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처럼 - 신영복 서화 에세이
신영복 글.그림, 이승혁.장지숙 엮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선배는 묵묵히 소주잔을 내려보며 말했다. “나는 왜 이 소주처럼 맑지 못하는 것일까.” 그 말은 오랫동안 내 기억에 남았다. 세월이 지나고 처음처럼이라는 이름의 소주가 세상에 나왔다. 그 즈음에 ‘처음처럼’ 이라는 제목을 단 책이 세상에 나왔다.


마치 소주처럼 맑고 투명한 글이다. 마치 소주처럼 톡 쏘는 부드럽지만 강한 메시지가 들어있는 글이다. 긴 세월의 고초. 잃어버린 시간들. 아픔. 그것으로 인해 가시가 생기고 독기가 흐를만도 한데. 이 책에 담긴 글들은 하나같이 따사롭다. 따사롭다 못해 한낫의 따가운 햇살처럼 내 몸에 있는 자그마한 흠집을 하나하나 다 드러내고 살균하고 멸균시킨다.


그 토록 무서운 세월의 고통에, 인생을 갉아먹는 시간의 유배에도 굴하지 않고 지켜온 칼날같이 날카로운 정신과, 좀처럼 녹슬지 않고 날이 시퍼런 그 긍정과 사랑과 온유의 글들이 내 가슴을 후벼낸다. 술도 취하지 않고 어떻게 그렇게 진실을 쉽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인지, 어떻게 이 아픈 세상을 그리고 초연하게 살아 낼 수 있는 것인지.


그분은 맑게 미소 지으며 그곳에 있다. 인간의 처음 마음이라는 것은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닐까. 그는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 같다. 내가 오를 수 없는 저 아득한 혜안의 기슭에서서 나를 향해 달려오라고 손짓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아 그리운 그곳. 그러나 세상에 때를 뭍힌 나에게는 너무나 먼 곳이다. 그저 선생의 글을 읽고 잠시 몸을 求?것으로 만족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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