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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이언 매큐언 지음, 이민아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500페이지 가까이에 이르는 이 책의 내용은 하루동안에 일어난 일이다. 토요일 새벽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나서부터, 평온하게 시작된 주말의 하루가 길고 힘든 하루로 변하고, 마침내 고통과 절망의 밤을 맞은 후 다시 평온 되찾은 새벽이 되기까지 만 하루와 약간의 시간이 더 지나는 사이에 일어난 일들. 그 일들이 주인공의 마음속에 남긴 괘적을 그리는 일이다. 사건들이 이야기를 끌어가지만 이 책은 무엇보다도 주인공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심리적인 움직임의 포착에 민감하다.
끈김없이 유려하게 흐르는 문장은 읽기가 쉽고 이해하기에 어려움이 없다. 천천히 주인공의 마음이 움직여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중년이라는 삶에 선 한 중상층의 가장이 느끼는 인생이라는 것에 대해서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는 힘든 젊음을 이겨낸 후 지금의 '안정된' 자리에 도달했다. 유명한 신경외과 의사인 그는 날마다 힘든 많은 수술을 성공적으로 치뤄내며 삶의 보람을 느낀다. 그가 이룩한 평온한 삶, 가정, 아내와의 행복, 운동, 건강...
그러나 그의 평온은 위협받고 있다. 그의 건강은 날마다 조금씩 젊음을 잃어가고 있다. 그토록 열심히 하는 운동도 점점 힘이 부쳐가고, 그가 사랑으로 이룬 가정은 이제 머리가 큰 자녀들이 자신의 기대에서 벗어나는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스스로는 아직 안정을 유지하고 있다고 느끼지만,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는 그의 삶에 서서히 균열이 가고, 그 균열이 점점 커져가고 있다는 것이 보인다.
주인공의 개인적인 삶과 교차해서 흐는 것이 바로 9.11 이후 미국의 아프카니스탄 침공에 이어 이루어지는 이라크 침공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사건은 주인공의 개인적인 사건과 절묘하게 교차하며 함께 이 책의 주제를 이룩한다. 주인공이 느끼는 삶의 위기가 단지 개인사의 아픔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아픔과 함께 통합되면서 사회성을 얻게되는 것이 바로 저자가 개인의 삶은 사회의 아픔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토요일 하루에 일어난 가장 큰 사건. 결코 치유될 수 없는 '헌팅턴 무도병'이라는 희귀한 병에 걸린 거리의 부랑자와의 우연한 조우에서 이루어진 조그만 접촉사고가 결국은 그의 가정에 부랑배의 침입을 가져와 가족 모두의 생명에 위협을 가져오는 상황설정은 기묘하게 이라크전 반대시위와 연결된다. 그가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 가장 먼저 감지한 사건이 이슬람의 테러를 상기하게 되는 비행기 불시착 사건이었다. 그의 낮은 런던을 가득메우는 200만 인파의 반전 시위에 휘둘린다.
그날 그의 개인사가 영국과는 멀리 떨어진 이라크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관한 사람들의 반응에 큰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토요일 하루동안 사람이 사람에게 가하는 폭력과, 그 폭력을 제거한다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또 다른 폭력 사이에서 많은 생각을 한다. 그의 의식내부에서 또 그의 자녀들과, 또 길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사람들과. 마침내 이라크 반대 시위의 여파로 휩쓸리게 된 부랑배들이 그날 저녁 그의 '안정되었으나 파열음이 일어나는' 집에 쳐들어 왔을때 이야기는 극적인 고조의 순간을 맞게 된다.
삶은 무엇이고, 안정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순간 발현되는 분산된 듯한 가족간에 벌어지는 놀라운 응집력은 또 무엇인가. 이제 죽음을 앞둔 노인과,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 젊은 여인. 그리고 불한당을 한순간에 무장 해체 시켜버리는 한편의 '시'. 이 길고 복잡한 하루를 통해서 저자가 말하는 것은 명확하다. 아픔과 폭력과 삶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삶과 사랑은 영원할 것이며 그 힘에 대한 신뢰가 계속되는 한 우리에게 아직은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