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카민스키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13
다니엘 켈만 지음, 안성찬 옮김 / 들녘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유려한 문체로 멋있게 시작된 이 책은 읽어나갈수록 종잡을수 없는 스토리로 빠져들어간다. 한때 위대했던 미술가의 죽음을 앞두고 그를 취재하러간 기자가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제대로 된 취재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계속 조바심이 난다. 어려운 형편에 이 미술가의 전기를 출간해 성공의 입지를 마련하려는 기자가 변변한 취재는 고사하고, 자신의 돈과 시간과 인간관계만을 축내는 상황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어이없게도 그런 상황은 책의 마지막  - end - 까지도 계속된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첫 1/3을 넘어서면 책의 대체적인 구도가 그려지기 시작하는게 보통이고, 그때부터는 책을 읽는 속도가 붙기 마련인데, 이 책은 끝까지 주의를 기울여 찬찬이 읽어보았지만 끝내 종잡지를 못하고 말았다. 책을 다 읽고 뒤에 붙은 후기를 보면서 비로소 내가 책을 잘못읽었다는 것을 꺠달아다. 머리속으로 그때까지 책을 읽은 내용을 역회전을 시켜보았다. 아뿔사.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목요연하게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내가 그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나는 작가의 관점에서 이 책을 읽으려고 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이야기가 진전되지 않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이 책을 철저하게 제 3자의 관점, 아니면 이 책에 화자가 아니라 대상으로 등장하는 미술가의 관점에서 이 책을 읽었더라면 책의 내용은 정반대로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이루기 위해 미술가에게 접근해서 그의 삶의 숨겨진 부분들을 캐어내서 전기작가로서의 입지를 구축하여 명성을 누리려는 작가의 개인적 욕심에 나도 모르게 동화되고, 나도 화자인 전기작가의  입장이 되어 같이 초조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런 마음을 비꼬아서 오늘날의 세태를 비웃는 블랙유머를 간직한 책이란 것을 몰랐던 것이다. 하긴 그런 것을 모르고 보았고, 책을 다 읽고 난 후에야 그것을 깨닳았기 때문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멍한 느낌의 또 다른 감동을 느끼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 책은 그렇게 나를 철저하게 감동시키고, 마음아프게 하고, 나 자신이 선 위치를 깨닿게 해주었던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전기작가의 입장에 섰던 나의 속물성과 마주대변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책에 나오는 작가들의 그림. 거울에 비친 사물의 모습의 반영. 자꾸만 비틀려가는 자화상. 몇개의 선들 사이로 희미하게 나타나는 사람의 모습들. 괴팍하게 보이면서도 사람들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읽지 않는 화가의 이상한 모습. 바쁘고 정확하게 돌아가는 세태의 흐름과는 도무지 템포를 맞추지 않는 화가의 낮잠습관. 세상 사람들이 그가 이미 죽은 것처럼 여기게 만든 긴 시간에 걸친 철저한 은거. 그러면서 수십년을 세월을 걸쳐 잊지 못하는 옛사랑에 대한  우스광스러울만큼 순수한 추억....

 

미술계가 바라는 것은 화가가 죽는 것 뿐이라는 말이 있다. 이 책에서도 그 말이 되풀이해서 등장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빠름의 세계에 속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 대가의 죽음을 바란다. 그의 앞에서 어떤 비굴함을 보이든지 그들의 속마음에는 이 화가의 죽음과 그로 인한 그림의 희소성의 완결. 그리고 그로 인해 자신들에게 돌아올 이익에 대한 계산만이 들어 있을 뿐이다. 본의 아니게 화가와 긴 여행을 떠나는 전기작가도 화가를 진정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잘 팔릴만한 에피소드들을 모으는데만 관심이 있다.

 

그런 세상을 비웃으며, 그런 세상을 묵묵히 참으며, 그런 세상을 등지고 삶을 살아가며, 그런 세상이 원하지 않는 그림을 그리며, 그 세상에서 떄묻지 않은 옛사랑의 추억을 간직하며, 비록 눈을 멀었지만 마음으로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눈 먼 화가의 입장에서 이 책을 다시 생각해본다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문법이라는 것이 얼마나 정신없는 미친세상같은지를 절실하게 느낄수 있다. 나도 툴툴거리면서도 그 중 한 작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바로 그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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