 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풀과 나뭇가지, 잎사귀로 만들어 동굴 안에 두었고 그 위에는 벌레를 쫓는 식물이 놓여 있었어요. 잠자리를 조금이라도 낫게 만들려는 손길이 그렇게 오래됐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뭉클했습니다. 고고학자들은 침대 층층에서 재도 발견했다는데, 잠을 자고 난 뒤 깔개에 불을 질러 벌레를 쫓았던 흔적이라고 하고요. 지금 이 의식을 되살린다면 아침마다 태울 침대를 싣고 쓰레기장으로 향하는 자동차 행렬이 생길 거라는 농담까지 붙여 두는데, 이런 유머 덕분에 사백 쪽 가까운 분량이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책의 무게중심은 제4장에 있습니다. 전통 생활을 유지하는 부족 사회에는 '불면증'이라는 말조차 없는 경우가 많다는 관찰에서 시작해서, 밤중에 깨는 일을 고장으로 여기지 않는 태도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짚어요. 저녁형 인간은 늦게까지 경계를 유지하고 아침형 인간은 새벽에 깨어 무리를 지켰으며, 그 사이의 공백은 얕은 잠을 자는 사람들이 메웠다는 가설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렇게 적혀 있어요. "얕은 잠을 자는 사람들은 어쩌면 동굴 속에서 모두를 지켜 낸 '슈퍼 히어로'였는지도 모른다." 저자 스스로 다소 냉소적인 위로로 들릴 수 있다고 먼저 인정하고 꺼내는 문장인데, 그 조심스러움까지 포함해서 좋았습니다.


같은 장에서 마음이 가장 오래 걸린 곳은 따로 있었어요. 잠을 못 자는 사람에게 주변이 건네는 선의가 오히려 절망이 될 수 있다는 대목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마음을 놓아 버려야 해, 나도 가끔 잠을 못 자. 저자는 이런 말들이 대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잘라 말합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봤는데도 나아지지 않을 때 사람은 자기가 무기력하다고 여기게 되고, 주변이 그 힘듦을 가늠하지 못할 때 더 외로워진다고요.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의 무력감도 함께 그려 두는데, 잠은 잘 잤냐는 아침 인사에 돌아오는 대답을 한 줄로 떼어 놓았습니다. "최악이었어. 당신은?" 짧은 대화 한 토막에 그 집의 아침 공기가 다 들어 있는 것 같았어요.


그렇다면 왜 현대인만 이렇게 잠들기 어려운가. 이 책의 답은 잠 자체가 아니라 잠을 대하는 방식에 있습니다. 스필먼과 글로빈스키의 모델을 빌려 타고난 수면 성향, 실직 같은 촉발 사건, 그리고 문제가 생긴 뒤에 새로 만들어지는 사고방식과 행동을 나눠 설명해요. 마지막 항목이 핵심입니다. 왜 아직도 깨어 있지, 이러다 내일 망치겠어 같은 걱정, 시계를 자꾸 확인하는 습관, 오늘은 꼭 숙면해야 한다는 기대 같은 것들이요. 뇌는 이런 생각을 진짜 벌어진 일처럼 받아들여서, 일을 망칠 거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스트레스 반응을 시작한다고 합니다. 포식자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몸은 포식자가 눈앞에 있는 것처럼 반응한다는 설명이 붙는데, 이 책에서 포식자라는 말이 어떻게 쓰이는지가 여기서 드러납니다.


뒤쪽으로 갈수록 실천 쪽으로 내려옵니다. 잠들기 한 시간 반쯤 전부터 하루를 차분히 정리하라는 권유가 나오고, 그 본보기로 주/호안시 부족의 저녁이 등장해요. 선선해지고 어두워지면 모닥불 앞에 둘러앉는데, 낮에는 채집 계획이나 사냥 전략 같은 실용적인 이야기를 하다가 밤에는 대화의 성격이 바뀐다고 합니다. 모닥불 대화의 팔십 퍼센트 이상이 상징적인 이야기이고 대개 배울 만한 교훈을 담고 있으며, 낮에 직접 부딪치던 갈등이 밤에는 이야기 형태로 풀려 나온다고요. 관찰한 연구자는 "그들은 그날의 문제들을 불씨와 함께 사라지게 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 이후 우리의 실용적인 정보 흡수가 하루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진다는 문장이 바로 뒤에 놓여 있어서, 이 대비가 오래 남았어요.


의자에 앉아 하는 호흡 연습도 소개되는데, 억지로 리듬을 만들지 말고 자연스러운 호흡을 따라가라는 당부가 붙습니다. 침대가 아니라 의자에서 연습하라는 조건도 일관돼요. 그리고 이 장에서 저자가 얻었다는 깨달음 하나가 특히 오래 남았습니다. 밤에 사람을 깨우는 것이 꼭 부정적인 생각만은 아니라는 것, 즐거운 활동이나 창의적인 일도 속도를 늦추지 않으면 잠을 밀어낸다는 것이요. 속도를 줄이다 보면 열패감이 들 수도 있지만, 한계를 인정하면 오히려 여유가 생기고 뇌는 더 안전한 환경에 있다고 여기게 된다는 설명이 따라옵니다. 마흔 후반쯤 되면 이 문장이 다르게 읽힙니다. 잠을 못 자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더 하겠다고 선택한 대가라는 관점 전환이니까요.


마지막 장은 균형을 이야기합니다. 성인의 최적 수면 시간이 여덟 시간이라는 생각은 십구 세기 초의 낡은 관념에 기반한 과장된 믿음으로 보인다고 단언하고, 조상들의 평균은 여섯에서 일곱 시간 사이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정리해요. 나이가 들수록 밤잠에서 자주 깨는 현상을 파수꾼 가설로 설명하는 대목도 여기 있습니다. 노인들이 위험 신호에 더 쉽게 깨어났고 그 예민함이 무리를 지켰다는 이야기인데, 새벽에 눈이 떠지는 변화를 쇠퇴의 신호로만 읽지 않게 해 주더군요. 필요한 수면의 양이 삶의 시기마다 달라질 수 있고 어떤 시점에는 이전보다 적게 자도 충분할 수 있다는 문장도 같은 자리에 놓여 있습니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비유는 식사입니다. 좋은 식사에는 준비가 필요하고, 시작하기 전에 어느 정도 배가 고파야 하고, 몸이 심하게 긴장해 있으면 진수성찬 앞에서도 제대로 먹지 못한다는 이야기예요. 허기가 수면 압력에 해당한다고 보면 그림이 선명해집니다. 감자칩 반 봉지를 먹은 뒤 형편없이 조리된 음식을 꾸역꾸역 삼키려는 상황이 곧 우리가 잠에게 요구하는 것과 같다고요. 산업사회에서 잠이 일종의 패스트푸드가 되어 버렸다는 진단으로 이어지는데, 빠르고 즉각적인 효과를 기대하는 방식이 새로운 기준이 됐다는 말이 뼈아팠습니다.


다 좋았느냐 하면 걸리는 데가 하나 있었어요. 여덟 시간이라는 기준을 낡은 관념이라며 물리친 책이 정작 뒤쪽에서는 꽤 촘촘한 숫자를 내놓습니다. 잠들기 두세 시간 전부터 주변 밝기를 촛불 열 개 정도로, 잠자리 들기 한두 시간 이내에는 격렬한 운동을 피하고, 침상 시간은 주 단위로 십오 분에서 삼십 분씩 조정하라는 식으로요. 대부분 환경에 관한 조건이고 잘 잤는지를 채점하는 항목은 아니니 성격이 다르긴 합니다. 다만 숫자에 예민한 사람이라면 이 안내마저 새로운 체크리스트로 삼기 쉽겠다 싶었어요. 통제를 내려놓으라는 권유와 구체적인 지침 사이에서 어느 쪽으로 기울지는 결국 읽는 사람 몫으로 남습니다.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만나다 보면 읽고 덮으면 끝나는 책과 생활 어딘가에 남는 책이 갈리는데, 이번 한 권은 후자에 가까웠어요. 잠을 잘 자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는 대신 잠을 채점하지 말라고 말하는 쪽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여덟 시간을 채웠는지 헤아리는 습관이 오래된 분, 새벽에 눈이 떠지는 일이 잦아져 내심 신경 쓰이는 분이라면 얻어 갈 문장이 많을 거예요. 수면 관련 정보를 찾다가 자극적인 제목들 사이에서 지쳤던 분에게도 좋은 정리가 됩니다. 저자가 마지막에 붙여 둔 당부처럼, 숙면이 힘든 밤에는 원시인이라면 어떻게 했을지 한번 물어보는 정도가 이 책이 권하는 전부입니다.


책 끝에서 저자는 자기처럼 당신도 특별한 원인이 없어 보이는데 잠들기 어려운 날이 있을 수 있다고 적어 둡니다. 치료사가 끝까지 독자 옆자리에 앉아 말하는 방식이 이 책의 결을 잘 보여 준다고 생각했어요.


9월 중순을 넘기면서 밤공기가 눈에 띄게 선선해졌습니다. 해도 부쩍 일찍 저물고요. 계절이 알아서 어두워지고 서늘해지는 이 시기가, 잠에 관한 책을 읽기에는 가장 좋은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밤에는 몇 시간을 잤는지 세는 대신 불빛 몇 개만 미리 꺼 두려고 합니다.


잠을 더 잘 자는 기술 대신, 잠을 채점하지 않는 태도를 배우게 하는 다정한 수면 과학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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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장난 글공부
강학종 지음 / 오프온북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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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손에 쥐어 보니 두께도 판형도 부담 없는 쪽입니다. 가방에 넣고 다니며 틈틈이 펼치기 좋은 정도예요. 표지에는 민트색 언덕 위로 책을 펼쳐 든 아이가 웃고 있고, 아래쪽 분홍 띠에 이 한 권이 담은 것들이 숫자로 적혀 있습니다. 27가지 일기 작성법, 엄마의 마음 준비 11가지, 읽기 독립을 도와주는 그림책 110권. 겉은 학습서의 얼굴인데 정작 문을 열면 아이들의 연필 자국이 먼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기로 배우는 초등 그림책 인문학>은 박향의 작가와 두 딸 김나연, 김다은이 함께 쓴 도서입니다. 나연이의 일기장이 스물여덟 권, 다은이의 것이 여덟 권. 그 분량이 이 책의 재료 전부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제1부에서 조금 놀랐습니다. 아이에게 뭘 시킬지를 말하기 전에 옆에 앉는 어른의 태도를 먼저 손보자고 나오거든요. 처음부터 혼자 잘 쓰는 아이는 없음을 받아들이라는 항목이 첫 번째고, 일기 쓰기가 어른에게도 쉽지 않은 창조적 활동임을 알아주라는 항목이 그다음입니다. 맞춤법은 지적하지 않는다, 일기장은 처음엔 다섯 줄이 넘지 않는 것으로 사 준다, 필명을 만들어 준다. 특히 필명 이야기가 오래 남았습니다. 숙제를 검사받는 사람 대신 이름을 가진 필자로 아이를 대우하는 장치인 셈이죠. 저자는 두 딸도 습관이 붙기까지는 일주일에 두세 번만 썼다고 담담하게 적어 둡니다. 매일 쓰기를 요구하지 않는 실용서라는 점에서 신뢰가 갔어요.


갈등 일기 부분은 사례가 먼저 나옵니다. 다은이의 '슬픈 날'은 네 줄입니다. 예나가 먼저 놀자고 했다가 안 논다고 해서 슬펐고, 서아까지 안 논다고 해서 더 슬펐다는 기록. 슬펐다에서 더 슬펐다로 한 칸 올라가는 것만으로 그날의 온도가 다 적힌 셈입니다. 나연이의 '듣기 싫은 엄마의 잔소리'는 거의 전부 그림이에요. 화난 얼굴 위로 책 봐, 유두브보지 마, 게임은 5분 해가 말풍선으로 떠 있고, 그 아래엔 '착한 말'이라는 제목으로 사랑해, 최고야, 고마워, 괜찮아, 멋져가 나란히 적혀 있습니다. 듣기 싫은 말과 듣고 싶은 말을 아이가 스스로 갈라 놓은 지면입니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아홉 살이면 다 혼자 하라고 한다는 고민, 9살이 무슨 고등학교 3학년 같다는 비유, 그리고 엄마는 많이 안 그러는데 아빠가 많이 그런다는 관찰이 나옵니다. 아이 일기에 '아빠'라는 단어가 이런 자리에 들어앉아 있는 걸 읽는 일은 생각보다 조용한 경험이었습니다.


방법론은 그 뒤에 붙습니다. 사건을 육하원칙으로 차갑게 적어 열기를 내리고, 감정의 온도를 시시각각 남기고, 비유로 무게를 표현하고, 상대의 입장에서 딱 한 문장을 써 보고, 진짜 원했던 것을 질문으로 던지고, 억울함에 발언권을 주고, 마지막엔 자신을 안아 주는 한마디로 끝냅니다. 앞에 실린 두 편의 일기가 이 일곱 단계의 예시로 그대로 회수되는 구조라 설명이 겉돌지 않았습니다. 이 챕터에서 가져가고 싶은 문장은 이거였어요.


"일기장은 세상에서 가장 입이 무겁고 다정한 나의 편입니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것이 나를 흔드는 무언가에서 차분히 들여다볼 수 있는 것으로 바뀐다는 설명도 붙어 있습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정서 명명과 겹치는 대목이라, 아이용으로 쓰인 문장이지만 어른이 읽어도 유효합니다.


뒷부의 질문 일기는 성격이 좀 다릅니다. 나연이의 '방귀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는 음식을 먹고 내려가 가스를 만든다는 나름의 설명으로 시작해서, 엄마는 뿡, 아빠는 뿡뿌룽, 동생은 뽕, 자기는 뿡 ㅋㅋㅋ으로 가족별 소리를 분류하고는 이렇게 닫힙니다. "역시 방귀는 no." 또 한 편은 사진이 왜 네 컷일까를 묻다가 손님들이 기다려서일 거라고 스스로 답을 내고, 동생은 아직 배울 게 많다고 정리한 뒤 꼭 대학 잘 가라는 말을 붙이고, 끝에는 엄마 아빠 다은이 사랑해로 마무리합니다. 저자가 이 챕터에서 당부하는 건 간단합니다. 검색창이나 AI를 열기 전에 머릿속에서 나온 첫 생각을 먼저 적어 보라는 것. 방귀의 원리는 기계도 알지만 우리 아빠 방귀 소리가 뿡뿌룽이라는 관찰은 그 집 아이만 쓸 수 있는 정보라는 설명이 뒤따릅니다.


읽으면서 걸린 점도 있습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한 문장 써 보기, 내가 진짜 원했던 핵심 찾기 같은 항목은 여덟 살, 열 살 아이가 혼자 해내기엔 난도가 꽤 높아 보였어요. 결국 옆에서 어른이 얼마나 잘 물어 주느냐에 달린 일인데, 그 질문을 어떻게 건네야 하는지에 대한 안내는 상대적으로 얇습니다. 구성도 그렇습니다. 일기 예시, 정의, 작성법 일곱 가지, 그림책 두 권, AI 시대의 세 가지 힘. 이 틀이 스물일곱 갈래에 똑같이 적용되다 보니 찾아 쓰기엔 편한데 처음부터 끝까지 통독하면 뒤로 갈수록 비슷하게 읽히는 구간이 생깁니다. 사전처럼 필요한 갈래만 펼쳐 보는 쪽이 이 도서를 제대로 쓰는 방법 같아요.


그림책 목록은 꽤 성실합니다. 갈등 일기에는 난주 작가의 <잔소리의 최후>가 놓여 있는데, 잔소리꾼 엄마를 둔 고슴도치가 반격을 시작하는 이야기라 아이와 부모가 같이 웃게 되는 책이라고 소개합니다. 함께 붙은 레오 리오니의 <까마귀 여섯 마리>는 밭을 지키려는 농부와 먹이를 찾는 까마귀가 서로를 향한 비난에만 열을 올리는 우화로, 갈등이라는 주제에 잘 맞는 선택이었습니다. 질문 일기 쪽에는 이상교 작가와 밤코 작가의 <싫다는 건 뭘까?>, 조안 M. 렉서와 알리키의 <좋은 걸까? 나쁜 걸까?>가 들어 있어요. 싫다는 감정을 들여다보는 법과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여유. 질문이라는 갈래에 이 두 권을 붙인 감각이 좋았습니다. 부록의 110권 목록까지 있으니 읽기 독립 시기에 뭘 골라야 할지 막막한 집에서는 이 부분만으로도 값을 합니다.


AI가 정답은 찾지만 먼저 궁금해하지는 않는다는 문장이 책 곳곳의 뼈대입니다. 요즘 도구들의 작동 방식을 아는 분이라면 이 진술에 토를 달 여지도 있겠지만, 저자가 겨누는 건 기술 논쟁이 아니라 아이가 자기 물음을 갖는 습관 쪽이라 무리한 주장으로 읽히지는 않았습니다. 부제에 걸린 AI 시대라는 말이 장식으로 그치지 않고 각 챕터 끝에서 매번 회수되는 점도 성실하게 느껴졌고요.


서평단 책을 받다 보면 읽고 덮으면 끝나는 것과 책상에 남겨 두게 되는 것이 갈리는데, 이 한 권은 후자였어요. 저녁에 아이 일기장을 펼쳐 놓고 뭐라고 말해 줄지 막막해지는 분들, 일기를 검사하는 손과 읽어 주는 목소리 사이에서 헷갈려 온 분들에게 실질적인 참고가 될 겁니다. 초등 저학년 아이를 곁에 둔 집이라면 목차만 훑어봐도 오늘 밤에 써 볼 일기 한 종류는 건질 수 있을 테고요.


가을로 넘어오면서 해가 짧아졌습니다. 저녁이 길어진 만큼 아이가 공책 앞에 앉는 시간도 조금 앞당겨질 텐데, 그 옆자리에 어떤 얼굴로 앉아 있을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었습니다. 삐뚤빼뚤한 글씨를 고쳐 줄 사람보다 먼저 읽어 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 이 책이 하는 말은 결국 그 한마디로 모입니다.


아이의 일기장을 검사 대상에서 읽을 거리로 옮겨 놓는 안내서, 스물일곱 갈래의 작성법과 그림책 110권 목록이 든 실용적인 한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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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로 배우는 초등 그림책 인문학 - 하루 30분, AI 시대를 앞서가는 아이의 인문학 습관
박향의 외 지음 / 오롯한삐삐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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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손에 쥐어 보니 두께도 판형도 부담 없는 쪽입니다. 가방에 넣고 다니며 틈틈이 펼치기 좋은 정도예요. 표지에는 민트색 언덕 위로 책을 펼쳐 든 아이가 웃고 있고, 아래쪽 분홍 띠에 이 한 권이 담은 것들이 숫자로 적혀 있습니다. 27가지 일기 작성법, 엄마의 마음 준비 11가지, 읽기 독립을 도와주는 그림책 110권. 겉은 학습서의 얼굴인데 정작 문을 열면 아이들의 연필 자국이 먼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기로 배우는 초등 그림책 인문학>은 박향의 작가와 두 딸 김나연, 김다은이 함께 쓴 도서입니다. 나연이의 일기장이 스물여덟 권, 다은이의 것이 여덟 권. 그 분량이 이 책의 재료 전부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제1부에서 조금 놀랐습니다. 아이에게 뭘 시킬지를 말하기 전에 옆에 앉는 어른의 태도를 먼저 손보자고 나오거든요. 처음부터 혼자 잘 쓰는 아이는 없음을 받아들이라는 항목이 첫 번째고, 일기 쓰기가 어른에게도 쉽지 않은 창조적 활동임을 알아주라는 항목이 그다음입니다. 맞춤법은 지적하지 않는다, 일기장은 처음엔 다섯 줄이 넘지 않는 것으로 사 준다, 필명을 만들어 준다. 특히 필명 이야기가 오래 남았습니다. 숙제를 검사받는 사람 대신 이름을 가진 필자로 아이를 대우하는 장치인 셈이죠. 저자는 두 딸도 습관이 붙기까지는 일주일에 두세 번만 썼다고 담담하게 적어 둡니다. 매일 쓰기를 요구하지 않는 실용서라는 점에서 신뢰가 갔어요.


갈등 일기 부분은 사례가 먼저 나옵니다. 다은이의 '슬픈 날'은 네 줄입니다. 예나가 먼저 놀자고 했다가 안 논다고 해서 슬펐고, 서아까지 안 논다고 해서 더 슬펐다는 기록. 슬펐다에서 더 슬펐다로 한 칸 올라가는 것만으로 그날의 온도가 다 적힌 셈입니다. 나연이의 '듣기 싫은 엄마의 잔소리'는 거의 전부 그림이에요. 화난 얼굴 위로 책 봐, 유두브보지 마, 게임은 5분 해가 말풍선으로 떠 있고, 그 아래엔 '착한 말'이라는 제목으로 사랑해, 최고야, 고마워, 괜찮아, 멋져가 나란히 적혀 있습니다. 듣기 싫은 말과 듣고 싶은 말을 아이가 스스로 갈라 놓은 지면입니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아홉 살이면 다 혼자 하라고 한다는 고민, 9살이 무슨 고등학교 3학년 같다는 비유, 그리고 엄마는 많이 안 그러는데 아빠가 많이 그런다는 관찰이 나옵니다. 아이 일기에 '아빠'라는 단어가 이런 자리에 들어앉아 있는 걸 읽는 일은 생각보다 조용한 경험이었습니다.


방법론은 그 뒤에 붙습니다. 사건을 육하원칙으로 차갑게 적어 열기를 내리고, 감정의 온도를 시시각각 남기고, 비유로 무게를 표현하고, 상대의 입장에서 딱 한 문장을 써 보고, 진짜 원했던 것을 질문으로 던지고, 억울함에 발언권을 주고, 마지막엔 자신을 안아 주는 한마디로 끝냅니다. 앞에 실린 두 편의 일기가 이 일곱 단계의 예시로 그대로 회수되는 구조라 설명이 겉돌지 않았습니다. 이 챕터에서 가져가고 싶은 문장은 이거였어요.


"일기장은 세상에서 가장 입이 무겁고 다정한 나의 편입니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것이 나를 흔드는 무언가에서 차분히 들여다볼 수 있는 것으로 바뀐다는 설명도 붙어 있습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정서 명명과 겹치는 대목이라, 아이용으로 쓰인 문장이지만 어른이 읽어도 유효합니다.


뒷부의 질문 일기는 성격이 좀 다릅니다. 나연이의 '방귀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는 음식을 먹고 내려가 가스를 만든다는 나름의 설명으로 시작해서, 엄마는 뿡, 아빠는 뿡뿌룽, 동생은 뽕, 자기는 뿡 ㅋㅋㅋ으로 가족별 소리를 분류하고는 이렇게 닫힙니다. "역시 방귀는 no." 또 한 편은 사진이 왜 네 컷일까를 묻다가 손님들이 기다려서일 거라고 스스로 답을 내고, 동생은 아직 배울 게 많다고 정리한 뒤 꼭 대학 잘 가라는 말을 붙이고, 끝에는 엄마 아빠 다은이 사랑해로 마무리합니다. 저자가 이 챕터에서 당부하는 건 간단합니다. 검색창이나 AI를 열기 전에 머릿속에서 나온 첫 생각을 먼저 적어 보라는 것. 방귀의 원리는 기계도 알지만 우리 아빠 방귀 소리가 뿡뿌룽이라는 관찰은 그 집 아이만 쓸 수 있는 정보라는 설명이 뒤따릅니다.


읽으면서 걸린 점도 있습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한 문장 써 보기, 내가 진짜 원했던 핵심 찾기 같은 항목은 여덟 살, 열 살 아이가 혼자 해내기엔 난도가 꽤 높아 보였어요. 결국 옆에서 어른이 얼마나 잘 물어 주느냐에 달린 일인데, 그 질문을 어떻게 건네야 하는지에 대한 안내는 상대적으로 얇습니다. 구성도 그렇습니다. 일기 예시, 정의, 작성법 일곱 가지, 그림책 두 권, AI 시대의 세 가지 힘. 이 틀이 스물일곱 갈래에 똑같이 적용되다 보니 찾아 쓰기엔 편한데 처음부터 끝까지 통독하면 뒤로 갈수록 비슷하게 읽히는 구간이 생깁니다. 사전처럼 필요한 갈래만 펼쳐 보는 쪽이 이 도서를 제대로 쓰는 방법 같아요.


그림책 목록은 꽤 성실합니다. 갈등 일기에는 난주 작가의 <잔소리의 최후>가 놓여 있는데, 잔소리꾼 엄마를 둔 고슴도치가 반격을 시작하는 이야기라 아이와 부모가 같이 웃게 되는 책이라고 소개합니다. 함께 붙은 레오 리오니의 <까마귀 여섯 마리>는 밭을 지키려는 농부와 먹이를 찾는 까마귀가 서로를 향한 비난에만 열을 올리는 우화로, 갈등이라는 주제에 잘 맞는 선택이었습니다. 질문 일기 쪽에는 이상교 작가와 밤코 작가의 <싫다는 건 뭘까?>, 조안 M. 렉서와 알리키의 <좋은 걸까? 나쁜 걸까?>가 들어 있어요. 싫다는 감정을 들여다보는 법과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여유. 질문이라는 갈래에 이 두 권을 붙인 감각이 좋았습니다. 부록의 110권 목록까지 있으니 읽기 독립 시기에 뭘 골라야 할지 막막한 집에서는 이 부분만으로도 값을 합니다.


AI가 정답은 찾지만 먼저 궁금해하지는 않는다는 문장이 책 곳곳의 뼈대입니다. 요즘 도구들의 작동 방식을 아는 분이라면 이 진술에 토를 달 여지도 있겠지만, 저자가 겨누는 건 기술 논쟁이 아니라 아이가 자기 물음을 갖는 습관 쪽이라 무리한 주장으로 읽히지는 않았습니다. 부제에 걸린 AI 시대라는 말이 장식으로 그치지 않고 각 챕터 끝에서 매번 회수되는 점도 성실하게 느껴졌고요.


서평단 책을 받다 보면 읽고 덮으면 끝나는 것과 책상에 남겨 두게 되는 것이 갈리는데, 이 한 권은 후자였어요. 저녁에 아이 일기장을 펼쳐 놓고 뭐라고 말해 줄지 막막해지는 분들, 일기를 검사하는 손과 읽어 주는 목소리 사이에서 헷갈려 온 분들에게 실질적인 참고가 될 겁니다. 초등 저학년 아이를 곁에 둔 집이라면 목차만 훑어봐도 오늘 밤에 써 볼 일기 한 종류는 건질 수 있을 테고요.


가을로 넘어오면서 해가 짧아졌습니다. 저녁이 길어진 만큼 아이가 공책 앞에 앉는 시간도 조금 앞당겨질 텐데, 그 옆자리에 어떤 얼굴로 앉아 있을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었습니다. 삐뚤빼뚤한 글씨를 고쳐 줄 사람보다 먼저 읽어 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 이 책이 하는 말은 결국 그 한마디로 모입니다.


아이의 일기장을 검사 대상에서 읽을 거리로 옮겨 놓는 안내서, 스물일곱 갈래의 작성법과 그림책 110권 목록이 든 실용적인 한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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