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그대가 세상을 잊을 것이고, 곧 세상이 그대를 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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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 문학을 읽으십시오
얀 마텔 지음, 강주헌 옮김 / 작가정신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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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프카가 보여준 감정은 여전히 우리 시대에도 남아 있습니다. 그 이전까지 가난은 물질적인 것이었고 몸으로 느끼는 것이었습니다. 찰스 디킨스가 가난을 어떻게 묘사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물질적인 성공이 가난을 벗어나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카프카 덕분에 우리는 정신의 빈곤, 즉 일자리가 있더라도 내면에서 시작되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불안감을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20세기의 역기능, 머리를 쓸 필요가 없는 일과 억압적이고 좀스런 규제에서 비롯되는 불안감, 우리 모두가 거대한 기계의 외딴 톱니바퀴에 불과한 듯한 자본주의와 잿빛 도시에서 비롯되는 두려움, 이런 것들을 카프카는 폭로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걱정거리들을 떨쳐냈을까요? 그동안 열심히 노력한 끝에 이런 불안감과 소외감에서 벗어났을까요??
안타깝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카프카의 목소리는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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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고독을 사랑하고, 그로 인한 고통을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로 참고 견디십시오. 당신 편지에 따르면,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이 멀어져 간다고 했는데, 그것은 당신의 주변이 넓어지기 시작했다는 증거입니다. 
당신 가까이에 있는 것이 멀어질 때 당신의 공간은 거대해지고 별들이 들어섭니다. 당신의 성장을 오히려 기뻐하십시오. 필연적으로 누구와도 함께 갈 수 없는 길입니다. 그리고 뒤처진 사람들을 관대하게 대하고, 그들의 앞에서 확고하고 침착한 태도를 취하며, 당신의 회의로 그들을 괴롭히지 말고, 그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당신의 확신이나 즐거움으로 그들을 놀라게 하지 마십시오. 설령 당신이 달라지고 또 달라지더라도 굳이 그들과 단순하면서도 충실하게 어우러지려 노력하는 마음까지 변할 것은 없습니다. 당신에게는 낯선 형태를 띨 그들의 삶을 사랑하고, 당신은 혼자 있는 시간을 신뢰하더라도 혼자 있는시간을 두려워하는 노인들에게 관대하십시오. 부모와 자식 사이에 팽팽히 맞서는 관계를 자극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그 관계는 자식들의 힘을 크게 소진시키고, 노인들의 사지도 말려버리기 때문입니다. 비록 자식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노인들의 사랑은 감동적이고 따뜻하지 않습니까.
 노인들에게 충고를 바라거나, 이해를 구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당신을 위해 쌓인 사랑을 믿고, 그 사랑에 힘과 축복이 있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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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 문학을 읽으십시오
얀 마텔 지음, 강주헌 옮김 / 작가정신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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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시들이지만 저라면 이 시들을 몰아치듯 읽지 않을 겁니다. 서둘러 읽으면 시에 담긴 고요한 여운을 맛보기 어렵습니다. 소리 내어 읽는 게 가장 좋습니다. 운율을 정확히 맞추어 읽으며 입에 걸리는 부분들을 매끄럽게 다듬어간다면 시에 담긴 의미를 조금씩 이해하게 될 겁니다.
어떤 부분에서, 그러니까 인간이 되어가는 부분에서 시는 기막히게 좋은 훈련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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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술 - 출간 50주년 기념판
에리히 프롬 지음, 황문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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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술>


후반부 발췌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이바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란다. 만일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그(또는 그녀)와 일체감을 느끼지만 이는 ‘있는 그대로의 그’와 일체가 되는 것이지, 내가 이용할 대상으로서 나에게 필요한 그와 일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은 지식에 이르는 단 하나의 길이며 사랑은 합일의 행위를 통해 나의 물음에 대답한다. 사랑하는, 곧 나 자신을 주는 행위에서, 다른 사람에게 침투하는 행위에서 나는 나 자신을 찾아내고 나 자신을 발견하고, 나는 우리 두 사람을 발견하고 인간을 발견한다. 


-충분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랑의 ‘행위’에 있다. 이 행위는 사상을 초월하고 언어를 초월한다. 사랑의 행위는 대담하게 합일의 경험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그러나 사고를 통한 지식, 곧 심리학적 지식은 사랑의 행위를 통해 충분한 지식을 얻기 위한 불가결한 조건이다. 다른 사람의 실상을 보려면, 즉 내가 그에 대해 갖고 있는 환상, 곧 불합리하게 일그러진 상(像)을 극복하려면, 나는 다른 사람과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알아야 한다. 인간을 객관적으로 알게 될 때에만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인간의 궁극적 본질을 알 수 있다.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은 서로 의존하고 있다.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은 성숙한 인간, 곧 자신의 힘을 생산적으로 발휘하고 스스로 일한 결과만을 차지하려고 하고, 전지전능이라는 자아도취적 꿈을 포기하고, 오직 순수한 생산적 활동에 의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내적 힘에 바탕을 둔 겸손을 터득한 사람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일련의 태도이다. 


-매우 흔히 있는 일이거니와 남성이 정서적으로 어린아이 상태에 머물러 있어서 그의 남성적 성격의 특징이 약화되면, 그는 ‘성교’에서 배타적으로 남성적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이러한 결함을 보상하려고 한다. 그 결과는 돈 후안이다. 돈 후안은 성격적인 의미에서는 남성다움이 불확실하기 때문에 성교에서 자신의 남성적 힘을 입증할 필요가 있다. 남성다움의 마비가 극단적일 때, 가학성 음란증(폭력 사용)은 남성다움의 주요한―도착(倒錯)된―대용품이 된다. 여성의 성욕은 약화되거나 도착되면, 피학대 음란증 또는 소유욕으로 변한다. 


-다른 사람들의 욕구도 자기 자신의 욕구만큼 중요해진다. 사실상 다른 사람들이 더욱 중요해진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욱 만족스러워지고 즐거워진다. 사랑하는 것이 사랑받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해진다. 사랑함으로써 그는 자아도취와 자기 본위 상태에 의해 이루어진 고독과 고립이라는 감방에서 벗어난다. 그는 새로운 합일감, 참여감, 일체감을 느낀다.  


-어린아이의 사랑은 ‘나는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원칙에 따르고, 성숙한 사랑은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받는다’는 원칙에 따른다. 성숙하지 못한 사랑은 ‘그대가 필요하기 때문에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는 것이지만 성숙한 사랑은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삶에 대한 신념을 갖고, 지나친 걱정을 해서는 안 되며, 어머니의 걱정이 어린아이에게 전해지게 해서는 안 된다. 어머니는 생애 일부를 어린아이가 독립해서 마침내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를 바라는 소망에 바쳐야 한다. 아버지의 사랑은 원칙과 기대로 인도되어야 한다. 아버지의 사랑은 위협적이고 권위적이기보다는 참을성이 있고 관대해야 한다. 아버지의 사랑은 성장하는 어린아이에게 능력에 대한 확신을 증대시켜야 하고 마침내 어린아이가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권위를 갖고 아버지의 권위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


  결국 성숙한 사람이 되려면 자신이 자신의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되는 단계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말하자면 그는 어머니다운, 그리고 아버지다운 양심을 갖게 되어야 한다. 

-어떤 소년이 애정은 있으나 지나치게 방임하거나 지나치게 간섭을 하는 어머니와 약하고 냉담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났다는 사실은 신경증의 원인이 된다. 이 경우 그는 어릴 때의 어머니에 대한 애착에 집착할 것이고, 따라서 어머니에게 의존하고 무력감을 느끼고 수용적 인간, 다시 말하면 받아들이고 보호받고 돌봐주기를 바라는 인간의 특징인 갈망을 갖게 되고, 따라서 아버지다운 성질―훈련, 독립심, 스스로 삶을 익혀나가는 능력―을 갖지 못한 사람으로 발달한다. 그는 누구에게서나, 때로는 여자에게서 때로는 권위와 권력이 따르는 지위에 있는 남자에게서 ‘어머니’를 찾으려고 한다.


  한편 어머니가 냉담하고 동정심이 없고 지나치게 간섭한다면, 그는 어머니의 보호를 바라는 욕구를 아버지에게, 결과적으로 부친상(父親像)으로 전환하거나―이 경우 결과는 전자의 경우와 같다―또는 일방적으로 부친 지향적인 인간으로 발달해서 법률, 질서, 권위의 원칙에 순종할 뿐 무조건적 사랑을 기대하거나 받아들이는 능력은 갖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발달은 아버지가 권위주의적이고 동시에 아들에게 강한 애착을 갖는 경우 더욱 강화된다 

-본래 사랑은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는 아니다. 사랑은 한 사람과, 사랑의 한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 곧 ‘성격의 방향’이다. 어떤 사람이 다른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나머지 동포에게는 무관심하다면, 그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공서적 애착이거나 확대된 이기주의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은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상에 의해서 성립된다고 믿고 있다. 

-만일 내가 참으로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게 된다. 만일 내가 어떤 사람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을 통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세계를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나 자신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랑은 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과 관계하는 성격의 방향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랑받는 대상에 따라 달라지는 여러 가지 사랑의 형태 사이에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과 우리 자신에 대한 사랑은 양자택일적인 것이 아니다. 반대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태도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모든 사람에게서 발견될 것이다. ‘대상’과 ‘우리 자신의 자아’ 사이의 관련이 문제되는 한, ‘사랑’은 원칙적으로 ‘불가분의 것’이다. 순수한 사랑은 생산성의 표현이고 보호, 존경, 책임, 지식을 의미한다. 순수한 사랑은 누군가에 의해 야기된다는 의미에서의 ‘감정’이 아니라 사랑받는 자의 성장과 행복에 대한 능동적 갈망이며, 이 갈망은 자신의 사랑의 능력에 근원이 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할 줄 아는 힘의 실현이고 집중화이다. 사랑에 내포되어 있는 기본적 긍정은 본질적으로 인간 성질의 구현으로서 사랑하는 사람을 지향하고 있다. 한 사람에 대한 사랑에는 인간 자체에 대한 사랑이 내포되어 있다. 

-이기적인’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고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을 위해 원하며, 주는 데서는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받는 데서만 기쁨을 느낀다. 그는 거기서 무엇을 얻어낼 수 있는가 하는 관점에서만 외부 세계를 본다. 그는 다른 사람의 욕구에는 흥미가 없고 다른 사람의 존엄성과 통합성을 존중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자기 자신만을 생각한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유용성을 기준으로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을 판단한다. 그는 기본적으로 사랑할 줄 모른다. 이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과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은 불가피하게 양자택일적임을 증명하지 않는가? 

-이기심과 자기애는 동일한 것이기는커녕 정반대되는 것이다. 이기적인 사랑은 자기 자신을 엄청나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사랑하지 않는다. 사실상 그는 자기 자신을 미워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과 배려의 결여―이것은 그의 생산성의 결여에 대한 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를 공허하게 만들고 좌절시킨다. 그는 필연적으로 불행하며 생활에서 만족을 얻기 위해 초조해하지만 스스로 이 만족의 달성을 가로막고 있다. 그는 지나칠 정도로 자기 자신을 돌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진정한 자아를 돌보는 데 실패한 것을 은폐하고 보상을 받으려고 노력하고 있을 뿐이며, 이러한 노력은 실패로 끝난다. 

-지나치게 걱정하는 어머니에게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다른 사람에 대한 탐욕스러운 관심과 비교하면 이기심을 이해하기가 더욱 쉬워진다. 이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를 특별히 좋아한다고 의식적으로 믿지만, 사실은 자신의 관심의 대상에 대해 깊이 억압되어 있는 적의를 갖고 있다. 이 어머니는 자식을 몹시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식을 사랑할 능력이 전혀 없는 것을 보상하려고 지나친 관심을 갖는다. 

-비이기적인’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 뿐이고’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을 자랑한다. 그는 자신의 비이기주의에도 불구하고 불행하며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조차도 원활하지 못한 데 대해 당황스러워한다. 분석적 연구에 따르면, 그의 비이기주의는 그의 다른 증상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그것들 가운데 하나이며 사실은 가장 중요한 증상일 때가 흔하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능력이나 즐기는 능력이 마비되어 있고, 그는 삶에 대한 적의로 가득 차 있으며, 비이기주의라는 표면 뒤에는 미묘하지만 매우 강렬한 자기 본위가 숨어 있다. 그의 비이기주의가 다른 증상과 함께 증상으로 해석되어서 그의 비이기주의와 다른 고통의 근원인 생산성의 결여가 고쳐질 때에만 이 사람은 치유될 수 있다. 

-비이기주의의 본질은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에서 특히 명백히 나타나고, 우리 문화에서는 ‘비이기적’인 어머니가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에서 가장 자주 나타난다. 이 어머니는 자신의 비이기심을 통해 자녀들이 사랑받는 것이 무엇이며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는 경험을 하게 될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녀의 비이기심의 영향은 그녀의 기대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사랑받고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나타내는 행복감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들은 불안해하고 긴장해 있고 어머니의 비난을 두려워하고 어머니의 기대에 따라 살려고 애를 쓴다. 보통, 그 아이들은 어머니의 삶에 대한 적의에 영향을 받는데, 이러한 적의를 명백히 인식한다기보다는 막연히 느낄 뿐이며 마침내 그들도 이러한 적의에 감염된다. 결국 ‘비이기적’인 어머니가 미치는 영향은 이기적인 어머니의 영향과 별로 다르지 않다.  

-자기애에 대한 이러한 사상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의 다음과 같은 말에 가장 잘 요약되어 있다. “만일 그대가 그대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대는 모든 사람을 그대 자신을 사랑하듯 사랑할 것이다. 그대가 그대 자신보다도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는 한, 그대는 정녕 그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한다면, 그대는 그들을 한 인간으로 사랑할 것이고 이 사람은 신인 동시에 인간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서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사람도 사랑하는 위대하고 올바른 사람이다.”>

   
-도교의 역설적 사고의 특징적인 예는 다음과 같은 말에서 볼 수 있다. “무게는 가벼움의 뿌리이고 정지는 운동의 지배자이다.”> 혹은 “본래의 과정에 있는 도(道)는 하는 일이 없고 그러므로 하지 않는 일이 없다.”> 혹은 “나의 말은 매우 알기 쉽고 매우 행하기 쉽다. 그러나 이 말을 알고 이 말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세계에는 한 사람도 없다.”

    
-알면서도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최고의 ‘각성’이고, 모르면서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병이다. 

-도’를 알고 있는 자는 ‘도에 대해’ 말하려고 하지 않고, 도에 대해 언제든 말할 용의를 갖추고 있는 자는 도를 알지 못한다.”

-오늘날 인간의 행복은 ‘즐기는 데’ 있다. 즐긴다는 것은 ‘만족스러운 소비’를 말하고 상품, 구경거리, 음식, 술, 담배, 사람들, 강의, 책, 영화 등을 ‘입수하는 것’을 말한다. 모든 것이 소비되고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것이다. 세계는 우리의 식욕에 대한 하나의 커다란 대상으로서 커다란 사과, 커다란 병, 커다란 유방이 된다. 우리는 젖을 빠는 자이고, 영원히 기대하는 자이고, 희망에 가득 찬 자이다―그리고 영원히 실망하는 자이다. 우리의 성격은 교환하고 받아들이고 싸게 팔아버리고 소비하는 데 적합하다. 모든 것은, 물질적 대상과 마찬가지로 정신적 대상도, 교환과 소비의 대상이 된다. 

-자본주의가 인간의 자연적 욕구와 일치한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인간은 본성상 경쟁적이고 상호간 적의로 가득 차 있음을 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제학자들은 이 점을 경제적 이득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욕망이라는 관점에서 ‘증명하고’, 다윈주의자들은 적자생존이라는 생물학적 법칙에 의해 ‘증명’했으나, 프로이트는 인간이 모든 여자를 정복하려는 무한한 욕망에 쫓기고 있고 오직 사회적 압력만이 이러한 욕망을 행동화하는 것을 저지한다고 가정함으로써 동일한 결론에 도달했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서로 질투하지 않을 수 없고 이러한 상호 질투와 경쟁은, 비록 이러한 질투와 경쟁의 사회 경제적 원인이 모두 없어지더라도, 계속될 것이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정신을 집중시킨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한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실은 경청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체하고 심지어 충고까지 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들 자신의 대답조차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결과 대화는 그들을 피곤하게 만든다. 그들은 정신을 집중시키고 듣는다면 더욱 피곤해질 것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다. 어떤 활동이든, 만일 정신을 집중시킨 상태에서 행한다면, 우리를 더욱 각성시키지만(비록 후에는 자연스럽고 유익한 피로감이 생기지만), 정신이 집중되지 않은 모든 활동은 우리를 졸립게 만든다. 그런데 정신이 집중되지 않은 활동은 그날 밤 잠들기 어렵게 만든다. 

-정신을 집중시킨다는 것은 전적으로 현재에, 지금 여기에 살고 있다는 것, 따라서 지금 무엇인가 하고 있으면서 다음에 해야 할 일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말할 것도 없이 정신 집중은 서로 사랑하고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실행해야 한다. 그들은 관습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도피하지 말고 서로 친밀하게 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발광한 사람이나 몽상가는 외부 세계에 대해 객관적 견해를 갖는 데 ‘완전히’ 실패한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다소간 정신이상이고 다소간 잠자고 있다. 우리는 모두 세계에 대한 비객관적 견해, 곧 우리의 자아도취적 방향에 의해 왜곡된 견해를 갖고 있다.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은 ‘이성’이다. 이성의 배후에 있는 정서적 태도는 겸손한 태도이다. 객관적이라는 것, 곧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겸손한 태도를 갖게 되었을 때, 어린아이로서 꿈꾸고 있던 전지전능의 꿈으로부터 벗어났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사랑은 자아도취의 상대적 결여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사랑은 겸손, 객관성, 이성의 발달을 요구한다. 우리는 이러한 목적에 전 생애를 바쳐야 한다. 겸손과 객관성은 사랑이 그런 것처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놓여 있는 역설적 상태는 깨어 있을 때에도 반쯤 잠들어 있고, 잠잘 때에 또는 잠들고 싶어할 때에도 반쯤 깨어 있다는 것이다. 완전히 깨어 있다는 것은 싫증을 느끼지 않기 위한, 또는 싫증내지 않기 위한 조건이다. 사실상 싫증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 싫증을 내지 않는다는 것은 생활의 주요 조건의 하나이다. 내면적인 게으름을 피하기 위해 수용적·축적적 형태로든, 자신의 시간을 단지 낭비하는 상태로든, 하루 종일 자신의 눈과 귀로 느끼고 사고하고 있는 것은 사랑을 실천하는 데 불가결한 조건이다. 

-‘중용’이 오늘날 가장 인기 있는 종교적 격언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중용은 공정성의 윤리라는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이해하고 즐겨 실천할 수 있는 종교적 격언이 된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실천은 공정성과 사랑의 차이를 인식하는 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는 관리자의 관료 조직에 의해, 직업 정치가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사람들은 집단적 암시에 의해 동기를 부여받고, 그들의 목표는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는 것이고 이 자체가 목적이 되고 있다. 모든 활동은 경제적 목적에 종속하고, 수단은 목적이 되었다. 인간은 잘 먹고 잘 입고 있지만 각별히 인간적인 자신의 자질이나 기능에 대해서는 조금도 궁극적 관심을 갖지 못한 자동 인형이다. 인간이 사랑할 줄 알게 되려면 그는 최고의 위치에 놓여야 한다. 인간이 경제적 기구에 이바지하지 않고 경제적 기구가 인간에게 이바지해야 한다. 인간은 기껏해야 이익을 나누어 갖는 데 그치지 말고 경험을 나누고, 일을 나누어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사회는, 인간의 사회적이고 사랑할 줄 아는 본성이 그의 사회적 존재와 분리되지 않고 일체를 이루는 방식으로 조직되어야 한다. 내가 입증하려고 노력한 바와 같이, 사랑만이 인간의 실존 문제에 대한 건전하고 만족스러운 대답이라면, 상대적으로나마 사랑의 발달을 배제하는 사회는 인간성의 기본적 필연성과 모순을 일으킴으로써 결국 멸망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의 본성을 분석하는 것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사랑이 결여되었다는 것을 밝혀내고 이러한 결여 상태에 책임이 있는 사회적 조건을 비판하는 것이다. 개인의 예외적인 현상일 뿐 아니라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사랑의 가능성에 대한 신앙을 갖는 것은 인간의 본성 자체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하는 합리적 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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