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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자인간
아베 고보 지음, 송인선 옮김 / 문예출판사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노숙자인 것도 아니다. 옷이 없거나 달리 절박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냥 상자를 뒤집어 써 보고, 그리곤 그렇게 있는 것이 생각보다 편하다는 것을 느끼고, 그 편한 것을 버리기가 싫어서 상자를 뒤집어 쓰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런 사람을 상자인간이라고 부를수 있지 않을까. 바바리 코트를 입고 이상한 짓을 하는 사람을 '바바리맨'이라고 하듯이, 그에 못지 않게 가로 1미터, 세로 1미터의 사각의 종이상자를 쓰고 그 상자 안에 자신이 필요로 하는 잡동사니를 주렁주렁 걸고 다니는 사람을 상자인간이라고 부르는 것에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사면이 상자로 쌓여진 밀폐된 공간에 눈으로 밖을 관찰할 수 있는 작은 창만을 뚫어놓고, 그 속에서 세상을 관찰하는 인간의 존재를 생각해보자. 그는 세상에 속해 있지만, 세상과 분명히 담을 쌓은 사람이다. 세상은 그의 존재를 알수는 있지만, 그의 얼굴이나 그의 표정을 알 수가 없다. 그도 상자에 난 구멍을 통해 세상을 관찰할 수는 있겠지만, 세상과 소통을 할 수는 없다. 1cm두꼐도 되지 않는 종이 상자로 쳐진 막 한겹이 이렇게 한 사람을 세상과 거의 완전히 분리시켜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아베 고보라는 일본의 걸출한 작가는 바로 이런 '비 일상성'을 설정함으로써, 그의 글의 상상력의 한계를 엄청난 부피와 깊이로 넓히는데 성공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공통적으로.... 한다." 라는 전제를 '상자인간'이라는 설정으로 단번에 무너뜨려 버림으로서 다른 작가들이 일찌기 경험해보지 못한 전인미답의 존재론적 탐구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달리 존재하는 사람. 세상을 인식하지만, 그 세상을 일반적인 경험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경험하는 경험에 대한 이야기. 예를 들면. '물에 빠져 익사한 사람'이 아니라, '물에서 하늘로 빠져서 익사한 물고기' 의 존재를 생각해보라.
작가는 이 두텁지 않은 한권의 책에서 각기 A. C.D 라는 사람들의 존재를 설정하여. 그 존재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기, 세상을 바라보는 존재를 바라보기를 하고 있다. 그 결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일상적이지 않은 시선을 경험해보는 체험을 통해서 우리의 '세상에 대한 인식의 차원'이 넓어지고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낄수 있는 커다란 미덕이 아닐수 없다. 오랜만에 느끼는 진지한 사고의 연습이 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