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연대
수잔 글래스펠 지음, 차영지 옮김 / 내로라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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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공감이 구원이 됩니다

어떤 책은 표지와 제목으로 인해 선뜻 마음이 동한다. 이 책은 표지 그림과 제목이 시사하듯 보이지 않지만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연대에 대한 얘기다.

아픔을 가진 자에게 공감과 위로는 따뜻함을 넘어 구원을 준다. 즉 삶을 견디게하며 용기를 준다. 요즘 또 다시 마음 다친자들의 자살 소식을 듣는다. 그 중에는 자살 싸이트에서 만난 두 남녀도 있다. 아픔을 가진자들이 자살이라는 연결점으로 서로가 연대되어 죽음이라는 용기를 가졌다.

이렇게 연대함(공감)은 삶의 가장 큰 무서움(죽음)도 이기게 한다. 어쩌면 우리 사회가 많이 아픈 이유도 서로 연대함이 적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마틴 부버의 ‘나와 너’라는 책이 생각이 난다. 독일 출신의 유대인 사상가 마르틴 부버는 인간이 맺는 두 종류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너'의 관계와 '나—그것'의 관계이다. '나—그것'의 관계는 상대방의 존재를 '기능적인 어떤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때 상대방은 언제든 다른 대상으로 대체될 수 있으며, 나의 목적을 위한 도구로서만 유용하다. '나—너'의 관계는 인격적인 관계로,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유일한 '나'와 역시 대체 불가능한 '너'가 신뢰 속에서 존재하는 관계다.

좀 더 설명하면 '나—너'의 관계는 온 존재를 기울이는 관계이며, '너'를 나의 의도에 따라 판단하지 않는다. 판단은 '나—그것'의 관계일 때 가능하다. 즉 '나—너'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이며, '나—그것'의 관계는 쓸모의 관계이다. '나—너'의 관계는 상대방을 현존하도록 만들지만, '나—그것'의 관계는 눈앞에 있는데도 상대방을 부재하게 만드는 관계다. 이 관계는 피상적이고 기계적인 관계 속에서 상대방을 무의미한 존재로 만들며 이때 '너'라는 의미는 단지 '너는 내가 이용할 수 있는 존재'일 뿐이다는 식이다. 나에게 무의미한 '너'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 마음의 연대는 ‘나와 그것’의 관계를 ‘나와 너’의 관계로 나아가도록 한다.

이 책은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한 소설이다. 사건에 대한 실제 얘기는 책의 맨 뒷편에 나온다. 소설의 내용은 이러하다. 한밤중 남편이 목에 밧줄이 감긴 모습으로 살해되었다. 그런데 같은 침대 옆자리에 있던 부인은 곤히 자느라 범인을 목격하지 못하였다고 말한다.

"깊게 잠드는 편이라서."

이 말에 대해 목격자(루이스 헤일)와 보안관 피터스, 담당 검사, 두 명의 이웃 여인들이 사건 현장에 오게 된다. 누가 보아도 아내가 살인했을 가능성을 두고 추측하지만 여인들은 사건 현장을 둘러보며 그 여인이 겪었을 아픔을 공감하고 이해하게 된다. '더러워진 수건, 뚜껑이 열린 채 방치된 설탕 통, 낡아 빠진 화덕, 양동이, 특히 정갈하지 못한 한 부분의 퀼트 조각 등은 살해된 자의 아내가 즉 농부의 아내가 얼마나 힘들게 살았을지를 느끼게 해준다. 아래의 글은 사건 현장에 있던 두 여성이 남긴 여성으로서의 '연대감'을 느낀 대목이다.

"검사는 싱크대로 가서 손을 씻었다. 하지만 깨끗한 부분을 찾을 수가 없었다. 수건이 더럽네요. 제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주부는 아니었던가 봐요. 부인들이 봐도 그렇지 않나요?"

헤일 부인이 반발했다. "농장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어요." p55

"헨더슨 검사님. 농부의 아내로 살려면 얼마나 많은 일을 해내야 하는지 아시나요? 게다가...

그 집은 쾌적한 환경은 아니잖아요. 이 집." p57

남성이 수건을 보는 관점과 여성이 보는 관점이 보이는가? 여성은 연대하고 있다. 그러나 남성은 사건 중심으로만 살피고 있다. 또 다른 대목으로 가보자. 이번에 낡아 빠진 화덕에 대한 얘기다.

"한 눈에도 여기저기 부식되어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하는 화덕을 보았다. 헤일 부인은 해가 몇 번이고 바뀌도록 낡아 빠진 화덕과 씨름해야 하는 삶은 도대체 어땠을지 생각해 보았다. 헤일 부인은 떠올렸다. 저 오븐에서 어떻게든 뭐라도 구워보려 애쓰는 미니 포스터를. 어떻게 살고 있는지 한 번도 들여다보지 못했던 미니 포스트를....." p83

그리고 또 다른 대목은 '퀼트 조각'의 대목으로 가보자.

"바느질이 다른 부분은 정갈한데 여기 이건..... 세상에나 완전히 다른 사람이 한 것 같네요. 여기저기 찔리기도 많이 찔렸나 봐요. 이걸 만들 때 정신을 딴 데 팔고 있기라도 했던 걸까요? 시선이 마주쳤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반짝이며 터져 나왔다. 어떠한 연대감이 둘 사이에 생겨난 것이다. [...] 아무리 봐도 한 사람의 실력이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의 차이였다. 엉망진창진 퀼트 조각을 들고 있으려니, 어쩐지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된 불안감을 진정시켜보려 여기저기 바늘을 찌르던 한 여자의 심정이 퀼트 조각을 통해 고스란히 전달되는 것 같았다. p.89, 93

이 책은 한 사건에 대한 '공감'에 대한 얘기다. 이 사회는 어떤 사람을 단죄하고, 사건을 처리하는 하나의 대상 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한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떠해야 하는 지를 보게 된다. 한 사람은 우주와 같다는 말을 들었다. 그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요소들이 첨부되어야 한다. 그래서 범죄자를 대하는 시선도 살인=징역 또는 사형이 아닌, 다른 관점으로 범죄자를 보게 한다. 물론 여기에도 이런 등식이 적용되어야 하느냐는 난관도 있지만 말이다. 아무튼 우리에게는 저자가 말하듯 말하지 못할 비밀이 있다. 나만의 불운이고 비극인 것 같아서, 내가 부족하여 이겨내지 못한 시련인 것 같아서, 그저 감추고만 있는 비밀이 누구에게나 있다. 하지만 꺼내어지는 순간 우리는 모두 알게 된다. 다들 같은 마음으로 감내하며 인내하려 애쓰고 있음을 말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여성이란 존재를 단지 가정에서 '하찮은 일'을 도맡아 하는 존재에서 한 인격적인 존재로 인정받는 길을 열어 주었다. 당시 여성들은 자신의 비극이 개인적인 문제라고만 생각했지만 그러나 한 사람의 삶이 드러나자 같은 비극을 견디며 살아가느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며 권리를 찾았다. 결국,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공론화해야 하는 사회적 문제였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즉 드러내거 연대화여 변화를 일으켰다. 그렇다. "어떤 공감은 구원이 된다. 공감은 연대를, 연대는 용기를, 용기는 변화를 불러온다. 모두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결국 같은 마음으로 견디고 있는 것이다." p.146-147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매몰차며 냉정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서로가 서로를 참되게 생각하며 기쁨도 슬픔도 나누는 사이가 된다면 이 사회는 토마스 모오가 말하는 유토피아와 같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물론 토마스 모어가 말한 것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적 유토피아가 그려지지 않고 있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연대하는 ‘사랑으로만 이루어진 사회’ 그런 사회를 꿈꾼다.

그것은 어쩌면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만이 그런 참 연대를 이루는 세계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암튼 우린 연대함을 통해 살아갈 용기와 구원을 얻는다. 이 책은 그것을 말해주는 책이다.

- 이 글은 책과 콩나무 카페를 통해 도서를 협찬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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