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통해 종교 밖에서 종교를 오해하셔던 분들이 오해를 풀고,
종교에 관심을 두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종교는 좋은 것이다. 어떤 종교도 악을 추구하지 않는다
종교는 유익한 것이다. 종교는 수천 년 동안 진지한 태도로 인간이 어떤 존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해왔다.
이 책은 종교에 관한 한편의 대서사시이다.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맨다면 이 책을 통해서 분명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종교에 대한 무지와 선입견으로 종교가 주는 선한 혜택을 받아 누리지 못하는 자에게 이 책은 저자 자신이 ‘종교에 대한 잘못된 사고를 말끔하게 씻겨주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혀 준다’고 말한다.
그래서 종교가 이제는 삶이 되고 가치가 되어 자신의 삶을 더 이롭게 만드는 계기가 되리라 생각하고 있다.
한국인 작가로서 이정도의 깊이와 종교적 세계관을 짚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어줍잖은 학문적 지식의 나열로 종교와 신을 논한 책을 보며 실망했었는데 이 책은 이런 모든 종교적 갈증과 종교에 대한 잘못된 가치관을 완전히 씻겨주며 길을 보여준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인 잣대와 논리적 귀결과 깊은 사고와 내적 진리로 즉 직관적인 진리로 종교라는 대서사시를 써내려간다.
상식이 바라본 종교
종교를 언급함에 있어 '기우제'를 언급하는 것은 올바르게 보인다. 그 이유는 다른 것과 다르게 가뭄은 인간이 넘을 수 없는 경계선이 있기 때문이다. 즉 홍수나 전쟁은 인간이 가진 힘으로 대처 가능한 영역이지만 가뭄은 딱히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즉 피할 곳도 없고, 싸울 대상도 없다.
사람들은 비가 오지 않음으로 누군가 여기에 대해 외친 '신의 진노 때문'이라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래서 가뭄의 이유가 신의 진노라면 그 마음을 풀어주면 된다는 생각이 모여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우제를 드린다. 확신은 없다. 하지만 이 말이 맞기를 바라며 드린다. 이렇게 기우제는 시작되었다.
그런데 기우제를 드린다고 바로 비가 오지 않는다. 그런데 왜 기우제를 드렸나? 그건 기우제를 드리면 비가 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기우제는 '비가 올 때까지' 드려졌다. 사람들의 절박한 기다림 속에 기도한 결과 하늘은 응답한 것이다. 이 경험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선사하였다.
'비를 내리는 신이 있다. 신이 진노하면 가뭄이 찾아온다. 하지만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면 신이 마음을 돌이켜서 비를 내린다.'
이렇게 종교는 시작되었다.
그런데 우리의 삶에도 같은 가뭄의 시간이 찾아온다. 시간이 지나 금방 해결될거 같으면 좋은데 가뭄과 같이 단조로운 삶이 지속된다. 이때 누군가 자신이 대안을 가지고 있다 말하며 우리의 미래가 신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 가운데 귀가 열린자들은 동참하며 신에게 기도한다. 그런데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문제가 해결된 사람도 있다. 이때 제관(제사를 맡은 관원)들은 좋은 결과를 만난 사람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이런 사람들은 기우제를 통해 비를 만난 사람과 같은 종교적 체험이 생긴 사람들이다. 그들은 기도가 응답된 감격을 가지고 있다. 제관들은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며 설득한다. 반면 실패한 자들이 있을 것인데 이런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무대 아래 어두운 곳으로 모인다. 대부분의 사람은 실패한 사람을 보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기도가 응답이 없는 이유는 제대로 기도하지 않았거나 실패한 원인을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심지어 실패한 본인도 자신에게 문제가 있기에 응답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오늘날에도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라고 저자는 말한다.
기우제가 종교의 시작이고, 미래에 대한 불안이 지금도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 앞의 미래에 대해 우리는 알지 못한다. 종교는 알지 못하는 부분,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 그건 신의 영역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그 신에게 기도하는 것을 통해 그 부분에 개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무지에 대해 신으로 대답하는 것' 이것이 오늘날 종교에 대한 정의이다.
코로나로 인해 종교는 사실 사회적으로 욕을 먹고 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는 인간 삶의 자리에 언제나 함께하고 있다.
이것은 종교가 비단 나쁜 용도로 사용되기 보다는 삶이 버겁고 힘든 사람들에게 언제나 따뜻한 위로가 되고 안식처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를 멀리서 볼 때는 비판의 대상이지만 종교 안에 들어오면 사실상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 없다.
사실 심리학 관점에서 종교를 바라보는 사람은 따뜻한 시각으로 종교를 정의한다. 즉 거짓 희망이라도 그 희망이 삶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게 한다는 것이다. 환자에게서도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환자보다 신이 자신을 치료해 줄 거라고 믿는 환자의 완치율이 더 높기에 상담자들은 종교를 권면하고 있다.
사회적 관점에서 종교를 바라보는 사람은 차가운 시선으로 종교를 대한다. 신을 기다리기 보다는 저수지를 만들어 가뭄을 이겨내는 방식을 택한다. 사람들이 어떤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면 해결 될 수 있는 문제를 안일하게 대처함으로 인류는 사실 정체되고 발전하지 않았었다. 그건 자신이 해결해 나가야 하는 문제를 모두 신에게 미뤘기 때문이다.
이렇게 종교는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사회를 정체되게 만들므로 종교는 나약한 사람들에게 기생하며 진보를 방해하는 인류의 적으로 생각한다. 더군다나 종교가 지금까지 사회 속에서 전쟁을 벌이고, 테러를 행하고, 탄압하며 서로 종교끼리 싸움으로 종교는 이제 넌더리나는 제품이 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종교가 꼭 그런것만이 아님을 차근차근 풀어나가면서 종교가 가진 기본 진리를 전한다.
특히 종교는 거짓 희망을 파는 곳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곳이며, 깨달음을 찾고, 사랑을 추구하며 바르게 살아가는 삶을 권면하는 곳이라고 말하며 '오해와 비판을 여러가지 설명으로 해소'하고 있다.
그 가운데 '영역오류'의 말이 인상적이다. 두 가지 예를 드는데 한 가지만 언급하면 의료에 대해 경제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의 의료 현실은 왜곡되었다. 그 이유는 고급 인력과 첨단 장비를 통해 대형병원이 유지되려면 더 높은 가격으로 환자를 맞아야 한다. 즉 평범한 사람들이 대형 로펌의 변호사를 만날 수 없는 것처럼 대형 병원의 교수는 부유한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것이다. 경제 논리에서 보면 말이다. 그러나 의료 논리에서는 이 논리는 틀렸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의업에 종사하는 일원이 될 때 자신의 생애를 인류 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기 때문이다. 의료는 상품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돈이 없다는 이유로 생명의 가치가 훼손된다면 이 사회는 비참한 사회이다. 따라서 의료는 의료의 논리로 이해되어야지 경제 논리로 보면 심각한 문제를 낳는다.
이와같이 종교는 종교의 관점으로 다루어야 한다. 자신의 생각과 논리로 종교를 바라보면 그 익숙한 논리가 종교를 오해하는 동시에 심리적, 무의식적, 폭력적으로 종교를 대하게 된다.
"모든 종교는 들어가보면 선하다. 어떤 종교도 인생을 낭비하고, 타인을 공격하며, 자신을 망치도록 가르치지 않는다."
© msandersmusic, 출처 Pixabay
그러면 왜 지금의 종교는 우리가 볼 때에 다 나쁘게 보이는가?
그건 저자가 말하듯 우유가 상온에 있으면 부패하듯 종교가 상온에 있었기 때문에 부패했다는 것이다.
즉 원래 종교는 타 종교와 분쟁하거나 공격하지 않는다. 서로 의견과 관점이 다를 뿐이지 모든 종교는 선을 가르친다. 그러나 종교가 부패하면 서로를 악으로 공격한다. 또한 종교가 커지면 종교는 권력을 얻게 되는데 건강한 종교는 그 권력을 사회적 약자와 폭력적 세상을 대항하여 타락한 문화에 반대의 목소리를 낸다. 그러나 종교가 부패하면 그 권력을 통해 종교의 이익을 구하게 된다. 또한 종교가 세속화되고 교조화되는 것도 결국 종교가 상온에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서 제 기능을 잘하면 종교는 오히려 사회에 약이되고 사람들 마음을 충분히 위로하는 동시에 진리의 길잡이가 되어 더 좋은 사람으로 가치있는 존재로 세상을 살게한다. 이것이 사실 종교가 하고 있는 것이라고 저자는 강력히 말한다. 여기서 어떤 사람의 글귀가 떠올라 적어 본다.
신앙은 인생의 힘이다. -레프 톨스토이
신의 존재를 믿는다는것, 인간의 행복은 이 한마디로 다한다. -레프 톨스토이
종교가 없는 도덕률은 방향을 찾지 못하는 항해와 같다. 구름에 별이 보이지 않는 바다에서 선박의 위치를 알려고 하는 노력과 같다. <H.W. 롱펠로우/ 카바나>
종교는 인격도야의 근본이다. 페스탈로치
종교의 영원한 가치는 그것이 소망에 대한 도전을 이끌어 주고, 사람의 마음에 희망을 안겨 주는데 있다 - E.M.홉킨스
이 책은 이 말이 사실임을 증명해가는 변증서와 같다. 줄칠 곳도 많고, 생각해 볼 것도 많고, 이치적으로 논리적으로 말하기에 거부할 수도 없는 수사법이 이곳에 펼쳐져 있다.
한 친구의 죽음을 통해서 다섯명의 친구가 생에 처음으로 '죽음'을 자신과 동일시하게 되면서 각자 다른 방식으로 그 죽음의 의미를 새기는 중에 "종교"가 "죽음과 삶에 실제로 답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 저자는 종교가 답인 세상을 말해주려고 오래 되었지만 새로운 네 개의 시선으로 종교를 바라보게 한다.
새로운 시선이란 "세속주의, 과학주의, 명상종교, 계시종교"에 관한 것이다.
죽음에 대해 인류는 이 네가지의 답을 가지고 사실 설명하고 있고, 이해하고 있고, 살아가고 있다.
사실 우리의 삶은 네 개의 시선이 전부 포함된 사회 속에서 살아가며 그것을 은연중에 자신이 그런 사고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평소에는 세속주의자이다. 그래서 죽음을 무시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종교에 대해서 논쟁할 때는 과학주의자가 된다.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장례식장에서는 계시종교를 믿는다. 돌아가신 고인이 지금 좋은 곳에 가셔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고 말이다. 사회적인 이야기를 할 때는 명상종교를 믿는다.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며 그렇지 않은 사람을 향해 비판한다. 이처럼 우리는 모순된 답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러한 삶은 어떠한 답도 그 안에 깊이 스며들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유행처럼 적용된 종교는 그 사람에게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한다. 즉 그저 사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자신으로서 네 가지 중 하나라도 제대로 가질 때 삶은 새롭게 나를 형성하여 삶이 주고자 하는 '선물들'을 다 받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네 가지의 시선은 네 가지의 종교성이다. 즉 내가 믿는 가치관이 곧 나의 종교성이기에 내가 어떤 가치관에 속하고 있는지 제대로 살피면서 자신의 삶을 제대로 가꾸어 나가기를 바라는 것이 저자가 요구하는 종교성이다.
이렇게 사는 것이 전부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종교는 우리에게 과연 필요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