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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로 배우는 초등 그림책 인문학 - 하루 30분, AI 시대를 앞서가는 아이의 인문학 습관
박향의 외 지음 / 오롯한삐삐 / 2026년 8월
평점 :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손에 쥐어 보니 두께도 판형도 부담 없는 쪽입니다. 가방에 넣고 다니며 틈틈이 펼치기 좋은 정도예요. 표지에는 민트색 언덕 위로 책을 펼쳐 든 아이가 웃고 있고, 아래쪽 분홍 띠에 이 한 권이 담은 것들이 숫자로 적혀 있습니다. 27가지 일기 작성법, 엄마의 마음 준비 11가지, 읽기 독립을 도와주는 그림책 110권. 겉은 학습서의 얼굴인데 정작 문을 열면 아이들의 연필 자국이 먼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기로 배우는 초등 그림책 인문학>은 박향의 작가와 두 딸 김나연, 김다은이 함께 쓴 도서입니다. 나연이의 일기장이 스물여덟 권, 다은이의 것이 여덟 권. 그 분량이 이 책의 재료 전부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제1부에서 조금 놀랐습니다. 아이에게 뭘 시킬지를 말하기 전에 옆에 앉는 어른의 태도를 먼저 손보자고 나오거든요. 처음부터 혼자 잘 쓰는 아이는 없음을 받아들이라는 항목이 첫 번째고, 일기 쓰기가 어른에게도 쉽지 않은 창조적 활동임을 알아주라는 항목이 그다음입니다. 맞춤법은 지적하지 않는다, 일기장은 처음엔 다섯 줄이 넘지 않는 것으로 사 준다, 필명을 만들어 준다. 특히 필명 이야기가 오래 남았습니다. 숙제를 검사받는 사람 대신 이름을 가진 필자로 아이를 대우하는 장치인 셈이죠. 저자는 두 딸도 습관이 붙기까지는 일주일에 두세 번만 썼다고 담담하게 적어 둡니다. 매일 쓰기를 요구하지 않는 실용서라는 점에서 신뢰가 갔어요.
갈등 일기 부분은 사례가 먼저 나옵니다. 다은이의 '슬픈 날'은 네 줄입니다. 예나가 먼저 놀자고 했다가 안 논다고 해서 슬펐고, 서아까지 안 논다고 해서 더 슬펐다는 기록. 슬펐다에서 더 슬펐다로 한 칸 올라가는 것만으로 그날의 온도가 다 적힌 셈입니다. 나연이의 '듣기 싫은 엄마의 잔소리'는 거의 전부 그림이에요. 화난 얼굴 위로 책 봐, 유두브보지 마, 게임은 5분 해가 말풍선으로 떠 있고, 그 아래엔 '착한 말'이라는 제목으로 사랑해, 최고야, 고마워, 괜찮아, 멋져가 나란히 적혀 있습니다. 듣기 싫은 말과 듣고 싶은 말을 아이가 스스로 갈라 놓은 지면입니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아홉 살이면 다 혼자 하라고 한다는 고민, 9살이 무슨 고등학교 3학년 같다는 비유, 그리고 엄마는 많이 안 그러는데 아빠가 많이 그런다는 관찰이 나옵니다. 아이 일기에 '아빠'라는 단어가 이런 자리에 들어앉아 있는 걸 읽는 일은 생각보다 조용한 경험이었습니다.

방법론은 그 뒤에 붙습니다. 사건을 육하원칙으로 차갑게 적어 열기를 내리고, 감정의 온도를 시시각각 남기고, 비유로 무게를 표현하고, 상대의 입장에서 딱 한 문장을 써 보고, 진짜 원했던 것을 질문으로 던지고, 억울함에 발언권을 주고, 마지막엔 자신을 안아 주는 한마디로 끝냅니다. 앞에 실린 두 편의 일기가 이 일곱 단계의 예시로 그대로 회수되는 구조라 설명이 겉돌지 않았습니다. 이 챕터에서 가져가고 싶은 문장은 이거였어요.
"일기장은 세상에서 가장 입이 무겁고 다정한 나의 편입니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것이 나를 흔드는 무언가에서 차분히 들여다볼 수 있는 것으로 바뀐다는 설명도 붙어 있습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정서 명명과 겹치는 대목이라, 아이용으로 쓰인 문장이지만 어른이 읽어도 유효합니다.

뒷부의 질문 일기는 성격이 좀 다릅니다. 나연이의 '방귀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는 음식을 먹고 내려가 가스를 만든다는 나름의 설명으로 시작해서, 엄마는 뿡, 아빠는 뿡뿌룽, 동생은 뽕, 자기는 뿡 ㅋㅋㅋ으로 가족별 소리를 분류하고는 이렇게 닫힙니다. "역시 방귀는 no." 또 한 편은 사진이 왜 네 컷일까를 묻다가 손님들이 기다려서일 거라고 스스로 답을 내고, 동생은 아직 배울 게 많다고 정리한 뒤 꼭 대학 잘 가라는 말을 붙이고, 끝에는 엄마 아빠 다은이 사랑해로 마무리합니다. 저자가 이 챕터에서 당부하는 건 간단합니다. 검색창이나 AI를 열기 전에 머릿속에서 나온 첫 생각을 먼저 적어 보라는 것. 방귀의 원리는 기계도 알지만 우리 아빠 방귀 소리가 뿡뿌룽이라는 관찰은 그 집 아이만 쓸 수 있는 정보라는 설명이 뒤따릅니다.
읽으면서 걸린 점도 있습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한 문장 써 보기, 내가 진짜 원했던 핵심 찾기 같은 항목은 여덟 살, 열 살 아이가 혼자 해내기엔 난도가 꽤 높아 보였어요. 결국 옆에서 어른이 얼마나 잘 물어 주느냐에 달린 일인데, 그 질문을 어떻게 건네야 하는지에 대한 안내는 상대적으로 얇습니다. 구성도 그렇습니다. 일기 예시, 정의, 작성법 일곱 가지, 그림책 두 권, AI 시대의 세 가지 힘. 이 틀이 스물일곱 갈래에 똑같이 적용되다 보니 찾아 쓰기엔 편한데 처음부터 끝까지 통독하면 뒤로 갈수록 비슷하게 읽히는 구간이 생깁니다. 사전처럼 필요한 갈래만 펼쳐 보는 쪽이 이 도서를 제대로 쓰는 방법 같아요.

그림책 목록은 꽤 성실합니다. 갈등 일기에는 난주 작가의 <잔소리의 최후>가 놓여 있는데, 잔소리꾼 엄마를 둔 고슴도치가 반격을 시작하는 이야기라 아이와 부모가 같이 웃게 되는 책이라고 소개합니다. 함께 붙은 레오 리오니의 <까마귀 여섯 마리>는 밭을 지키려는 농부와 먹이를 찾는 까마귀가 서로를 향한 비난에만 열을 올리는 우화로, 갈등이라는 주제에 잘 맞는 선택이었습니다. 질문 일기 쪽에는 이상교 작가와 밤코 작가의 <싫다는 건 뭘까?>, 조안 M. 렉서와 알리키의 <좋은 걸까? 나쁜 걸까?>가 들어 있어요. 싫다는 감정을 들여다보는 법과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여유. 질문이라는 갈래에 이 두 권을 붙인 감각이 좋았습니다. 부록의 110권 목록까지 있으니 읽기 독립 시기에 뭘 골라야 할지 막막한 집에서는 이 부분만으로도 값을 합니다.
AI가 정답은 찾지만 먼저 궁금해하지는 않는다는 문장이 책 곳곳의 뼈대입니다. 요즘 도구들의 작동 방식을 아는 분이라면 이 진술에 토를 달 여지도 있겠지만, 저자가 겨누는 건 기술 논쟁이 아니라 아이가 자기 물음을 갖는 습관 쪽이라 무리한 주장으로 읽히지는 않았습니다. 부제에 걸린 AI 시대라는 말이 장식으로 그치지 않고 각 챕터 끝에서 매번 회수되는 점도 성실하게 느껴졌고요.
서평단 책을 받다 보면 읽고 덮으면 끝나는 것과 책상에 남겨 두게 되는 것이 갈리는데, 이 한 권은 후자였어요. 저녁에 아이 일기장을 펼쳐 놓고 뭐라고 말해 줄지 막막해지는 분들, 일기를 검사하는 손과 읽어 주는 목소리 사이에서 헷갈려 온 분들에게 실질적인 참고가 될 겁니다. 초등 저학년 아이를 곁에 둔 집이라면 목차만 훑어봐도 오늘 밤에 써 볼 일기 한 종류는 건질 수 있을 테고요.

가을로 넘어오면서 해가 짧아졌습니다. 저녁이 길어진 만큼 아이가 공책 앞에 앉는 시간도 조금 앞당겨질 텐데, 그 옆자리에 어떤 얼굴로 앉아 있을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었습니다. 삐뚤빼뚤한 글씨를 고쳐 줄 사람보다 먼저 읽어 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 이 책이 하는 말은 결국 그 한마디로 모입니다.
아이의 일기장을 검사 대상에서 읽을 거리로 옮겨 놓는 안내서, 스물일곱 갈래의 작성법과 그림책 110권 목록이 든 실용적인 한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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