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렷한 줄거리가 있는 책은 아니다.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의 주인공이 누구인지가 궁금하다. 클리어일까, 아니며 이야기 속의 또다른 이야기의 주인공인 트루디일까. 아마도 트루디일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형식상의 주인공은 클리어이다. 클리어와 트루디.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진 두 사람. 그러나 클리어는 자신이 홍콩에 도착하기전, 홍콩에서 활약했던 트루디에 관해 알게되면서 자신의 삶 또한 달라져간다. 결국 같은 시간대에 존재하지 않는 두 여인은 두사람을 함께 알고 있는 사람들을 통하여 연결된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이 과거를 살아갔던 사람의 삶에서 영향을 받으며 변해가는 것이다. 그 삶의 변화는 어쩌면 비도덕적인 것일수도 있다. 그녀가 변해간 모습이 꼭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면 반대로 그녀가 그전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반드시 바람직 한 것일까? 이 책의 저자는 비교적 분명히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거 같다. "두가지 가능한 삶의 모습이 있다. 그리고 그 여자는 그 두가지의 삶중 다른 하나를 선택했다. 그에 대한 평가는 독자들의 몫이다." 나는 저자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지 않다. 저자는 그녀가 이전의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향하여 당당히 나아가는 것이 힘들고 아프지만 감당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제시하는 것 같기 떄문이다. 평화로운 삶, 온갖 아픔에도 불구하고 도덕과 품성을 지키는 삶이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작가의 그런 메시지는 이 책에 등장하는 여러 다채로운 인물들이 위기에 처했을때 보여주는 그 이기적인 모습을 제시하는 것에서 드러난다. 평화롭고 모범적이고 칭찬을 받을만한 사람들이지만, 위기에 처했을때 이기적인 면을 드러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라. 반면에 자유롭게 인생을 즐기는 한없이 가벼운 삶을 살아가는 여인은 오히려 그 위기의 순간을 흔들리지 않고 잘 버티어 낸다. 비록 그 힘든 삶이 결국 죽음으로 몰고가게 되었지만, 인습과 도덕률에 메이지 않고 싱싱하고 펄펄 살아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런 파국마저도 맞아들일 용기를 낼 만한 삶이라고 칭찬하는 것은 아닐까. 이 책의 결말부분을 보아도 같은 생각이 든다. 홍콩. 식민지. 그리고 전쟁. 그 복잡함과 혼란과 아픔이 모여있는 우리와도 가까운 곳을 그려낸 작가. 그 작가가 바로 우리의 피를 물려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비록 영문으로 출판된 책이지만 이 책은 확대된 한국문학으로 볼수 있을지도 모르고 우리는 문학사에 또 한사람의 큰 재목을 얻은 셈이다. 이 책은 그렇게 평하는 것이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잘 정재되고 무겁고 강하고 아픈 메시지를 담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