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의 일상 - 생명공학시대의 건강과 의료
백영경.박연규 지음 / 밈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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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쉬타인. 사람이 사람을 만든 이야기이다. 생명이 없던 것에 생명을 불어 넣어서 일어난 이야기이기도 하다. 생명을 가지고 장난을 하는 일... 바로 그런 일들이 요즘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살과 살을 모아서 꽤메는 원시적인 방법이 아니라, 고도로 첨단화되고 진보니 혁신이니 산업이니 공학이니 벤쳐니 하는 온갖 찬사를 받으면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꼭 유전자 공학이나 생명공학을 이야기 하지 않아도 우리 주변에 흔하기 일어나는 일이다. 복제양 돌리가 우리나라에서 복제개를 만드는 것으로까지 진행되기 전에도 시험관아이 같은 것들은 이젠 더 이상 이상한 일이라고 하기도 힘들 정도의 일상이 된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런 것을 다룬다. 우리들 곁에 일상처럼 존재하자만 사실은 일상적이지 않은 일들. 우리가 관성에 젖어서 별로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문제에 대한 의문제기. 바로 그 색다름이 이 책이 가지는 힘이다. 우리가 평범한 것으로 바라보던, 혹은 우리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적응해서 덤덤하게 받아들이던 일에 관해 원래적인 시각을 가지고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책. 우리의 삶이 어느듯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프랑켄쉬타인같은 것이 되지 않았는가를 되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이제까지 많은 찬성들이 있었다. 진보와 발전과 그것이 약속하는 무한한 희망에 관한 부푼 기대감. 그런 것들이 생명을 다루는 기술의 발달에 관한 의구심과 불안을 넘어서서 우리사회의 프랑켄쉬타인화를 더욱 진전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시험관 아기, 대리모, 성장클리닉, 체세포복제... 성장 클리닉에서 키가 더욱 크게 만드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나 관용적이다. 아무도 그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은 바로 그런 우리가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래서 낮설고, 낮설기에 힘이 있는 책이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괴리에 관한 이야기를 말하는 책들이 많다. 오늘날 끊임없이 발전해가는 자연과학에 대해 인문학은 그 내용을 파악하기도 힘들고, 따라서 인문학의 본연인 사회현상에 대한 비판기능이 거의 정지할 수 밖에 없었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비판을 하겠는가. 그래서 오늘날의 세상에는 이런 말이 진실아닌 진실이 되었다. "기술적으로 가능하고, 수요가 있는 모든 일은 가능하다." 현재 인간복제는 금지되고 있지만, 기술적으로 가능하고, 그것을 위해 충분한 돈을 제공할 의사가 있는 사람만 있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사회적인 감시가 지금처럼 느슨하다면...



이 책은 바로 그런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괴리를 메꾸어주는 책이다. 이 책은 의학적 기술의 발달이 인간이 인간에게 하는 행동에 대해 사회적인 맥락에서 접근한다. 충분한 돈만 제공할 수 있다면 오늘날 한 사람의 키를 다른 사람보다 더욱 크게 하는 그런 기술은 더 이상 새로운 진전도 아니다. 이미 범용기술이 된지 오래이고, 첨단연구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도, 어지간간 의사면 모두가 가능하게 할 수가 있다. 단 돈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돈이 없는 사람은 ?



바로 여기가 자연과학의 발달에 대한 인문학적인 비평이 필요하게 되는 지점이다. 생명을 다루는 기술이 결국은 소수자의 수중에 들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돈에 의한 차별화. 지식에 의한 차별화. 정보접근에 의한 차별화 못지 않게 중요한 또 하나의 차별화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인간의 몸에 대한 차별화이다. 돈으로 더 큰 키를 살 수 있고, 돈으로 불임으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소중한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오늘이다. 심지어 돈만 있으면 남의 자궁을 빌려서 대리모를 통한 출산도 할 수가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단지 여기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 책은 근본으로 돌아가서 세상의 문제를 다시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인구가 줄어드는 오늘날 시험관 아기를 통해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게 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닌가라고 물을 수 있다. 그렇다면 부부가 아이가 없이 살아가는 것은 불행한 것이라는 공식은 도대체 어떻게 사회화가 되었는가라고 묻기 떄문이다. 돈으로 키를 키울수 있어 사람들의 전반적인 신장이 높아진다면, 정상적인 키를 가지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작은 키가 된 사람에 대한 사회윤리적인 접근은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는 것이다. 애당초 키가 큰것이 좋은 것이라는 것은 왜 일반적인 것이 되었는가라고 묻고 있다.



규제만으로는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다. "기술적으로 가능하고, 충분한 돈이 있으면" 어떤 규제를 가하더라도 세상의 한 부분에서는 얼마든지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대리모 출산을 법으로 금지하면, 그런 법이 없는 나라로 대리모가 이동을 하면 쉽게 규정을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 현실이다. 모든 규제에는 회피방법이 있기 마련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가치관의 변화가 아닐까. 아이를 가져야 한다는 것, 키가 커야 한다는 것, 남보다 우월해야 한다는 것... 그런 검증받지 못하고, 인문학적으로 걸러지지 못한 사회현상이 우리들을 프랑켄쉬타인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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