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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 당신은 끝에 서 보았는가?
윤정 지음 / 북보자기 / 2020년 3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삶의 언어는 의미에 매달리지 않는다.
이 말이 강인하게 다가와 이 책을 보게 되었다.
작가가 선정한 27개의 기표 속에서 마지막 기표인 '죽음'을 통해, 생의 끝자락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으로 바라보면서 두려움 없이 다가서는 힘을 이 책은 주고자 한다.
작가는 자기 독백적인 글을 통해 자신이 가진 생각을 말로 표현하려고 한다.
'빠짐'이라는 기표 안에서 '독백'이라는 글로 자신의 감정을 언어가 가진 모든 표현을 통해 유려하게 표현한다.
내 몸짓, 내 말, 내 의식적인 행동이 어떤 유기체의 말초적인 본능으로 움직이는 반사작용으로 그치고 있는 듯하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흘러간다. 그 모든 것을 계산해보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내 생애에서 헛되이 흘러갔을까? 분병히 어딘가에 빠져 있다.
어쩌면 나는 더 진실한 삶의 부재를 숨기고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감각으로 만들어진 지각과 감정을 자아라는 이름으로 데리고 와서, 결국은 미로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정체 상태가 되는 것을 빠짐이라고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사실이 무엇이든 나는 그것이 일어나더라도 놓아두고 있다.
가끔 뵌 적도 없는 신에게 떠넘기고, 나는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문제를 삭제하고 만다. 분명히 빠진 것이다.
자아는 있지만 스스로 주체를 가진 의식의 자아는 없는 것 같다.
난해한 내용이기도 하지만 저자는 '무엇'에 빠지고 싶어 하는 자신을 본다.
절망과 충족감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충동을 보면서 만족으로 행복하기도 하고, 절망하면서 수렁에 빠지기도 한다. 어떤 날은 분리되어 차분하지만 어떤 날은 붕붕거리면서 떠다닌다.
이런 감정은 우리의 모습이지 않나 생각한다.
저자는 또 말하기를 '수렁에 빠지고 싶은 충동은 상처에 의해 올 수도 있지만, 너무 만족하여 유혹 속에 빠지기도 한다'고 말한다. 즉 빠짐은 모든 행위에 대해 내 책무가 아니라, '나'라는 자신을 내맡기고 양도하는 것임을 말해준다. 이처럼 수렁에 빠진다는 것은 어느 곳에서도 자신이 스스로 설 곳이 없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죽음에서 조차도 자신이 사는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렇게 저자는 끝없이 사라지는 존재에 대해 아름다운 고민을 하는 유일한 종種?이 '사람이다'고 말한다.
또한 사라지는 것에 대해 생명을 물을 수 있는 존재인 '사람'은 작은 독백과 성찰 사이 끝에 서서 언어의 의미를 삶으로 잘게 쪼개어서, 사랑의 가슴을 품고 새날을 맞이하는 아침을 마주하고자 하였다.
"자살"이라는 쳅터에서 저자는 삶의 진실함을 마주대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삶에서 무엇인가를 바라며 살고 싶지 않다. 그냥 좋아하며 잘 살면 된다. 꽃은 꽃대로 피고, 눈은 눈대로 내린다. 그냥 그대로 내던져놓고 살아가는 것, 이미 나의 생명이 선택한 자살의 삶이다."
이 글을 통해 저자의 가치관, 세계관을 본다.
"끝(종국, 죽음)"을 찾아서 연구하고 살펴보니 삶은 '사라짐'과 '비움', '소멸', '공허함', '죽음'이라는 것으로 결국 종식되는 것을 보고 저자는 아마도 많이 놀랐고, 불안했던 것이다. 또는 '끝'이 인생의 의미를 물을 때 뭐라고 답해야 될 지를 나름 고민과 철학적 사색으로 언어의 유희를 거쳐서 자신의 얘기를 써 내려가고 있다.
처음 이 책을 접하고는 난해할 수 있어 이어지는 글 잇기(이어짐이)가 쉽게 다가오지 않을 수 있으나 어쩌겠나?
결국 "끝"이 다가온 순간 "무"로 돌아갈 세상에서 잠시 세상이 이해되지 않아 복잡한 얘기를 마음대로 써보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그는 "죽음"이라는 27번째 쳅터에서 말한다.
'죽음의 실체는 어떤 모습일까?'
"나는 독백 속에서 죽음의 비밀을 말하고 싶지만, 어차피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이다. 삶이 떠난다는 것은 육체적 감각의 소멸이다. 그러면서 인간은 영혼을 집착하기도 한다. 도저히 들여다 보고 확인할 수 없지만 무의 심연을 공허함을 인정해 버리기 쉽다.... 하지만 우리는 죽음에 대해 여러가지로 고민한다.
죽음의 또 다른 이름은 '소멸' 아니면 동사로 '사라짐'이다. 그 사라짐이 왜 공허했을까?
아마도 형이상학의 극단적 예단의 의미로 본다. 공허? 더 채워야 하는 빈 마음이 아닐까?
빈 마음의 끝점에는 아르키메데스의 점이 머물고 있다.
그 점은 공간을 채우는 생며의 주체로 나아감을 철학으로 암시하고자 했다."
(아르키메데스 점이란 관찰자가 탐구 주제를 총체적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유리한 가설적 지점을 가리킨다. 연구 대상을 그밖의 모든 것들과 관계에서 볼 수 있도록 하며, 그것들을 독립적인 것들로 유지하도록 하는, 그 연구 대상에서 "자신(관찰자) 제거하기"라는 이상(Ideal)은 바로 아르키메데스 점의 관점으로 묘사된다. / 위키백과)
그 점이 있는 자리에 창조주가 계셨다.
그 점을 가지고 문명을 세웠고, 그 점의 의미가 중세철학을 진두지휘하면서, 선은 악을 제거하는 점의 존재로 등장하게 된다. 그러므로 공허는 절대적 선을 가지고 해결하는 본질처럼 비추고 있었다. 지금도 여전하다.
그 점은 시간을 제거하고, 이원성의 갑옷을 입고, 공허를 끝내려는 전체주의적 시도를 보여주면서 세상을 애매하게 제거하려고 한다.
죽음은 그렇게 심판받고 있었다.
철학과 죽음의 부재는 풀 수 없는 현실 상황이다. 죽음과 사라짐은 시작과 끝이 아니다. 순간순간 이어지는 생명의 현상이다. 그 생명은 사라지는 죽음에 대해 생명을 묻는다...지금 내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그 믿음만큼 신뢰하고 싶다. 끝은 끝이 아니라 끝없는 것이다. 그 사이에 나는 끝없는 끝을 붙잡고 편집된 의미의 먼지를 털어내고 있다. 입춘이다. 봄은 뿌려놓은 죽음을 끝내 살아내려는 날이다. 그 죽음의 춤으로 봄은 찬란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맨 끝에 있는 끝이라는 '시?'를 적어보며 저자의 글 안에서 '끝'을 의미해 본다.
끝이 있었다면, 널 만나지 못했으거야.
우리는 없을 거야. 끝없는 길이 끝없었기에, 너랑 손잡고 걸어갈 수 있었던 거야.
끝없기에 다시 살아갈 수 있었던 것 같아.
힘들어도, 병들어도, 죽어서도, 끝이 없어서 희망을 갖는 거지.
영원하다는 것은 끝없는 고백인 거야.
하늘도, 별도, 달도, 해도, 바다도, 꽃도, 어머니도, 아버지도, 너도, 나도 끝없는 고백의 모습인 거지.
책을 보게 되면 '들뢰즈'라는 인물이 나온다. 들뢰즈가 죽음을 말한 것이 있어 함께 실어 본다.
"권력이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를 억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불안하게 하는 것입니다. 혹은 비릴리오가 말하듯이, 권력이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의 내밀한 작은 두려움들을 관리하고 조직하는 것이죠. …(중략)… 아무리 춤추자고 말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우리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으니까요. 또 아무리 “죽음이란 얼마나 불행한가”라고 말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무엇인가를 잃으려면 먼저 살아야만 할 테니까요."
- 질 들뢰즈·클레르 파르네, 『디알로그』, 허희정·전승화 옮김, 동문선, 2005, p.117~118.
이 글(사진의 내용, 저자의 내용)이 난해한가? 결국 글은 읽는 이의 해석이다.
글 저자가 무엇을 말하든지 그것을 읽고 소화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당신은 끝에 서 보았는가?
구약성경 전도서 7:1-4절 말씀을 추가해 본다.
전도서는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다는 솔로몬이 쓴 책이다.
이 메세지가 결국 저자가 의도한 책의 결론이지 않나 생각된다.
(맨 아래는 저자의 또 다른 책이다)
- 명예가 값비싼 향유보다 더 낫고, 죽는 날이 태어나는 날보다 더 중요하다.
-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더 낫다. 살아 있는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 슬픔이 웃음보다 나은 것은, 얼굴을 어둡게 하는 근심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다.
-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은 초상집에 가 있고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은 잔칫집에 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