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타반
헨리 반 다이크 지음, 차영지 옮김 / 내로라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왕께서 오시고 계십니다.

마중을 나가야겠습니다.

p55 아르타반

책을 단숨에 다 읽었다. 그만큼 이 책은 간편히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그런데 그 깊이가 남다르다.

이미 성서를 알고 있는 분들에게도 이 책의 내용은 그냥 읽혀지지 않고 새삼 깊이있게 울림을 주고 있다고 말하겠다. 이 책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함께 신약성경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를 모티브로 해서 만든 책이라고 본다. 그런데 저자가 말하듯 이 책은 지어낸 이야기나 구전이나, 어느 날 펑하고 나타난 이야기가 아닌 "누군가 저자에게 선물로 준 이야기"라고 말하고 있다.

어디에서 나온 이야기인지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허공에서 펑 하고 나타났을지도 모릅니다. 분명히 어느 책에 적혀 있던 것도 아니고 동방에서 구전되어 온 이야기도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지어낸 이야기라고는 도무지 생각이 되지 않습니다. 이건 누군가 제게 선물로 주신 이야기가 분명합니다. 그리고 어쩐지 저는 제게 이야기를 선물하신 그분을 알 것만 같습니다.

헨리 반 다이크 p.145

이 책은 그냥 줄을 치지 않고 소설처럼 읽으려 했다. 그런데 이 책은 독자에게 펜을 들게 했고, 줄기차게 줄을 긋게 하였다. 그리고 그 말을 마음과 뇌리에 새기게 하였다. 그만큼 이 책이 주는 영적 깨달음의 가지들은 독자의 마음에 이미 뿌리내려 성경에서 말하는 바를 다시금 되새겨 주고 있다.

이 책은 진리의 본질을 언급한다. 조로아스터교가 본질을 끝없이 추구하는 종교라고 하듯 주인공 아르타반은 조로아스터 사제의 모습으로 나타나 진리라는 본질을 향해 남들과 다르게 추구하며 열정을 내고 있다.(p21)

어느 날 아르타반은 함께하는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을 부른다. 그들을 향해 "여러분은 신을 숭배하고 본질을 갈망하는 그 마음을 다 잡기 위해 오셨을 거라면서, 제단의 불꽃을 다시 점화하듯 믿음도 이따금 불을 붙여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숭배하는 것은 이 불이 아니라 이 불은 단지 그분을 상징하는 것이며, 이 불은 빛과 진리에 관하여 말해주고 있는 것임을 말하며 스승과 같은 노학자 아브가르스에게 자신의 말이 맞는지 묻는다. 이에 그 노학자는 심오한 말을 하였다.

"그렇다, 나의 아들아. 깨달음을 쫓는다면 맹목적인 숭배자가 되는 것을 절대로 경계해야 할 것이니라. 형태라는 장막을 걷고 현실이라는 성전에 들어갈 때, 오래된 상징은 새로운 빛과 진리를 드러낼지니라." p.31

그렇다. 진리를 찾는 자는 맹목적인 숭배자가 되어선 아니 되고, 형태라는 장막을 걷어 현실이라는 장막에 들어가야만 진짜 진리를 맛보게 된다. 이 책은 그런 진짜 메시야를 찾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고, 진리의 실체가 눈에 보이는 그런 형태나 기대하던 어떤 대상이 아니라 지금 내 옆에서 아파하고, 괴로워하며, 배고파하는 자들이다.

"생사가 달린 갈등 앞에서 아르타반의 영혼이 욱신거렸다. 이방인에게 선행을 베풀기 위해서 중대한 사명과 신앙적 보상을 송두리째 포기해야 하는지, 죽어 가는 유대인 한 명에게 물 한 컵을 내어 주기 위해서 예언의 별을 놓쳐야만 하는 것인지, 아르타반은 고민 끝에 기도했다." p.75

우리는 신을 향해 예배하면서, 숭앙하면서, 사명을 감당하면서, 또는 성지 순례를 통해 좀 더 구원자와 가까운 은혜를 누리려고 비싼 돈을 들여 이스라엘이나 기타 성지로 떠난다. 그런데 그 성지가 어디에 있는가? 과연 구원자를 만나려는 노력이 기도를 많이하여 환상으로 주님을 눈에 보이게 만나는 것인가? 과연 고운 목소리로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며 성가를 부르면서 고귀하게 신을 찬미하는 것이 신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며 종교적 행위로서 최선을 다한 것인가?

실제적 예수(구원자)는 우리 주변에 있음에도 다른 예수를 찾아서 예배당을 두드리고, 저 멀리 성지로 떠난다. 그러나 그 구원자는 아르타반이 그러하듯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분이다. 물론 개중에는 특별한 은혜로 구원자 예수를 보고 만난 분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책에도, 성경에도 그 구원자는 영광스런(권력을 얻은, 세상적 업적에 뛰어난 모습) 형태로 존재하거나 메시야처럼 나타나지 않고 우리 가운데 비천하고 가난한 모습으로 악압받고 고통받는 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네가 찾는 왕은 성에 살지 않거니와 부자와 권력자들 사이에 있지도 않을 것이니라. 어떠한 빛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겠느냐. 이스라엘을 빛나게 할 참된 영광이 무엇이겠느냐. 그 영광이 사람들이 쉬이 바라는 위대한 세상적 업적과 동일했다면 이미 오래전 세상에 왔을 것이니라.(실제로 요셉은 아브라함의 어떤 아들도 다시 뛰어넘지 못할 권세를 이집트의 성에서 누렸음이오, 솔로몬은 역사에 다시 나오지 못할 장엄한 업적을 예루살렘의 사자들 사이에서 왕권을 다지며 세웠음이니라) 지금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완전한 새로운 빛이니라. 그 영광스러운 승리는 인내와 고통 속에서만 돋아날 것이요, 그가 새로 세울 나라는 결코 스러지지 않을 사랑으로 세워질 영원의 나라이니라. [...] 언약의 메시아는 그를 애타게 부르짖는 가난한 자들과 비천한 자들과 근심하는 자들과 억압된 자들 가운데 계실지니라." p113-115, 덕망 있는 유대교 율법학자 랍비

주인공 아르타반은 잔뜩 기대를 안고 동방박사처럼 세 가지 보물을 들고 즉 사파이어, 루비, 진주를 가지고 별을 쫓아 예루살렘까지 이르렀다. 그는 잔뜩 기대하며 열정과 갈망을 품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베들레헴으로 갔다. 그러나 아르타반은 거기서 예수를 보지 못했다. 어느 덧 33년이 흐르고 새카맣게 빛나던 머리카락은 눈 덮인 겨울 산처럼 희게 되었고, 불꽃 같은 눈도 이제는 타 버린 재처럼 흐려졌다. 지치고 닳은 상태 속에 그는 죽음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의 영혼은 여전히 왕을 갈망하고 있었기에 마지막 희망으로 다시 예루살렘을 찾게 된다. 그러나 거리는 유월절 분위기로 어수선하다. 더군다나 거대한 무리의 인파가 어디론가 향하는 모습이 보였고, 하늘에는 우중충한 어둠이 드리웠다. 소동의 원인을 알고 싶어 누군가에게 물었는데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는 자가 골고타라는 곳에서 십자가 처형을 당한다는 것이 아닌가? 땅도 진동하며 지진이 일어 났다. 이 가운데 아르타반은 묵직한 기와에 머리를 맞아 쓰러진다. 그리고 그는 그토록 기다리는 구원자를 죽어가는 그 순간에 만나게 된다. 음성으로 만난 것인지 환상으로 만난 것인지는 독자는 모르겠다. 마치 누군가에게는 그저 저무는 태양의 어스름한 빛 속에서 아주 작고 고요한 소리 같았고, 너무도 확실하고 분명하게 마음에 새겨지는 말 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노쇠한 아르타반의 목소리였다. 페르시아 말로 그는 자신에게 말한 분에게 이렇게 대답을 했다.

"나의 신이시여. 저는 그러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언제 굶주린 당신께 먹을 음식을 내어드렸습니까. 제가 언제 목마른 당신에게 물을 내어드렸습니까. 집 잃고 헤매는 당신을 품은 적도, 벌거벗은 당신을 입힌 적도, 감옥에서 병든 당신을 돌보아드린 적도 없습니다. 33년 동안, 당신을 찾아 헤매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을 왕으로 섬기기는커녕 당신 앞에 도착하지도 못했습니다."

이에 저 멀리에서 달콤한 소리가 들려왔다. 희미하게 들렸지만, 마음에 각인되는 소리였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이렇게 그의 여정은 끝났다. 창백하던 그의 얼굴에 잔잔한 경이와 기쁨의 빛이 서서히 차오르며 아주 길고 긴 안도의 숨을 내쉰다. 지혜로운 남자는 마침내 자신이 바라던 왕을 만났고, 그가 준비한 보물은 모두 왕께 진상되었다.

스토리를 중심으로 썼는데 그럴수 밖에 없다. 이 책은 스토리를 읽어야 한다. 그 스토리가 이 책의 서평이고, 이 책이 주고자 하는 날것 그대로의 모습이다. 바라던 왕(구원자)을 찾아 우리는 어쩌면 그 왕이 원하는 바와 다른 것을 추구하며 예배하며 추앙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 왕은 우리 곁에 도움이 필요로한 곳에 있건만 예루살렘에 있다고 착각하며, 헛된 것에 삶을 허비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주인공이 가진 세 가지 보물은 왕께 직접 드린 것은 아니지만 그 왕이 받았다. 그건 바로 눈물과 아픔으로 얼룩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을 통해서 말이다. 어쩌면 아르타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나사렛 가족의 아이를 찾아 헤맨 것이 아니라, 별로 상징되는 그 구원자의 본질을 찾으려고 애썼다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이 작품은 본질에 관한 이야기다. 종교를 초월한, 선한 삶을 향한 개인적 갈망과 그 갈망 깊은 곳에 내재되어 있는 우리 마음의 본질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책의 한 문장

오래전부터 발목을 잡아 온 영혼의 갈등을 다시 느꼈기 때문이다. 바벨론의 종려나무 숲에서도, 베들레헴의 초가집에서도, 아르타반의 영혼은 신앙적 기대와 실천적 사랑의 충동 사이에서 갈등했었다. 무려 두 번이나, 신을 위해 준비한 보물을 사람을 위해 사용하고 말았다. 만일 이것이 아르타반의 선택을 지켜보기 위한 일종의 시험이라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 것이다. 엄청난 기회인지 마지막 시험인지, 아르타반은 자신으로서 알 수 없겠다고 결론지었다. 즉 애초에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고, 그런 불가피한 선택이야말로 신이 주신 운명이라 말할 수 있지 않겠냐고, 아르타반은 생각했다. 그러자 갈등하던 마음에 한 가지 확신이 차올랐다.

"도움이 필요한 아이를 구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라의 실천이라는 확신이었다. 사랑이야말고 영혼이 낼 수 있는 유일한 빛이 아니겠는가."

"딸아. 이걸로 너 자신을 자유롭게 하거라. 왕께 드리기 위해 소중히 간직해 온 나의 마지막 보물이란다." p.131-133

"최악의 상황 속에서 최대한 만족하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최선의 그림자라도 쫓는 것이 더 나은 것이 삶 아니겠느냐? 게다가, 위대한 무언가를 목격하기 위해서 때로는 홀로 떠나야 하는 법이니라" p. 51

- 이 글은 책과 콩나무 카레를 통해 도서를 협찬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