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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코넬 울리치 지음, 이은경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표지가 멋지다. 별이 반짝이는 검은 밤. 도시를 향해 서 있는 남자의 뒷모습. 그리고 그 뒤로 길게 뻗은 그림자. 남자는 다리로 보이는 곳에 서 있다. 왼쪽 발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그냥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도시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듯이 보인다. 천개의 별들이 반짝이는 밤. 어둡지만 그리 어둡지만은 않은 밤에 홀로 도시를 향해 길을 걸어가는 사나이. 그의 고독이 잘 느껴지는 신비로운 힘을 지닌 표지이다.
책의 표지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 책의 내용이 바로 이 표지에 잘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누아르'소설의 대가라고 불려지는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사람의 존재론적 문제를 다루고 있다. 흥미로운 탐정소설같기도 하고, 무척 재미있는 스릴러물 같기도 한 이 책은 매끄러운 문체와 긴박감이 도는 상황전개. 그리고 무척 감상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멜로물의 성격을 두루가지고 있다.
다양한 장르적 성격을 가진다는 것은 흔히 뚜렷한 특징을 드러내지 못하는 책이 되고 마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책을 보라. 이 책은 그 반대를 나타내고 있지 않은가. 다양한 장르적인 성격으로 분열되는 것이 아니라, 한권의 책에 그 다양한 성격들을 완벽하게 융합해서 장르적 특성에 메이는 책이 아니라 장르를 뛰어넘어 인간의 삶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멋지게 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이 흥미로운 책은 이미 수십년 전에 쓰여진 것이란다. 이렇게 현재적인 문장으로 인간의 삶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이 놀라운 힘을 가진 책이! 그리고 이 작가의 이름으로 검색을 해보니, 놀랍게도 이 다작을 한 작가의 책 중 국내에 번역이 된 책은 이 책이 처음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이 책을 통해서 '누아르' 문학이란 것을 창조하고 스스로 그 백미를 만든 사람의 작품을 처음 대하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은 인간의 죽음에 관해서 다루는 책이다. 태어나서 욕망과 희망과 꿈을 피워보고, 때로는 큰 성취를 이루고, 때로는 엄청난 좌절을 격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크게 보아서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 있는 돌아갈 수 없는 일직선의 길을 가는 것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잘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길 저쪽, 길이 끝나는 곳에 죽음이라는 것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죽음은 탄생하는 그 순간부터 정해져 있는 숙명이라는 것을. 그래서 마치 그것이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살아간다.
다시 표지로. 검은 밤. 그러나 별들이 지켜보는 완전히 어둡지는 않은 밤. 홀로 서 있는 외로운 남자. 발을 들고 앞을 향해 뚜벅 뚜벅. 한걸음, 그리고 또 한걸음. 길은 길에 연하여 끝을 알 수 없고, 앞에 있는 도시는 상당히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또한 끝이 그곳에 있다는 것(다리이니까)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단지 표지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작가는 그 인간이라는 존재를, 이 흥미로운 추리소설 같은 스릴러물을 통해, 무척 진지하게 또한 무척 재미있게, 또한 무척 효과적으로 설파하고 있다. 그곳에는 끝이 있다고.... 그리고 그 끝을 받아들이는 인간군상들의 아픔과 절규에 대해서. 재미와 함께 감동을 누릴수 있는 무척 현대적인 책. 그래서 시대를 앞서 살아간 그에게 찬사를 보내는 것이 합당한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