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그냥 줄을 치지 않고 소설처럼 읽으려 했다. 그런데 이 책은 독자에게 펜을 들게 했고, 줄기차게 줄을 긋게 하였다. 그리고 그 말을 마음과 뇌리에 새기게 하였다. 그만큼 이 책이 주는 영적 깨달음의 가지들은 독자의 마음에 이미 뿌리내려 성경에서 말하는 바를 다시금 되새겨 주고 있다.
이 책은 진리의 본질을 언급한다. 조로아스터교가 본질을 끝없이 추구하는 종교라고 하듯 주인공 아르타반은 조로아스터 사제의 모습으로 나타나 진리라는 본질을 향해 남들과 다르게 추구하며 열정을 내고 있다.(p21)
어느 날 아르타반은 함께하는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을 부른다. 그들을 향해 "여러분은 신을 숭배하고 본질을 갈망하는 그 마음을 다 잡기 위해 오셨을 거라면서, 제단의 불꽃을 다시 점화하듯 믿음도 이따금 불을 붙여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숭배하는 것은 이 불이 아니라 이 불은 단지 그분을 상징하는 것이며, 이 불은 빛과 진리에 관하여 말해주고 있는 것임을 말하며 스승과 같은 노학자 아브가르스에게 자신의 말이 맞는지 묻는다. 이에 그 노학자는 심오한 말을 하였다.
"그렇다, 나의 아들아. 깨달음을 쫓는다면 맹목적인 숭배자가 되는 것을 절대로 경계해야 할 것이니라. 형태라는 장막을 걷고 현실이라는 성전에 들어갈 때, 오래된 상징은 새로운 빛과 진리를 드러낼지니라." p.31
그렇다. 진리를 찾는 자는 맹목적인 숭배자가 되어선 아니 되고, 형태라는 장막을 걷어 현실이라는 장막에 들어가야만 진짜 진리를 맛보게 된다. 이 책은 그런 진짜 메시야를 찾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고, 진리의 실체가 눈에 보이는 그런 형태나 기대하던 어떤 대상이 아니라 지금 내 옆에서 아파하고, 괴로워하며, 배고파하는 자들이다.
"생사가 달린 갈등 앞에서 아르타반의 영혼이 욱신거렸다. 이방인에게 선행을 베풀기 위해서 중대한 사명과 신앙적 보상을 송두리째 포기해야 하는지, 죽어 가는 유대인 한 명에게 물 한 컵을 내어 주기 위해서 예언의 별을 놓쳐야만 하는 것인지, 아르타반은 고민 끝에 기도했다." p.75
우리는 신을 향해 예배하면서, 숭앙하면서, 사명을 감당하면서, 또는 성지 순례를 통해 좀 더 구원자와 가까운 은혜를 누리려고 비싼 돈을 들여 이스라엘이나 기타 성지로 떠난다. 그런데 그 성지가 어디에 있는가? 과연 구원자를 만나려는 노력이 기도를 많이하여 환상으로 주님을 눈에 보이게 만나는 것인가? 과연 고운 목소리로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며 성가를 부르면서 고귀하게 신을 찬미하는 것이 신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며 종교적 행위로서 최선을 다한 것인가?
실제적 예수(구원자)는 우리 주변에 있음에도 다른 예수를 찾아서 예배당을 두드리고, 저 멀리 성지로 떠난다. 그러나 그 구원자는 아르타반이 그러하듯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분이다. 물론 개중에는 특별한 은혜로 구원자 예수를 보고 만난 분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책에도, 성경에도 그 구원자는 영광스런(권력을 얻은, 세상적 업적에 뛰어난 모습) 형태로 존재하거나 메시야처럼 나타나지 않고 우리 가운데 비천하고 가난한 모습으로 악압받고 고통받는 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