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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난화 경제이야기 - 환경이 세계 산업지도를 바꿔나가고 있다
김종서 지음 / 참콘경제연구소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얼마전 영화를 하나 본적이 있다. 지구가 멈추는 날이라는 제목의 키아누 리브스가 주연하는 영화였다. 인터넷에서 이 영화에 대한 평점은 낮았지만 나는 이런 분야의 공상과학 부문의 영화에 관심이 있어서 기꺼이 영화를 보았다. 생각보다 영화는 흥미로웠고, 또 마지막에 놀라운 메시지를 남겨주었다.
전 우주적인 관점에서 볼때 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춘 행성은 극히 적다. 천문학의 발전으로 행성을 가진 별들이 속속 발견되고 있지만, 아직도 전체 우주에서 행성을 가진 별의 비율은 극히 낮을 뿐 아니라, 지금 우리의 관측수준으로 발견할수 있을 정도로 큰 행성은 생명이 존재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한히 크다는 우주의 무한성이, 무한히 낮다는 희소성을 상쇄할 때, 우주에는 여전히 우리들외의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뿐인가' 라는 우주적 차원에서의 외로움을 표현하는 책들도 있고, 칼 세이건 박사같이 우주에 대한 동경과 사랑을 갖춘 사람도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외계의 생명체에 대해 호감을 갖는 것일까. 지구인들의 과거를 돌이켜보라. 과거에 단절되어 있던 문명과 문명의 만남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월한 문명이 약한 문명에 대한 침탈과 파괴 몰락, 식민지화로 이어졌던 것이 어김없는 공식이다. 만약 우주에 우리외의 생명체가 존재한다면 그들이 과연 우리에게 우호적인 존재일까...
그만큼 우리는 외롭다. 지구라는 조그마한 행성의 표면에 납작붙어서 사는 조그마한 무리에 불과하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만든 문명이라는 것으로 지구가 수십억년에 걸쳐 축적해 놓은 환경자원을 마구 사용하고 있다. 그 결과 지구가 아슬아슬하게 만들어 놓은 생명의 잉태조건을 인간들 스스로가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멈추어야 한다. 그 명제에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항상 '어떻게'이다. 과연 어떻게. 환경보호운동을 벌이면, 로하스 운동이 확산되면, 공정무역의 움직임이 전세계적인 규모로 벌어지면.... 모든 나라가 기후의 변동에 화들짝 놀라서 시급히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재원을 국민의 세금부담으로 만드는데 합의를 한다면. 기업들과 소비자들이 지구 환경을 위해 기꺼이 더 많은 비용을 부담하는데 동의를 한다면... 그러면 우리는 아마도 지구라는 환경이 인간이라는 취약한 존재와 그들이 만들어 놓은 문명이라는 것을 살릴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지구가 멈추는 날이라는 영화에서도 그랬듯이 인간들은 정말 심각한 위기에 부딪히지 않고서는 오늘의 안락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환경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많은 기업들이 환경문제를 개선하는 사업모델을 만들기 위해 지금도 고심하고 있다. 이 책도 바로 그런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세상에 태어난 책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내가 말하는 것은 일부 사람들이 아니라, 국가적 규모의 노력, 전세계적인 차원에서의 노력으로 인해 정말로 지구환경의 개선에 뚜렷한 변화를 보이는 것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런 큰 차원에서의 나의 생각은 부정적이다.
그러면 우리들 지구호에 동승한 인간들은 결국 더 큰 위기에 맞닥뜨려져야만 친환경으로 방향전환을 할 것인가? 내 생각은 그렇다. TV에 나오는 불쌍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부전화에는 동참을 하면서도, 그런 사람들이 눈물어린 사연을 창피하게 노출하지 않고도 기부금을 받도록 제도적 장치를 만드는데에는 반감을 보인다. 석유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면 전쟁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 인간이다. 핵무기의 위험을 알면서도 절대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사람들이다. 환경오염 산업이 자신들의 땅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을 알면서도 경제발전을 위해 사양산업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개발도상국들의 모습을 보라.
문제는 경제다. 인간들은 경제적인 이익에 길들여진 존재들이다. 그들이 믿는 신앙조차도 인류를 위해 희생하기 보다는 더 많은 복(경제적 여유, 더 많은 지구의 자원을 사용할 권리, 제한된 자원의 희소성 중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할 권리, 또는 교환가치)를 얻기 위한 또 하나의 방편일 뿐이다. 자신의 진정한 종교를 대의를 위해. 정의를 위해, 고통받는 민족들의 아픔을 위해, 스스로 몸을 던져 산산조각나는 용감한 용사들 조차도 자신들의 민족과 자신들의 국가가 더 많은 교환가치를 받을 것을 인정하기 위해 그러는 것이라고 보면 너무 지나친 견해일까. 물론 나는 심정적으로 그들의 마음에 동조한다. 그러나 지구를 장악하고 있는 인간들을 조정하는 법칙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인간이라는 종은 태어난 이래로 항상 착취를 하면서 살아왔다. 처음에는 나무에 달린 과일과, 풀에 맺힌 열매를, 들에 달리는 동물들을. 그리고 인간의 개채수가 늘어난 다음에는 그들 동물들의 마지막 한마리까지 죽여서 아예 멸종을 시킬때까지 사냥을 멈추지 않았던 것이 인간들이었다. 자신의 땅에서 착취할 것이 부족하면, 다른 인간들이 사는 땅으로 쳐들어가 그들의 것을 빼앗기 위해 인간이 인간을 죽여온 것이 인간들의 역사이다. 위대한 점령자 알렉산드, 케사르, 징기스칸... 그들은 평화의 시대를 연 것이 아니라 지배부족의 피지배부족에 대한 착취구조를 공고히 한 능력있는 약탈자의 이름에 불과할 뿐이다.
오늘날의 세걔최고의 부자이면서 동시에 현인으로 추앙을 받는 워렌버핏이 과연 빛나는 현인일까. 그가 자신의 재산을 기부하는 것으로 그는 흘륭한 인간의 반열에 오를까. 위대한 경영자라는 잭 웰치는 과연 지구를 구하는데 무슨 기여를 한 것일까. 다이너마이트 잭이라고 그가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부르듯이 그는 화학물질을 만드는 부분부터 시작하여 세계를 효율적으로 장악한 사람일 뿐이다. 워랜버핏이 투자한 회사들이(대표적인 것이 코카콜라다) 지구의 안전과 환경을 위해 무엇을 하였을까. 먼 훗날에 그들은 위대한 인간으로 불릴지는 몰라도, 지구와 인류를 위해 값진 일을 한 사람으로 생각되지는 않을 것이다.
세계는 이윤을 기준으로 움직인다. 문제는 경제다. 온실가스 감축에 앞서는 유럽인들의 노력은 칭찬할만하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막대한 재원을 쏫아부어 만든 환경기술을 공짜로 후발국들에게 나누어주겠는가. 지금 전세계가 청정에너지 개발에 뛰어드는 것이 과연 세계를 구하기 위한 이타심에 의해서일까. 아니면 장래의 새로운 블루오션을 선점하기 위한 치열한 이윤추구의 결과인가. 이산화탄소를 절감하기 위해 만들어진 획기적인 기술이 이산화탄소를 제외한 더 많은 공해를 지구에 가져다 오는 일이 과연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바이오 연료를 만들기 위해 산림을 벌채하는 사람들을 보라.
온난화 문제를 푸는 방법도 경제적인 것이어야 한다. 몇몇 가슴 뜨거운 사람들의 어슬픈 노력으로 지구가 바뀔수는 없다. 인간이라는 동물들이 타인이나 후손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안락함을 포기할 것을 기대해서는 안됀다. 지금 가업들이 앞다투어 그린기술에 매달리는것은 그곳에서 더 많은 이윤의 냄새를 맡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환경문제를 당위성의 문제나, 정의의 문제로, 개인적인 각성의 문제로 다루어서는 안됀다.
환경문제는 지구와 인류사회가 당면한 가장 중요한 경제적 이슈이다.(도덕적 이슈가 아니다) 환경문제에 대한 접근도 철저히 기업과 국가, 경제주체의 이익에 대한 분석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래서 지구를 살리기 위해서 환경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더 안락한 내일을 위해서 환경을 생각하는 것으로 급속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온난화 문제를 경제적인 문제로 풀어가야 하는 것이다.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이제 우리도 환경을 돈문제라고 까발려서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그 미래의 황금가치를 누가 차지할지 피나는 경쟁을 벌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