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과 탐욕의 인문학 - 그림속으로 들어간
차홍규 엮음 / 아이템하우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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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의 욕망과 탐욕을 관음하는 섹슈얼판타지에 관한 예술가의 시선


“인간에겐 인간의 내부에 도사린 신을 향한

상승하는 욕망과 이성을 향한 하강하는

쾌감의 상반된 양면이 있다.”

《악의 꽃》의 악마적 에로티스트 시인 보들레르

책이 무언가 독자에게 끌림을 주고 선택하게 만드는 것은 아마도 인간 자신이 원하고 추구하는 내적 욕망일 것이다.

시인 '보들레르'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인간에겐 인간의 내부에 도사린 신을 향한 상승하는 욕망과 이성을 향한 하강하는 쾌감의 상반된 양면이 있다.”

이 문구가 내 눈에 각인이 되었다. 인간에게 있는 욕망을 잘 투영한 문장이라고 본다.

인간은 욕망하는 무엇이 있다. 아담의 아내 이브는 그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찾는 존재이면서 아담에게 욕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책에서는 이브가 가진 욕망에 대해서 다루지 않았지만 정신세계사(출판사)에서 나온 '제 3의 이브'라는 책에서 보면 이브는 아담보다 더 내적 진리를 욕망하며 찾는 진리의 용맹자로서 나온다.

아무튼 이 책에서는 아담 안에서 욕망의 대상이 나오는 장면을 묘사한다. 아담의 갈비뼈로 만든 이브는 실로 아름다웠고 에로티시즘을 분출하게 하였다. 처음 마주 대한 이성의 존재를 느끼는 순간 아담은 자연스럽게 끓어오르는 감정에 휩싸였다. 아담은 이브가 들고 있는 선악의 열매가 금지된 열매인 줄 알면서도 이브가 건넨 열매를 받아 먹는다. 과연 이것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파멸의 순간임을 아담은 진정 몰랐던 것일까?

이후로 이브는 죄를 잉태한 사악한 존재로 여기게 되었고 중세사회의 뿌리 깊은 여성혐오를 낫게 했다.

심지어 20세기 중세 미술에서는 '여자=성욕을 충돌질하는 요부'라는 편견 가득한 그림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예술 작품에 그려진 이브의 모습은 눈부신 나체와 함꼐 요염함을 강조하는 복숭앗빛 살결과 출렁이는 황금빛 머리카락, 발르게한 뺨, 풍만한 육체가 관객들에게 숨이 멎을 만큼 고혹적인 존재로 이브를 느끼게 하고 있다.

무엇보다 지극히 인간적인 애정의 시선으로 보면 이브는 낙원에 홀로 선 남자에게 영혼과 섹스의 황홀감을 안겨주며 욕망을 알게 해준 인물이다. 성의 신비는 낙원에서 쫓겨나도 좋을 만큼 남자에게 있어 마력적인 끌림을 주며 새로운 낙원의 세계인 것이다.

이브가 가진 모습이 어쩌면 이 책에서 주로 말하고자 하는 근본 뿌리가 된다.

즉 이브는 욕망의 대상인 동시에 파괴의 위험성을 갖는 여성으로서 팜프 파탈의 성격을 갖고 있다.

프랑스어로 팜므 파탈은 '치명적인 여자'가 된다. 흔히 우리나라에서는 악녀의 캐릭터로 등장한다. 화려한 외모와 선정적인 몸매의 한 여자가 한 남자를 감미롭게 유혹한 후 파멸로 이끄는 것이다. 때로는 공멸을 자초하면서 말이다.

『욕망과 탐욕의 인문학』에는 46가지 그림의 주제와 함께 다양한 욕망을 부추기는 요염한 팜므 파탈의 여인들이 나온다. 한마디로 ‘사랑에 이르는 46가지 러브로망’이 작가의 글솜씨와 역사성 지식과 예술적 그림으로 서술되고 있다.

예술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욕망과 탐욕에 대한 관음이며, 예술가는 대상을 엿보는 관음증자이다. 그런데 화가가 그리는 대상은 그림을 소비하는 관객의 욕망을 형성하면서 내적 욕망을 대신 투영해 준다. 그래서 예술가를 일컬어 관음과 사랑을 욕망하는 판타지의 창조라고 부르는 것이다.

욕망의 소재이며 관객이 선호하는 영원한 주제는 '사랑'인데 이 사랑은 신성한 아카페적인 사랑도 아니고, 관념적인 플라토닉의 사랑도 아닌 자기중심적이고 소유적인 이성간의 사랑인 '에로스'이다. 재미있는 것은 예술가가 지고지순하고 순정적인 사랑으로서는 관객을 유혹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림을 엿보는 관객이 호감을 느끼는 것은 흥미롭고 드라마틱한 에로스적 사랑인 것이다. 그래서 예술가가 그리는 사랑은 파괴적이고 일탈이며 금지된 사랑이다.

이브는 욕망의 대상인 동시에 파괴의 위험성을 갖는 여성, 즉 팜프 파탈의 성격을 갖는다. p28

이브의 그림을 첫 장면으로 해서 수많은 에로티시즘적인 그림들은 보는 관객들를 유혹하면서 대개 가장 완벽한, 환상의 세계에 대한 메타포를 형성한다. 이 나쁜 환상의 메타포는 우리가 사는 허무한 세상을 견딜 수 있게 하는 희미한 힘인 동시에 막강한 희망으로 나타난다.

사랑과 욕망의 간극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 간격의 틈새에는 섣불리 말하지 못하는 사실 혹은 진실이 숨겨져 있다.

로마의 역사를 바꾼 '헌신의 여인 루쿠레티아'에 대한 글과 그림은 인간의 욕망과 탐욕 속에 벌어진 에로티시즘이 가져다 준 선물로서 비극인 동시에 희극으로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즉 팜므 파탈(나쁜 여자)의 이미지가 아니면서도 결국 너무 아름답고 지고 지순해서 타르퀴니우스의 셋째 아들인 '섹스투스'에게 팜므 파탈로서의 여자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옴므 파탈(나쁜 남자)의 남자가 결국 욕망에 못 이겨, 그 욕망과 탐욕이 과욕으로 나타나 개인적인 멸망을 가져온 동시에 로마 시대의 새로운 포문을 여는 계기가 되고 있다.

로마의 역사를 바꾼 사건

​루크레티아(Lucretia, ?~BC509) 이야기

어느 날 저녁 왕자인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의 막사(아르데아를 공격하러 나간 전쟁터)에서 참전한 귀족들이 모여서 저녁 식사후 담화를 나누다가 서로 자신들의 부인의 미덕을 자랑하는 자리에, 로마의 귀족이었던 콜리타누스가 자신의 아내 루크레티아가 얼마나 정숙한지를 자랑하며 진짜인지 내기를 한다. 급기야 그들은 로마로 돌아가 아내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보고 오자고 제안한다. 예상대로 섹스투스를 비롯한 다른 장교의 부인들은 모두 젊은 여인과 파티를 즐기며 흥청망청 보내고 있는데 오직 루크레티아만은 밤이 깊었는데도 시녀들과 함께 남편의 어깨걸이를 만들기 위해 양모를 손질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예고 없이 찾아온 남편과 동료들을 극진히 대접한다.

문제는 루크레티아가 미덕만 갖춘게 아니라 미모까지 눈부셨다. 그녀의 아름다움에 한 눈에 반한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는 일행들과 함께 일단 진영으로 돌아왔지만 밤에 몰래 빠져나와 루크레티아를 찾아가 위협하며 만일 자기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그녀를 죽인 뒤 하인을 이용해 거짓추문을 퍼트리겠다고(노예를 죽여 알몸으로 침실에 눕혀 놓고, 루크레티아가 간통을 저지르다 대가를 치른 것으로 위장하겠다고 협박), 가문에 불명예를 안기겠다는 협박으로 겁탈하고 아침일찍 떠난다. 물론 루크레티아는 단호하게 거절했지만 명예를 목숨처럼 여겼기에 섹스투스에게 마지 못해 자기 몸을 주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가져 올 후폭풍은 어마어마 했다. 그녀는 아버지와 전쟁터에 남아 있는 남편을 급히 편지를 통해 부르며, 자신에게 벌어진 비극을 설명 후 강간범을 처벌해 줄 것을 약속 받은 후 자결을 하게 된다. 이때 남편과 함께 온 친구가 그녀의 가슴에서 칼을 뽑아들고 이렇게 외쳤다.(혁명가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왕의 조카였음)

이 여인의 피로서 맹세하노라. 왕과 그의 자식들을 죽이고,

다시는 그 누구도 로마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겠너라. p91

이렇게 섹스투스는 살해되었고 로마는 왕을 폐하고 왕가를 추방했으며(기원전 590년) 로마 공화정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민주공화국들이 채택하고 있는 대통령제의 원형이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이렇게 『욕망과 탐욕의 인문학』이라는 책은 여인이라는 이름의 원죄 끌림, 치명적 탐욕의 유혹 광기, 팜므 파탈의 치명적 욕망 유혹, 억압된 영혼의 아름다움 동경, 가질 수 없는 관음, 예술의 마지막 지점 애증, 불같은 사랑의 지배 탐닉, 세상에서 가장 치명적인 질투 복수, 경계에 선 치명적 유혹 근친, 멈출 수 없는 권력의 확신 치정, 권력자를 향한 치열한 암투 도발 등 11장 46가지 이야기가 이렇게 재미있게 화려하게 또는 매혹적인 그림으로 독자들을 초청하고 있다.

두 가지의 욕망인 '신을 향한 상승하는 욕망과 이성을 향한 하강하는 쾌감'의 양면성에 대해 철학적으로 역사적으로 심리적으로 잘 그려져 책은 무척 흥미를 주고 재미를 주는 책이다.

파격 러브로망으로 그리는 욕망과 탐욕의 에로틱판타지

남자는 마음이 없어도 팔을 내어줄 수 있지만 여자는 마음이 없으면 그 팔을 베지 못한다. 남자는 마음속에 묻어둔 그냐가 곁에 없을 때 그 그리움이 자기를 조금씩 갉아먹고 끝내는 흔적도 없이 무너뜨림을 안다. p59

칼립소 : 절대 사랑의 경지를 보여준다. p61

칼립소는 사랑의 순간이 찾아왔을 때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열정을 다해 사랑했고, 실연으로 상처와 절망을 겪었지만

포기할 줄 아는 미덕까지 지녔다.

자발적이며 독립적인 여자들은 절대로 서성거리며 기다리지만은 않는다. 한 남자만을 바라보는 착한 여자는 천국에 가지만, 자신이 찾은 사랑을 포기할 줄 모르는 나쁜 여자는 자신이 가고 싶은

열락의 세계로 자신을 던진다. p61


사디즘의 원조

아래는 성의 가학자 사드 후작의 사진이다. 1768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부활절 사건'을 통해 프랑스 사회는 술렁이게 된다. '매춘부 로즈 켈러 학대 사건, 처녀 유괴, 최음제 사건 등 그 외 추악한 행위들이 마치 N번방 박사처럼 나타나고 있다. 맨 아래 그림은 감옥에 갇혀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그는 집필을 하게 되었는데 대표적인 책이 <소돔의 120>일이다. 수없이 다양한 성적 도착 행위를 그림처럼 생생하게 묘사했다.

암튼 나쁜놈이니 읽고 머리에서 지우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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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이 알고 싶다 - 미혹되지 않기 위해 알아야 할 이단의 모든 것 알고 싶다
탁지일 지음 / 넥서스CROSS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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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혹되지 않기 위해

알아야 할 이단의 모든 것

코로나 19와 이단 신천지 문제

그것은 모든 이단에 대한 경각심을 우리에게 주는 싸인이다.

2019년도에 기묘한 영화 하나가 나왔습니다. <미드소마>라는 영화입니다.

공포, 미스터리물 영화라고 하는데 이 영화를 보다 보면 '사이비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과 집단 생활의 모습에서 기괴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한국 드라마로 사이비에 대해 실감나게 보여 준 드라마가 있는데 바로 "구해줘"라는 드라마입니다.

사이비는 우리나라만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에도 존재하는 이상 단체입니다.

특히 한국에는 코로나 19가 확산되면서 "신천지"에 대한 거짓된 모습들이 명확하게 드러났습니다.

전형적인 사이비의 모습이며 사회의 역기능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단은 가정과 사회를 좀 먹을 뿐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가혹한 '삶'을 가져다 줍니다.

이단에 빠져있을 때도 간혹 자신이 바른 삶을 살고 있는가 질문을 하겠지만 그러나 그 안에 들어가 있으면 이단이 삼단이 되고 사오단, 칠팔단이 되어도 어떤 계기가 아니면 절대로 이단에서는 빠져나올 수 없는 양태가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자신이 이단에 빠졌다는 사실과 그동안 속아왔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에는 정신과 영혼이 완전히 '패닉' 상태로 빠져들어 한동안 사회 생활과 가정 생활, 종교 생활이 힘들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이단은 삶의 해악을 넘어 극악이며, 이 땅에서 추방되어야 할 망극된 모임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1992년도 였지요. TV에서 처음으로 이단을 마주 대하게 되었습니다. 흰옷 입은 사람들이(다미선교회) 자신들이 휴거 당하여 하늘 나라에 올라간다면서 집단으로 모여 난리를 쳤습니다. 분명 10월 28일에 예수님이 오셔서 자신들을 하늘나라로 데리고 가야했는데, 그래서 열정적으로 찬양하며 함께 분위기가 업되어 하늘만을 바라보았는데 저녁 12시가 넘어서도 그 예수님은 오지 않고 그들은 여전히 땅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단이 있구나 하고 바라보았던 것이 시간이 흘러 이단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여 이 책에 나오는 것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 11개나 됩니다.

“신천지, 하나님의교회, 구원파, 통일교, 안식교, 전능신교, 여호와의 증인, JMS, 만민중앙교회, 은혜로교회”가 대표적입니다.

자칭 재림 예수라고 말하는 자들이 한국에만 하더라도 50명이 된다고 하니 아마도 공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이단을 더한다면 100여개나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외에도 타종교에도 이단과 같은 사이비들을 더한다면 세상에는 미혹하는 존재들이 수없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책은 핵심 이단에 대하여 그 교리와 실제 상태에 대해 매우 엑기스적인 자료만 잘 뽑아서 한눈에 보도록 하였습니다. 특히 이단에 대한 계보를 보여주면서 그 뿌리에 통일교 문선명과 전도관 박태선과 장막성전 유재열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모든 이단의 시초가 여기에서 비롯되었고 여기에서 업그레이드 되었다는 것입니다.

6.25 전쟁을 전후하여 한국교회 이단운동들은 본격화 되었고 지금까지도 계속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다.

끝이 안 보이는 이단들의 계략에 기존 정통 교회는 바른 교리와 가르침으로 무장하여 대처를 해야만 이단들에 의해 교회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가정이 잘 지켜질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그렇습니다. "젊고 똑똑한 사람들이 이제는 이단에 빠지고 있습니다."

나날이 업그레이드 되고, 교묘해지는 포교 방법으로 사람들의 정신과 삶을 망쳐 놓고 있는데 마치 백신 주사처럼 예방과 대처가 꼭 필요한 상황입니다.

이 책 한 권을 통해 이단에 대한 매우 실용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단의 현상은 성서에서 미리 예언 된 현상입니다. 신약성경 마태복음 24장에 그 내용이 기록 되어 있습니다. 몇 부분만 인용해 보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마태복음 24:3-5, 10-12

거짓에게 미혹되지 않기 위해서는 정신을 차리며 항상 징검다리는 건널 때 돌을 두드리고 건너라는 말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옳은 종교는 사회와 가정과 삶을 건강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단은 반드시 가정과 사회와 삶을 망가지게 하고 패허로 만들어 버립니다.

극단적인 시한부 종말론자들은 한 마디로 다 가짜로 보면 됩니다.

칸트의 말입니다.

참된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신이나 영혼에 관해서, 또는 과거와 미래는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해서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일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삶에서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아니 될 일을 확실히 아는 것이다.

인생의 길 _톨스토이

참된 신앙을 깨닫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맹목적으로 신봉해 온 종전의 신앙에서 잠시 벗어나, 어렸을 때부터 받아온 모든 것을 이성에 의해 측정해 볼 필요가 있다.

신을 알지 못하는 것은 나쁘지만, 신이 아닌 것을 신이라고 여기는 것은 더욱더 좋지 않다.

인생의 길 _톨스토이

지금은 종교인들만 아니라 비종교인들도 이단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이단은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가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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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나의 자서전 - 김혜진 소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24
김혜진 지음 / 현대문학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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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7페이지에 이르면 이렇게 시작하는 문구가 있다.



나는 남일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우체국 옆 2층 주택.

남일동이라는 특별한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면서 '홍'이라는 아이를 통해 이 사회의 어도운 모습을 비춰주고 있다. 즉 재개발 이후 빈부 격차로 양분된 지역사회 갈등으로 황폐한 곳, 대물림되는 빈부에 대한 불안과 집에 대한 집착이 만들어낸 우리 사회의 위태로운 욕망을 이 책은 그려내 주고 있다.

픽션 같지 않는 글이 책의 글귀 속에서 보여진다고 할까?
마치 헤르만 헤세가 자신의 얘기를 데미안에 투영해서 썼듯이 저자는 홍이씨가 되어 이 책을 써 내려가며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편견과 배제가 만들어 낸 우리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즉 주류에서 소외된 이들의 절박함과 욕망을 담담하게 그려내면서 자신이 어릴적 받아 온 그 서러움과 차별을 문학을 통해 표출하여 사회의 어두운 면을 바로잡아 보려는것같다.

남일동이라는 마을을 중심으로 해서 '집이 가진 삶의 애착'과 사람들의 차별이 서려있는 이곳을 벗어나는 존재가 되는 것이 어쩌면 꿈인 사람들의 마음을 보여주면서 저자는 인간의 삶이 가진 복잡미묘한 감정을 쏟아내 주고 있다. 

애잔함과 뭔가모를 스산함, 불합리한 세상을 향하여 불이라도 질러서 모두 날려버리고픈 동질감을 저자는 독자에게 안겨다 주며 한국 사람으로 집이 가진 의미와 어떤 지역이라는 선긋기를 통해 차별과 혐오라는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의 불합리한 심리를 마치 카뮈처럼 부조리버린 세상을 고발하며 사람들에게 뭔가 호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편의 영화를 본 거와 같은 느낌을 주는 책이 바로 오늘 내가 본 "불과 나의 자서전"이라는 책이다.

자기 응시를 통해 혐오를 비추는 불빛,
패배가 난들어내는 뜨거운 눈빛.

이 두 가지를 이 책에서 선명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다음 책이 기대가 되고, 또한 그가 출판한 책도 궁금해진다.
또한 이 책을 읽은 느낌을 남겨본다.

어쩌면 저자는 추억 속의 집이 그대로 남아 있어 삶의 그리움을 붙잡아 두려고 하는 지도 모른다. 
그때의 아련한 추억과 내 어릴적 추억은 삶의 행복이자 마음의 낙원이기에 재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내 추억을 
뭉게 버릴 수 있으니 차라리 추억 없는 현대 문명의 화려함과 편리 보다는 나만이 간직한 추억 속의 보물을 홀로 간직하고자 저자는 대여섯살의 주소지를 외면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실제 고향을 가보면 오히려 개발이 되어 서글프다. 
내 삶의 자락들이 한꺼플 두꺼플 벗겨져 나를 이방인처럼 맞이하게 만들고, 
나도 이방인처럼 내 고향을 바라보게 된다. 

오랜 과거의 집은 나만의 낙원이다. 
절대로 건들 수 없는 영역이기에 나는 저자처럼 나만의 추억을 간직하고자 나만의 방식으로 과거를 그려보고 글로서 그리움을 적어보고자 한다. 

그때가 언제인지 모르지만 나의 자서전도 책으로 출간되기 바라면서...

아래는 마음에 남는 글을 실어본다. 
 

한 마을에도 일평생이라는 게 있다면 남일동의 시간은 어디쯤일까?

어떤 삶은 조금씩 나아지고, 또 다른 삶은 내리막길을 걷고, 느닷없이 중단되는 삶이 있고, 어느 날은

흐리고 어두워서 앞이 보이지 않다가 또 어느 순간엔 무서울 정도로 환한 날이 계속되고. 그런 종잡을 수 없는 많은 순간들을 응축해 놓은 것이 삶이라면 남일동은 어디쯤 지나고 있는 것일까 가늠해본다.

p50

주해는 그마저도 어쩔 수 없는 일로 받아들이는 모양이었습니다....사람들 마음을 정확히 알 수 있나요. 
안다고 해도 어쩔 수 없고요. 전 동네분들이랑 잘 지내고 싶어요.
주해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나도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오해하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어쨎든 좋은 의도일 거라고, 고마운 마을일 거라고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p63

홍이 씨는 주해라는 사람을 통해서 삶의 담대함과 무미한 신경전, 삶의 아웅다웅하는 모습 보다는 태연한 받아들임을 배워나가는 것이 아닐까?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나는 그날 내가 보았던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비로서 희망이라 할 만한 것을 가지게 된 한 사람의 얼굴이었습니다. 삶이 지금보다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 틀림없이 그렇게 될 거라는 확신. p72 

내게 주해는 이웃이었고 친구였으며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누군가였습니다. 그게 누구든 나는 다시금 실패하는 관계를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p75-76

누군가가 누군가에게서 집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누군가의 슬픔과 불행을 목격하는 대가로 싼 집을 구입할 때 각오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때는 알리가 없었습니다. p81

홍아, 사람이 사는 데 가장 필요한 게 뭔지 아니? 집이다. 사람은 자기 집이 있어야 떳떳하게 살 수 있어. 두고 봐라. 앞으로 점점 더 그렇게 될 테니까. p85-86

그리고 나는 깨달았습니다.
어머니가 결혼식장에서 먹었던 싸구려 뷔페 음식을 토해내던 그날, 이 집이 어머니를 슬프게 만든다고 생각했던 그 밤에, 집을 가진다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즐겁고 기쁘기만 한 일은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p109

홍이 씨, 남일동에 살아본 적 없죠? 집이 없어서 불안해본 적 있어요? p 156

주해가 몰고 온 변화는 다만 눈에 보이는 그런 것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이곳이 달라질 거라는 믿음, 바꿀 수 있다는 자신. 
주해가 보여준 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내내 설마설마했고, 망설이다가 오래전에 포기해버린 그런 마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주해가 일으켜 세운 건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잔뜩 웅크리고 있던 사람들의 마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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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가 나에게 말을 걸어올 때 - 죽음, 삶에 답하다
김봉현 지음 / 지식의숲(넥서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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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통해 종교 밖에서 종교를 오해하셔던 분들이 오해를 풀고,

 

종교에 관심을 두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종교는 좋은 것이다. 어떤 종교도 악을 추구하지 않는다

 

종교는 유익한 것이다. 종교는 수천 년 동안 진지한 태도로 인간이 어떤 존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해왔다.

 

이 책은 종교에 관한 한편의 대서사시이다.

 

 

의 의미를 찾아 헤맨다면 이 책을 통해서 분명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종교에 대한 무지와 선입견으로 종교가 주는 선한 혜택을 받아 누리지 못하는 자에게 이 책은 저자 자신이 종교에 대한 잘못된 사고를 말끔하게 씻겨주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혀 준다고 말한다.

 

그래서 종교가 이제는 삶이 되고 가치가 되어 자신의 삶을 더 이롭게 만드는 계기가 되리라 생각하고 있다.

 

한국인 작가로서 이정도의 깊이와 종교적 세계관을 짚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어줍잖은 학문적 지식의 나열로 종교와 신을 논한 책을 보며 실망했었는데 이 책은 이런 모든 종교적 갈증과 종교에 대한 잘못된 가치관을 완전히 씻겨주며 길을 보여준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인 잣대와 논리적 귀결과 깊은 사고와 내적 진리로 즉 직관적인 진리로 종교라는 대서사시를 써내려간다.

 

상식이 바라본 종교

 

 

 

종교를 언급함에 있어 '기우제'를 언급하는 것은 올바르게 보인다. 그 이유는 다른 것과 다르게 가뭄은 인간이 넘을 수 없는 경계선이 있기 때문이다. 즉 홍수나 전쟁은 인간이 가진 힘으로 대처 가능한 영역이지만 가뭄은 딱히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즉 피할 곳도 없고, 싸울 대상도 없다.

 

 

 

사람들은 비가 오지 않음으로 누군가 여기에 대해 외친 '신의 진노 때문'이라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래서 가뭄의 이유가 신의 진노라면 그 마음을 풀어주면 된다는 생각이 모여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우제를 드린다. 확신은 없다. 하지만 이 말이 맞기를 바라며 드린다. 이렇게 기우제는 시작되었다.

 

 

 

그런데 기우제를 드린다고 바로 비가 오지 않는다. 그런데 왜 기우제를 드렸나? 그건 기우제를 드리면 비가 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기우제는 '비가 올 때까지' 드려졌다. 사람들의 절박한 기다림 속에 기도한 결과 하늘은 응답한 것이다. 이 경험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선사하였다.

 

 

 

'비를 내리는 신이 있다. 신이 진노하면 가뭄이 찾아온다. 하지만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면 신이 마음을 돌이켜서 비를 내린다.'

 

 

 

이렇게 종교는 시작되었다.

 

 

 

그런데 우리의 삶에도 같은 가뭄의 시간이 찾아온다. 시간이 지나 금방 해결될거 같으면 좋은데 가뭄과 같이 단조로운 삶이 지속된다. 이때 누군가 자신이 대안을 가지고 있다 말하며 우리의 미래가 신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 가운데 귀가 열린자들은 동참하며 신에게 기도한다. 그런데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문제가 해결된 사람도 있다. 이때 제관(제사를 맡은 관원)들은 좋은 결과를 만난 사람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이런 사람들은 기우제를 통해 비를 만난 사람과 같은 종교적 체험이 생긴 사람들이다. 그들은 기도가 응답된 감격을 가지고 있다. 제관들은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며 설득한다. 반면 실패한 자들이 있을 것인데 이런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무대 아래 어두운 곳으로 모인다. 대부분의 사람은 실패한 사람을 보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기도가 응답이 없는 이유는 제대로 기도하지 않았거나 실패한 원인을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심지어 실패한 본인도 자신에게 문제가 있기에 응답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오늘날에도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라고 저자는 말한다.

 

기우제가 종교의 시작이고, 미래에 대한 불안이 지금도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 앞의 미래에 대해 우리는 알지 못한다. 종교는 알지 못하는 부분,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 그건 신의 영역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그 신에게 기도하는 것을 통해 그 부분에 개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무지에 대해 신으로 대답하는 것' 이것이 오늘날 종교에 대한 정의이다.

 

 

 

코로나로 인해 종교는 사실 사회적으로 욕을 먹고 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는 인간 삶의 자리에 언제나 함께하고 있다.

 

 

 

이것은 종교가 비단 나쁜 용도로 사용되기 보다는 삶이 버겁고 힘든 사람들에게 언제나 따뜻한 위로가 되고 안식처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를 멀리서 볼 때는 비판의 대상이지만 종교 안에 들어오면 사실상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 없다.

 

 

 

사실 심리학 관점에서 종교를 바라보는 사람은 따뜻한 시각으로 종교를 정의한다. 즉 거짓 희망이라도 그 희망이 삶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게 한다는 것이다. 환자에게서도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환자보다 신이 자신을 치료해 줄 거라고 믿는 환자의 완치율이 더 높기에 상담자들은 종교를 권면하고 있다.

 

 

 

사회적 관점에서 종교를 바라보는 사람은 차가운 시선으로 종교를 대한다. 신을 기다리기 보다는 저수지를 만들어 가뭄을 이겨내는 방식을 택한다. 사람들이 어떤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면 해결 될 수 있는 문제를 안일하게 대처함으로 인류는 사실 정체되고 발전하지 않았었다. 그건 자신이 해결해 나가야 하는 문제를 모두 신에게 미뤘기 때문이다.

 

 

 

이렇게 종교는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사회를 정체되게 만들므로 종교는 나약한 사람들에게 기생하며 진보를 방해하는 인류의 적으로 생각한다. 더군다나 종교가 지금까지 사회 속에서 전쟁을 벌이고, 테러를 행하고, 탄압하며 서로 종교끼리 싸움으로 종교는 이제 넌더리나는 제품이 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종교가 꼭 그런것만이 아님을 차근차근 풀어나가면서 종교가 가진 기본 진리를 전한다.

 

특히 종교는 거짓 희망을 파는 곳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곳이며, 깨달음을 찾고, 사랑을 추구하며 바르게 살아가는 삶을 권면하는 곳이라고 말하며 '오해와 비판을 여러가지 설명으로 해소'하고 있다.

 

 

 

그 가운데 '영역오류'의 말이 인상적이다. 두 가지 예를 드는데 한 가지만 언급하면 의료에 대해 경제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의 의료 현실은 왜곡되었다. 그 이유는 고급 인력과 첨단 장비를 통해 대형병원이 유지되려면 더 높은 가격으로 환자를 맞아야 한다. 즉 평범한 사람들이 대형 로펌의 변호사를 만날 수 없는 것처럼 대형 병원의 교수는 부유한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것이다. 경제 논리에서 보면 말이다. 그러나 의료 논리에서는 이 논리는 틀렸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의업에 종사하는 일원이 될 때 자신의 생애를 인류 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기 때문이다. 의료는 상품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돈이 없다는 이유로 생명의 가치가 훼손된다면 이 사회는 비참한 사회이다. 따라서 의료는 의료의 논리로 이해되어야지 경제 논리로 보면 심각한 문제를 낳는다.

 

 

 

이와같이 종교는 종교의 관점으로 다루어야 한다. 자신의 생각과 논리로 종교를 바라보면 그 익숙한 논리가 종교를 오해하는 동시에 심리적, 무의식적, 폭력적으로 종교를 대하게 된다.

 

 

 

"모든 종교는 들어가보면 선하다. 어떤 종교도 인생을 낭비하고, 타인을 공격하며, 자신을 망치도록 가르치지 않는다."

 

 

 

 

 

© msandersmusic, 출처 Pixabay

 

그러면 왜 지금의 종교는 우리가 볼 때에 다 나쁘게 보이는가?

 

 

 

그건 저자가 말하듯 우유가 상온에 있으면 부패하듯 종교가 상온에 있었기 때문에 부패했다는 것이다.

 

즉 원래 종교는 타 종교와 분쟁하거나 공격하지 않는다. 서로 의견과 관점이 다를 뿐이지 모든 종교는 선을 가르친다. 그러나 종교가 부패하면 서로를 악으로 공격한다. 또한 종교가 커지면 종교는 권력을 얻게 되는데 건강한 종교는 그 권력을 사회적 약자와 폭력적 세상을 대항하여 타락한 문화에 반대의 목소리를 낸다. 그러나 종교가 부패하면 그 권력을 통해 종교의 이익을 구하게 된다. 또한 종교가 세속화되고 교조화되는 것도 결국 종교가 상온에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서 제 기능을 잘하면 종교는 오히려 사회에 약이되고 사람들 마음을 충분히 위로하는 동시에 진리의 길잡이가 되어 더 좋은 사람으로 가치있는 존재로 세상을 살게한다. 이것이 사실 종교가 하고 있는 것이라고 저자는 강력히 말한다. 여기서 어떤 사람의 글귀가 떠올라 적어 본다.

 

 

 

신앙은 인생의 힘이다. -레프 톨스토이

 

신의 존재를 믿는다는것, 인간의 행복은 이 한마디로 다한다. -레프 톨스토이

 

종교가 없는 도덕률은 방향을 찾지 못하는 항해와 같다. 구름에 별이 보이지 않는 바다에서 선박의 위치를 알려고 하는 노력과 같다. <H.W. 롱펠로우/ 카바나>

 

종교는 인격도야의 근본이다. 페스탈로치

 

종교의 영원한 가치는 그것이 소망에 대한 도전을 이끌어 주고, 사람의 마음에 희망을 안겨 주는데 있다 - E.M.홉킨스

 

 

 

이 책은 이 말이 사실임을 증명해가는 변증서와 같다. 줄칠 곳도 많고, 생각해 볼 것도 많고, 이치적으로 논리적으로 말하기에 거부할 수도 없는 수사법이 이곳에 펼쳐져 있다.

 

 

 

한 친구의 죽음을 통해서 다섯명의 친구가 생에 처음으로 '죽음'을 자신과 동일시하게 되면서 각자 다른 방식으로 그 죽음의 의미를 새기는 중에 "종교""죽음과 삶에 실제로 답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 저자는 종교가 답인 세상을 말해주려고 오래 되었지만 새로운 네 개의 시선으로 종교를 바라보게 한다.

 

새로운 시선이란 "세속주의, 과학주의, 명상종교, 계시종교"에 관한 것이다.

 

죽음에 대해 인류는 이 네가지의 답을 가지고 사실 설명하고 있고, 이해하고 있고, 살아가고 있다.

 

 

 

사실 우리의 삶은 네 개의 시선이 전부 포함된 사회 속에서 살아가며 그것을 은연중에 자신이 그런 사고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평소에는 세속주의자이다. 그래서 죽음을 무시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종교에 대해서 논쟁할 때는 과학주의자가 된다.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장례식장에서는 계시종교를 믿는다. 돌아가신 고인이 지금 좋은 곳에 가셔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고 말이다. 사회적인 이야기를 할 때는 명상종교를 믿는다.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며 그렇지 않은 사람을 향해 비판한다. 이처럼 우리는 모순된 답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러한 삶은 어떠한 답도 그 안에 깊이 스며들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유행처럼 적용된 종교는 그 사람에게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한다. 즉 그저 사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자신으로서 네 가지 중 하나라도 제대로 가질 때 삶은 새롭게 나를 형성하여 삶이 주고자 하는 '선물들'을 다 받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네 가지의 시선은 네 가지의 종교성이다. 즉 내가 믿는 가치관이 곧 나의 종교성이기에 내가 어떤 가치관에 속하고 있는지 제대로 살피면서 자신의 삶을 제대로 가꾸어 나가기를 바라는 것이 저자가 요구하는 종교성이다.

 

 

 

이렇게 사는 것이 전부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종교는 우리에게 과연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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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마을의 공유경제 소동 - 2020 문학나눔 선정 도서 파랑새 인문동화 3
안선모 지음, 로사(김소은) 그림, 김황식 추천 / 파랑새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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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조용한 마을 에코 캐슬에 오지랖 박사님이 이사를 오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제발 옆집에 제대로 된 사람이 들어왔으면 좋겠는데...."


 주인공인 '윤기'의 어머니가 비어있는 옆집을 보며 심각하게 말했습니다.


"엄마 어떤 사람이 제대로 된 사람이야?"


"학벌 좋고, 좋은 직장 다니는 부모에 아이들이 공부 잘 하는 집이면 최고지 뭐."


공유경제에 대한 아이들의 눈 높이에서 이 얘기는 시작됩니다.
'박글쎄요'라는 주인공의 원래 이름은 박윤기입니다.
그런데 왜 이름이 이상할까요? 그건 무슨 질문을 하든 '글쎄요'라는 말로 대답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이 살고 있는 마을은 '에코 캐슬'이라는 곳입니다.
캐슬이라는 단어와 함께 이 책을 읽다보면 한동안 인기 프로였던 "스카이 캐슬"이라는 드라마가 연상됩니다. 드라마에도 한 가정이 이사를 오면서 얘기가 시작되듯이 이 책에서도 '오지랖 박사'라는 분이 이사를 오면서 조용한 마을이 활기찬 마을로, 이웃이 함께 공유하며 나눔을 하는 마을로 바뀌게 됩니다.

아저씨는 특이했으며 그래서 처음에는 마을 사람들이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아저씨는 자동차도 없으며, 소파도 없고, 텔레비전도 없고, 세탁기도 없고, 에어컨도 없고, 더군다나 갑자기 자신의 집을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도록 내어주는 '에어비앤비'라는 것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불편한 이웃이 된 오지랖 박사님은 조금씩 조금씩 사람들에게 다가가 '공유경제'를 언급하며 마을 사람들을 동참시켜 가면서 마을 사람들을 하나되게 만들고 서로가 가진 물건이나, 자동차, 채소와 같은 것을 나누기 시작하면서 마을은 전에 없던 화기애애함이 깃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불편한 이웃은 이제 행복한 이웃이 되었고 마을은 '무엇이든 나눌 수 있는 구조(모습)가 되어' 함께하는 기쁨을 누리게 되는 행복한 이야기랍니다.


집, 자동차, 공구, 명품...‘물류’까지!


‘공유경제’는 2008년 미국에서 처음 대두된 개념이라고 합니다. 금융 위기로 세계 경제가 휘청일 때 하버드대의 로렌스 레식 교수가 불황을 극복할 대안으로 공유경제를 제시하게 됩니다. 그가 정의하는 공유경제는 개인이나 기업이 각자의 자산이나 서비스를 공유하는 활동 전체를 의미하는데 레식 교수는 공유를 통해 자산의 가용성을 높이고, 소유비용 부담을 덜면 경제 성장을 촉진하고 지속가능성을 구현할 수 있다고 언급했죠.


그래서 2008년 공유숙박 플랫폼 에어비앤비를 시작으로 다양한 공유경제 서비스가 등장했습니다. 

아참 에어비앤비를 설명하고 지나가야 겠지요. Airbnb는 세계 최대의 숙박 공유 서비스에요.  

즉 손님에게 에어베드(air bed)와 아침(breakfast)을 내줬다는 점에 착안해서 만들어진 게 지금의 에어비앤비라고 합니다. 에에비앤비를 기점으로 교통, 거주, 유통 분야에 진출한 공유경제 기업들은 사람들의 일상에 빠르게 스며들었으며 시장조사기관 Pew Research Center에 따르면, 미국 성인의 72%가 공유경제 서비스를 사용해본 적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실제 공유경제 서비스에 자신이 소유한 공간이나 차량 등을 제공해 본 적 있다고 답한 사용자는 22%에 달하였습니다. 공유경제가 전 세계를 관통하는 흐름이 된 지금도 미국의 공유경제는 세계시장 규모의 60%를 차지하면서 가장 진취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산업통상자원부에서 차용)


미국의 경제학자 제레미 리프킨은 <소유의 종말>이라는 책에서 "개인의 소유는 줄어들고 공유 영역이 넓어질거라고 예측"했습니다. 그 예측대로 세상은 빠르게 공유경계 플렛폼을 구축해 가고 있으며 이제는 소유하고 늘어 놓는 삶보다는 함께 공유하며 "더불어 살면서 효용성과 환경문제까지도 고려한 삶의 방식"을 택하는 시대가 왔습니다. 


이미 자전거와 전동킥보드는 도시 지역에서 공유를 통해 쓰고 있으며 얼마 전까지 차량 공유 서비스인 "타다"로 인해 한국 사회는 시끌벅적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논란은 결국 현대인들에게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가져 올 수 있는 공유개념임을 우리는 받아들여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공유경제가 모든 이들에게 장점과 효율로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건 이 책에 나오는'오지랖 박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데 '어떤 사람에겐 좋은 제도가 또 다른 사람에게는 좋지 않는 제도가 되어 큰 피해를 당하는 일이 생긴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우버 택시를 이용하는 사람이 늘수록 기존의 택시 기사들은 일자리를 빼앗기게 되면서 생계가 곤란해 지게 됩니다.


특히 공유경제 시스템에 큰 문제는 이 시스템을 이용하는 소비자가 피해를 보는 경우 어디서 보상을 받을지 애매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즉 사용자를 위한 앱은 제공해 주지만 개인 간의 서비스 교환은 책임을 지지 않으니 사고가 날 때 법적인 보호장치가 미비하다는 거지요.


물론 이 모든 것은 보완하고 수정해 나가야 하지만 주인공인 '윤기'가 말하듯 "그러고 보면 세상 모든 만물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언제나 좋을 수도 없고 언제나 나쁠 수도 없다."는 말이 맞아보입니다.


주인공 박윤기를 통해서 본 '조용한 마을의 공유경제 소동'은 아이들의 눈 높이에서 얘기를 재미있게 이어나갑니다. 동화라면 동심을 불러 일으키며 재미있고 신비한 이야기만 있는 줄 알았는데 지금 현실의 문제도 다루고 앞으로의 미래도 생각하게끔 하는 동화가 나와서 세계와 주변을 보는 안목을 길러 주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나 생각됩니다. 


공유경제라는 어려운 얘기가 동화라는 형태를 통해 새로운 옷을 입고 독자인 어린이들에게 매우 유용하게 읽히는 서적이 되리라 봅니다. 아이들 독서 토론으로도 좋고, 지정도서로도 정하여도 충분한 교육적 가치가 있는 도서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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