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나의 자서전 - 김혜진 소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24
김혜진 지음 / 현대문학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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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7페이지에 이르면 이렇게 시작하는 문구가 있다.



나는 남일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우체국 옆 2층 주택.

남일동이라는 특별한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면서 '홍'이라는 아이를 통해 이 사회의 어도운 모습을 비춰주고 있다. 즉 재개발 이후 빈부 격차로 양분된 지역사회 갈등으로 황폐한 곳, 대물림되는 빈부에 대한 불안과 집에 대한 집착이 만들어낸 우리 사회의 위태로운 욕망을 이 책은 그려내 주고 있다.

픽션 같지 않는 글이 책의 글귀 속에서 보여진다고 할까?
마치 헤르만 헤세가 자신의 얘기를 데미안에 투영해서 썼듯이 저자는 홍이씨가 되어 이 책을 써 내려가며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편견과 배제가 만들어 낸 우리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즉 주류에서 소외된 이들의 절박함과 욕망을 담담하게 그려내면서 자신이 어릴적 받아 온 그 서러움과 차별을 문학을 통해 표출하여 사회의 어두운 면을 바로잡아 보려는것같다.

남일동이라는 마을을 중심으로 해서 '집이 가진 삶의 애착'과 사람들의 차별이 서려있는 이곳을 벗어나는 존재가 되는 것이 어쩌면 꿈인 사람들의 마음을 보여주면서 저자는 인간의 삶이 가진 복잡미묘한 감정을 쏟아내 주고 있다. 

애잔함과 뭔가모를 스산함, 불합리한 세상을 향하여 불이라도 질러서 모두 날려버리고픈 동질감을 저자는 독자에게 안겨다 주며 한국 사람으로 집이 가진 의미와 어떤 지역이라는 선긋기를 통해 차별과 혐오라는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의 불합리한 심리를 마치 카뮈처럼 부조리버린 세상을 고발하며 사람들에게 뭔가 호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편의 영화를 본 거와 같은 느낌을 주는 책이 바로 오늘 내가 본 "불과 나의 자서전"이라는 책이다.

자기 응시를 통해 혐오를 비추는 불빛,
패배가 난들어내는 뜨거운 눈빛.

이 두 가지를 이 책에서 선명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다음 책이 기대가 되고, 또한 그가 출판한 책도 궁금해진다.
또한 이 책을 읽은 느낌을 남겨본다.

어쩌면 저자는 추억 속의 집이 그대로 남아 있어 삶의 그리움을 붙잡아 두려고 하는 지도 모른다. 
그때의 아련한 추억과 내 어릴적 추억은 삶의 행복이자 마음의 낙원이기에 재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내 추억을 
뭉게 버릴 수 있으니 차라리 추억 없는 현대 문명의 화려함과 편리 보다는 나만이 간직한 추억 속의 보물을 홀로 간직하고자 저자는 대여섯살의 주소지를 외면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실제 고향을 가보면 오히려 개발이 되어 서글프다. 
내 삶의 자락들이 한꺼플 두꺼플 벗겨져 나를 이방인처럼 맞이하게 만들고, 
나도 이방인처럼 내 고향을 바라보게 된다. 

오랜 과거의 집은 나만의 낙원이다. 
절대로 건들 수 없는 영역이기에 나는 저자처럼 나만의 추억을 간직하고자 나만의 방식으로 과거를 그려보고 글로서 그리움을 적어보고자 한다. 

그때가 언제인지 모르지만 나의 자서전도 책으로 출간되기 바라면서...

아래는 마음에 남는 글을 실어본다. 
 

한 마을에도 일평생이라는 게 있다면 남일동의 시간은 어디쯤일까?

어떤 삶은 조금씩 나아지고, 또 다른 삶은 내리막길을 걷고, 느닷없이 중단되는 삶이 있고, 어느 날은

흐리고 어두워서 앞이 보이지 않다가 또 어느 순간엔 무서울 정도로 환한 날이 계속되고. 그런 종잡을 수 없는 많은 순간들을 응축해 놓은 것이 삶이라면 남일동은 어디쯤 지나고 있는 것일까 가늠해본다.

p50

주해는 그마저도 어쩔 수 없는 일로 받아들이는 모양이었습니다....사람들 마음을 정확히 알 수 있나요. 
안다고 해도 어쩔 수 없고요. 전 동네분들이랑 잘 지내고 싶어요.
주해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나도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오해하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어쨎든 좋은 의도일 거라고, 고마운 마을일 거라고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p63

홍이 씨는 주해라는 사람을 통해서 삶의 담대함과 무미한 신경전, 삶의 아웅다웅하는 모습 보다는 태연한 받아들임을 배워나가는 것이 아닐까?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나는 그날 내가 보았던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비로서 희망이라 할 만한 것을 가지게 된 한 사람의 얼굴이었습니다. 삶이 지금보다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 틀림없이 그렇게 될 거라는 확신. p72 

내게 주해는 이웃이었고 친구였으며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누군가였습니다. 그게 누구든 나는 다시금 실패하는 관계를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p75-76

누군가가 누군가에게서 집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누군가의 슬픔과 불행을 목격하는 대가로 싼 집을 구입할 때 각오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때는 알리가 없었습니다. p81

홍아, 사람이 사는 데 가장 필요한 게 뭔지 아니? 집이다. 사람은 자기 집이 있어야 떳떳하게 살 수 있어. 두고 봐라. 앞으로 점점 더 그렇게 될 테니까. p85-86

그리고 나는 깨달았습니다.
어머니가 결혼식장에서 먹었던 싸구려 뷔페 음식을 토해내던 그날, 이 집이 어머니를 슬프게 만든다고 생각했던 그 밤에, 집을 가진다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즐겁고 기쁘기만 한 일은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p109

홍이 씨, 남일동에 살아본 적 없죠? 집이 없어서 불안해본 적 있어요? p 156

주해가 몰고 온 변화는 다만 눈에 보이는 그런 것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이곳이 달라질 거라는 믿음, 바꿀 수 있다는 자신. 
주해가 보여준 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내내 설마설마했고, 망설이다가 오래전에 포기해버린 그런 마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주해가 일으켜 세운 건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잔뜩 웅크리고 있던 사람들의 마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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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가 나에게 말을 걸어올 때 - 죽음, 삶에 답하다
김봉현 지음 / 지식의숲(넥서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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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통해 종교 밖에서 종교를 오해하셔던 분들이 오해를 풀고,

 

종교에 관심을 두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종교는 좋은 것이다. 어떤 종교도 악을 추구하지 않는다

 

종교는 유익한 것이다. 종교는 수천 년 동안 진지한 태도로 인간이 어떤 존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해왔다.

 

이 책은 종교에 관한 한편의 대서사시이다.

 

 

의 의미를 찾아 헤맨다면 이 책을 통해서 분명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종교에 대한 무지와 선입견으로 종교가 주는 선한 혜택을 받아 누리지 못하는 자에게 이 책은 저자 자신이 종교에 대한 잘못된 사고를 말끔하게 씻겨주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혀 준다고 말한다.

 

그래서 종교가 이제는 삶이 되고 가치가 되어 자신의 삶을 더 이롭게 만드는 계기가 되리라 생각하고 있다.

 

한국인 작가로서 이정도의 깊이와 종교적 세계관을 짚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어줍잖은 학문적 지식의 나열로 종교와 신을 논한 책을 보며 실망했었는데 이 책은 이런 모든 종교적 갈증과 종교에 대한 잘못된 가치관을 완전히 씻겨주며 길을 보여준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인 잣대와 논리적 귀결과 깊은 사고와 내적 진리로 즉 직관적인 진리로 종교라는 대서사시를 써내려간다.

 

상식이 바라본 종교

 

 

 

종교를 언급함에 있어 '기우제'를 언급하는 것은 올바르게 보인다. 그 이유는 다른 것과 다르게 가뭄은 인간이 넘을 수 없는 경계선이 있기 때문이다. 즉 홍수나 전쟁은 인간이 가진 힘으로 대처 가능한 영역이지만 가뭄은 딱히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즉 피할 곳도 없고, 싸울 대상도 없다.

 

 

 

사람들은 비가 오지 않음으로 누군가 여기에 대해 외친 '신의 진노 때문'이라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래서 가뭄의 이유가 신의 진노라면 그 마음을 풀어주면 된다는 생각이 모여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우제를 드린다. 확신은 없다. 하지만 이 말이 맞기를 바라며 드린다. 이렇게 기우제는 시작되었다.

 

 

 

그런데 기우제를 드린다고 바로 비가 오지 않는다. 그런데 왜 기우제를 드렸나? 그건 기우제를 드리면 비가 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기우제는 '비가 올 때까지' 드려졌다. 사람들의 절박한 기다림 속에 기도한 결과 하늘은 응답한 것이다. 이 경험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선사하였다.

 

 

 

'비를 내리는 신이 있다. 신이 진노하면 가뭄이 찾아온다. 하지만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면 신이 마음을 돌이켜서 비를 내린다.'

 

 

 

이렇게 종교는 시작되었다.

 

 

 

그런데 우리의 삶에도 같은 가뭄의 시간이 찾아온다. 시간이 지나 금방 해결될거 같으면 좋은데 가뭄과 같이 단조로운 삶이 지속된다. 이때 누군가 자신이 대안을 가지고 있다 말하며 우리의 미래가 신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 가운데 귀가 열린자들은 동참하며 신에게 기도한다. 그런데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문제가 해결된 사람도 있다. 이때 제관(제사를 맡은 관원)들은 좋은 결과를 만난 사람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이런 사람들은 기우제를 통해 비를 만난 사람과 같은 종교적 체험이 생긴 사람들이다. 그들은 기도가 응답된 감격을 가지고 있다. 제관들은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며 설득한다. 반면 실패한 자들이 있을 것인데 이런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무대 아래 어두운 곳으로 모인다. 대부분의 사람은 실패한 사람을 보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기도가 응답이 없는 이유는 제대로 기도하지 않았거나 실패한 원인을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심지어 실패한 본인도 자신에게 문제가 있기에 응답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오늘날에도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라고 저자는 말한다.

 

기우제가 종교의 시작이고, 미래에 대한 불안이 지금도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 앞의 미래에 대해 우리는 알지 못한다. 종교는 알지 못하는 부분,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 그건 신의 영역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그 신에게 기도하는 것을 통해 그 부분에 개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무지에 대해 신으로 대답하는 것' 이것이 오늘날 종교에 대한 정의이다.

 

 

 

코로나로 인해 종교는 사실 사회적으로 욕을 먹고 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는 인간 삶의 자리에 언제나 함께하고 있다.

 

 

 

이것은 종교가 비단 나쁜 용도로 사용되기 보다는 삶이 버겁고 힘든 사람들에게 언제나 따뜻한 위로가 되고 안식처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를 멀리서 볼 때는 비판의 대상이지만 종교 안에 들어오면 사실상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 없다.

 

 

 

사실 심리학 관점에서 종교를 바라보는 사람은 따뜻한 시각으로 종교를 정의한다. 즉 거짓 희망이라도 그 희망이 삶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게 한다는 것이다. 환자에게서도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환자보다 신이 자신을 치료해 줄 거라고 믿는 환자의 완치율이 더 높기에 상담자들은 종교를 권면하고 있다.

 

 

 

사회적 관점에서 종교를 바라보는 사람은 차가운 시선으로 종교를 대한다. 신을 기다리기 보다는 저수지를 만들어 가뭄을 이겨내는 방식을 택한다. 사람들이 어떤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면 해결 될 수 있는 문제를 안일하게 대처함으로 인류는 사실 정체되고 발전하지 않았었다. 그건 자신이 해결해 나가야 하는 문제를 모두 신에게 미뤘기 때문이다.

 

 

 

이렇게 종교는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사회를 정체되게 만들므로 종교는 나약한 사람들에게 기생하며 진보를 방해하는 인류의 적으로 생각한다. 더군다나 종교가 지금까지 사회 속에서 전쟁을 벌이고, 테러를 행하고, 탄압하며 서로 종교끼리 싸움으로 종교는 이제 넌더리나는 제품이 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종교가 꼭 그런것만이 아님을 차근차근 풀어나가면서 종교가 가진 기본 진리를 전한다.

 

특히 종교는 거짓 희망을 파는 곳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곳이며, 깨달음을 찾고, 사랑을 추구하며 바르게 살아가는 삶을 권면하는 곳이라고 말하며 '오해와 비판을 여러가지 설명으로 해소'하고 있다.

 

 

 

그 가운데 '영역오류'의 말이 인상적이다. 두 가지 예를 드는데 한 가지만 언급하면 의료에 대해 경제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의 의료 현실은 왜곡되었다. 그 이유는 고급 인력과 첨단 장비를 통해 대형병원이 유지되려면 더 높은 가격으로 환자를 맞아야 한다. 즉 평범한 사람들이 대형 로펌의 변호사를 만날 수 없는 것처럼 대형 병원의 교수는 부유한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것이다. 경제 논리에서 보면 말이다. 그러나 의료 논리에서는 이 논리는 틀렸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의업에 종사하는 일원이 될 때 자신의 생애를 인류 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기 때문이다. 의료는 상품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돈이 없다는 이유로 생명의 가치가 훼손된다면 이 사회는 비참한 사회이다. 따라서 의료는 의료의 논리로 이해되어야지 경제 논리로 보면 심각한 문제를 낳는다.

 

 

 

이와같이 종교는 종교의 관점으로 다루어야 한다. 자신의 생각과 논리로 종교를 바라보면 그 익숙한 논리가 종교를 오해하는 동시에 심리적, 무의식적, 폭력적으로 종교를 대하게 된다.

 

 

 

"모든 종교는 들어가보면 선하다. 어떤 종교도 인생을 낭비하고, 타인을 공격하며, 자신을 망치도록 가르치지 않는다."

 

 

 

 

 

© msandersmusic, 출처 Pixabay

 

그러면 왜 지금의 종교는 우리가 볼 때에 다 나쁘게 보이는가?

 

 

 

그건 저자가 말하듯 우유가 상온에 있으면 부패하듯 종교가 상온에 있었기 때문에 부패했다는 것이다.

 

즉 원래 종교는 타 종교와 분쟁하거나 공격하지 않는다. 서로 의견과 관점이 다를 뿐이지 모든 종교는 선을 가르친다. 그러나 종교가 부패하면 서로를 악으로 공격한다. 또한 종교가 커지면 종교는 권력을 얻게 되는데 건강한 종교는 그 권력을 사회적 약자와 폭력적 세상을 대항하여 타락한 문화에 반대의 목소리를 낸다. 그러나 종교가 부패하면 그 권력을 통해 종교의 이익을 구하게 된다. 또한 종교가 세속화되고 교조화되는 것도 결국 종교가 상온에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서 제 기능을 잘하면 종교는 오히려 사회에 약이되고 사람들 마음을 충분히 위로하는 동시에 진리의 길잡이가 되어 더 좋은 사람으로 가치있는 존재로 세상을 살게한다. 이것이 사실 종교가 하고 있는 것이라고 저자는 강력히 말한다. 여기서 어떤 사람의 글귀가 떠올라 적어 본다.

 

 

 

신앙은 인생의 힘이다. -레프 톨스토이

 

신의 존재를 믿는다는것, 인간의 행복은 이 한마디로 다한다. -레프 톨스토이

 

종교가 없는 도덕률은 방향을 찾지 못하는 항해와 같다. 구름에 별이 보이지 않는 바다에서 선박의 위치를 알려고 하는 노력과 같다. <H.W. 롱펠로우/ 카바나>

 

종교는 인격도야의 근본이다. 페스탈로치

 

종교의 영원한 가치는 그것이 소망에 대한 도전을 이끌어 주고, 사람의 마음에 희망을 안겨 주는데 있다 - E.M.홉킨스

 

 

 

이 책은 이 말이 사실임을 증명해가는 변증서와 같다. 줄칠 곳도 많고, 생각해 볼 것도 많고, 이치적으로 논리적으로 말하기에 거부할 수도 없는 수사법이 이곳에 펼쳐져 있다.

 

 

 

한 친구의 죽음을 통해서 다섯명의 친구가 생에 처음으로 '죽음'을 자신과 동일시하게 되면서 각자 다른 방식으로 그 죽음의 의미를 새기는 중에 "종교""죽음과 삶에 실제로 답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 저자는 종교가 답인 세상을 말해주려고 오래 되었지만 새로운 네 개의 시선으로 종교를 바라보게 한다.

 

새로운 시선이란 "세속주의, 과학주의, 명상종교, 계시종교"에 관한 것이다.

 

죽음에 대해 인류는 이 네가지의 답을 가지고 사실 설명하고 있고, 이해하고 있고, 살아가고 있다.

 

 

 

사실 우리의 삶은 네 개의 시선이 전부 포함된 사회 속에서 살아가며 그것을 은연중에 자신이 그런 사고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평소에는 세속주의자이다. 그래서 죽음을 무시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종교에 대해서 논쟁할 때는 과학주의자가 된다.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장례식장에서는 계시종교를 믿는다. 돌아가신 고인이 지금 좋은 곳에 가셔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고 말이다. 사회적인 이야기를 할 때는 명상종교를 믿는다.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며 그렇지 않은 사람을 향해 비판한다. 이처럼 우리는 모순된 답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러한 삶은 어떠한 답도 그 안에 깊이 스며들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유행처럼 적용된 종교는 그 사람에게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한다. 즉 그저 사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자신으로서 네 가지 중 하나라도 제대로 가질 때 삶은 새롭게 나를 형성하여 삶이 주고자 하는 '선물들'을 다 받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네 가지의 시선은 네 가지의 종교성이다. 즉 내가 믿는 가치관이 곧 나의 종교성이기에 내가 어떤 가치관에 속하고 있는지 제대로 살피면서 자신의 삶을 제대로 가꾸어 나가기를 바라는 것이 저자가 요구하는 종교성이다.

 

 

 

이렇게 사는 것이 전부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종교는 우리에게 과연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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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마을의 공유경제 소동 - 2020 문학나눔 선정 도서 파랑새 인문동화 3
안선모 지음, 로사(김소은) 그림, 김황식 추천 / 파랑새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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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조용한 마을 에코 캐슬에 오지랖 박사님이 이사를 오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제발 옆집에 제대로 된 사람이 들어왔으면 좋겠는데...."


 주인공인 '윤기'의 어머니가 비어있는 옆집을 보며 심각하게 말했습니다.


"엄마 어떤 사람이 제대로 된 사람이야?"


"학벌 좋고, 좋은 직장 다니는 부모에 아이들이 공부 잘 하는 집이면 최고지 뭐."


공유경제에 대한 아이들의 눈 높이에서 이 얘기는 시작됩니다.
'박글쎄요'라는 주인공의 원래 이름은 박윤기입니다.
그런데 왜 이름이 이상할까요? 그건 무슨 질문을 하든 '글쎄요'라는 말로 대답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이 살고 있는 마을은 '에코 캐슬'이라는 곳입니다.
캐슬이라는 단어와 함께 이 책을 읽다보면 한동안 인기 프로였던 "스카이 캐슬"이라는 드라마가 연상됩니다. 드라마에도 한 가정이 이사를 오면서 얘기가 시작되듯이 이 책에서도 '오지랖 박사'라는 분이 이사를 오면서 조용한 마을이 활기찬 마을로, 이웃이 함께 공유하며 나눔을 하는 마을로 바뀌게 됩니다.

아저씨는 특이했으며 그래서 처음에는 마을 사람들이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아저씨는 자동차도 없으며, 소파도 없고, 텔레비전도 없고, 세탁기도 없고, 에어컨도 없고, 더군다나 갑자기 자신의 집을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도록 내어주는 '에어비앤비'라는 것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불편한 이웃이 된 오지랖 박사님은 조금씩 조금씩 사람들에게 다가가 '공유경제'를 언급하며 마을 사람들을 동참시켜 가면서 마을 사람들을 하나되게 만들고 서로가 가진 물건이나, 자동차, 채소와 같은 것을 나누기 시작하면서 마을은 전에 없던 화기애애함이 깃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불편한 이웃은 이제 행복한 이웃이 되었고 마을은 '무엇이든 나눌 수 있는 구조(모습)가 되어' 함께하는 기쁨을 누리게 되는 행복한 이야기랍니다.


집, 자동차, 공구, 명품...‘물류’까지!


‘공유경제’는 2008년 미국에서 처음 대두된 개념이라고 합니다. 금융 위기로 세계 경제가 휘청일 때 하버드대의 로렌스 레식 교수가 불황을 극복할 대안으로 공유경제를 제시하게 됩니다. 그가 정의하는 공유경제는 개인이나 기업이 각자의 자산이나 서비스를 공유하는 활동 전체를 의미하는데 레식 교수는 공유를 통해 자산의 가용성을 높이고, 소유비용 부담을 덜면 경제 성장을 촉진하고 지속가능성을 구현할 수 있다고 언급했죠.


그래서 2008년 공유숙박 플랫폼 에어비앤비를 시작으로 다양한 공유경제 서비스가 등장했습니다. 

아참 에어비앤비를 설명하고 지나가야 겠지요. Airbnb는 세계 최대의 숙박 공유 서비스에요.  

즉 손님에게 에어베드(air bed)와 아침(breakfast)을 내줬다는 점에 착안해서 만들어진 게 지금의 에어비앤비라고 합니다. 에에비앤비를 기점으로 교통, 거주, 유통 분야에 진출한 공유경제 기업들은 사람들의 일상에 빠르게 스며들었으며 시장조사기관 Pew Research Center에 따르면, 미국 성인의 72%가 공유경제 서비스를 사용해본 적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실제 공유경제 서비스에 자신이 소유한 공간이나 차량 등을 제공해 본 적 있다고 답한 사용자는 22%에 달하였습니다. 공유경제가 전 세계를 관통하는 흐름이 된 지금도 미국의 공유경제는 세계시장 규모의 60%를 차지하면서 가장 진취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산업통상자원부에서 차용)


미국의 경제학자 제레미 리프킨은 <소유의 종말>이라는 책에서 "개인의 소유는 줄어들고 공유 영역이 넓어질거라고 예측"했습니다. 그 예측대로 세상은 빠르게 공유경계 플렛폼을 구축해 가고 있으며 이제는 소유하고 늘어 놓는 삶보다는 함께 공유하며 "더불어 살면서 효용성과 환경문제까지도 고려한 삶의 방식"을 택하는 시대가 왔습니다. 


이미 자전거와 전동킥보드는 도시 지역에서 공유를 통해 쓰고 있으며 얼마 전까지 차량 공유 서비스인 "타다"로 인해 한국 사회는 시끌벅적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논란은 결국 현대인들에게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가져 올 수 있는 공유개념임을 우리는 받아들여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공유경제가 모든 이들에게 장점과 효율로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건 이 책에 나오는'오지랖 박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데 '어떤 사람에겐 좋은 제도가 또 다른 사람에게는 좋지 않는 제도가 되어 큰 피해를 당하는 일이 생긴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우버 택시를 이용하는 사람이 늘수록 기존의 택시 기사들은 일자리를 빼앗기게 되면서 생계가 곤란해 지게 됩니다.


특히 공유경제 시스템에 큰 문제는 이 시스템을 이용하는 소비자가 피해를 보는 경우 어디서 보상을 받을지 애매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즉 사용자를 위한 앱은 제공해 주지만 개인 간의 서비스 교환은 책임을 지지 않으니 사고가 날 때 법적인 보호장치가 미비하다는 거지요.


물론 이 모든 것은 보완하고 수정해 나가야 하지만 주인공인 '윤기'가 말하듯 "그러고 보면 세상 모든 만물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언제나 좋을 수도 없고 언제나 나쁠 수도 없다."는 말이 맞아보입니다.


주인공 박윤기를 통해서 본 '조용한 마을의 공유경제 소동'은 아이들의 눈 높이에서 얘기를 재미있게 이어나갑니다. 동화라면 동심을 불러 일으키며 재미있고 신비한 이야기만 있는 줄 알았는데 지금 현실의 문제도 다루고 앞으로의 미래도 생각하게끔 하는 동화가 나와서 세계와 주변을 보는 안목을 길러 주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나 생각됩니다. 


공유경제라는 어려운 얘기가 동화라는 형태를 통해 새로운 옷을 입고 독자인 어린이들에게 매우 유용하게 읽히는 서적이 되리라 봅니다. 아이들 독서 토론으로도 좋고, 지정도서로도 정하여도 충분한 교육적 가치가 있는 도서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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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자가 들려주는 일상 속 행복
마르크 오제 지음, 서희정 옮김 / 황소걸음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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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자가 들려주는 일상 속 행복은 거창하지도 대단하지도 않는 삶의 소박함 속에서 나타나 저자의 마음에 행복함을 가져다 주고 있다. 첫번째 쳅터부터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아오는 행복들'에 대해 언급한다.


이 행복은 일상을 버티도록 도와주는 행복이며, 또 거리에서 친구를 우연히 만나듯, 모르지만 왠지 친근한 인상이 드는 사람을 마주치듯 만나는 행복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이 행복은 '소박한 행복들'임을 말해주면서 이것은 '뻬앗겨봐야'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지 실감할 수 있는 것들임을 말해준다. 이런 행복들을 빼앗기는 원인은 여러 가지인데 질병이나 입원, 전쟁처럼 심각한 것일 수도, 가벼운 것일 수도, 개인적인 것일 수도, 사회적인 것일 수도 있는데 결국 이런 '방해물들'은 그 방해물 때문에 금지되거나 불가능해진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그것들이 얼마나 필요한지 절감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아주 쉬운 예로 입원함으로 침대에서 꼼짝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일상에서 누렸던 그 행복이 엄청난 행복임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일상을 채우는 공간에서 커피 한 잔 마실 때마다 유독 큰 만족감이 큰 것도 아니고 최신 뉴스를 보는 일은 그나마 더 즐거울 데 없지만, 이런 작은 자유를 한동안 박탈당해보면 일상의 진가가 무엇인지 깨닫고, 일상이 얼마나 중요한지 깊이 느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우리의 바람은 좀 더 소박해지고 꼭 필요한 것만 남게 되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소박한 행복은 사실 인류학자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닌 모든 사람이 살면서 느끼는 것이다.

삶은 어쩌면 소소한 행복이 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고 소중한 것인데 이것은 무언가를 '빼앗길 때', '일상의 삶이 방해받는 순간'이 올 때 우리는 그때서야 소박한 행복이 가장 큰 행복임을 깨닫게 되지 않나 생각된다.


저자는 사실 인류학자이다 보니 조금 문장을  인류학적인 표현으로 어렵게 글을 썼지만 인간이 만나는 행복은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같아 어쩌면 인간적이다는 생각이 든다. 즉 배움이 많고 프랑스 인류학자라도 삶의 행복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에게도 충분하게 누릴 수 없는 '각자의 가치적 행복'이지 않나 생각된다.  


여기서 나는 생각나는 글이 있어 서평을 쓰다가도 적고 싶어 적어본다. 서평은 책의 내용과 특징을 소개하거나 가치를 평가하는 글이기도 하지만 책은 읽는 이에게 연결 고리를 주는 메시지를 주기에 나만의 방식으로 나누면 좋겠다 생각하여 적어 본다. 


나는 간소하면서 아무 허세도 없는

생활이야 말로 최상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인슈타인


사람은 명예와 지위가 주는 즐거움은 잘 알지만,

이름 없고 평범하게 지내는 즐거움은 알지 못한다. -채근담


답이 없다는 것도 하나의 답이다.

소박하게 먹고 조심스럽게 말하고

아무에게도 상처주지 마라. -호피(Hopi)족 명언


소박한 마음에게도 행복은 찾아 온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적어 본 것이다.


사느냐 죽느냐?


이 제목은 햄릿에서 나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서두에 나오는 문구를 읽으면서 인간은 누구나 이런 생각 속에 깊이 잠기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가 깊이 생각한 것이 나의 이성적 고뇌에서도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왜 태어났고, 나는 왜 나인가? 이런 철학적 물음은 어린 시절에 자연스럽게 떠올라 질문을 던진다. 삶에서 우연은 우리를 어찌할 수 업는 결과로 이끌어간다. 행복인지 불행인지 나는 언제나 나를 규정하는, 따라서 내 의지를 벗어난, 애초에 있덨던 우연의 산물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다른 사람이 아니고 나로 존재한다는 명백한 사실은 그 이유를 모든다 해도 반박할 여지가 없는 필연이고, 본질적 모순과 불가능하고 상상하기도 어려운 부인()을 전제로 해야 의문을 품을 수 있는 존재의 출발점이다."


"자아는 타자라는 시련을 통해 확립된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임의성은 창조의 결과물이자 예상치 못하게 충만하고 행복한 시간을 제공하는 원천이 될 수 있다."


저자는 계속해서 일상 속의 행복을 누리는 얘기를 언급하며 작가의 얘기를 해주고 있는데 작가는 독자를 통해 자기 행복감을 확인하며 글쓰기를 이어 간다는 것이다. 즉 '쓰는 자의 의식에는 언제나 타자가 있다' 

이 말은 사람이 가진 행복은 타인에게 향하려는 지속적인 노력 속에서 발견됨을 말해주고 있다.

독자적 개인은 타인과 맺는 관계로 자아를 실현하고 '독자성은 오직 관계 속에서 발생' 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인간이 가진 행복은 나 홀로만의 행복보다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행복을 발견하는 것을 더 선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저자는 이렇게 생각의 줄기를 잡아서 살피는 중 '타자와의 관계속에서 인간이 가진 행복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일상 속에 가진 행복의 줄기를 끄집어 내어 행복을 즐기려 하고 있다.

그는 인류학자로서 첫 발을 내 딛었던 그때의 현지 조사 과정에서의 기억을 통해 행복을 기억한다.

그는 샹송을 통해서 과거의 노래를 귀환시킨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자신이 함께 스스럼없이 불렀던 그 기억을 되살리면서 그때 그 시절 할아버지 댁 부엌을 소환하는 상상을 하며 감성에 젖어든 것이다.

요즘으로 치자면 '뉴트로'식의 행복 찾기를 현실 안에서 과거를 돌아보며 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트로트'가 한국인의 남녀노소를 깨워서 과거 그때의 시절과 경험, 눈과 기억에 넣어둔 행복을 살포시 끄집어 내듯이 저자는 여행 속에서, 풍경 속에서, 음식 속에서, 또한 나이 듦 속에서 행복 찾기를 소박하게 찾아가고 있는 모습을 이 책에서는 보여주고 있다.


나이 듦의 행복에서 저자는 우리에게 이 행복을 충만하게 누리라고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우리는 나이를 먹으며 나이의 속박에서 벗어나 시간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법을 배우는 것 같다."고 말한다. 이어서 "나이 들어서 좋은 점은 누구나 자기가 간직한 기억과 상상, 추억과 꿈을 마음껏 탐색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긴다는 것이다."고 말한다. 따라서 은퇴는 도전이라고 강력하게 말한다.


따라서 나이는 우리에게 지금을 살라고, 순간에 충실하며 지금 이 순간의 모든 것을 누리라고 가르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렇게 저자는 자신을 둘러싼 주변을 돌아볼 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아오는 행복들"이 많이 있음을 발견하면서 일상은 그저 '하나의 지나감'이 아닌 행복으로 울타리쳐진 삶의 낙원임을 깨닫고 있는 모습을 계속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 행복을 소중하게 간직하라고, 지금 순간을 개인을 넘어 공동체, 더 나아가 인류의 존재로서 간직하는 세대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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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끝에 서 보았는가?
윤정 지음 / 북보자기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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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삶의 언어는 의미에 매달리지 않는다. 


이 말이 강인하게 다가와 이 책을 보게 되었다.


작가가 선정한 27개의 기표 속에서 마지막 기표인 '죽음'을 통해, 생의 끝자락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으로 바라보면서 두려움 없이 다가서는 힘을 이 책은 주고자 한다. 


작가는 자기 독백적인 글을 통해 자신이 가진 생각을 말로 표현하려고 한다. 


'빠짐'이라는 기표 안에서 '독백'이라는 글로 자신의 감정을 언어가 가진 모든 표현을 통해 유려하게 표현한다.


내 몸짓, 내 말, 내 의식적인 행동이 어떤 유기체의 말초적인 본능으로 움직이는 반사작용으로 그치고 있는 듯하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흘러간다. 그 모든 것을 계산해보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내 생애에서 헛되이 흘러갔을까? 분병히 어딘가에 빠져 있다. 


어쩌면 나는 더 진실한 삶의 부재를 숨기고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감각으로 만들어진 지각과 감정을 자아라는 이름으로 데리고 와서, 결국은 미로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정체 상태가 되는 것을 빠짐이라고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사실이 무엇이든 나는 그것이 일어나더라도 놓아두고 있다.

가끔 뵌 적도 없는 신에게 떠넘기고, 나는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문제를 삭제하고 만다. 분명히 빠진 것이다.

자아는 있지만 스스로 주체를 가진 의식의 자아는 없는 것 같다. 


난해한 내용이기도 하지만 저자는 '무엇'에 빠지고 싶어 하는 자신을 본다.

절망과 충족감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충동을 보면서 만족으로 행복하기도 하고, 절망하면서 수렁에 빠지기도 한다. 어떤 날은 분리되어 차분하지만 어떤 날은 붕붕거리면서 떠다닌다.


이런 감정은 우리의 모습이지 않나 생각한다.


저자는 또 말하기를 '수렁에 빠지고 싶은 충동은 상처에 의해 올 수도 있지만, 너무 만족하여 유혹 속에 빠지기도 한다'고 말한다. 즉 빠짐은 모든 행위에 대해 내 책무가 아니라, '나'라는 자신을 내맡기고 양도하는 것임을 말해준다.  이처럼 수렁에 빠진다는 것은 어느 곳에서도 자신이 스스로 설 곳이 없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죽음에서 조차도 자신이 사는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렇게 저자는 끝없이 사라지는 존재에 대해 아름다운 고민을 하는 유일한 종種?이 '사람이다'고 말한다.

또한 사라지는 것에 대해 생명을 물을 수 있는 존재인 '사람'은 작은 독백과 성찰 사이 끝에 서서 언어의 의미를 삶으로 잘게 쪼개어서, 사랑의 가슴을 품고 새날을 맞이하는 아침을 마주하고자 하였다.


"자살"이라는 쳅터에서 저자는 삶의 진실함을 마주대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삶에서 무엇인가를 바라며 살고 싶지 않다. 그냥 좋아하며 잘 살면 된다. 꽃은 꽃대로 피고, 눈은 눈대로 내린다. 그냥 그대로 내던져놓고 살아가는 것, 이미 나의 생명이 선택한 자살의 삶이다."


이 글을 통해 저자의 가치관, 세계관을 본다. 


"끝(종국, 죽음)"을 찾아서 연구하고 살펴보니 삶은 '사라짐'과 '비움', '소멸', '공허함', '죽음'이라는 것으로 결국 종식되는 것을 보고 저자는 아마도 많이 놀랐고, 불안했던 것이다. 또는 '끝'이 인생의 의미를 물을 때 뭐라고 답해야 될 지를 나름 고민과 철학적 사색으로 언어의 유희를 거쳐서 자신의 얘기를 써 내려가고 있다.


처음 이 책을 접하고는 난해할 수 있어 이어지는 글 잇기(이어짐이)가 쉽게 다가오지 않을 수 있으나 어쩌겠나?

결국 "끝"이 다가온 순간 "무"로 돌아갈 세상에서 잠시 세상이 이해되지 않아 복잡한 얘기를 마음대로 써보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그는 "죽음"이라는 27번째 쳅터에서 말한다.


'죽음의 실체는 어떤 모습일까?'


"나는 독백 속에서 죽음의 비밀을 말하고 싶지만, 어차피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이다. 삶이 떠난다는 것은 육체적 감각의 소멸이다. 그러면서 인간은 영혼을 집착하기도 한다. 도저히 들여다 보고 확인할 수 없지만 무의 심연을 공허함을 인정해 버리기 쉽다.... 하지만 우리는 죽음에 대해 여러가지로 고민한다. 

죽음의 또 다른 이름은 '소멸' 아니면 동사로 '사라짐'이다. 그 사라짐이 왜 공허했을까?


아마도 형이상학의 극단적 예단의 의미로 본다. 공허? 더 채워야 하는 빈 마음이 아닐까?

빈 마음의 끝점에는 아르키메데스의 점이 머물고 있다.

그 점은 공간을 채우는 생며의 주체로 나아감을 철학으로 암시하고자 했다."

(아르키메데스 점이란 관찰자가 탐구 주제를 총체적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유리한 가설적 지점을 가리킨다. 연구 대상을 그밖의 모든 것들과 관계에서 볼 수 있도록 하며, 그것들을 독립적인 것들로 유지하도록 하는, 그 연구 대상에서 "자신(관찰자) 제거하기"라는 이상(Ideal)은 바로 아르키메데스 점의 관점으로 묘사된다. / 위키백과)


그 점이 있는 자리에 창조주가 계셨다.

그 점을 가지고 문명을 세웠고, 그 점의 의미가 중세철학을 진두지휘하면서, 선은 악을 제거하는 점의 존재로 등장하게 된다. 그러므로 공허는 절대적 선을 가지고 해결하는 본질처럼 비추고 있었다. 지금도 여전하다.

그 점은 시간을 제거하고, 이원성의 갑옷을 입고, 공허를 끝내려는 전체주의적 시도를 보여주면서 세상을 애매하게 제거하려고 한다.


죽음은 그렇게 심판받고 있었다. 

철학과 죽음의 부재는 풀 수 없는 현실 상황이다. 죽음과 사라짐은 시작과 끝이 아니다. 순간순간 이어지는 생명의 현상이다. 그 생명은 사라지는 죽음에 대해 생명을 묻는다...지금 내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그 믿음만큼 신뢰하고 싶다. 끝은 끝이 아니라 끝없는 것이다. 그 사이에 나는 끝없는 끝을 붙잡고 편집된 의미의 먼지를 털어내고 있다.  입춘이다. 봄은 뿌려놓은 죽음을 끝내 살아내려는 날이다. 그 죽음의 춤으로 봄은 찬란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맨 끝에 있는 끝이라는 '시?'를 적어보며 저자의 글 안에서 '끝'을 의미해 본다.


끝이 있었다면, 널 만나지 못했으거야.

우리는 없을 거야. 끝없는 길이 끝없었기에, 너랑 손잡고 걸어갈 수 있었던 거야.

끝없기에 다시 살아갈 수 있었던 것 같아.

힘들어도, 병들어도, 죽어서도, 끝이 없어서 희망을 갖는 거지.

영원하다는 것은 끝없는 고백인 거야.

하늘도, 별도, 달도, 해도, 바다도, 꽃도, 어머니도, 아버지도, 너도, 나도 끝없는 고백의 모습인 거지.


책을 보게 되면 '들뢰즈'라는 인물이 나온다. 들뢰즈가 죽음을 말한 것이 있어 함께 실어 본다.

"권력이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를 억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불안하게 하는 것입니다. 혹은 비릴리오가 말하듯이, 권력이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의 내밀한 작은 두려움들을 관리하고 조직하는 것이죠. …(중략)… 아무리 춤추자고 말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우리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으니까요. 또 아무리 “죽음이란 얼마나 불행한가”라고 말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무엇인가를 잃으려면 먼저 살아야만 할 테니까요."

- 질 들뢰즈·클레르 파르네, 『디알로그』, 허희정·전승화 옮김, 동문선, 2005, p.117~118.


이 글(사진의 내용, 저자의 내용)이 난해한가? 결국 글은 읽는 이의 해석이다. 

글 저자가 무엇을 말하든지 그것을 읽고 소화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당신은 끝에 서 보았는가?


구약성경 전도서 7:1-4절 말씀을 추가해 본다. 

전도서는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다는 솔로몬이 쓴 책이다. 

이 메세지가 결국 저자가 의도한 책의 결론이지 않나 생각된다.

(맨 아래는 저자의 또 다른 책이다)


  1. 명예가 값비싼 향유보다 더 낫고, 죽는 이 태어나는 보다 더 중요하다.
  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더 낫다. 살아 있는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3. 슬픔이 웃음보다 나은 것은, 얼굴을 어둡게 하는 근심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다.
  4.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은 초상집에 가 있고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은 잔칫집에 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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