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연민 (127~136쪽)


연민은 남의 불행을 먹고 사는 서글픈 감정일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상대방이 불행에서 벗어나는 순간, 우리에게 연민의 감정은 씻은 듯이 사라질 수 밖에 없다.

(.....)


불행히도 연민은 결코 사랑으로 바뀔 수 없다. 왜 그럴까? 타자의 불행을 감지했을 때 출현하는 감정이기에, 연민의 밑바닥에는 다행히 자기는 그런 불행을 겪지 않았다는 것, 나아가 불행한 타자를 도울 수 있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


약자를 도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발생하는, 강자가 되었다는 자부심, 혹은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존재감, 이것이야말로 연민의 감정 뒤에 숨겨진 이면의 정체다. 그렇지만 강자의 자부심은 오직 약자가 약자로서 계속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순간까지만 유지되는 법.(....) 사랑의 감정은 어느 누가 약자이고 어느 누가 강자인 관계가 아니라 두 사람이 대등한 관계에 있을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에디트라는 불쌍한 아가씨에게 연민의 감정을 품으면서 그는 자존심을 회복했던 남자다. 그러니까 그에게 중요한 것은 에디트라는 여자가 아니라 그 자신이었을 뿐이다.(...)



애인과 친구의 가치를 알려면, 사실 내가 고통에 빠져 있을때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오히려 내가 가장 행복할 때에 진짜 애인인지 가짜 애인인지, 혹은 진짜 친구과 가짜 친구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게 된다.(...)

어떤 이는 당신의 불행을 위로하면서 상대적으로 자신이 당신보다 행복하다는 사실에 뿌듯해 할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이혼했거나 실직했다고 치자. 결혼 생활이 평탄하지 않은 친구들 혹은 직장에 불평불만이 많은 친구들이 몰려들어 당신을 위로할 것이다. 그렇지만 돌아가는 길에 그들은 그나마 자신에게는 가정과 직장이 있다는 사실에 행복을 느낄수 있다.

이게 인간이다.






슈테판 츠바이크 <초조한 마음>



"아무것도 모른 채 꽃 향기를 맡다가 갑자기 독사에게 물린 기분이었다.(....중략)

다른 모든 것은 예상했어도 운명의 저주를 받아 자신의 몸조차 가눌 힘 없는 소녀가 남자를 사랑하고 사랑 받고 싶어한다는 사실. 단순히 연민 때문에 이곳에 오는 나를 그토록 끔찍하게 오해했다는 사실만큼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 <초조한 마음> 속



"연민이라는 것은 양날을 가졌답니다. 연민을 잘 다루지 못하겠으면 거기서 손을 떼고, 특히 마음을 떼야 합니다. 연민은 모르핀과도 같습니다. 처음에는 환자에게 도움이 되고 치료도 되지만 그 양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거나 제때 중단하지 않으면 치명적인 독이 됩니다. 처음 몇 번 맞을 때에는 마음이 진정되고 통증도 없애 주죠. 그렇지만 우리의 신체나 정신은 모두 놀라울 정도로 적응력이 뛰어나답니다. 신경이 더 많은 양의 모르핀을 찾게 되는 것처럼 감정은 더 많은 연민을 원하게 됩니다.(...) 소위님,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연민은 무관심보다 더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우리 의사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고, 판사나 법 집행관, 전당포 주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연민에 굴복한다면 이 세상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연민이라는 거, 아주 위험한 겁니다.!" - <초조한 마음>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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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12-18 16: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초조한 마음> 아주 흥미롭게 읽었는데 반갑네요 ㅋ 연민이라는 마음이 참 위험하긴 한거 같아요. 연민인지 사랑인지 경계도 애매하고 ㅋ

북프리쿠키 2022-12-18 20:12   좋아요 1 | URL
오~역쉬! 읽으셨나요...츠바이크의 유일한 장편소설인데..긴장과 몰입감이 대단하다는 평이 많았네요.
네..‘연민‘또한 ‘사랑‘만큼이나 자연스런 감정이긴 한데...‘사랑‘에는 책임을 지우지만 ‘연민‘에는 책임을 지우지 않는 데에 또 한번 깊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 또한 연민의 이면에 내가 우월하다는 생각으로 불행한 상대방에 다가선 적이 꽤 있었던 같아
이 글을 읽고 다시 한번 반성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