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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
커리드웬 도비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7월
평점 :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후 곰곰히 생각해본다. 이 책의 제목인 함정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함께 적혀 있는 영문 제목인 breaking 이란 또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사전상으로는 연관성이 없는 breaking 과 함정이라는 두 단어 사이에는 도대체 무슨 연관성이 있어서 함정이라는 이름으로 이 책을 번역 출간한 것일까.
장소미상, 국명미상의 조그마한 나라가 있다. 대통령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니 나라는 틀림없는 나리일 것이다. 그러나 그 나라는 실제로 인물이 활동하는 구체적인 공간이라기보다는 등장인물들의 사유를 펼치기에 알맞게 고안된 적당히 작고, 너무 작지는 않도록 꾸며진 불명료한 공간일 뿐이다.
사람들이 등장한다. 여러가지 직업을 가진 사람들, 적들. 대통령이었던 사람과 쿠데타를 일으킨 사람. 그리고 그들과 연관된 여러가지 사람들. 사실 누가 누구인지, 누가 누구와 어떤 관련성을 가진 사람인지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읽지 않으면 제대로 파악이 되지 않는다. 모호하고 애매하고 복잡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모호함을 통해서 저자가 표현하려고 하는 것은 오히려 더욱 분명히 드러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책을 일독하고 책장을 덮은 후 제일 먼저 머리속에 떠오르는 막연한 관념이 사라지기 전에, 그 느낌을 적으려고 곧바로 컴퓨터 앞으로 달려와 글을 적어나가면서 막연하던 것들이 점점 더 구체화 되어가는 것을 느낀다.
지금 내가 느끼는 느낌은 바로 함정에 관한 것이다. breaking 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느낌이기도 하다. 그 두 단어가 공통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어떤 느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 허망한 기대와 배반들,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 수 없는 공허함. 시간을 열정으로 채워넣어 무엇을 향하영 다가갔을때 마침내 느껴지는 그 목표의 무의미함.
쿠데타로 정권이 바뀌고. 정권이 바뀌고도 실제로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고, 사람들은 복수를 위해 노력하고, 때로는 그 복수가 애당초의 목표를 잃어버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사랑이라는 지고의 가치가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비천한 것처럼 쓸모없는 것이라는 것을 느끼고, 세상은 패러글라이드를 타는 사람들 처럼 빙글빙글 나비 모양의 궤적을 그리면서 의미없는 회전을 계속한다는 것.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태어나 호주에서 공부하고 영국을 거쳐 미국에서 활동하는 학사학위로 찍은 다큐멘터리로 세상의 주목을 받고 석사 학위로 쓴 이 책이 세계적인 관심을 끄는, 아직도 세상에 남아있는 또 다른 대학으로 옮겨서 박사학위 과정을 밟고 있는 이 매력적인 저자의 눈에 보이는 세계의 모습은 이런 것이었는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