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역사 다이제스트 100 New 다이제스트 100 시리즈 2
손주영.송경근 지음 / 가람기획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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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생각하면 유럽이나 동이사아의 여행지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고고학적인 관심이 있고 피라미드나 스핑크스에 관심이 있는 자는 특별한 여행지인 이집트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알다시피 피라미드(Pyramid)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다. 또한 이집트는 고대 문명의 발상지이다. 고대 이집트부터, 헬레니즘 제국, 비잔틴 제국, 이슬람 제국, 오스만 제국 모두가 나일 문명에서 비롯되었다. 다시 말해 헬레니즘-로마-비잔틴-이슬람 문명 모두가 이집트 문명이라는 토대 위에서 활짝 꽃을 피웠다.

여행을 다녀온 분들에 의하면 이집트 여행은 쉽지 않은 여행이라고 한다. 치안상태는 물론 사기꾼(바가지)이 너무 많으며, 거리는 인도처럼 더럽다고 한다. 그러나 인류 최초의 삶과 문명이 시작된 나라이기에 이런 저런 것을 가리지 않고 장엄한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대하기를 원한다면 이집트 여행은 신선한 여행이 될 거라고 본다.

이집트라는 나라는 다큐멘타리가 나오면 꼭 챙겨보는 편이다. 그리고 이집트는 성경에 나오는 모세와 연관되기에 그 나라의 역사와 배경이 궁금하였다. 그러던차에 이집트 역사에 대한 100장면을 간추려 정리된 책이 발간이 되니 독자에게 그 궁금증을 해소하는 기회가 되었다.

이집트의 역사는 7,000년이라는 장엄한 역사 속에서 시작되었다. 오늘날 이집트의 인구는 약 6,200만 명이고, 국토의 면적은 1,002,000km²이다. 우리 남한 땅의 10배가 넘는다. 그러나 경작할 수 있고 사람이 사는 곳은 약 4만km²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길게 남북으로 흐르고 있는 나알강변 파욥의 침하 지역, 서부 사막의 오아시스지역, 북쪽 나일강 하류의 부채꼴 모양의 삼각주 땅을 빼고 나면 나머지가 모두 사막(전 국토의 97%)이다.

그런것을 보면 참 아쉬운 나라라 생각된다. 그러나 과거 이곳은 찬란한 문명의 시작이 이루어진 곳이기에 비록 전국토의 3%만 사용되더라도 그 역사의 찬란함은 놀랍다고 하겠다. 이들이 쓰는 통화는 이집트 파운드를 쓰고, 1인당 GNP는 마화 1,021달러이다. 국민의 90%가 무슬림이며 대다수가 정통파라 불리는 순니들이다. 기독교 인구도 자리잡고 있는데 7%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좀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절반 이상이 그리스도교 단성론과 콥트교들이다.

머리말만 읽어도 전체적인 이집트에 대한 그림이 그려진다. 조금 더 설명하자면 이집트는 고대부터 두 지역으로 나뉘어 발전했다. 북부 나일강 하루와 삼각주 일대는 '하이집트'라 부르고, 나일강 계곡의 나머지 남부 지역은 '상이집트'라고 일컫는다. 이 두 지역은 하나로 통일되어 강력한 왕조가 세워지고 번영된 문명시대를 열기도 하였다. 이집트의 삼각주는 세계에서 제일 큰 삼각주로서 지중해안을 따라 200km가 모두 비옥한 땅들이다. 총 1만 5,0000km²의 부채꼴 모양의 삼각주는 곡창지대를 형성하고 있는데 오늘날까지 이집트 농업의 심장이자 모든 생산품의 주산물지역이다.

책은 총 4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은 〈고대 이집트 시대 BC 3000sus~BC 341년〉 2장은 그리스 로마 시대 〈BC 332년~AD 641년〉 3장은 〈이슬람 시대 641~1798〉 4장은 현대 이집트 〈1798~현재〉로 구성되어 있다. 어느 장이나 다 역사적 재미가 넘쳐난다. 아쉬운 것은 그림(사진)자료가 좀 더 칼라로 선명했으면 하는 바다.

이집트 나일 문명의 태동부터 시작하여 오늘날의 시간과 달력에 대한 정보, 특히 밤과 낮을 12시간 나눈 것은 고대 이집트인들이 최초라고 말해준다. 그만큼 이 문명은 뛰어난 문명이었다. 그리고 이집트하면 미라가 생각날 것인데 이것은 죽은 다음의 세상을 강하게 믿었던 신앙에서 비롯된 산물임을 알게 되었다. 이집트는 사제를 중요하게 여겼는데 그들은 영혼의 수호자로서 사람들에게 사후 세계에 대한 동경을 주었다. 즉 서쪽 산맥 너머에 있는 오시리스의 세계에 영혼이 머무른다고 여겼으며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살아 생전에 어떤 행동을 했는지를 죽음의 신 오시리스에게 판결을 받아야 한다. 만일 저울에 달릴 때 죽은자의 심장이 깃털보다 무겁다면 죄가 무겁다는 뜻이기에 그는 소위 멸망을 하고 수평이면 그는 영생하여 오시리스의 왕국에 들어가게 된다. 이렇게 사후 세계를 강조하다 보니 이집트인들은 일찍부터 삶이란 단지 사후의 세계를 준비하는 짧은 순간이라 여겼고, 나일강 계곡은 죽음에 바쳐질 땅으로만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한 부분을 또 하나 소개하면 원래 이집트인들은 나일강 동쪽은 사람들이 사는 이승세계로 삶이 존재하는 곳이고, 강 서쪽은 사자들이 사는 저승세계로 죽음이 존재하는 곳이라는 관념이 있어 무덤은 언제나 서쪽에 두었다.

모세에 대한 궁금중에 책을 읽다 말다 훅 넘어가 모세가 이끈 유대인의 출애급 내용을 보았다. 학자들의 말로는 홍해는 가공의 이야기라고 하며, 출애급은 15세기에 시작되어 13세기까지 계속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출애급은 이스라엘에게 있어 역사적으로 커다란 사건이지만 이집트의 역사기록은 헤브라이 백성들의 출애급에 대해 이렇다 할 언급이 없었다고 한다. 이것으로 보아 이집트인들에게 이스라엘의 출애급은 소수민족 혹은 노예계층에서 일으킨 사소한 사건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해준다. 그러나 역사라는 것은 망각과 함께 잃어버린 자료들로 뭉쳐진 스토리로서 기록이 배제되거나 소실 되었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론적으로 지금 현대의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평화 협정으로 인해 평화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찬란한 이집트의 현재 모습은 예전의 영광을 다 잃은 상태이다. 현재의 대통령은 엉망이 된 이집트 경제를 일으켜야만 하는 숙제와 함께 아랍국가와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할 것이다.

이 책은 문명이 시작된 이집트, 그 나일 문명은 어떻게 시작됐고, 어떤 시간을 거쳐왔을까에 대해 100가지 역사적 장면을 가져와 설명해주는 책이다. 이집트의 역사를 읽는 것은 세계 패권이 부딪히는 역사를 읽어나가는 것과 함께 우리에게 아직은 낯선 아랍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다. 역사 한 바퀴를 도니 이집트라는 나라가 더욱 친근해지고,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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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마지막 황실
이해경 지음 / 유아이북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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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6일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래 왕위 계승을 기다렸던 찰스 3세가 마침내 대관식을 치르고 영국 윈저왕조의 5대 왕에 오르는 절차를 마쳤다. 그러나 화려한 대관식에 대한 관심 만큼 국왕을 보는 영국인들의 지지는 열렬하지는 않고 어둡다. 일각에선 영국의 현 경제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호화로운 대관식을 치르는데 대한 비판이 제기됐다. 비용이 최소 1억 파운드(1685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됐는데 1953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대관식 비용의 약 2배이다. 더군다나 세금 낭비에 특권 논란, 젊은 층의 무관심까지 군주로서 적지 않은 과제가 찰스 3세의 어깨에 짊어졌다. 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60%가 찰스 3세를 국왕으로 인정하는 데 반대한다고 답했다. 사실 대관식은 매우 낯설다. 지금 시대에 맞지 않는 억지스러움이 현시대를 비집고 들어서려고 하는 격이다.

본 책은 대한제국 황실에 대한 회고록과 같은 책이다. 1997년에 저자는 《나의 아버지》를 펴낸바 있다. 주인공은 아버지 의친왕이다. 그러나 이 책은 고종 황제의 손녀이며 의친왕의 딸인 이해경 왕녀인 자신의 얘기다. 저자는 이 책을 쓴 의도를 두 가지로 밝힌다. 첫째, 왕녀로 태어나 민간인이 되어, 또 재미 동포가 되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여정을 정리하기 위해서이다. 둘째, 대한제국의 황자였던 아버지 의친왕에 대한 왜곡된 평가를 바로잡고 싶은 마음에서라고 한다.

누구나 그렇듯이 아버지라는 존재가 역사 속에서 계속 부정적으로 평가되면 후손 또한 좋지 않은 이미지로 각인이 된다. 일제에 의해 기록된 역사를 보면 "이강은 몸이 불편한 때를 빼고는 매일 밤 술을 마시고 기생을 끌어들였다"고 하지만 사실 이것은 일제의 핍박과 삼엄한 감시로 인해 매일 술집에 다니는 척해야만 목숨이 부지되는 상황이기에 방탕한 모습은 실제 모습이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본 책에도 언급되었듯 아버지 의친왕은 생전에 열 네 번이나 시해를 당할뻔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항상 권총을 휴대하고 다닌 것이다.(이 사실은 아버지가 수양아들로 삼으셨을 만큼 각별한 친분이 있던 황재경 목사님을 통해 들은 얘기다)

무엇보다 아버지 의친왕은 조선통감이던 이토 히로부미가 "당신을 왕으로 만들어 줄 테니 내 말만 들으라"고 할 때 "네 이놈, 무슨 개수작이냐"라고 호통을 당당한 모습이었다. 그때 신변의 위협을 느껴 영국 공사관으로 피신하면서 보호를 받으셨다. 이렇게 아버지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는 가운데서도 의기 있는 행동으로 당시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의 권세를 가졌던 일본 사람을 굴복 시켰다고 저자는 기록한다. p212-213

하세가와 요사마치가 조선 주둔군 사령관으로 있었을 때 의친왕이 하루는 찾아가서 무슨 부탁을 하였느나 사령관이 잘 들어주지 않았다. 여기에 격분한 의친왕은 그 자리에서 별안간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데리우치에게 하던 식으로 "네 이놈, 그만한 일도 안 들어주려면 무엇 하러 여기 나와 있느냐"하며 금세 쏠 기세를 보였다. 하세가와는 혼비백산하여 "전하, 시키시는 대로 하겠습니다"하고 무수히 빌어서 위급한 찰나를 모면했다고 한다. -이증복의 기사 p215

저자 왕녀는 아버지에 대한 애증이 가득하다. 이 책은 자신에 대한 얘기이지만 아버지의 그늘진 모습을 햇빛으로 가득 채워 나가는 기록이다.

일단 이 책은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실 가족의 삶을 회고한 것이라 독자로서 미지의 영역처럼 호기심 가득한 내용들이라서 좋았다. 저자는 세 살 때부터 궁에 살았다. 왕의 딸로, 황제의 손녀로, 역사책에 나오는 사람들의 가족으로 살았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저자를 만나게 되면 왕녀의 삶은 어떠했는지 궁금했고, 궁 안의 비밀을 알고 싶어했다. 우선 독자 또한 머리말처럼 "얼마나 호강을 많이 누렸을까?"라고 생각한다. 소위 클라스가 우리와 다르기에 왕족이 누린 삶은 어떠했는지 궁금하다. 그래서 저자는 숨김 없이 말한다. 즉 저자는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혼자서 목욕을 해본 적이 없다. 열다섯 살까지 저자만 전적으로 돌봐주는 전담 유모가 있었다. 또한 유모 외에 사소한 시중드는 사람이 늘 옆에 있어 사소한 일까지 도와주고 대신 해주었다. 또 자동차가 귀하던 시절 가까운 거리에 있던 학교까지 자동차를 타고 다녔다. 입학 초에는 친구들이 차가운 도시락을 먹을 때 궁에서 지어 온 따뜻한 점심을 숙직실에서 따로 먹었다." 이정도면 왕녀로서의 삶이 어떠한지를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호강만큼 규칙과 법도에 속박 당하는 일로 힘들었다고 한다. 마치 깔끔하고 점잖은 감옥에 갇힌 것 같은 삶이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후반, 6.25와 같은 전쟁으로 나라가 힘들때 왕실 가족 또한 굶주리뫄 비참한 피란살이를 하였다. 그런데 오히려 '특별한' 가족이었기에 더 큰 공포와 절망감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휴전이 된 후 대한민국 정부는 황실을 박대하고 재산을 다 빼았았다. 그런 고초로 인해 가족들은 민감해 있었고, 불만이 가득찼었다. 그리하여 저자는 20대 중반에 고국을 떠나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그때가 1956년이었으며 그로부터 60년이 훌쩍 넘어 지금 저자는 근현대사의 증인으로 서 있게 되었다.

이 책은 왕녀로 지낸 시간과 함께 일제 강점기,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학창 시절, 그리고 해방을 거쳐 6․25전쟁까지의 혼란 등을 고스란히 기록하면서 더불어 우리가 알지 못한 대한제국 황실과 구한말의 숨겨진 역사를 황실 가족의 일생을 통해, 특히 왕녀의 시각으로 재조명한 기록물이다.

책을 열면 제 1부에서 궁에서 보낸 어린 날과 학창 시절에 대해 얘기하는데 특히 어린 시절 사진을 보면 왕녀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저자 이해경은 1930년 출생이다. 그러나 4세 사진과 7세 사진을 보면 이 아이는 정말 영국 왕실의 자녀들처럼 그렇게 예쁜 공주로 살아간 귀한 존재였다. 순종비가 선물한 프랑스 인형이 보이는데, 감히 그 시대에는 일반인들은 상상도 못하는 선물인 것이다.

궁 안에서의 삶과 궁 밖에서의 삶을 오고가며 보여주는 일상 생활의 모습들은 숨겨진 왕실내의 모습을 엿보는 재미로서 충분히 귀한 기록물이라 생각된다. 고종 황제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의 다섯째 딸로 태어나 근현대사의 풍파를 겪으며 드라마와 같은 삶을 산 그녀의 일기는 충분히 독자들을 매료시키며 세밀한 역사에 동참하도록 해준다. 그렇다. 저자는 대한제국 황실의 기억을 더듬으면서 정치적으로 폄하된 이야기가 아닌 실제의 역사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특히 이 책은 대한제국의 황자로 독립운동에 뜻을 펼치고자 상하이에 망명하려 했던 아버지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 책에 기록된 것이 마음에 남는다. 어머니 의찬왕비의 말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한 왕조의 마지막은 비극으로 끝이 난다. 그러므로 우리 황실이 당면한 비운은 당연히 겪어야 할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조용히 살아라"

황실 사람들이 겪은 것을 생각하면 아픈 부분들이 많다. 그러나 저자는 항상 이 말씀을 떠올리며 세상을 왕녀가 아닌 평범한 민간으로서 아픔을 견뎌내고 있다. 황실의 추억을 썼지만 독자들에겐 조선왕조의 마지막과 근현대사의 중요한 기록물로 우리에게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이 책의 한 문장

“나는 하루에 100년을 뛰었습니다.” 누가 나에게 어린 시절 얘기를 해보라고 하면 나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살던 궁과 다니던 학교 사이에는 시대적인 격차가 있었기 때문이다. 궁 안의 삶은 여전히 옛 풍습을 지키는 봉건 시대였고, 학교에는 날로 변화하는 개화 시대가 펼쳐지고 있었다. 나는 양쪽의 풍조에 다 발을 맞춰야 했다. 아침이면 봉건 시대에서 개화 시대로 건너갔다가 학교가 끝나면 개화 시대에서 봉건 시대로 되돌아가는 것이 날마다 반복되는 나의 일상이었다. p.42


- 이 글은 컬쳐불룸을 통해 도서를 협찬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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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연대
수잔 글래스펠 지음, 차영지 옮김 / 내로라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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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공감이 구원이 됩니다

어떤 책은 표지와 제목으로 인해 선뜻 마음이 동한다. 이 책은 표지 그림과 제목이 시사하듯 보이지 않지만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연대에 대한 얘기다.

아픔을 가진 자에게 공감과 위로는 따뜻함을 넘어 구원을 준다. 즉 삶을 견디게하며 용기를 준다. 요즘 또 다시 마음 다친자들의 자살 소식을 듣는다. 그 중에는 자살 싸이트에서 만난 두 남녀도 있다. 아픔을 가진자들이 자살이라는 연결점으로 서로가 연대되어 죽음이라는 용기를 가졌다.

이렇게 연대함(공감)은 삶의 가장 큰 무서움(죽음)도 이기게 한다. 어쩌면 우리 사회가 많이 아픈 이유도 서로 연대함이 적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마틴 부버의 ‘나와 너’라는 책이 생각이 난다. 독일 출신의 유대인 사상가 마르틴 부버는 인간이 맺는 두 종류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너'의 관계와 '나—그것'의 관계이다. '나—그것'의 관계는 상대방의 존재를 '기능적인 어떤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때 상대방은 언제든 다른 대상으로 대체될 수 있으며, 나의 목적을 위한 도구로서만 유용하다. '나—너'의 관계는 인격적인 관계로,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유일한 '나'와 역시 대체 불가능한 '너'가 신뢰 속에서 존재하는 관계다.

좀 더 설명하면 '나—너'의 관계는 온 존재를 기울이는 관계이며, '너'를 나의 의도에 따라 판단하지 않는다. 판단은 '나—그것'의 관계일 때 가능하다. 즉 '나—너'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이며, '나—그것'의 관계는 쓸모의 관계이다. '나—너'의 관계는 상대방을 현존하도록 만들지만, '나—그것'의 관계는 눈앞에 있는데도 상대방을 부재하게 만드는 관계다. 이 관계는 피상적이고 기계적인 관계 속에서 상대방을 무의미한 존재로 만들며 이때 '너'라는 의미는 단지 '너는 내가 이용할 수 있는 존재'일 뿐이다는 식이다. 나에게 무의미한 '너'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 마음의 연대는 ‘나와 그것’의 관계를 ‘나와 너’의 관계로 나아가도록 한다.

이 책은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한 소설이다. 사건에 대한 실제 얘기는 책의 맨 뒷편에 나온다. 소설의 내용은 이러하다. 한밤중 남편이 목에 밧줄이 감긴 모습으로 살해되었다. 그런데 같은 침대 옆자리에 있던 부인은 곤히 자느라 범인을 목격하지 못하였다고 말한다.

"깊게 잠드는 편이라서."

이 말에 대해 목격자(루이스 헤일)와 보안관 피터스, 담당 검사, 두 명의 이웃 여인들이 사건 현장에 오게 된다. 누가 보아도 아내가 살인했을 가능성을 두고 추측하지만 여인들은 사건 현장을 둘러보며 그 여인이 겪었을 아픔을 공감하고 이해하게 된다. '더러워진 수건, 뚜껑이 열린 채 방치된 설탕 통, 낡아 빠진 화덕, 양동이, 특히 정갈하지 못한 한 부분의 퀼트 조각 등은 살해된 자의 아내가 즉 농부의 아내가 얼마나 힘들게 살았을지를 느끼게 해준다. 아래의 글은 사건 현장에 있던 두 여성이 남긴 여성으로서의 '연대감'을 느낀 대목이다.

"검사는 싱크대로 가서 손을 씻었다. 하지만 깨끗한 부분을 찾을 수가 없었다. 수건이 더럽네요. 제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주부는 아니었던가 봐요. 부인들이 봐도 그렇지 않나요?"

헤일 부인이 반발했다. "농장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어요." p55

"헨더슨 검사님. 농부의 아내로 살려면 얼마나 많은 일을 해내야 하는지 아시나요? 게다가...

그 집은 쾌적한 환경은 아니잖아요. 이 집." p57

남성이 수건을 보는 관점과 여성이 보는 관점이 보이는가? 여성은 연대하고 있다. 그러나 남성은 사건 중심으로만 살피고 있다. 또 다른 대목으로 가보자. 이번에 낡아 빠진 화덕에 대한 얘기다.

"한 눈에도 여기저기 부식되어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하는 화덕을 보았다. 헤일 부인은 해가 몇 번이고 바뀌도록 낡아 빠진 화덕과 씨름해야 하는 삶은 도대체 어땠을지 생각해 보았다. 헤일 부인은 떠올렸다. 저 오븐에서 어떻게든 뭐라도 구워보려 애쓰는 미니 포스터를. 어떻게 살고 있는지 한 번도 들여다보지 못했던 미니 포스트를....." p83

그리고 또 다른 대목은 '퀼트 조각'의 대목으로 가보자.

"바느질이 다른 부분은 정갈한데 여기 이건..... 세상에나 완전히 다른 사람이 한 것 같네요. 여기저기 찔리기도 많이 찔렸나 봐요. 이걸 만들 때 정신을 딴 데 팔고 있기라도 했던 걸까요? 시선이 마주쳤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반짝이며 터져 나왔다. 어떠한 연대감이 둘 사이에 생겨난 것이다. [...] 아무리 봐도 한 사람의 실력이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의 차이였다. 엉망진창진 퀼트 조각을 들고 있으려니, 어쩐지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된 불안감을 진정시켜보려 여기저기 바늘을 찌르던 한 여자의 심정이 퀼트 조각을 통해 고스란히 전달되는 것 같았다. p.89, 93

이 책은 한 사건에 대한 '공감'에 대한 얘기다. 이 사회는 어떤 사람을 단죄하고, 사건을 처리하는 하나의 대상 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한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떠해야 하는 지를 보게 된다. 한 사람은 우주와 같다는 말을 들었다. 그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요소들이 첨부되어야 한다. 그래서 범죄자를 대하는 시선도 살인=징역 또는 사형이 아닌, 다른 관점으로 범죄자를 보게 한다. 물론 여기에도 이런 등식이 적용되어야 하느냐는 난관도 있지만 말이다. 아무튼 우리에게는 저자가 말하듯 말하지 못할 비밀이 있다. 나만의 불운이고 비극인 것 같아서, 내가 부족하여 이겨내지 못한 시련인 것 같아서, 그저 감추고만 있는 비밀이 누구에게나 있다. 하지만 꺼내어지는 순간 우리는 모두 알게 된다. 다들 같은 마음으로 감내하며 인내하려 애쓰고 있음을 말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여성이란 존재를 단지 가정에서 '하찮은 일'을 도맡아 하는 존재에서 한 인격적인 존재로 인정받는 길을 열어 주었다. 당시 여성들은 자신의 비극이 개인적인 문제라고만 생각했지만 그러나 한 사람의 삶이 드러나자 같은 비극을 견디며 살아가느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며 권리를 찾았다. 결국,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공론화해야 하는 사회적 문제였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즉 드러내거 연대화여 변화를 일으켰다. 그렇다. "어떤 공감은 구원이 된다. 공감은 연대를, 연대는 용기를, 용기는 변화를 불러온다. 모두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결국 같은 마음으로 견디고 있는 것이다." p.146-147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매몰차며 냉정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서로가 서로를 참되게 생각하며 기쁨도 슬픔도 나누는 사이가 된다면 이 사회는 토마스 모오가 말하는 유토피아와 같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물론 토마스 모어가 말한 것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적 유토피아가 그려지지 않고 있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연대하는 ‘사랑으로만 이루어진 사회’ 그런 사회를 꿈꾼다.

그것은 어쩌면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만이 그런 참 연대를 이루는 세계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암튼 우린 연대함을 통해 살아갈 용기와 구원을 얻는다. 이 책은 그것을 말해주는 책이다.

- 이 글은 책과 콩나무 카페를 통해 도서를 협찬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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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타반
헨리 반 다이크 지음, 차영지 옮김 / 내로라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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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께서 오시고 계십니다.

마중을 나가야겠습니다.

p55 아르타반

책을 단숨에 다 읽었다. 그만큼 이 책은 간편히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그런데 그 깊이가 남다르다.

이미 성서를 알고 있는 분들에게도 이 책의 내용은 그냥 읽혀지지 않고 새삼 깊이있게 울림을 주고 있다고 말하겠다. 이 책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함께 신약성경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를 모티브로 해서 만든 책이라고 본다. 그런데 저자가 말하듯 이 책은 지어낸 이야기나 구전이나, 어느 날 펑하고 나타난 이야기가 아닌 "누군가 저자에게 선물로 준 이야기"라고 말하고 있다.

어디에서 나온 이야기인지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허공에서 펑 하고 나타났을지도 모릅니다. 분명히 어느 책에 적혀 있던 것도 아니고 동방에서 구전되어 온 이야기도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지어낸 이야기라고는 도무지 생각이 되지 않습니다. 이건 누군가 제게 선물로 주신 이야기가 분명합니다. 그리고 어쩐지 저는 제게 이야기를 선물하신 그분을 알 것만 같습니다.

헨리 반 다이크 p.145

이 책은 그냥 줄을 치지 않고 소설처럼 읽으려 했다. 그런데 이 책은 독자에게 펜을 들게 했고, 줄기차게 줄을 긋게 하였다. 그리고 그 말을 마음과 뇌리에 새기게 하였다. 그만큼 이 책이 주는 영적 깨달음의 가지들은 독자의 마음에 이미 뿌리내려 성경에서 말하는 바를 다시금 되새겨 주고 있다.

이 책은 진리의 본질을 언급한다. 조로아스터교가 본질을 끝없이 추구하는 종교라고 하듯 주인공 아르타반은 조로아스터 사제의 모습으로 나타나 진리라는 본질을 향해 남들과 다르게 추구하며 열정을 내고 있다.(p21)

어느 날 아르타반은 함께하는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을 부른다. 그들을 향해 "여러분은 신을 숭배하고 본질을 갈망하는 그 마음을 다 잡기 위해 오셨을 거라면서, 제단의 불꽃을 다시 점화하듯 믿음도 이따금 불을 붙여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숭배하는 것은 이 불이 아니라 이 불은 단지 그분을 상징하는 것이며, 이 불은 빛과 진리에 관하여 말해주고 있는 것임을 말하며 스승과 같은 노학자 아브가르스에게 자신의 말이 맞는지 묻는다. 이에 그 노학자는 심오한 말을 하였다.

"그렇다, 나의 아들아. 깨달음을 쫓는다면 맹목적인 숭배자가 되는 것을 절대로 경계해야 할 것이니라. 형태라는 장막을 걷고 현실이라는 성전에 들어갈 때, 오래된 상징은 새로운 빛과 진리를 드러낼지니라." p.31

그렇다. 진리를 찾는 자는 맹목적인 숭배자가 되어선 아니 되고, 형태라는 장막을 걷어 현실이라는 장막에 들어가야만 진짜 진리를 맛보게 된다. 이 책은 그런 진짜 메시야를 찾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고, 진리의 실체가 눈에 보이는 그런 형태나 기대하던 어떤 대상이 아니라 지금 내 옆에서 아파하고, 괴로워하며, 배고파하는 자들이다.

"생사가 달린 갈등 앞에서 아르타반의 영혼이 욱신거렸다. 이방인에게 선행을 베풀기 위해서 중대한 사명과 신앙적 보상을 송두리째 포기해야 하는지, 죽어 가는 유대인 한 명에게 물 한 컵을 내어 주기 위해서 예언의 별을 놓쳐야만 하는 것인지, 아르타반은 고민 끝에 기도했다." p.75

우리는 신을 향해 예배하면서, 숭앙하면서, 사명을 감당하면서, 또는 성지 순례를 통해 좀 더 구원자와 가까운 은혜를 누리려고 비싼 돈을 들여 이스라엘이나 기타 성지로 떠난다. 그런데 그 성지가 어디에 있는가? 과연 구원자를 만나려는 노력이 기도를 많이하여 환상으로 주님을 눈에 보이게 만나는 것인가? 과연 고운 목소리로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며 성가를 부르면서 고귀하게 신을 찬미하는 것이 신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며 종교적 행위로서 최선을 다한 것인가?

실제적 예수(구원자)는 우리 주변에 있음에도 다른 예수를 찾아서 예배당을 두드리고, 저 멀리 성지로 떠난다. 그러나 그 구원자는 아르타반이 그러하듯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분이다. 물론 개중에는 특별한 은혜로 구원자 예수를 보고 만난 분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책에도, 성경에도 그 구원자는 영광스런(권력을 얻은, 세상적 업적에 뛰어난 모습) 형태로 존재하거나 메시야처럼 나타나지 않고 우리 가운데 비천하고 가난한 모습으로 악압받고 고통받는 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네가 찾는 왕은 성에 살지 않거니와 부자와 권력자들 사이에 있지도 않을 것이니라. 어떠한 빛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겠느냐. 이스라엘을 빛나게 할 참된 영광이 무엇이겠느냐. 그 영광이 사람들이 쉬이 바라는 위대한 세상적 업적과 동일했다면 이미 오래전 세상에 왔을 것이니라.(실제로 요셉은 아브라함의 어떤 아들도 다시 뛰어넘지 못할 권세를 이집트의 성에서 누렸음이오, 솔로몬은 역사에 다시 나오지 못할 장엄한 업적을 예루살렘의 사자들 사이에서 왕권을 다지며 세웠음이니라) 지금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완전한 새로운 빛이니라. 그 영광스러운 승리는 인내와 고통 속에서만 돋아날 것이요, 그가 새로 세울 나라는 결코 스러지지 않을 사랑으로 세워질 영원의 나라이니라. [...] 언약의 메시아는 그를 애타게 부르짖는 가난한 자들과 비천한 자들과 근심하는 자들과 억압된 자들 가운데 계실지니라." p113-115, 덕망 있는 유대교 율법학자 랍비

주인공 아르타반은 잔뜩 기대를 안고 동방박사처럼 세 가지 보물을 들고 즉 사파이어, 루비, 진주를 가지고 별을 쫓아 예루살렘까지 이르렀다. 그는 잔뜩 기대하며 열정과 갈망을 품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베들레헴으로 갔다. 그러나 아르타반은 거기서 예수를 보지 못했다. 어느 덧 33년이 흐르고 새카맣게 빛나던 머리카락은 눈 덮인 겨울 산처럼 희게 되었고, 불꽃 같은 눈도 이제는 타 버린 재처럼 흐려졌다. 지치고 닳은 상태 속에 그는 죽음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의 영혼은 여전히 왕을 갈망하고 있었기에 마지막 희망으로 다시 예루살렘을 찾게 된다. 그러나 거리는 유월절 분위기로 어수선하다. 더군다나 거대한 무리의 인파가 어디론가 향하는 모습이 보였고, 하늘에는 우중충한 어둠이 드리웠다. 소동의 원인을 알고 싶어 누군가에게 물었는데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는 자가 골고타라는 곳에서 십자가 처형을 당한다는 것이 아닌가? 땅도 진동하며 지진이 일어 났다. 이 가운데 아르타반은 묵직한 기와에 머리를 맞아 쓰러진다. 그리고 그는 그토록 기다리는 구원자를 죽어가는 그 순간에 만나게 된다. 음성으로 만난 것인지 환상으로 만난 것인지는 독자는 모르겠다. 마치 누군가에게는 그저 저무는 태양의 어스름한 빛 속에서 아주 작고 고요한 소리 같았고, 너무도 확실하고 분명하게 마음에 새겨지는 말 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노쇠한 아르타반의 목소리였다. 페르시아 말로 그는 자신에게 말한 분에게 이렇게 대답을 했다.

"나의 신이시여. 저는 그러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언제 굶주린 당신께 먹을 음식을 내어드렸습니까. 제가 언제 목마른 당신에게 물을 내어드렸습니까. 집 잃고 헤매는 당신을 품은 적도, 벌거벗은 당신을 입힌 적도, 감옥에서 병든 당신을 돌보아드린 적도 없습니다. 33년 동안, 당신을 찾아 헤매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을 왕으로 섬기기는커녕 당신 앞에 도착하지도 못했습니다."

이에 저 멀리에서 달콤한 소리가 들려왔다. 희미하게 들렸지만, 마음에 각인되는 소리였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이렇게 그의 여정은 끝났다. 창백하던 그의 얼굴에 잔잔한 경이와 기쁨의 빛이 서서히 차오르며 아주 길고 긴 안도의 숨을 내쉰다. 지혜로운 남자는 마침내 자신이 바라던 왕을 만났고, 그가 준비한 보물은 모두 왕께 진상되었다.

스토리를 중심으로 썼는데 그럴수 밖에 없다. 이 책은 스토리를 읽어야 한다. 그 스토리가 이 책의 서평이고, 이 책이 주고자 하는 날것 그대로의 모습이다. 바라던 왕(구원자)을 찾아 우리는 어쩌면 그 왕이 원하는 바와 다른 것을 추구하며 예배하며 추앙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 왕은 우리 곁에 도움이 필요로한 곳에 있건만 예루살렘에 있다고 착각하며, 헛된 것에 삶을 허비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주인공이 가진 세 가지 보물은 왕께 직접 드린 것은 아니지만 그 왕이 받았다. 그건 바로 눈물과 아픔으로 얼룩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을 통해서 말이다. 어쩌면 아르타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나사렛 가족의 아이를 찾아 헤맨 것이 아니라, 별로 상징되는 그 구원자의 본질을 찾으려고 애썼다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이 작품은 본질에 관한 이야기다. 종교를 초월한, 선한 삶을 향한 개인적 갈망과 그 갈망 깊은 곳에 내재되어 있는 우리 마음의 본질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책의 한 문장

오래전부터 발목을 잡아 온 영혼의 갈등을 다시 느꼈기 때문이다. 바벨론의 종려나무 숲에서도, 베들레헴의 초가집에서도, 아르타반의 영혼은 신앙적 기대와 실천적 사랑의 충동 사이에서 갈등했었다. 무려 두 번이나, 신을 위해 준비한 보물을 사람을 위해 사용하고 말았다. 만일 이것이 아르타반의 선택을 지켜보기 위한 일종의 시험이라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 것이다. 엄청난 기회인지 마지막 시험인지, 아르타반은 자신으로서 알 수 없겠다고 결론지었다. 즉 애초에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고, 그런 불가피한 선택이야말로 신이 주신 운명이라 말할 수 있지 않겠냐고, 아르타반은 생각했다. 그러자 갈등하던 마음에 한 가지 확신이 차올랐다.

"도움이 필요한 아이를 구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라의 실천이라는 확신이었다. 사랑이야말고 영혼이 낼 수 있는 유일한 빛이 아니겠는가."

"딸아. 이걸로 너 자신을 자유롭게 하거라. 왕께 드리기 위해 소중히 간직해 온 나의 마지막 보물이란다." p.131-133

"최악의 상황 속에서 최대한 만족하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최선의 그림자라도 쫓는 것이 더 나은 것이 삶 아니겠느냐? 게다가, 위대한 무언가를 목격하기 위해서 때로는 홀로 떠나야 하는 법이니라" p. 51

- 이 글은 책과 콩나무 카레를 통해 도서를 협찬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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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와 삶은 하나입니다 - 삶을 바꾸는 12가지 기독교 핵심 교리
폴 트립 지음, 윤종석 옮김 / 디모데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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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으로 좋다. 그러나 성도의 견인과 성화 부분에 있어 기존의 교리 틀 안에 갇힌 모습이다. 구원론에 대한 재고를 하지 않는다면 여전히 교회(성도)가 성도로서의 진정한 삶을 잃어버릴 것이다. 즉 언어유희적인 모습이 보였다. 제시카윤목사님과 김세윤박사를 토대로 다시 재고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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