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왕녀는 아버지에 대한 애증이 가득하다. 이 책은 자신에 대한 얘기이지만 아버지의 그늘진 모습을 햇빛으로 가득 채워 나가는 기록이다.
일단 이 책은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실 가족의 삶을 회고한 것이라 독자로서 미지의 영역처럼 호기심 가득한 내용들이라서 좋았다. 저자는 세 살 때부터 궁에 살았다. 왕의 딸로, 황제의 손녀로, 역사책에 나오는 사람들의 가족으로 살았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저자를 만나게 되면 왕녀의 삶은 어떠했는지 궁금했고, 궁 안의 비밀을 알고 싶어했다. 우선 독자 또한 머리말처럼 "얼마나 호강을 많이 누렸을까?"라고 생각한다. 소위 클라스가 우리와 다르기에 왕족이 누린 삶은 어떠했는지 궁금하다. 그래서 저자는 숨김 없이 말한다. 즉 저자는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혼자서 목욕을 해본 적이 없다. 열다섯 살까지 저자만 전적으로 돌봐주는 전담 유모가 있었다. 또한 유모 외에 사소한 시중드는 사람이 늘 옆에 있어 사소한 일까지 도와주고 대신 해주었다. 또 자동차가 귀하던 시절 가까운 거리에 있던 학교까지 자동차를 타고 다녔다. 입학 초에는 친구들이 차가운 도시락을 먹을 때 궁에서 지어 온 따뜻한 점심을 숙직실에서 따로 먹었다." 이정도면 왕녀로서의 삶이 어떠한지를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호강만큼 규칙과 법도에 속박 당하는 일로 힘들었다고 한다. 마치 깔끔하고 점잖은 감옥에 갇힌 것 같은 삶이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후반, 6.25와 같은 전쟁으로 나라가 힘들때 왕실 가족 또한 굶주리뫄 비참한 피란살이를 하였다. 그런데 오히려 '특별한' 가족이었기에 더 큰 공포와 절망감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휴전이 된 후 대한민국 정부는 황실을 박대하고 재산을 다 빼았았다. 그런 고초로 인해 가족들은 민감해 있었고, 불만이 가득찼었다. 그리하여 저자는 20대 중반에 고국을 떠나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그때가 1956년이었으며 그로부터 60년이 훌쩍 넘어 지금 저자는 근현대사의 증인으로 서 있게 되었다.
이 책은 왕녀로 지낸 시간과 함께 일제 강점기,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학창 시절, 그리고 해방을 거쳐 6․25전쟁까지의 혼란 등을 고스란히 기록하면서 더불어 우리가 알지 못한 대한제국 황실과 구한말의 숨겨진 역사를 황실 가족의 일생을 통해, 특히 왕녀의 시각으로 재조명한 기록물이다.
책을 열면 제 1부에서 궁에서 보낸 어린 날과 학창 시절에 대해 얘기하는데 특히 어린 시절 사진을 보면 왕녀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저자 이해경은 1930년 출생이다. 그러나 4세 사진과 7세 사진을 보면 이 아이는 정말 영국 왕실의 자녀들처럼 그렇게 예쁜 공주로 살아간 귀한 존재였다. 순종비가 선물한 프랑스 인형이 보이는데, 감히 그 시대에는 일반인들은 상상도 못하는 선물인 것이다.
궁 안에서의 삶과 궁 밖에서의 삶을 오고가며 보여주는 일상 생활의 모습들은 숨겨진 왕실내의 모습을 엿보는 재미로서 충분히 귀한 기록물이라 생각된다. 고종 황제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의 다섯째 딸로 태어나 근현대사의 풍파를 겪으며 드라마와 같은 삶을 산 그녀의 일기는 충분히 독자들을 매료시키며 세밀한 역사에 동참하도록 해준다. 그렇다. 저자는 대한제국 황실의 기억을 더듬으면서 정치적으로 폄하된 이야기가 아닌 실제의 역사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특히 이 책은 대한제국의 황자로 독립운동에 뜻을 펼치고자 상하이에 망명하려 했던 아버지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 책에 기록된 것이 마음에 남는다. 어머니 의찬왕비의 말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한 왕조의 마지막은 비극으로 끝이 난다. 그러므로 우리 황실이 당면한 비운은 당연히 겪어야 할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조용히 살아라"
황실 사람들이 겪은 것을 생각하면 아픈 부분들이 많다. 그러나 저자는 항상 이 말씀을 떠올리며 세상을 왕녀가 아닌 평범한 민간으로서 아픔을 견뎌내고 있다. 황실의 추억을 썼지만 독자들에겐 조선왕조의 마지막과 근현대사의 중요한 기록물로 우리에게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