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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파리행 - 조선 여자, 나혜석의 구미 유람기
나혜석 지음, 구선아 엮음 / 알비 / 2019년 6월
평점 :
여행은 일상을 탈출해 자유를 느끼게 해준다. 누군가는 여행했던 기억으로 일상을 버틴다고도 한다. 누군가는 여행 후 자신의 삶이 바뀌었다고 한다. 그만큼 여행은 삶의 활력소이자 인생의 전환점이 되어준다. 조선 시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연암 박지원의 청나라 여행기인 <열하일기>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조선 시대 여인 중에도 유럽과 미국을 다녀오고 유람기를 쓴 사람이 있다.

따뜻한 봄날 아지랑이가 끼었을 때 루브르궁전 정원 주위에 화단을 돌아 여신상 분수에 발을 멈추고 역대 인물 조각을 쳐다보며 좌우에 우거진 삼림 사이로 소요하면 이것이야말로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다. - p.75
이 책 <꽃의 파리행>은 조선 최초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의 구미 유람기이다. 러시아, 스위스,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영국, 스페인을 거쳐 미국으로 여행을 다닌다.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그녀가 여행하며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주로 다룬다. 조선 시대 여인의 눈과 귀와 발로 유럽과 미국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나혜석은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 인간이 살지 않는 다른 세상)이라는 단어를 많이 쓴다. 이 단어만 봐도 그녀가 보고 느낀 여행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었다.
나혜석이라는 작가에 대해서만 봐도 대단하다. 조선 시대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생각해보면 더욱더 그렇다. 누구나 대학을 갈 수는 없는 환경에서 모든 학교에 진학하고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도쿄에 유학을 떠나기까지 했다. 이후에는 유럽과 미국으로 여행을 떠나기까지 한 엄청난 경제적 여유가 있던 지식인이다. 나혜석은 서양화가일 뿐 아니라 작가, 언론인, 여성 운동가, 독립운동가 그리고 페미니스트이다. 그녀의 이러한 이력에는 구미 유람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것은 그녀가 여행한 동안의 생각, 그리고 여행을 다녀와서 조선에서 살면서 느꼈던 것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아직 깨지 않은 꿈 속에 있는 것이었다. 꿈 속에서 깨어보려고 허덕이는 것은 나 외에 아무도 알 사람이 없었다. - p.214
책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역시 여행을 다녀온 후 나혜석이 파리를 그리워하며 쓴 글이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이 글은 그녀의 사상이 한껏 담겨있어 나혜석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갇힌 삶을 사는 조선 시대 여성의 삶을 확실히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 짧은 머리를 길게 기르고 짧은 치마 대신 긴 치마를 입는다. 화가로서, 여성으로서, 학생으로서 느꼈던 그 모든 감정은 닫아둔 채 사는 나혜석의 삶은 새장 속의 삶처럼 느껴진다.
조선 시대 여성이 보고 느낀 서양의 모습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특히 유럽이나 미국을 여행한 사람이라면 이 책의 내용이 조금 색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자신이 다녀온 곳을 다른 시대의 사람의 시각으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을 것이다.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조선 시대 여성 운동가이자 페미니스트로 살았던 나혜석의 삶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