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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번째 파도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김라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모든 것을 뒤엎어 버리는 격렬한 파도. 그 일렁이는 물결이 몰려올때 그 속에 몸을 맞길수 있을까. 어디로 나를 이끌어 갈지 알 수 없는 강하고 큰 힘을 가진 커다란 변화가 찾아올때 그것을 회피하지 않고 받아들일 용기가 있을까. 그 파도 속에는 간절히 원하는 무엇이 들어 있긴 하지만, 그 파도가 이끌어 갈 그곳에 또 다른 무엇이 있을지 알 수가 없을때, 사람들은 흔히들 몸을 도사리곤 하지 않는가.
먼먼 시간을 거슬러 올라 어린시적에 보았지만 아직도 잊을수 없는 강렬한 이미지의 영화. 파피용. 한 프랑스 작가가 최근에 발표한 책 파피용과 이름이 꼭같은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일곱번째 파도를 타고 먼 바다를 향해 야자를 얼기설기 엮은 푸대와 함께 섬에서 멀어지는 스퀴브 맥퀸의 모습이었다. 섬위에서 멀어져가는 그를 바라보는 동료에게 손을 흔들면서 껄껄 웃음을 짓는 그의 모습이 멀어져가면서 영화의 주제곡 'free as the wind' 이 울려 퍼진다.
자유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면서 나는 그 시절부터 그 노래의 첫 몇 음절들을 흥얼거리곤 했었다. 길을 걸을때, 무엇을 생각할때, 멍하니 빈 공간을 바라볼때, 술에 취해 친구들과 노래를 부를때, 기쁨에 혹은 아픔에 몸을 떨때... 나는 자유라는 막연한 이미지를 알수 없는 이유로 동경하고 있었다. 그 시절의 내 삶이 자유롭지 못했기 떄문일까. 그러면 지금의 내 삶은 자유로운 것일까... 더 이상 그 노래를 흥얼거리지 않는 지금의 내 삶은?
새삼스럽게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만든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삶에 무엇이 찾아왔을때, 그 가치로운 것이 많은 댓가를 치루게 만들때. 많은 위험을 무릅쓰게 만들때. 그 결단의 순간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고민하고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가. 어떤 사람은 야자를 묶은 푸대에 몸을 의지하고 그 위험한 바다로 행하는 선택을 하고, 어떤 사람은 권태가 덕지덕지 눌러붙었으나 상대적으로 안락한 감옥의 섬에 남기를 선택한다.
이 책에 나오는 이들도 같은 상황에 처해있다. 상대적으로 안락한 삶, 윤리적이고, 도덕적으로 비난받지 않을 여건, 스스로의 양심으로부터 고통을 당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삶이라는 선택과 다른 선택을 할 기회가 생겨났을때, 정말로 자신이 기다리고 있는 것 같지만 결코 확신을 할 수 없고, 그 새로운 선택을 하기 위해서 너무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르는 선택의 순간이 나타날때 그들은 어떻게 고민하고, 어떻게 용기를 내고, 또 어떻게 좌절을 하는지... 그런 섬세한 디테일이 잘 나타난 책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마디의 대화도 없고, 저자의 개입이 한마디도 없는 독특한 구성. 처음부터 끝까지 주고받은 이메일의 내용만으로 구성되는 책. 깜빡이는 컴퓨터 화면에 나타난 글자들로만 이어지는 글들이 나타내는 놀랍도록 섬세한 사람들 감정의 떨림에 대한 미묘한 묘사. 이 책이 선택한 실험적인 기법은 이 책이 나타내고자 한 그 내면의 움직임을 놀랍도록 잘 표현하고 있다. 좀처럼 보기 힘든 내용과 기법상의 완벽한 일치이다.
일곱번째 파도가 나타났을때 그들은 결단을 내린다. 각자가 결단을 내리는 과정은 다르고, 각자가 원하는 것도 다를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마주보지만 사람은 각자의 지옥에 갖혀 있고, 영원히 완벽히 상대와 빈틈없는 합체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이 바로 사람의 삶이다. 그리고 그 파도에 휩쓸린 후 그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그 뒤로 그들은 오랫동안 행복했을까. 이 책은 파도에 휩쓸린 후 그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단지 짧은 단서만 있을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