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번국도 Revisited (특별판)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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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을 둘러싼 기억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둘 죽어간다. 우리는 그걸 ‘학살’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의 날씨를 잊었고, 싫은 내색을 할 때면 찡그리던 콧등의 주름이 어떤 모양으로 잡혔는지를 잊었다. 나란히 앉아서 창밖을 내다보던 이층 찻집의 이름을 잊었고, 가장 아끼던 스웨터의 무늬를 잊었다. 하물며 찻집 문을 열 때면 풍기던 커피와 곰팡이와 방향제와 먼지 등의 냄새가 서로 뒤섞인 그 냄새라거나 집 근처 어두운 골목길에서 꽉 껴안고 등을 만질 때 느껴지던 스웨터의 까끌까끌한 촉감 같은 건 이미 오래 전에 모두 잊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마침내 그 사람의 얼굴이며 목소리마저도 잊어버리고 나면, 나만의 것이 될 수 없었던 것들로 가득했던 스무 살 그 무렵의 세계로, 우리가 애당초 바라봤던, 우리가 애당초 말을 걸었던, 우리가 애당초 원했던 그 세계 속으로 완전한 망각이 찾아온다.
-38p쪽

완전한 망각이란, 사랑 안에서, 가장 순수한 형태의 보존. 그러니 이 완전한 망각 속에서, 아름다워라, 그 시절들. 잊혀졌으므로 영원히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기억의 선사시대. 이제 우리에게는 그 시절의 눈이 -39p쪽

여기 남아서, 가끔씩 혼자 7번국도를 상상했어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길. 지금까지 내가 본 길들만 생각났지만, 어떤 날에는 불현듯 뭔가가 또렷하게 보일 때도 있었어요. 돌멩이를 쥔 주먹 같은 것, 혹은 바람에 긁힌 두 뺨의 얼굴. 그리고 바다, 바다, 바다...... 바다를 생각할 때면 늘 영원이라는 단어가 떠올라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변함 없이 그대로인 세계. 물질들은 생겨났다가 또 사라지지만, 그 시간과 공간만은 바뀌지 않는 세계. 그런 세계 속에서 내가 태어나 자랐어요. 이쪽에서 저쪽으로, 쉬지 않고. 나는 무엇에도 고정되지 않아요. 그저 경험할 뿐. 왜냐하면 나는 영원하지 않으니까. 그걸 생각하면 두려울 건 하나도 없어요. 계속 움직일 뿐, 두려움은 여기 없어요.
-186p쪽

사랑에 대해서 말하려고 이렇게 에둘러 왔네요. 이제는 죽고 없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 나 자신을 사랑하는 일, 동시에 두 남자를 사랑하는 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인간을 사랑하는 일. 그 모든 사랑이 내게는 공평하고 소중하다는 걸 말하기 위해서. 그러므로 내가 할 일은 기억하는 것. 잊지 않는 것. 끝까지 남아 그 사랑들에 대해서 말하는 증인이 되는 것. 기억의 달인이 되어, 사소한 것들도 빼놓지 않고, 어제의 일인 것처럼 늘 신선하게, 거기서 더 나아가 내가 죽은 뒤에도 그 기억들이 남을 수 있도록, 이 세계 곳곳에 그 기억들을 숨겨두는 일.
-187p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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