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한중록 (패브릭 양장) - 1795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혜경궁 홍씨 지음, 박병성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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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책은 초판본 한중록이다. 패브릭 양장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소중한 책이며 소장용 책이라는 것이다. 
말로만 들었던 '한중록'을 처음으로 손에 잡아 들어 읽었다. 처음 1권은 책의 저자인 혜경궁 홍씨가 자신의 출생부터 어릴 때의 추억, 9세때 세자빈으로 간택된 이야기에서부터 이듬해 입궁한 이후 50년 간의 궁중 생활을 회고하고 있다. 1권을 읽을 때 혜경궁에 대해서 매력을 느겼다. 이 여성이 과연 어떤 사람인가?  사도세자의 부인이며 정조의 어머니로서 여성으로서 갖추우어야 될 모든 것을 지녔을 만큼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마치 1권은 뭔가 흡입하듯 빨려 들어가 읽었다. 이 책을 옮긴이가 말했듯이 이 책을 읽어보면 "문장이 사실적이고 박진감이 있으며, 문체는 옛 귀족 여인들의 전아한 품위를 풍기고 경어체의 아름다움이 보인다. 특히 저자 혜경궁 홍씨를 비롯하여 등장인물 가운데에서 전통 사회의 규범적 여인상의 전형을 볼 수 있다."

사도세자는 가히 신사임당과 같은 현숙한 아내를 만난거와 같아 끔찍한 결말이 아니라면 사도세자는 복이 많은 남자가 맞는거 같다.  문체에서 보여지는 귀품과 그가 간택을 받는 장면에서 그가 가진 남다른 생각은 과히 이 여성이 왜 세자빈이 될 수 있는 가를 짐작하게 한다. 세 번째 간택을 받을 때 정성왕후가 내리신 의복은 매우 아름다운 비단 옷이었다. 이때 그녀는 이런 것에 마음을 뺏기지 않았다. 이때 나이 10세였는데 간택을 받았을 때 그가 가졌던 마음을 보면 이러하다.

"이런 옷들은 내가 어려서 곱게 입어보지 못하였으나, 남이 가진 것을 부러워해 본 적도 없었다. 내 가까운 친척 중에 나와 나이가 같은 여자애가 있었는데, 그 집이 부유하여 귀한 딸로 자란 까닭에 고운 옷과 단장하는 기구를 안 가진 것이 없었지만, 나는 부러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간택을 받은 후에 궁궐 생활을 하게 되는데 이때 그 어린 나이에 궁중의 예를 소홀히 하지 않는 모습도 보면 이러하다. "궁궐에 들어와 나는 감히 문안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인원, 정성 두 왕후께는 5일에 한 번씩 하고, 선희궁께는 3일에 한 번씩 하지만 날마다 모실 때가 더 많앆다. 그때의 궁궐의 법도가 매우 엄하여 예복을 하지 않으면 감히 뵐 수 없었고, 시간이 늦으면 못하므로, 새벽의 문안 시간을 어기지 않으려고 잠을 편히 자지 못하였다.... 나는 보모와 복례에게 엄하게 부탁하여 새벽에 일찍 깨우는 일을 큰일처럼 하고 게을리하지 못하게 했다. 추위가 심한 겨울과 더운 여름 그리고 비바람과 함박눈이 내리는 날에도 문안 갈 날에 한 번도 시간에 늦이 않은 것을 두 사람의 공이었다.....옛날 궁중의 법이 어찌 그리도 엄하던지 문안 외에도 어려운 일이 많았으나 나는 괴롭게 여기지 않았는데, 이것 또한 옛 사람의 됨됨이라 능히 감당하였던 것 같다." 

어린 나이에 생각하는 바가 깊고, 마음됨이 귀하게 보인다. 특히 혜경궁을 모신 보모와 복례에 대해서도 기록하여서 그들로 인해 자신이 많은 은혜를 입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서 한 가지 말을 보탠다.

"보모와 복례는 나에게 마치 어린 종처럼 굴었는데 나를 잘 섬긴 덕으로 나중까지 복을 누렸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녀는 위로 임금과 함께 왕후는 물론 아래 사람에게 대하는 자세가 경박하거나 교만하거나 소홀히 대하는 법이 없음은 물론이요 남편인 사도세자에게도 훌륭한 아내로 비친다. 물론  아들 정조를 지키기 위해, 또한 자신의 가문(노론파)을 위해 남편 사도세자를 제거하는데 그녀가 일조를 하였다는 부분도 있다. 친정 아버지인 홍봉한은 세자빈 홍씨에게 당론(노론)을 따를 것을 요구했는데 문제는 홍씨에게 따르기를 요구하는 당론이 사도세자 제거였다. 노론은 혜경궁 홍씨를 끌어들이기 위해 세자 대신 세손(정조)을 세우겠다고 약속했고 혜경궁 홍씨는 이 약속을 명분으로 당론을 따랐다. 그리고 그녀는 세자에게 가는 정보를 통제했고, 세자에 대한 정보를 노론에 제공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을 《한중록》에 스스로 밝히기도 했다는데 본 책에서는 그런 내용이 없는 거 같고 홍봉한에 대해서는 매우 좋은 점만 기록하고 있어서 다른 한중록 책을 참고해야 할 것으로 본다.

본디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처럼 한중록이라는 책은 남편의 억울함 보다는 친정 가문에 대한 편중이 심하게 치우져 있는 거 같다. 한 자료에 의하면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쓴 이유는 "재위 24년 만에 정조가 죽고 손자 순조純祖(재위 1800~1834)가 즉위하자 혜경궁은 친정재건에 나섰으며 그녀는 사도세자 사건을 가문의 자리에서 정리할 필요성을 느끼고 《한중록》을 저술했다는 것이다. 즉 사도세자의 죽음과 자신의 친정은 아무 관련이 없음을 극구 변명하기 위해 《한중록》을 썼다는 것이다. 작품 해설에도 나오듯이 '아들 정조가 승하한 직후부터 어린 왕 순조에게 보여주기 위해 썻으며 정치적 색채가 짙은 작품'이라고 하듯이 편향된 자료가 없잖아 있을 것으로 본다.

실제 혜경궁 홍씨와 홍봉한은 세자에게 가는 정보를 불법적으로 차단하거나 조작해서 세자를 위험에 빠뜨렸다고 한다. 혜경궁에게 세자는 이미 정적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친정 가문에 대한 좋은 묘사를 적어 본다. 혜경궁 홍씨가 묘사한 친정 가문에 대한 묘사를 보면 예사롭지 않는 가문이며 지식과 언어의 풍채가 과연 명문대가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어머니에 대한 말을 적어 놓은 것이다. "어머니께서는 비록 재상가의 맏며느였으나 일 년 내내 비단옷 한 벌 걸친 적이 없었고, 패물함에는 장신구도 몇 개 없었다. 뿐만 아니라 밖에 나갈 때 걸치는 외출복도 한 벌뿐이어서 때가 묻으면 밤을 틈타 더러워진 옷을 빠셨다. 또한 길쌈과 바느질을 밤낮으로 하셔서 늘 아랫방에는 날이 밝을 때까지 불이 켜져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자신이 그렇게 밤새워 일하셨지만, 그것을 보고 늙고 젊은 종들이 괴로워할까 염려하셨다...어머니께서는 평소에 기쁨과 노여움의 감정을 가볍게 드러내지 않으시고 타고난 마음씨가 온화하면서도 엄숙하셔서, 집안에서 그 덕을 칭찬하면서도 어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큰고모는 명관의 아내이며, 작은 고모는 현 임금의 친족인 청릉군의 며느리이시다. 막내고보는 이부상서의 며느리이시고 작은어머니께서는 이부사랑의 따님이시다. 이처럼 한 집안 부녀들의 가문이 훌륭하여 온 세상의 칭송을 받았으나 일찍이 교만한 빛이나 사치가 조금도 없었다."

"어머니의 형제는 세 분인데 이모인 김생원댁은 일찍 과부가 되니 어머니께서 극진히 섬기셨다. 이모다 돌아가신 후에는 어머니께서 이종사촌들을 무척 불쌍히 여겨 은혜를 베풀어 자식같이 아끼셨다. 양식과 의복을 대 주셔서 이종형제들이 배고품과 추위를 면할 수 있었고, 나중에 장가까지 보내 주셨는데 이종형제들이 늘 이렇게 말했다. '사람마다 어머니가 한 분이지만 우리에게는 어머니가 두 분 계십니다.'"

그녀는 남편 사도세자의 모습도 세밀하게 적어놓았다.  세자가 <옥추경(귀신을 부리는 주문)>을 읽기 시작하면서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다는 것이다. 밤마다 옥추경을 읽던 세자는 갑자기 뇌성보화천존이 보인다. 천둥을 주관하는 신이 보인다며 늦은 밤에 정신이 아득하여 무서워하였다고 말한다. 10여 세부터 병환의 기운이 있어 음식을 드시는 것과 행동이 예사롭지 않았던 것도 있었지만 옥추경을 읽은 후로는 아주 딴사람같이 행동하고 천둥이 치면 귀를 막고 엎드렸다가 그친 후에 일어서는 행동도 보였다고 한다.

특히 이 부분이 마음이 아리는데 영조가 한 날 세자를 찾아왔을 때 평상시는 도포나 용포를 입고 있었는데 그날은 무명옷을 입고 있었다. 이러한 아들의 병환을 모르는 가운데 영조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나를 없애고자 하느냐. 어찌 생무명으로 된 상복을 입었느냐?" 

그러면서 평소 세자가 쓰던 세간을 다 드러내는 중에 평소 좋아하는 군도가 특이 했는데 지팡이 모양 같은데 그 안에 칼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영조가 보고는 놀라면서 분하게 여겼는데 이에 세자빈은 이렇게 적고 있다.

"대조(영조)께서 소조(사도세자)의 병환은 모르시고 다 불효로만 탓하시니 그저 지극히 원통할 뿐이로다."

영조는 아들 세자를 잘 모르고 있었다. 아들을 이해하려고 하기 보다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모습에서 사도세자의 정신병은 결국 아버지에게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중록에 대한 기록들은 워낙 많고, 좋은 리뷰가 많아서 구체적인 기록과 흐름은 기록해 보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 책을 통해 우리가 마음에 담아야 하는 것은 "사도세자"의 진정한 "내면의 아픔"이다.
사도세자는 과연 정신이상자, 사이코패스였을까? 그는 정치적인 희생자가 아닌가?
그는 아버지의 지나친 기대와 편향적인 성격으로 인해 삐뚤어진 불쌍한 존재가 아닌가 하여 읽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아내인 혜경 궁씨는 또 어떻겠는가? 비록 한중록이 자신의 일생을 기록하면서 자신의 친정 가문을 변호하는 책으로 비춰지기도 하지만 그녀 또한 세자빈으로 채택되면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면서 고통의 아린 마음이 가장 컸을 것이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 속에 한편은 아내로서, 한편은 며느리로서, 한편은 친정집 딸로서, 또 한편은 정조와 순조의 어머니로서 그녀 또한 역사 속에 행복한 여인이기 보다는 비운의 여인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녀의 말이다.








"하늘이 무섭고 차마 망극망극하여 얼른 죽어 아무것도 모르고 싶더라" 



그렇다. 이 책은 한 여성이 겪은 역사적 사건의 기록이 담긴 내용이다. 역사책에는 "임오화변"으로 기록되어 있다. 간략하게 언급하며 책에 대한 이해를 하는 것도 좋겠다. 이 책은 조선 왕조 역사상 최악의 가족사가 기록되어 있다. 시간적으로는 1762(영조 385월 13일 벌어진 사건이다쉽게 말해서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사건이다이 날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뒤주에 들어가라고 명령했고뒤주에 갇힌 사도세자는 8일 뒤 세상을 떠났다. 우리는 이 사건을 임오화변이라고 한다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 2015에 의하면 "사도세자가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살해된 엽기적인 사건으로서 어미가 죽일 것을 청하고, 아비가 죽이라 명하고, 장인이 앞장서서 집행한 이 사건"이라고 말해주고 있다. 참으로 전대미문의 사건이다.


『한중록』을 쓴 혜경궁은 한중록을 쓸 때 집안이 망한 아픔에 화가 치밀어 등이 뜨거워 잠을 자지 못했다고 한다. 어떤 날은 누워 자려다가 벌떡 일어나 앉아 벽을 두드리기도 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남편의 아픔에도 그녀는 괴로웠지만 오히려 친정 가문에 대한 아픔이 더 컸을까봐 마음이 무겁고 아프며, 처음 1장을 읽었을 때의 그녀의 고귀한 모습은 무엇인가 하며 독자를 고뇌에 빠지게 한다.


마거릿 드래불(영국 작가)도 감탄한 역사적 기록물이며 내면적인 심리서와 같은 "한중록"


한국인이라면 꼭! 봐야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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