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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어웨이 ㅣ 앨리스 먼로 컬렉션
앨리스 먼로 지음, 황금진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5월
평점 :
최근에 여성 작가들의 글을 많이 읽고 있다. 여성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글들도 좋아한다. 청소년기나 한참 이전에는 남성 작가, 남성 중심의 이야기를 많이 읽었다.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의 시각이 공감이 가는 것일 수도 있고, 이제 충분히 여성들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게 내가 성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둠 속에 잠겨있다 여명 속에서 꿈틀거리며 일어나는 작품들을 하나씩 마주하는 느낌이라 기분이 좋다.

웅진 지식하우스에서 이번에 앨리스 먼로 단편소설집 여러 권을 냈다. 그중 가장 최신작들을 엮은 책이 <런어웨이>.
제목인 '런어웨이'는 가장 처음에 나오는 단편이다. 남편으로부터 도망치고자 했던 칼라와 그녀를 돕는 실비아. 희망한 것과 다르게 끝나버린 도망은 아쉬움을 남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지극히 현실적이라 마음을 무겁게 했다.
"언제나 이런 식이다. 한동안 벽장에 처박아 두었다가 때때로 다른 것을 찾으려고 뒤지다 보면 기억이 나고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것도 금방. 그러다 벽장에 계속 처박아두면 그 앞에도, 그 위에도 뭔가가 잔뜩 쌓이다가 급기야 전혀 떠올리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한 때는 보물 1호였던 것. 그것을 까맣게 잊게 되는 것이다. 한때는 잊어버린다는 생각 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 이제는 머리를 쥐어짜야 겨우 떠올리는 것이 되도 만다."
- <우연> 중
'우연'은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작품 중 하나일 것이다. 기차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들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다. 줄리엣의 행동과 그 마음이 가장 크게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재밌는 것이 뒷부분은 나로서는 마음이 복잡해지며 차마 공감할 수 없었던 이야기였다는 것이지만)
기억에 관한 줄리엣의 생각도 그렇다. 시간은 흐르고, 추억과 기억은 저 너머로 사라져 가버린다.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말은 기억의 이런 특성 덕분이 아닐까. 아마 기차역의 사건도 줄리엣에게는 흘러가는 기억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반전'은 슬픈 로맨스 소설의 느낌이 난다. 이 소설에서 가장 마음에 든 작품이다. 기차를 타고 멀리 셰익스피어 공연을 보러 다니던 로빈의 특별했던 하루와 1년 후, 그리고 그 이후. 그 모든 이야기가 반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작품 중에서 가장 가볍게 읽을 수 있었고, 작은 설렘을 준 작품이다.
사실 이전 작품을 읽어보지 않아 이 책이 앨리스 먼로의 소설을 접하는 첫 소설집이었다. <런어웨이>를 읽어보니 나무 가지가 뻗어 나가듯 이전 작품이 궁금하고 읽어보고 싶어진다. 시야의 모든 것들을 쓱 훑어보는 서술되지만 스쳐 지나간 것들을 붙잡아 이야기가 진행되는 점, 또 그 안에 들어있는 묵직함이 좋았다. 미스터리, 드리마, 로맨스 모두 조금씩 들어있어 재밌던 단편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