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워진 빈 자리
스테판 주글라 지음, 김혜경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한 여인의 자리가 비었다. 그 빈 자리에 전혀 관련이 없는 다른 여인이 차지를 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책은 그런 일들이 무척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처럼 이끌어간다. 그것이 몽환적이지 않으면서도, 약간 몽환적인 듯이 느껴지는 이 책이 가진 마력이다.

작가는 현실이라는 것의 냉정한 어법을 그런 신비로움을 약간 가미한 문체로 비틀어버린다. 현실적으로 그런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작가에게 그런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작가는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표현하기 위해, 현실에서 있을법하지 않은 설정을 해낸다.

마치 화가가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표현하기 위해 현실에 존재하는 사물을 해체하는 것처럼. 우리가 아는 현실이라는 것은 이 책에선 작가의 의지에 따라서 해체되고 새롭게 조립되고 만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일이라 독자들이 항의할 겨를이 없다. 작가의 힘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요즘 장르문학에서 많이 나오는 '체인지'같은 류의 설정이 아니다. 이 책은 그런 류의 책이 아니다. 철저한 존재론에 관한 성찰을 담은 책이다. 그러나 어렵지 않게 술술 읽히는 문장을 유지하고 있는 것 또한 이 책이 가지는 힘이다.

붙박이처럼 현실에 붙어 있는 삶. 우리가 소위 리얼이티니 정체성이라고 부르는 현실이라는 것. 그 현실에서의 '나'라는 존재가 과연 정말 '나'라는 존재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아니 리얼리즘 이후의 모든 화가들이 그리고자 했던 현실은 현실이 아니라는 것일까.

화가가 등장하는 이 책을 읽으며 나는 그런 생각을 해본다. 현실은 비현실적인 모습속에서 정말 자신의 진정한 본질을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 책의 작가는 예리한 시각으로 바로 그런 점을 잘 포착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아름답기 그지 없는 간결한 문장으로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적은 분량의 글로 훌륭하게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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