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소설 - 상
미즈무라 미나에 지음, 김춘미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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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고 나서도 바로 책을 책장에 꼽지 못하는 책들이 있다. 가끔. 그런 책들은 그 책이 나에게 준 감동의 깊이가 그만큼 크기 때문에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고 해서 바로 그 책에서 내 마음이 떠나게 하지 못하는 마력을 발휘하는 책들이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책들을 만나기가 점점 더 힘들어진다.  내 마음이 점점 딱딱한 껍질로 덮여가는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사실 요즘 그런 깊은 감동을 가진 책을 만나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은 요즘 만나기 힘든 바로 그 오래된 감동을 느끼게 해 준 책이었다. 길고 긴 이야기를 빙 돌아서야  비로서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이해가 되는 책. 책의 처음부터 스릴과 쾌감을 느끼게 하는 트랜디한 책은 아니지만, 묵직한 무게감이 전해지는 감동이 오랫동안 가슴속에 지글지글 타오르게 만드는 강한 힘을 가진 책이다. 한 사내아이의 아픔과 꿈. 그리고 그의 소망과 세상을 향한 도전. 그리고 마지막에 이루어지는 엔딩...

나는 책을 읽으면서 제목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다. 제목이 그 책의 정체성을 알려주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은 책을 읽고 난 다음에야 아하... 그래서 그렇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특히 요즘 선정적인 제목을 덩달아 붙이는 출판계의 풍토에 비추어 볼때 책을 읽기 전의 제목은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제목인 '본격소설'이라는 특이한 제목은 책을 읽기부터 늘 궁금하였다.

사실 '본격소설' 이라는 단어는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듯한데, 그 뜻을 정확하게는 알수 없는 정체불명의 단어였다. 혹 내가 모르지만는 문학인들에게는 친숙한 용어인가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었다... 요즘 대세를 이루다시피 하는 장르소설과 장르소설이 아닌것을 구별하고자 하는 용어인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저자가 쓴 또 하나의 유명한 소설의 제목이 사소설인 것을 감안하면, 본격소설이라는 제목은 사소설과는 대비되는 소설이라는 뜻으로 해석이 된다.

이 책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19세기의 서양소설이 소설의 규범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19세기류의 소설들을 본격소설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그런데 저자는 늘 그런 류의 소설을 자신이 써보는 것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말하는 본력소설이라는 것은 저자가 일본문학의 대세인 자신의 삶을 소설화한 '사소설'이 아니라, 저자의 창작에 의해 탄생한 실재로 있지 않은 소설을 말하는 것인것 같다.

그러나 저자는 이 책은 어떤 의미에서는 본격소설이 아니라고 말한다. 저자의 주장에 의하면 이 책에 나오는 인물이 실재로 존재한 인물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책의 화자 역시 저자의 실제 삶의 프로필과 유사한 점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학전공자가 아닌 나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이 책이 본격소설이냐 아니냐라는 저자의 명칭이 아니다. 이 책이 나에게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는가에 관한 것이 중요한 것이다.

소설은  아직은 일본이 전후의 피폐함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시기에 미국으로 밀항을한 한 가난한 사내에 관한 의문점으로 시작을 한다. 비자문제로 가장 허드렛일중 하나인 입주운전사로 미국생활을 시작을 한 어린 사내는 비상한 노력으로 짧은 시간에 미국내에서 성공을 거둔 사업가로 성장해버린다. 그 과정에서 보여주는 그의 노력은 눈물겨움을 넘어서 지독하다는 느낌을 줄 정도이다. 과연 그 엄청난 노력을 한 에너지가 무엇일까... 그런 의문이 일어날 즈음 책은 과거의 일본으로 돌아간다.

태평양 전쟁전. 일본의 상류층과 귀족들의 생활. 같은 부유층이면서도 근본이 깊은지 얕은지를 따지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일본의 상류층의 삶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수도인 도쿄뿐만이 아니라 고급 별장지에다 경쟁적으로 별장을 짓고 호사스러우면서 안락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전쟁이 그들의 삶의 모습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에 대해서도 자세한 스케치를 보여준다. 그리고 일본이 전쟁에서 패망하면서, 만주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속에 이 소설의 주인공이 들어 있었다.

거지보다 더 남루한 모습. 같이 가난한 가족중에서도 유난히 따돌림을 받을수 밖에 없는 이유. 총명한 눈빛을 가리는 겹겹히 쌓인 아픔의 층들. 그는 그 모든 굴레를 벗어나 조금씩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고 했으나, 그가 자신의 빈한한 처지를 개선하는 것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그가 목숨을 바쳐 사랑한 사람은 그가 감히 다다를 수 없는 높은 자리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밀항. 노력하는 자에게 기회를 준다는 신세계로의 밀항은 그래서 이루어진 것이다.

길고 긴 서사의 끝자락 무렵에서 우리는 그의 집념이 어떤 아픔의 소산인지, 그가 성공을 이루어서 궁극적으로 얻기를 바란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큰 성공을 이루기에는 너무나 짧았던 15년이라는 시간이, 자신이 바라던 것을 얻기를 소망하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긴 아픔의 시간이었는지. 그리고 그 시간이라는 힘은 그가 사랑하던 사람에게 어떤 상처를 남기고 말았는지... 이 책은 숙명에 도전하는 인간의 의지와, 무정한 시간이 삶을 허물어가는 힘에 관한 것이다.

본격문학이라는 것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든 나에겐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러나 이 책은 트랜디하게 쉽게 읽히고 가벼운 감흥을 주는 책과는 분명히 차별되는 책은 아니다. 멋을 살린 어려운 문장은 없다. 미국에서 공부한 원작자의 문장때문인지, 깔끔한 번역때문인지 일본 번역서를 읽을때 느껴지는 어색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쉽고 매끄럽고 술술 읽히는 문장들 뒤에 감추어진 아름과  감동과 슬픔은 크고 강하다. 그래서 이 책은 그야말로 본격적인 소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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