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여자는 거기에 있어
알렉스 레이크 지음, 박현주 옮김 / 토마토출판사 / 2019년 11월
평점 :
“아시겠지만,” 더그는 자리를 뜨려고 몸을 돌리며 말했다. “융통성 없다는 평판이 나면 좋을 게 없어요.”
“그럴 수 있겠죠.” 클레어가 말했다. “하지만 정직하다는 평판은 소중하죠.”
_1부 알피와 클레어 145p
e-book 카페 서평단 이벤트에 응모했는데 운이 따라 주었는지 당첨되어 책을 받았다. 날씨가 추워 책은 차가웠지만 갓 나온 책이어서 그런지(11월 12일이었다) 모서리 찌그러진 곳 하나 없이 새 책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모습이었다.
책의 줄거리는 대강 이러하다. 알피와 클레어는 부부이고 사이가 무척 좋아보이나, 알피가 헨리 브라이언트라는 페르소나를 만들어 클레어 모르게 익명 만남 사이트에서 독신 의사 행세를 하며 여자들을 만났다. 아내의 친구인 피파도 그중 하나였다. 피파는 헨리가 알피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알피는 피파를 유인 후 살해해 시신을 유기한다. 그리고 클레어를 해치워 아내 잃은 가련하고 불쌍한 남편이 되어 그의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헨리 브라이언트로 클레어가 불륜을 저질렀다는 증거를 조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알피는 클레어가 사라짐과 동시에 알피 자신이 작성하지 않은 헨리의 메일을 발견하게 되었고, 누가 자기 자신을 흉내 냈는지 신경 쓰기 시작했다.
한 마디로 책은 정말 재밌었다. 두꺼운 소설이지만 책상에 앉은 자리에서 엉덩이 한 번 떼지 않고 끝까지 읽었다. 문체가 길지도 않고 특별히 어렵고 심오한 내용을 묘사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금방 읽었다. 이 책을 읽은 직후 소설을 잘 읽지 않는 친구를 만나 줄거리를 말해줬는데 꽤 재밌게 듣는 눈치였다. 마음 같아서는 줄거리를 결말 끝까지 다 써 버리고 싶지만, 그러지 않는 이유는 이런 책은 스포일러하는 사람을 처단해야 한다는 나의 굳은 믿음 때문이다.
책에서 주목한 것은 세 가지인데, 첫 번째는 알피가 익명 만남 사이트에 클레어의 프로필을 만들었을 때 일이다. 저속하고 타이핑하고 싶지 않은 메시지를 보내는 남성들을 두고 아내를 죽이려던 알피는 소름끼치고 세계에는 정말로 끔찍한 인간들로 가득하다고 생각한다. 알피와 같은 (세상에 밝혀지지 않은) 범죄자도 이런 생각을 하는 걸 보면, 남성이 불특정 여성에게 음담패설이 담긴 메시지를 보내는 것은 소름끼치는 일이라는 일반적인 정서가 있는 것 같다. 알피가 상대의 마음을 어떻게 끌지 고민하는 사람이란 점도 한몫할 텐데, 물론 알피의 개인적인 성향도 있지만 그런 정서가 영국 사회 내에 있으리라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범죄자도 이런 고민을 하는데 무작정 자기의 감정만 내세우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지.
두 번째는 작중에서 해결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은 캐릭터들은 다 여성이라는 것이다. 물론 딸을 너무도 사랑하는 아버지가 사비로 보안 요원을 붙여주긴 했지만 아버지도, 그 남자 두 명도 결정적인 해결은 하지 못했다. 수사하고 추리해서 결론을 도출한 것도 여성 경찰이고 프롤로그에서 실종되었다는 여성을 발견한 것도 여성 운전자였다. 일반적으로 여성이 위기에 처하면 남성이 구하기에 나는 별다른 생각 없이 경찰도 남자일 것이고, 아버지의 재력으로 어떻게 되겠거니 했는데 둘 다 아니었다. 남성이 여성을 구하는 콘텐츠가 굳건한 시대에 여성이 여성을 구하는 일에 일조하는 콘텐츠는 새로움과 시야의 확장을 가져다준다. 조금 외람된 의견이지만 아무리 여성 캐릭터여도 전적으로 위험으로부터의 구출에서 단단히 한몫하지 않았다는 것도 인상 깊다. 한 사람의 소위 ‘하드캐리’로 해결되는 게 아니라 성별 불문, 직업 불문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모여서 해결되었다. 물론 본인이 가장 열심히 움직였어야 했겠지만!
마지막으로 이 작품에서 전하는 메시지는 ‘상대방에 대한 정직’이다. 작품 곳곳에서 정직함을 옹호하고 지지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묘사가 많았다. 대표적으로 내가 글 서두에 인용한 클레어의 말이 그렇다. 알피 역시 배우자에게 진실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표면적으로는 여자가 사라지고 그를 찾는 게 책의 주된 내용으로 보이지만, 그런 줄거리로 타인에게 정직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작가의 의도치 않은 의도가 아닐까.
글을 마무리하며 다시 책이 재밌었다고 언급한다. 나는 문학에서 여성 캐릭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안나 카레니나, 엘리자베스 베넷, 스칼렛 오하라를 좋아한다. 이 책은 재미있는 책이다. 만약 당신이 나처럼 문학 속 여성 캐릭터를 좋아한다면 만족스러운 독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