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 선생의 글과 강의는 사람 마음을 벅차게 만드는 감동이 있다. 눈물이 나올 만큼 코끝이 찡해지고, 가슴이 서린 적도 있다. 난 도올 선생의 겸손하지 않은 말투를 좋아한다. 정형화된 겸손과 위선에 질린 탓일까. 대개 겸손의 반대가 오만과 잘난척이라고 본다면 도올 입장에서는 굳이 겸손하지 않아도 될 일이다. 직선적이지만 수 많은 세월동안 마침내 바위를 깎는 물방울처럼 순간적인 기지에 번득이는 그러한 지혜가 아니라 수많은 불면의 밤들을 고민하고 공부하고 질문해왔던 그 결정체라는 것을 알기에 말이다. 왜 난 조금 더 일찍 도올 선생을 접하지 못했을까?
예전에 TV에서 강의할 때 그땐 청중들도 나이가 많고, 공자왈 맹자왈 하니, 그저 강의 방식이 특이한 동양철학 을 공부한 사람중에 하나이거니 했었다.
그냥 한문시간에 배우는 옛 글, 고리타분한 고문 정도로 내 젊은 시절의 기억에는 인문학 공부 정도로 남아있다. 다행스럽게도 tv프로그램에서 젊은 층도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제작되었다.
예전 <차이나는 도올>을 너무 재미있게 시청했고, <도올아인 오방간다>, 최근에 이승철과 도올이 함께하는 프로그램도 빼먹지 않고 보고 있다. 도올 선생이 젊은 세대들까지 껴안기 위해 좀더 쉽게 가자는 다짐은 고맙기까지 하다. 도올 선생의 깊은 학문과 삶의 철학이 그나마 이제서라도 내 마음속에 들어온 건 내 삶에 있어 큰 행운이고 감사할 일이다. 대한민국에 도올 선생같은 대학자가 있다는 게 자랑스럽고, 도올 선생이 책속에서 많이 언급하는 ˝럿셀경˝(버트런드러셀)처럼 오래오래 살아서 학문이라는 건 관념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고 실천함으로써 그 열매를 맺는 것임을, 인식은 실천을 통해서만 앎의 자격을 획득한다는 것임을, 그가 해우소에서 반야심경을 깨닫고 ˝나는 좆도 아니다˝라는 일곱글자를 깨친 것처럼 더 많은 대중의 가슴을 뜨겁게 해주었으면 한다.



이 책은 연변대학에서 한 학기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써온 글이다. 16주 동안 그가 강의한 강의안은 다음과 같다.

동서문화비교

1. 서양사조흐름전관
2. 중국철학사전관
3. 역사란 무엇인가?
4. 플라톤주의와 관념실재론
5. 근대성의 문제
6. 공자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7. 맹자와 칸트
8. 주희와 헤겔
9. 불교란 무엇인가?
10.하나님에 관한 이론
11. 양명학의 역사적 의의
12. 주희의 사서 운동
13. 서양현대철학의 제문제
14. 생명철학과 실존주의
15. 현대 중국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16.내가 말하는 인류의 희망

제목 하나하나가 정말 묵직하다.
또한 그 묵직한 만큼 얼마나 난해하고 지루해 질지 무섭고 버거운 주제들이다.
헌데, 개인적으로 도올의 강의에서 한번도 실망한 적이 없었다.(물론 이 강의를 들은 것은 아니지만)
평범하지도 않고, 청중이나 독자들이 한 순간도 방심할 수 없도록 몰입감이 대단하다.
또한 주제 자체가 유학사상의 본토에서, 중국인에게, 중국어로 강의를 한다는 게 경이롭지 않은가?
과연 중국의 대학생과 교수(따로 교수들을 위한 강의도 있다)들은 도올의 강의에 어떠한 반응을 나타낼지 궁금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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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학상장
지극한 도가 있더라도 그것을 배워보지 않으면 그 도의 위대함을 알길이 없다 했다. 그러므로 배워본 연후에나 자신의 부족함을 알 수 있고, 가르쳐본 연후에나 교육의 곤요로움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안 연후에나 스스로 자기를 반성할 수 있게 되고, 가르침의 곤료로움을 깨달은 연후에나 스스로 자기를 보강할 수 있게 된다. - 22쪽



내 평생, 내가 가장 사상적 영향을 깊게 받은 사람을 꼽으라면 역시 벤자민 슈왈츠를 꼽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9개 국어에 완벽하게 능통한 그의 광대무변한 사고는 나의 사유장벽을 깨뜨리고 ‘보편적 사유‘가 무엇인지를 깨우쳐 주었다. 그는 나를 사상가가 아닌 한 인간으로 만들어 주었다. 내 옆에 맏딸 승중이가 휘파람을 불며 걸어가고 있는데, 승중은 프린스턴 대학에서 천체물리학 박사를 했고, 컬럼비아대에서 희랍미술로 박사를 했다. 현재 토론토대학 미술사 교수로 재직중이며, 희랍고고학 협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 23쪽



미국이 아직도 세계를 지배하는 도덕성을 갖는 것은 군사력이나 경제력에 있는 것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미국의 군사력은 월남인민의 도덕적 투쟁앞에 무릎을 꿇었다. 미국의 경제력도 현재 ˝중환자실˝에 들어가 있는 상태이다.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는 힘은 ˝대학˝에 있다. 미국의 대학은 아직도 세계 문명을 선도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중국이 50년 안에 경제력과 군사력에 있어서 미국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해도 과연 중국의 전체 대학의 힘이 50년 안에 미국의 하버드, MIT, 시카고, 카네기 멜론, 스탠포드, 버클리를 합친 정도라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인가? 앞이 캄캄한 이야기다.! - 41쪽



중국이라는 대륙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중국인들이 사랑하는 책을 쓰는 것이다. 백화사유유천지! 그것이 내가 말년에 연변에 온 실용적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 61쪽



한국 사람들은 ˝중국제˝하면 무조건 질이 나쁜 것으로만 여긴다. 중국에서 온 ˝김치˝하면, 끔찍한 독물을 먹는 것처럼 생각한다. 한국에서 말하는 ˝중국제˝는 한국의 악덕상인들이 싸구려로 주문해서 만든 저질상품을 의미하는 것이지 ˝중국제˝전반에 대한 일반적 통념으로 규정하면 곤란하다. - 65쪽


˝나는 말야! 항상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사느냐? 그것이 제일 큰 관심이거든. 내 방에서 오늘 공부하고 생각하고 글쓰고 하는 일만으로도 나는 인류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거든....˝ - 86쪽



대체적으로 말해서, 유일신보다는 다원적 신관 즉 다신론이 훨씬 더 고등한 것이고 정직한 것이고 소박한 것이고 민주적인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유일신관은 고등종교에 속하는 것이고 다신론관은 저등종교에 속하는 것이라 말하지만 이런 메시지는 지난 100년 동안에 서구 우월주의가 우리에게 강요하여온 세뇌의 결과일 뿐이다. 모든 종교의 신관은 다신론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애니미즘(animism)으로부터 발생하는 모든 원초적 종교성은 다신을 포용한다. 다신이야말로 우주의 생명력을 감지하는 유기체론적 사유의 원형이다. 희랍의 다신, 로마의 토착적 다산이 기독교의 유일신으로 바뀌면서, 팔레스타인의 다신이 유태인의 유일신으로 바뀌면서, 조선의 만신들이 예수쟁이의 유일신으로 바뀌면서 오히려 인류는 전쟁과 독선의 불행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 128쪽



이제부터 여러분은 나의 강의를 그냥 들으십시요. 규정하지 마십시요. 다 들어보고 취사선택하면 그만입니다. 내 신념을 배우지 않아도 좋습니다.(...)
어떠한 사상이든지 미리 규정, 한정하지 말고 그냥 백운이 푸른 하늘을 스쳐가듯 마음에 수용하십시요. 그래야만 중국의 미래가 열립니다. 함부로 규정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공자가 말하는 호학의 첫걸음입니다. - 129쪽



조선왕조의 어떤 사상가를 ˝실학자˝로서 존재론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야바위꾼의 천박한 짓에 속하는 것이다. (...) 조선왕조에는 실학자가 없다! 그들을 ˝실학자˝라고 규정하는 것은 나를 ˝무신론자˝로서 규정하는 것과 똑같은 오류이다. 조선조에서 규정되어야 할 개념이 아닌 개념으로써 조선조의 사상가들을 규정하고, 한정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폭력이다.(...)
˝실학˝이 하나의 학풍을 규정하는 개념으로서 우리 학계에 등장한 것은 일제식민지시대 1930년대 이후의 사건일 뿐이며, ˝실학˝은 일본의 사상가들에 의하여 사용된 개념을 차용한 것이다. 그들이 쓰는 맥락은 ˝실학=반주자학=근대성˝의 도식을 명료한 사상패러다임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실사구시 학풍의 사상가들은 결코 반주자학자들이 아니며(....) 애국심의 발로의 일환으로서 ˝실학만세˝를 외치는 그 애타는 마음을 왜 내가 모르겠냐마는, 문제는 서구의 역사가 강요한 ˝근대˝라는 테제를 조선의 역사에서 찾을 필요가 근원적으로 부재하다는 사실을 나는 말하려 하는 것이다. 우리의 근대는 서양의 ˝진보사관˝이나 서양의 ˝자본주의˝가 가져다 주는 선물이 아니다. 우리는 그따위 근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조선왕조는 조선왕조 나름대로 유니크한 가치를 지닌다. 반주자학적인 실학을 찬양하면서 조선조의 주자학적 성과를 모두 허학으로 만들어 버린다면, 그것은 조선문명을 바라보는 정당한 자세일 수가 없다. - 135~137쪽



˝저는 선생님께서 학부강의를 하시면서 학생들을 야단치실 때 눈물이 나왔습니다. 무엇인가 형언할 수 없는 감개가 제 가슴에 서리더군요. 요즈음 선생님과 같이 학생들을 야단치고, 또 학생들에게 이상과 진리를 주입시키기 위해 피끓는 가슴을 전하는 그러한 선생은 없어요. 저는 요번 주 사표의 모범을 보았습니다. 선생님의 모든 편의는 제가 담당하겠습니다.˝ -1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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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0-03-28 18: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도올 팬이시군요!
저도 요즘 그 프로 챙겨 보려고 하는데 꼭 보다 조는 바람에...ㅠ
나중에 TV 다시보기로 봐야겠슴다.ㅋ

북프리쿠키 2020-03-28 18:07   좋아요 1 | URL
유아인보다는 이승철하고 할 때가 더 자연스럽고 보기 편하던데, 저번에 정우성하고 나왔던데 와이프가 눈을 못 떼더라구요 ㅋ
네 도올쌤 팬입니다 ㅎㅎ

stella.K 2020-03-28 19:51   좋아요 0 | URL
ㅎㅎㅎ 사실은 저도 그랬습니다.
도올 보다는 정우성. 제사 보다는 젯밥이었을까요?
정우성이 담담하게 자기 사춘기 시절을 얘기하는데
마음이 좀 찡하더라구요. 특히 특유의 어눌한 말투로 어머니 얘기하는데
이런 데가 있다니했습니다. 그걸 잠하고 바꿔 버렸으니... ㅉ
도올은...글쎄요. 그냥 사상이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로마서와 요한복음 강해 뭐라고 써 놨는지 궁금하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