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술 - 출간 50주년 기념판
에리히 프롬 지음, 황문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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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아무것도 모르는 자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못한다.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자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무가치하다.

  그러나 이해하는 자는 또한 사랑하고 주목하고 파악한다. 
  한 사물에 대한 고유한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랑은 더욱더 위대하다. 
  모든 열매가 딸기와 동시에 익는다고 상상하는 자는
  포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파라켈수스- 


-사랑은 기술인가? 기술이라면 사랑에는 지식과 노력이 요구된다. 혹은 사랑은 우연한 기회에 경험하게 되는, 다시 말하면 행운만 있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즐거운 감정인가?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남남으로 지내오던 두 사람이 갑자기 그들 사이의 벽을 허물어버리고 밀접하게 느끼며 일체(一體)라고 느낄 때, 이러한 합일의 순간은 인생에서 가장 유쾌하고 가장 격앙된 경험 가운데 하나다. 특히 폐쇄적이고 동떨어져 있어서 사랑을 모르고 지내던 사람의 경우라면 특히 놀랍고 기적적인 경험이다. 갑자기 친밀해지는, 이 기적은 성적 매력과 성적 결합에 의해 시작되는 경우, 대체로 더욱 촉진된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오래 지속될 수 없다. 두 사람이 친숙해질수록 친밀감과 기적적인 면은 점점 줄어들다가 마침내 적대감, 실망감, 권태가 생겨나며 최초의 흥분의 잔재마저도 찾아보기 어렵게 된다. 그러나 처음에 그들은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한다. 사실상 그들은 강렬한 열중, 곧 서로 ‘미쳐버리는’ 것을 열정적인 사랑의 증거로 생각하지만, 이것은 기껏해야 그들이 서로 만나기 전에 얼마나 외로웠는가를 입증할 뿐이다. 

-건축에도, 그리고 사랑에도 해당된다. 우리 문화권의 사람들은 사랑의 경우 명백히 실패하고 있으면서도 왜 사랑의 기술은 도무지 배우려고 하지 않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대답도 아마 여기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을 뿌리 깊이 갈망하면서도 사랑 이외의 거의 모든 일, 곧 성공, 위신, 돈, 권력이 사랑보다도 더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우리의 거의 모든 정력이 이러한 목적에 사용되고 거의 모든 사람이 사랑의 기술은 배우려고 들지 않는다.

  돈을 벌거나 특권을 얻는 데 필요한 것만이 배울 만한 가치가 있는 거라면, 오직 ‘영혼’에 유익할 뿐, 현대적 의미에서는 아무런 이익도 없는 사랑은 우리가 대부분의 정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는 사치에 지나지 않을까?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개인으로서든 인류로서든 결정되어 있는, 본능처럼 결정되어 있는 상황으로부터 비결정적이고 불확실하며 개방적인 상황으로 쫓겨난다. 확실한 것은 과거뿐이고 미래에 확실한 것은 오직 죽음뿐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동포를, 자신의 과거를, 자신의 미래의 가능성을 알고 있다. 분리되어 있는 실재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 자신의 생명이 덧없이 짧으며, 원하지 않았는데도 태어났고 원하지 않아도 죽게 되며,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들보다 먼저 또는 그들이 자신보다 먼저 죽게 되리라는 사실의 인식, 자신의 고독과 자신의 분리에 대한 인식, 자연 및 사회의 힘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인식, 이러한 모든 인식은 인간의 분리되어 흩어져 있는 실존을 견딜 수 없는 감옥으로 만든다. 인간은 이 감옥으로부터 풀려나서 밖으로 나가 어떤 형태로든 다른 사람들과, 또한 외부 세계와 결합하지 않는 한 미쳐버릴 것이다. 



-분리 경험은 불안을 일으킨다. 분리는 정녕 모든 불안의 원천이다.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내가 인간적 힘을 사용할 능력을 상실한 채 단절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분리되어 있는 것은 무력하다는 것, 세계―사물과 사람들―를 적극적으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나의 반응 능력 이상으로 세계가 나를 침범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분리는 격렬한 불안의 원천이다. 게다가 분리는 수치심과 죄책감을 일으킨다. 분리 상태에서 느끼는 죄책감과 수치심 경험은 성서에 아담과 이브 이야기로 표현되어 있다. 


-남자와 여자가 자기 자신과 서로를 알게 된 다음, 그들은 분리되어 있고, 그들이 서로 다른 성(性)에 속하는 것처럼 서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아직 서로 사랑하는 것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남남으로 남아 있다(이것은 아담이 이브를 감싸기보다는 오히려 비난함으로써 자신을 지키려고 한 사실에서도 매우 명백하게 드러난다). 인간이 분리된 채 사랑에 의해 다시 결합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의 인식, 이것이 수치심의 원천이다. 동시에 이것은 죄책감과 불안의 원천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절실한 욕구는 이러한 분리 상태를 극복해서 고독이라는 감옥을 떠나려는 욕구이다. 이 목적의 실현에 ‘절대적으로’ 실패할 때 광기가 생긴다. 우리는 외부 세계로부터 철저하게 물러남으로써 분리감이 사라질 때에 완전한 고립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는 인간이 분리되어 있던 외부 세계도 사라져버린다. 

-비도취적 문화권에 살고 있는 개인이 선택하는 형태는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이다. 사회적으로 정형화된 해결에 참여하는 사람들과는 대조적으로, 이러한 사람들은 죄책감과 후회로 괴로워한다. 알코올이나 마약에 피난함으로써 분리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도취 상태가 지나가버리고 나면 그들은 더욱 심한 분리감을 느끼며, 더욱 자주, 더욱 강렬하게 알코올이나 마약에 의존하게 된다.

  성적 도취를 해결책으로 삼는 경우는 이와는 약간 다르다. 성적 도취는 어느 정도 분리감을 극복하는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형태이며 고립 문제에 대한 부분적 해답이 된다. 그러나 다른 방법으로 분리 상태를 해결하지 못하는 많은 개인의 경우, 성적 오르가슴 추구는 알코올 중독이나 마약 중독과 별로 다를 바 없는 기능을 떠맡게 된다. 이것은 분리에 의해 생긴 불안에서 벗어나려는 절망적 노력이며 결과적으로는 분리감을 더욱 증대시킨다. 사랑이 없는 성행위는, 한순간을 제외하고는, 두 인간 사이의 간격을 좁혀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취적 합일의 모든 형태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강렬하고 심지어 난폭하다는 것, 둘째는 퍼스낼리티 전체에, 몸과 마음에 일어난다는 것, 셋째는 일시적이고 주기적이라는 것이다. 이와는 정반대되는 것이 과거나 현재에 있어서 사람들이 가장 자주 해결책으로 채택하고 있는 합일의 형태, 곧 집단―그 관습, 관례, 신앙―과의 일치에 바탕을 둔 합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상당한 발전을 볼 수 있다. 

--개인의 독자성에 대한 이러한 확신은 예컨대 탈무드[유대인의 율법과 그 해석]에도 표현되어 있다. 곧 “한 생명을 구한 자는 전 세계를 구한 것과 같고, 한 생명을 파괴하는 자는 전 세계를 파괴하는 것과 같다.” 


-일치에 의한 합일은 강렬하지도 않고 난폭하지도 않다. 이러한 합일은 냉정하고 관례에 따라 지시되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때로는 분리 상태에서 생기는 불안을 진정시키기에 불충분하다. 현대 서양 사회의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강박적인 성애 중시, 자살 등의 사례는 군중과의 일치에 상대적으로 실패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다. 게다가 일치에 의한 합일은 주로 정신에만 관계되고 육체에는 관계되지 않으며, 이러한 이유 때문에 도취적 해결책과 비교하면 결함이 있다. 


-공서적 합일의 ‘수동적’ 형태는 복종, 또는 임상적 용어를 사용한다면 피학대 음란증(마조히즘, masochism)이다. 피학대 음란증적 인간은 자신을 지휘하고 인도하고 보호하는 사람, 말하자면 자신의 생명이고 산소인 다른 사람의 일부가 됨으로써 견디기 어려운 고립감과 분리감에서 도피한다. 인간이 복종하고 있는 자의 힘은, 그것이 인간이든 신이든 팽창한다. 그는 모든 것이고 내가 그의 일부가 아닌 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한 부분으로서 나는 위대성, 힘, 확실성의 일부이다. 피학대 음란증적 인간은 결정을 내릴 필요가 없고 모험을 할 필요가 없다. 그는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그는 독립하지는 못한다. 그는 통합성을 갖지 못한다. 그는 아직도 완전히 탄생하지 못한 자다. 

-피학대 음란증적 인간이 가학성 음란증적 인간에 의존하듯이 가학성 음란증적 인간도 복종하는 자에게 의존한다. 양자는 한쪽이 없으면 살아나갈 수 없다. 차이점은 오직 가학성 음란증적 인간은 명령하고 착취하고 상처를 입히고 모욕을 가하고, 피학대 음란증적 인간은 명령받고 착취당하고 상처를 입고 모욕을 당한다는 점뿐이다. 

-사랑은 인간에게 능동적인 힘이다. 곧 인간을 동료에게서 분리하는 벽을 허물어버리는 힘, 인간을 타인과 결합하는 힘이다. 사랑은 인간으로 하여금 고립감과 분리감을 극복하게 하면서도 각자에게 각자의 특성을 허용하고 자신의 통합성을 유지시킨다. 사랑에서는 두 존재가 하나로 되면서도 둘로 남아 있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

˝선망, 질투, 야망, 온갖 종류의 탐욕은 격정이다. 그러나 사랑은 행동이며 인간의 힘을 행사하는 것이고, 이 힘은 자유로운 상황에서만 행사할 수 있을 뿐, 강제된 결과로서는 결코 나타날 수 없다.˝
 - 스피노자, 《윤리학(Ethics)》-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지 ‘빠지는 것’이 아니다. 가장 일반적인 방식으로 사랑의 능동적 성격을 말한다면, 사랑은 본래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할 수 있다. 


-성격이 비생산적인 사람들은 주는 것을 가난해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들 대부분은 주려고 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희생이라는 의미에서 주는 것을 덕으로 삼는다. 그들은 주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이유 때문에 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덕은 희생을 감수한다는 행위에서만 성립된다. 그들의 경우,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것이 낫다는 규범은 환희를 경험하기보다는 박탈당하는 것을 감수하는 편이 낫다는 의미이다. 

-생산적인 성격의 경우, 주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주는 것은 잠재적 능력의 최고 표현이다. 준다고 하는 행위 자체에서 나는 나의 힘, 나의 부(富), 나의 능력을 경험한다. 고양된 생명력과 잠재력을 경험하고 나는 매우 큰 환희를 느낀다. 나는 나 자신을 넘쳐흐르고 소비하고 생동하는 자로서, 따라서 즐거운 자로서 경험한다.4> 주는 것은 박탈당하는 것이 아니라 준다고 하는 행위에는 나의 활동성이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주는 것은 받는 것보다 더 즐겁다. 



-물질적인 영역에서는 준다는 것은 부자임을 의미한다. 많이 ‘갖고’ 있는 자가 부자가 아니다. 많이 ‘주는’ 자가 부자다. 하나라도 잃어버릴까 안달을 하는 자는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아무리 많이 갖고 있더라도 가난한 사람, 가난해진 사람이다. 자기 자신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부자다. 그는 자기를 남에게 줄 수 있는 자로서 자신을 경험한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자기 자신, 자신이 갖고 있는 것 중 가장 소중한 것, 다시 말하면 생명을 준다. 이 말은 반드시 남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을 준다는 뜻이다. 그는 자신의 기쁨, 자신의 관심, 자신의 이해, 자신의 지식, 자신의 유머, 자신의 슬픔―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의 모든 표현과 현시(顯示)를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생명을 줌으로써 그는 타인을 풍요하게 만들고, 자기 자신의 생동감을 고양함으로써 타인의 생동감을 고양시킨다. 그는 받으려고 주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는 주는 것 자체가 절묘한 기쁨이다.


  그러나 그는 줌으로써 다른 사람의 생명에 무엇인가 야기하지 않을 수 없고, 이와 같이 다른 사람의 생명에 야기된 것은 그에게 되돌아온다. 참으로 줄 때, 그는 그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준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주는 자로 만들고, 두 사람 다 생명을 탄생시키는 기쁨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는 행위에서는 무엇인가 탄생하고 이와 관련된 두 사람은 그들 두 사람을 위해 태어난 생명에 대해 감사한다. 

-사랑은 사랑을 일으키는 힘이고 무능력은 사랑을 일으키는 능력이 없다는 뜻이다. 마르크스는 이 사상을 아름답게 표현했다.


 ˝인간을 인간으로서’ 생각하고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인간적 관계로 생각하라. 그러면 당신은 사랑은 사랑으로만, 신뢰는 신뢰로만 교환하게 될 것이다. 예술을 감상하려 한다면 당신은 예술적 훈련을 받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영향력을 갖고 싶다면, 당신은 실제로 다른 사람을 격려하고 발전시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당신의 인간과 자연에 대한 모든 관계는 당신의 의지의 대상에 대응하는, 당신의 ‘현실적이고 개별적인’ 생명의 분명한 표현이 되어야 한다. 만일 당신이 사랑을 일깨우지 못하는 사랑을 한다면, 곧 당신의 사랑이 사랑을 일으키지 못한다면, 만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의 ‘생명의 표현’에 의해서 당신 자신을 ‘사랑받는 자’로 만들지 못한다면 당신의 사랑은 무능한 사랑이고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사랑의 능동적 성격은, 준다고 하는 요소 외에도, 언제나 모든 사랑의 형태에 공통된 어떤 기본적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해진다. 이러한 요소들은 보호, 책임, 존경, 지식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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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술>

후반부 발췌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이바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란다. 만일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그(또는 그녀)와 일체감을 느끼지만 이는 ‘있는 그대로의 그’와 일체가 되는 것이지, 내가 이용할 대상으로서
나에게 필요한 그와 일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은 지식에 이르는 단 하나의 길이며 사랑은 합일의 행위를 통해 나의 물음에 대답한다. 사랑하는, 곧 나 자신을 주는 행위에서, 다른
사람에게 침투하는 행위에서 나는 나 자신을 찾아내고 나 자신을 발견하고, 나는 우리 두 사람을 발견하고 인간을 발견한다.

-충분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랑의 ‘행위’에 있다. 이 행위는 사상을 초월하고 언어를 초월한다. 사랑의 행위는 대담하게
합일의 경험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그러나 사고를 통한 지식, 곧 심리학적 지식은 사랑의 행위를 통해 충분한 지식을 얻기 위한 불가결한
조건이다. 다른 사람의 실상을 보려면, 즉 내가 그에 대해 갖고 있는 환상, 곧 불합리하게 일그러진 상(像)을 극복하려면, 나는 다른 사람과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알아야 한다. 인간을 객관적으로 알게 될 때에만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인간의 궁극적 본질을 알 수 있다.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은 서로 의존하고 있다.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은 성숙한 인간, 곧 자신의 힘을 생산적으로 발휘하고 스스로
일한 결과만을 차지하려고 하고, 전지전능이라는 자아도취적 꿈을 포기하고, 오직 순수한 생산적 활동에 의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내적 힘에 바탕을
둔 겸손을 터득한 사람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일련의 태도이다.

-매우 흔히 있는 일이거니와 남성이 정서적으로 어린아이 상태에 머물러 있어서 그의 남성적 성격의 특징이 약화되면, 그는 ‘성교’에서
배타적으로 남성적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이러한 결함을 보상하려고 한다. 그 결과는 돈 후안이다. 돈 후안은 성격적인 의미에서는 남성다움이
불확실하기 때문에 성교에서 자신의 남성적 힘을 입증할 필요가 있다. 남성다움의 마비가 극단적일 때, 가학성 음란증(폭력 사용)은 남성다움의
주요한―도착(倒錯)된―대용품이 된다. 여성의 성욕은 약화되거나 도착되면, 피학대 음란증 또는 소유욕으로 변한다.

-다른 사람들의 욕구도 자기 자신의 욕구만큼 중요해진다. 사실상 다른 사람들이 더욱 중요해진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욱 만족스러워지고
즐거워진다. 사랑하는 것이 사랑받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해진다. 사랑함으로써 그는 자아도취와 자기 본위 상태에 의해 이루어진 고독과 고립이라는
감방에서 벗어난다. 그는 새로운 합일감, 참여감, 일체감을 느낀다.

-어린아이의 사랑은 ‘나는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원칙에 따르고, 성숙한 사랑은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받는다’는 원칙에 따른다.
성숙하지 못한 사랑은 ‘그대가 필요하기 때문에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는 것이지만 성숙한 사랑은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삶에 대한 신념을 갖고, 지나친 걱정을 해서는 안 되며, 어머니의 걱정이 어린아이에게 전해지게 해서는 안 된다. 어머니는 생애
일부를 어린아이가 독립해서 마침내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를 바라는 소망에 바쳐야 한다. 아버지의 사랑은 원칙과 기대로 인도되어야 한다.
아버지의 사랑은 위협적이고 권위적이기보다는 참을성이 있고 관대해야 한다. 아버지의 사랑은 성장하는 어린아이에게 능력에 대한 확신을 증대시켜야
하고 마침내 어린아이가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권위를 갖고 아버지의 권위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

결국 성숙한 사람이 되려면 자신이 자신의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되는 단계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말하자면 그는 어머니다운, 그리고
아버지다운 양심을 갖게 되어야 한다.

-어떤 소년이 애정은 있으나 지나치게 방임하거나 지나치게 간섭을 하는 어머니와 약하고 냉담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났다는 사실은 신경증의 원인이
된다. 이 경우 그는 어릴 때의 어머니에 대한 애착에 집착할 것이고, 따라서 어머니에게 의존하고 무력감을 느끼고 수용적 인간, 다시 말하면
받아들이고 보호받고 돌봐주기를 바라는 인간의 특징인 갈망을 갖게 되고, 따라서 아버지다운 성질―훈련, 독립심, 스스로 삶을 익혀나가는 능력―을
갖지 못한 사람으로 발달한다. 그는 누구에게서나, 때로는 여자에게서 때로는 권위와 권력이 따르는 지위에 있는 남자에게서 ‘어머니’를 찾으려고
한다.

한편 어머니가 냉담하고 동정심이 없고 지나치게 간섭한다면, 그는 어머니의 보호를 바라는 욕구를 아버지에게, 결과적으로 부친상(父親像)으로
전환하거나―이 경우 결과는 전자의 경우와 같다―또는 일방적으로 부친 지향적인 인간으로 발달해서 법률, 질서, 권위의 원칙에 순종할 뿐 무조건적
사랑을 기대하거나 받아들이는 능력은 갖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발달은 아버지가 권위주의적이고 동시에 아들에게 강한 애착을 갖는 경우 더욱
강화된다

-본래 사랑은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는 아니다. 사랑은 한 사람과, 사랑의 한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 곧 ‘성격의 방향’이다. 어떤 사람이 다른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나머지 동포에게는 무관심하다면, 그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공서적
애착이거나 확대된 이기주의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은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상에 의해서 성립된다고 믿고 있다.

-만일 내가 참으로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게 된다. 만일 내가 어떤 사람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을 통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세계를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나 자신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랑은 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과 관계하는 성격의 방향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랑받는 대상에 따라 달라지는 여러 가지 사랑의 형태
사이에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과 우리 자신에 대한 사랑은 양자택일적인 것이 아니다. 반대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태도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모든 사람에게서 발견될 것이다. ‘대상’과 ‘우리 자신의 자아’ 사이의 관련이 문제되는 한, ‘사랑’은 원칙적으로 ‘불가분의 것’이다.
순수한 사랑은 생산성의 표현이고 보호, 존경, 책임, 지식을 의미한다. 순수한 사랑은 누군가에 의해 야기된다는 의미에서의 ‘감정’이 아니라
사랑받는 자의 성장과 행복에 대한 능동적 갈망이며, 이 갈망은 자신의 사랑의 능력에 근원이 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할 줄 아는 힘의 실현이고 집중화이다. 사랑에 내포되어 있는 기본적 긍정은 본질적으로 인간 성질의
구현으로서 사랑하는 사람을 지향하고 있다. 한 사람에 대한 사랑에는 인간 자체에 대한 사랑이 내포되어 있다.

-이기적인’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고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을 위해 원하며, 주는 데서는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받는 데서만 기쁨을
느낀다. 그는 거기서 무엇을 얻어낼 수 있는가 하는 관점에서만 외부 세계를 본다. 그는 다른 사람의 욕구에는 흥미가 없고 다른 사람의 존엄성과
통합성을 존중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자기 자신만을 생각한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유용성을 기준으로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을 판단한다.
그는 기본적으로 사랑할 줄 모른다. 이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과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은 불가피하게 양자택일적임을 증명하지 않는가?

-이기심과 자기애는 동일한 것이기는커녕 정반대되는 것이다. 이기적인 사랑은 자기 자신을 엄청나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사랑하지 않는다.
사실상 그는 자기 자신을 미워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과 배려의 결여―이것은 그의 생산성의 결여에 대한 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를 공허하게 만들고 좌절시킨다. 그는
필연적으로 불행하며 생활에서 만족을 얻기 위해 초조해하지만 스스로 이 만족의 달성을 가로막고 있다. 그는 지나칠 정도로 자기 자신을 돌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진정한 자아를 돌보는 데 실패한 것을 은폐하고 보상을 받으려고 노력하고 있을 뿐이며, 이러한 노력은 실패로 끝난다.

-지나치게 걱정하는 어머니에게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다른 사람에 대한 탐욕스러운 관심과 비교하면 이기심을 이해하기가 더욱 쉬워진다. 이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를 특별히 좋아한다고 의식적으로 믿지만, 사실은 자신의 관심의 대상에 대해 깊이 억압되어 있는 적의를 갖고 있다. 이
어머니는 자식을 몹시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식을 사랑할 능력이 전혀 없는 것을 보상하려고 지나친 관심을 갖는다.

-비이기적인’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 뿐이고’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을 자랑한다. 그는 자신의 비이기주의에도 불구하고 불행하며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조차도 원활하지 못한 데 대해 당황스러워한다.
분석적 연구에 따르면, 그의 비이기주의는 그의 다른 증상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그것들 가운데 하나이며 사실은 가장 중요한 증상일 때가 흔하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능력이나 즐기는 능력이 마비되어 있고, 그는 삶에 대한 적의로 가득 차 있으며, 비이기주의라는 표면 뒤에는 미묘하지만 매우
강렬한 자기 본위가 숨어 있다. 그의 비이기주의가 다른 증상과 함께 증상으로 해석되어서 그의 비이기주의와 다른 고통의 근원인 생산성의 결여가
고쳐질 때에만 이 사람은 치유될 수 있다.

-비이기주의의 본질은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에서 특히 명백히 나타나고, 우리 문화에서는 ‘비이기적’인 어머니가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에서
가장 자주 나타난다. 이 어머니는 자신의 비이기심을 통해 자녀들이 사랑받는 것이 무엇이며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는 경험을 하게 될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녀의 비이기심의 영향은 그녀의 기대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사랑받고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나타내는 행복감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들은 불안해하고 긴장해 있고 어머니의 비난을 두려워하고 어머니의 기대에 따라 살려고 애를 쓴다. 보통, 그 아이들은 어머니의 삶에
대한 적의에 영향을 받는데, 이러한 적의를 명백히 인식한다기보다는 막연히 느낄 뿐이며 마침내 그들도 이러한 적의에 감염된다. 결국
‘비이기적’인 어머니가 미치는 영향은 이기적인 어머니의 영향과 별로 다르지 않다.

-자기애에 대한 이러한 사상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의 다음과 같은 말에 가장 잘 요약되어 있다. “만일 그대가
그대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대는 모든 사람을 그대 자신을 사랑하듯 사랑할 것이다. 그대가 그대 자신보다도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는 한, 그대는
정녕 그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한다면, 그대는 그들을 한 인간으로 사랑할 것이고
이 사람은 신인 동시에 인간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서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사람도 사랑하는 위대하고 올바른 사람이다.”>

   
-도교의 역설적 사고의 특징적인 예는 다음과 같은 말에서 볼 수 있다. “무게는 가벼움의 뿌리이고 정지는 운동의 지배자이다.”> 혹은
“본래의 과정에 있는 도(道)는 하는 일이 없고 그러므로 하지 않는 일이 없다.”> 혹은 “나의 말은 매우 알기 쉽고 매우 행하기 쉽다.
그러나 이 말을 알고 이 말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세계에는 한 사람도 없다.”

    
-알면서도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최고의 ‘각성’이고, 모르면서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병이다. 

-도’를 알고 있는 자는 ‘도에 대해’ 말하려고 하지 않고, 도에 대해 언제든 말할 용의를 갖추고 있는 자는 도를 알지 못한다.”

-오늘날 인간의 행복은 ‘즐기는 데’ 있다. 즐긴다는 것은 ‘만족스러운 소비’를 말하고 상품, 구경거리, 음식, 술, 담배, 사람들, 강의,
책, 영화 등을 ‘입수하는 것’을 말한다. 모든 것이 소비되고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것이다. 세계는 우리의 식욕에 대한 하나의 커다란
대상으로서 커다란 사과, 커다란 병, 커다란 유방이 된다. 우리는 젖을 빠는 자이고, 영원히 기대하는 자이고, 희망에 가득 찬 자이다―그리고
영원히 실망하는 자이다. 우리의 성격은 교환하고 받아들이고 싸게 팔아버리고 소비하는 데 적합하다. 모든 것은, 물질적 대상과 마찬가지로 정신적
대상도, 교환과 소비의 대상이 된다.

-자본주의가 인간의 자연적 욕구와 일치한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인간은 본성상 경쟁적이고 상호간 적의로 가득 차 있음을 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제학자들은 이 점을 경제적 이득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욕망이라는 관점에서 ‘증명하고’, 다윈주의자들은 적자생존이라는 생물학적
법칙에 의해 ‘증명’했으나, 프로이트는 인간이 모든 여자를 정복하려는 무한한 욕망에 쫓기고 있고 오직 사회적 압력만이 이러한 욕망을 행동화하는
것을 저지한다고 가정함으로써 동일한 결론에 도달했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서로 질투하지 않을 수 없고 이러한 상호 질투와 경쟁은, 비록 이러한
질투와 경쟁의 사회 경제적 원인이 모두 없어지더라도, 계속될 것이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정신을 집중시킨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한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실은 경청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체하고 심지어 충고까지 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들 자신의
대답조차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결과 대화는 그들을 피곤하게 만든다. 그들은 정신을 집중시키고 듣는다면 더욱 피곤해질 것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다. 어떤 활동이든, 만일 정신을 집중시킨 상태에서 행한다면, 우리를 더욱 각성시키지만(비록 후에는 자연스럽고 유익한
피로감이 생기지만), 정신이 집중되지 않은 모든 활동은 우리를 졸립게 만든다. 그런데 정신이 집중되지 않은 활동은 그날 밤 잠들기 어렵게
만든다.

-정신을 집중시킨다는 것은 전적으로 현재에, 지금 여기에 살고 있다는 것, 따라서 지금 무엇인가 하고 있으면서 다음에 해야 할 일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말할 것도 없이 정신 집중은 서로 사랑하고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실행해야 한다. 그들은 관습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도피하지 말고 서로 친밀하게 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발광한 사람이나 몽상가는 외부 세계에 대해 객관적 견해를 갖는 데 ‘완전히’ 실패한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다소간 정신이상이고 다소간
잠자고 있다. 우리는 모두 세계에 대한 비객관적 견해, 곧 우리의 자아도취적 방향에 의해 왜곡된 견해를 갖고 있다.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은 ‘이성’이다. 이성의 배후에 있는 정서적 태도는 겸손한 태도이다. 객관적이라는 것, 곧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겸손한 태도를 갖게 되었을 때, 어린아이로서 꿈꾸고 있던 전지전능의 꿈으로부터 벗어났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사랑은 자아도취의 상대적 결여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사랑은 겸손, 객관성, 이성의 발달을 요구한다. 우리는 이러한 목적에 전 생애를 바쳐야
한다. 겸손과 객관성은 사랑이 그런 것처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놓여 있는 역설적 상태는 깨어 있을 때에도 반쯤 잠들어 있고, 잠잘 때에 또는 잠들고 싶어할 때에도 반쯤 깨어
있다는 것이다. 완전히 깨어 있다는 것은 싫증을 느끼지 않기 위한, 또는 싫증내지 않기 위한 조건이다. 사실상 싫증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
싫증을 내지 않는다는 것은 생활의 주요 조건의 하나이다. 내면적인 게으름을 피하기 위해 수용적·축적적 형태로든, 자신의 시간을 단지 낭비하는
상태로든, 하루 종일 자신의 눈과 귀로 느끼고 사고하고 있는 것은 사랑을 실천하는 데 불가결한 조건이다.

-‘중용’이 오늘날 가장 인기 있는 종교적 격언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중용은 공정성의 윤리라는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이해하고 즐겨 실천할 수 있는 종교적 격언이 된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실천은 공정성과 사랑의 차이를 인식하는 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는 관리자의 관료 조직에 의해, 직업 정치가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사람들은 집단적 암시에 의해 동기를 부여받고, 그들의 목표는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는 것이고 이 자체가 목적이 되고 있다. 모든 활동은 경제적 목적에 종속하고, 수단은 목적이 되었다. 인간은
잘 먹고 잘 입고 있지만 각별히 인간적인 자신의 자질이나 기능에 대해서는 조금도 궁극적 관심을 갖지 못한 자동 인형이다. 인간이 사랑할 줄
알게 되려면 그는 최고의 위치에 놓여야 한다. 인간이 경제적 기구에 이바지하지 않고 경제적 기구가 인간에게 이바지해야 한다. 인간은 기껏해야
이익을 나누어 갖는 데 그치지 말고 경험을 나누고, 일을 나누어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사회는, 인간의 사회적이고 사랑할 줄 아는 본성이 그의 사회적 존재와 분리되지 않고 일체를 이루는 방식으로 조직되어야 한다. 내가
입증하려고 노력한 바와 같이, 사랑만이 인간의 실존 문제에 대한 건전하고 만족스러운 대답이라면, 상대적으로나마 사랑의 발달을 배제하는 사회는
인간성의 기본적 필연성과 모순을 일으킴으로써 결국 멸망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의 본성을 분석하는 것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사랑이 결여되었다는 것을 밝혀내고 이러한 결여 상태에 책임이 있는 사회적 조건을 비판하는
것이다. 개인의 예외적인 현상일 뿐 아니라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사랑의 가능성에 대한 신앙을 갖는 것은 인간의 본성 자체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하는 합리적 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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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아무것도 모르는 자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못한다.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자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무가치하다.

  그러나 이해하는 자는 또한 사랑하고 주목하고 파악한다. 
  한 사물에 대한 고유한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랑은 더욱더 위대하다. 
  모든 열매가 딸기와 동시에 익는다고 상상하는 자는
  포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파라켈수스- 


-사랑은 기술인가? 기술이라면 사랑에는 지식과 노력이 요구된다. 혹은 사랑은 우연한 기회에 경험하게 되는, 다시 말하면 행운만 있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즐거운 감정인가?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남남으로 지내오던 두 사람이 갑자기 그들 사이의 벽을 허물어버리고 밀접하게 느끼며 일체(一體)라고 느낄 때, 이러한
합일의 순간은 인생에서 가장 유쾌하고 가장 격앙된 경험 가운데 하나다. 특히 폐쇄적이고 동떨어져 있어서 사랑을 모르고 지내던 사람의 경우라면
특히 놀랍고 기적적인 경험이다. 갑자기 친밀해지는, 이 기적은 성적 매력과 성적 결합에 의해 시작되는 경우, 대체로 더욱 촉진된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오래 지속될 수 없다. 두 사람이 친숙해질수록 친밀감과 기적적인 면은 점점 줄어들다가 마침내
적대감, 실망감, 권태가 생겨나며 최초의 흥분의 잔재마저도 찾아보기 어렵게 된다. 그러나 처음에 그들은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한다. 사실상
그들은 강렬한 열중, 곧 서로 ‘미쳐버리는’ 것을 열정적인 사랑의 증거로 생각하지만, 이것은 기껏해야 그들이 서로 만나기 전에 얼마나
외로웠는가를 입증할 뿐이다.

-건축에도, 그리고 사랑에도 해당된다. 우리 문화권의 사람들은 사랑의 경우 명백히 실패하고 있으면서도 왜 사랑의 기술은 도무지 배우려고 하지
않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대답도 아마 여기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을 뿌리 깊이 갈망하면서도 사랑 이외의 거의 모든 일, 곧 성공,
위신, 돈, 권력이 사랑보다도 더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우리의 거의 모든 정력이 이러한 목적에 사용되고 거의 모든 사람이 사랑의
기술은 배우려고 들지 않는다.

돈을 벌거나 특권을 얻는 데 필요한 것만이 배울 만한 가치가 있는 거라면, 오직 ‘영혼’에 유익할 뿐, 현대적 의미에서는 아무런 이익도
없는 사랑은 우리가 대부분의 정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는 사치에 지나지 않을까?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개인으로서든 인류로서든 결정되어 있는, 본능처럼 결정되어 있는 상황으로부터 비결정적이고 불확실하며 개방적인 상황으로
쫓겨난다. 확실한 것은 과거뿐이고 미래에 확실한 것은 오직 죽음뿐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동포를, 자신의 과거를, 자신의 미래의 가능성을 알고 있다. 분리되어 있는 실재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 자신의
생명이 덧없이 짧으며, 원하지 않았는데도 태어났고 원하지 않아도 죽게 되며,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들보다 먼저 또는 그들이 자신보다 먼저 죽게
되리라는 사실의 인식, 자신의 고독과 자신의 분리에 대한 인식, 자연 및 사회의 힘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인식, 이러한 모든 인식은
인간의 분리되어 흩어져 있는 실존을 견딜 수 없는 감옥으로 만든다. 인간은 이 감옥으로부터 풀려나서 밖으로 나가 어떤 형태로든 다른 사람들과,
또한 외부 세계와 결합하지 않는 한 미쳐버릴 것이다.


-분리 경험은 불안을 일으킨다. 분리는 정녕 모든 불안의 원천이다.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내가 인간적 힘을 사용할 능력을 상실한 채 단절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분리되어 있는 것은 무력하다는 것, 세계―사물과 사람들―를 적극적으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나의 반응 능력 이상으로 세계가 나를 침범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분리는 격렬한 불안의 원천이다. 게다가 분리는
수치심과 죄책감을 일으킨다. 분리 상태에서 느끼는 죄책감과 수치심 경험은 성서에 아담과 이브 이야기로 표현되어 있다.



-남자와 여자가 자기 자신과 서로를 알게 된 다음, 그들은 분리되어 있고, 그들이 서로 다른 성(性)에 속하는 것처럼 서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아직 서로 사랑하는 것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남남으로 남아 있다(이것은
아담이 이브를 감싸기보다는 오히려 비난함으로써 자신을 지키려고 한 사실에서도 매우 명백하게 드러난다). 인간이 분리된 채 사랑에 의해 다시
결합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의 인식, 이것이 수치심의 원천이다. 동시에 이것은 죄책감과 불안의 원천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절실한 욕구는 이러한 분리 상태를 극복해서 고독이라는 감옥을 떠나려는 욕구이다. 이 목적의 실현에 ‘절대적으로’ 실패할
때 광기가 생긴다. 우리는 외부 세계로부터 철저하게 물러남으로써 분리감이 사라질 때에 완전한 고립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는
인간이 분리되어 있던 외부 세계도 사라져버린다.

-비도취적 문화권에 살고 있는 개인이 선택하는 형태는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이다. 사회적으로 정형화된 해결에 참여하는 사람들과는
대조적으로, 이러한 사람들은 죄책감과 후회로 괴로워한다. 알코올이나 마약에 피난함으로써 분리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도취 상태가
지나가버리고 나면 그들은 더욱 심한 분리감을 느끼며, 더욱 자주, 더욱 강렬하게 알코올이나 마약에 의존하게 된다.

성적 도취를 해결책으로 삼는 경우는 이와는 약간 다르다. 성적 도취는 어느 정도 분리감을 극복하는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형태이며 고립 문제에
대한 부분적 해답이 된다. 그러나 다른 방법으로 분리 상태를 해결하지 못하는 많은 개인의 경우, 성적 오르가슴 추구는 알코올 중독이나 마약
중독과 별로 다를 바 없는 기능을 떠맡게 된다. 이것은 분리에 의해 생긴 불안에서 벗어나려는 절망적 노력이며 결과적으로는 분리감을 더욱
증대시킨다. 사랑이 없는 성행위는, 한순간을 제외하고는, 두 인간 사이의 간격을 좁혀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취적 합일의 모든 형태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강렬하고 심지어 난폭하다는 것, 둘째는 퍼스낼리티 전체에, 몸과 마음에
일어난다는 것, 셋째는 일시적이고 주기적이라는 것이다. 이와는 정반대되는 것이 과거나 현재에 있어서 사람들이 가장 자주 해결책으로 채택하고
있는 합일의 형태, 곧 집단―그 관습, 관례, 신앙―과의 일치에 바탕을 둔 합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상당한 발전을 볼 수 있다.

--개인의 독자성에 대한 이러한 확신은 예컨대 탈무드[유대인의 율법과 그 해석]에도 표현되어 있다. 곧 “한 생명을 구한 자는 전 세계를
구한 것과 같고, 한 생명을 파괴하는 자는 전 세계를 파괴하는 것과 같다.”

-일치에 의한 합일은 강렬하지도 않고 난폭하지도 않다. 이러한 합일은 냉정하고 관례에 따라 지시되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때로는 분리
상태에서 생기는 불안을 진정시키기에 불충분하다. 현대 서양 사회의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강박적인 성애 중시, 자살 등의 사례는 군중과의
일치에 상대적으로 실패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다. 게다가 일치에 의한 합일은 주로 정신에만 관계되고 육체에는 관계되지 않으며, 이러한 이유
때문에 도취적 해결책과 비교하면 결함이 있다.

-공서적 합일의 ‘수동적’ 형태는 복종, 또는 임상적 용어를 사용한다면 피학대 음란증(마조히즘, masochism)이다. 피학대 음란증적
인간은 자신을 지휘하고 인도하고 보호하는 사람, 말하자면 자신의 생명이고 산소인 다른 사람의 일부가 됨으로써 견디기 어려운 고립감과 분리감에서
도피한다. 인간이 복종하고 있는 자의 힘은, 그것이 인간이든 신이든 팽창한다. 그는 모든 것이고 내가 그의 일부가 아닌 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한 부분으로서 나는 위대성, 힘, 확실성의 일부이다. 피학대 음란증적 인간은 결정을 내릴 필요가 없고 모험을 할 필요가 없다. 그는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그는 독립하지는 못한다. 그는 통합성을 갖지 못한다. 그는 아직도 완전히 탄생하지 못한 자다.

-피학대 음란증적 인간이 가학성 음란증적 인간에 의존하듯이 가학성 음란증적 인간도 복종하는 자에게 의존한다. 양자는 한쪽이 없으면 살아나갈
수 없다. 차이점은 오직 가학성 음란증적 인간은 명령하고 착취하고 상처를 입히고 모욕을 가하고, 피학대 음란증적 인간은 명령받고 착취당하고
상처를 입고 모욕을 당한다는 점뿐이다.

-사랑은 인간에게 능동적인 힘이다. 곧 인간을 동료에게서 분리하는 벽을 허물어버리는 힘, 인간을 타인과 결합하는 힘이다. 사랑은 인간으로
하여금 고립감과 분리감을 극복하게 하면서도 각자에게 각자의 특성을 허용하고 자신의 통합성을 유지시킨다. 사랑에서는 두 존재가 하나로 되면서도
둘로 남아 있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선망, 질투, 야망, 온갖 종류의 탐욕은 격정이다. 그러나 사랑은 행동이며 인간의 힘을 행사하는 것이고, 이 힘은 자유로운 상황에서만
행사할 수 있을 뿐, 강제된 결과로서는 결코 나타날 수 없다.˝
 - 스피노자, 《윤리학(Ethics)》-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지 ‘빠지는 것’이 아니다. 가장 일반적인 방식으로 사랑의 능동적 성격을
말한다면, 사랑은 본래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할 수 있다.

-성격이 비생산적인 사람들은 주는 것을 가난해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들 대부분은 주려고 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희생이라는
의미에서 주는 것을 덕으로 삼는다. 그들은 주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이유 때문에 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덕은 희생을
감수한다는 행위에서만 성립된다. 그들의 경우,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것이 낫다는 규범은 환희를 경험하기보다는 박탈당하는 것을 감수하는 편이
낫다는 의미이다.

-생산적인 성격의 경우, 주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주는 것은 잠재적 능력의 최고 표현이다. 준다고 하는 행위 자체에서 나는 나의
힘, 나의 부(富), 나의 능력을 경험한다. 고양된 생명력과 잠재력을 경험하고 나는 매우 큰 환희를 느낀다. 나는 나 자신을 넘쳐흐르고
소비하고 생동하는 자로서, 따라서 즐거운 자로서 경험한다.4> 주는 것은 박탈당하는 것이 아니라 준다고 하는 행위에는 나의 활동성이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주는 것은 받는 것보다 더 즐겁다.

-물질적인 영역에서는 준다는 것은 부자임을 의미한다. 많이 ‘갖고’ 있는 자가 부자가 아니다. 많이 ‘주는’ 자가 부자다. 하나라도
잃어버릴까 안달을 하는 자는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아무리 많이 갖고 있더라도 가난한 사람, 가난해진 사람이다. 자기 자신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부자다. 그는 자기를 남에게 줄 수 있는 자로서 자신을 경험한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자기 자신, 자신이 갖고 있는 것 중 가장 소중한 것, 다시 말하면 생명을 준다. 이
말은 반드시 남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을 준다는 뜻이다. 그는 자신의 기쁨,
자신의 관심, 자신의 이해, 자신의 지식, 자신의 유머, 자신의 슬픔―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의 모든 표현과 현시(顯示)를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생명을 줌으로써 그는 타인을 풍요하게 만들고, 자기 자신의 생동감을 고양함으로써 타인의 생동감을 고양시킨다. 그는 받으려고
주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는 주는 것 자체가 절묘한 기쁨이다.

그러나 그는 줌으로써 다른 사람의 생명에 무엇인가 야기하지 않을 수 없고, 이와 같이 다른 사람의 생명에 야기된 것은 그에게 되돌아온다.
참으로 줄 때, 그는 그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준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주는 자로 만들고, 두 사람 다 생명을 탄생시키는
기쁨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는 행위에서는 무엇인가 탄생하고 이와 관련된 두 사람은 그들 두 사람을 위해 태어난 생명에 대해 감사한다.

-사랑은 사랑을 일으키는 힘이고 무능력은 사랑을 일으키는 능력이 없다는 뜻이다. 마르크스는 이 사상을 아름답게 표현했다.

˝인간을 인간으로서’ 생각하고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인간적 관계로 생각하라. 그러면 당신은 사랑은 사랑으로만, 신뢰는 신뢰로만 교환하게 될
것이다. 예술을 감상하려 한다면 당신은 예술적 훈련을 받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영향력을 갖고 싶다면, 당신은 실제로 다른
사람을 격려하고 발전시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당신의 인간과 자연에 대한 모든 관계는 당신의 의지의 대상에 대응하는, 당신의 ‘현실적이고
개별적인’ 생명의 분명한 표현이 되어야 한다. 만일 당신이 사랑을 일깨우지 못하는 사랑을 한다면, 곧 당신의 사랑이 사랑을 일으키지 못한다면,
만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의 ‘생명의 표현’에 의해서 당신 자신을 ‘사랑받는 자’로 만들지 못한다면 당신의 사랑은 무능한 사랑이고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사랑의 능동적 성격은, 준다고 하는 요소 외에도, 언제나 모든 사랑의 형태에 공통된 어떤 기본적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해진다. 이러한 요소들은 보호, 책임, 존경, 지식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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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 문학을 읽으십시오
얀 마텔 지음, 강주헌 옮김 / 작가정신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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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떤 부분에서, 그러니까 인간이 되어가는 부분에서 시는 기막히게 좋은 훈련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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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 문학을 읽으십시오
얀 마텔 지음, 강주헌 옮김 / 작가정신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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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악의 존재를 신의 섭리로 보는 데서 비롯되는 이런 골치 아픈 질문들에 대답하기는 당시나 지금이나 여전히 곤란합니다.
우리에게 멀리 보는 시야가 부족하다고, 보잘것없는 우리 인간들은 이해할 수 없지만 악은 하느님 계획 중 일부로 어떤 궁극적인 의미가 있다고 대답하는 게 고작일 겁니다.
그 사이에, 그러니까 하느님이 이 땅에 내려와서 자신의 계획을 충분히 설명할 때까지 악은 끝없이 우리를 괴롭힙니다.
볼테르는 종교적인 관점에서 리스본의 지진에 격노했습니다.
 그의 결론은 명확했습니다. 신의 섭리라는 것은 없었습니다.
하느님도 없었습니다. 엄청난 악과 고통 앞에서도 변함없이 낙관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그것은 피해자들의 심정을 헤아리지못하는 짓일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짓이었습니다. 그래서 볼테르는 캉디드의 이야기로 그런 판단을 입증하기 시작했습니다. 
-볼테르의 캉디드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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