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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 시절 ㅣ 소설Q
금희 지음 / 창비 / 2020년 1월
평점 :
창비에서 진행되는 서평이벤트를 신청했는데 정호승님의 신간시집에 이어 소설까지 연달아 당첨되어 오랜만에 돌고래 비명을 발사했다. 창비 출판에서 내일을 향한 질문, 젊은 문학의 새로운 발견이라는 슬로건으로 <소설Q> 시리즈를 기획한 것같다. 네번째로 이름을 올린 금희 작가의 소설을 만나는 행운을 잡았다.
"나는 그 곳을 생각보다 쉽게
사랑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제목 <천진시절>을 보고는 천진했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일까 궁금했는데 공간적 배경이 중국의 천진이었다.^^
금희 작가는 중국 길림성에서 태어난 조선족 작가답게 그곳을 중심으로 서사를 자연스레 꾸려냈다. 경제발전을 일궈 나가던 시절의 중국 천진에서의 직장생활이 조금은 생경했지만 요즘 '사랑의 불시착'이라는 드라마를 가끔 봐서 그런지 중국의 천진이라는 곳의 그림이 쉽게 그려졌다. 중국 연변 쪽이면 북한과 가깝거나 비슷한 어느 언저리쯤이 아닐까~^^;;;
우리나라도 경제가 발달하기 이전의 시대에는 취직을 하기위해 고향을 떠나는 젊은이들이나 객지에서의 삶을 소재로 한 작품들도 많았었다. 최근에 읽은 소설 중에서 추억을 곱씹게 만드는 잔잔하면서 첫사랑의 상처와 연민 그리고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궁금증과 막연한 그리움들이 적절하게 잘 버무려진 소설이었다.
"정작 그 시절이 그물에 걸려 올라오는 정어리떼처럼 반짝반짝 들뛰기 시작하자 나는 깜짝 놀랐다. 무의식이라는 창고 속에서 진작 한 줌의 재로 사그라졌을 거라 여겼던 기억이기 때문이었다."
잊고 살았던 기억의 파편이 어느 순간 떠오를 때가 있다. 깊이 가라앉은 기억의 바닥에서 떠오를 때의 느낌을 표현한 문장이 마음에 들었다. 망각이라는 창고 속에 갇혀있던 것들이 나올 때 설레기도 하고 슬퍼지기도한다. 잊어서 아쉬웠던 기억에는 희열로 화답하게되지만 굳이 기억하지 않아도 될 기억이 떠오를 땐 아직도 아물지않은 상처가 더 아파온다.
주인공이 오랜만에 정숙언니를 만나 과거를 회상하듯이 나도 중학교 절친을 대학졸업이후 만나지 못했다가 20여년 만에 연락이 닿아 설레던 기억이 났다. 지금도 만나는 친구와 여러 시절을 함께하게 되는 추억의 공유의 힘은 의외로 막강한 관계를 형성시켜준다.
주인공 '상아'는 어린 시절부터 보아왔던 '무군'이라는 청년과 흐지부지 약혼까지 하게되고 취직을 핑계삼아 얼떨결에 고향을 떠나 천진에서의 생활이 시작된다. 처음에는 무군을 오빠처럼 듬직하게 믿어온 상아의 모습이 나온다. 사랑이라는 확신은 없지만 포근했던 유년의 기억들로 인해 오래 이어진 소중한 인연으로 가약을 맺게된 것이다. 어릴 때 사랑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사랑인지 아닌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떠밀려오게 된 시간을 함께 지내다가 불현듯 사랑에 대한 확신이 사라진다. 사랑이 깨어지는 순간, 콩꺼풀이 벗겨지는 순간에는 같은 사람이 갑자기 생판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 사람의 마음이 변하게 될 때에는 어떤 감정이 작용하게 되는 것일까.
"여전히 포장칸에서 박스와 씨름하는 무군, 아주머니가 소리치기 바쁘게 식당으로 달려가 고등어찜을 맛있게 먹는 무군, 휴일이면 희철이랑 공을 차고, 출출하면 나 몰래 사비로 고기를 사서 굽고, 저녁이면 소파에 길게 누워 발가락을 꼬물거리며 리모컨을 손에 쥔 채 키득키득 웃는 무군. 덕광에 출근한지도 1년 반이 되어가는데 무군은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 상태라면 그에게서 더 무슨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까 싶었다.
나의 약혼자가 저런 사람이었던가. 내가 저런 사람이랑 결혼하려고 여태 이렇게 살아왔단 말인가하는 생각이 갈마들때마다 나는 맛도 없는 음식을 허겁지겁 먹다가 체한 사람마냥 속이 더부룩했다."
사랑이 현실이 되는 순간 욕망과 꿈의 저울질에서 사랑과 사람을 자신만의 엄격한 잣대로 선택하고 수없이 속으로 헤어린다.
상아는 그제서야 무군의 곁을 떠나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지금의 남편과 무뚝뚝한 대화는 현실적이기도 하다. 아마 이럴 때 다른 사람을 떠올리듯이 문득문득 무군의 시선을 느낀다.
"나는 그에게 오늘의 일정을 대충 적어 보냈다.
-오늘 오후는 상황묘, 예원갔다가 저녁에 동방명주랑 외탄본대.
-어.
-내일은 금성이가 훈이 데리고 디즈니랜드 가겠다네.
-어.
-엄니 아부지 내일 푹 쉬라하고, 우리 모레 다 같이 집으로 갈거야.
-알았어.
-자기, 거기도 많이 덥지? 요즘 일 힘들어?
-더워.
대화의 의지가 느껴지지 않는 남편의 문자 앞에서 나는 노력을 그만 멈췄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그래도 그는 우리가 '한팀'이라는 사실을 망각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경기가 어려우면 잠깐씩 알바를 해서라도 생활비를 보냈고 이번 금성의 결혼식에도 부줏돈을 넉넉히 통장으로 넣었다. 핸드폰을 잠그고 창밖을 내다보며 나는 느닷없이 어떤 상상을 해보았다.
무군이라면 어땠을까?
혹은 무군은 지금 아내에게 어떤 남편으로 살아갈까. 무군을 추억하기 전에는 한번도 해보지 않은 상상이었다."
"나아지지않는 친정집의 형편, 치료비가 없어 방치하는 동안 점점 악화되어가는 남동생의 사정, 그 모든 것에 대한 부담감과 조급함, 게다가 오직 사랑밖에 모르는 너무도 단순한 남자친구. 정숙은 그들 사이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려는데 다다랐고 희철은 일이 그렇게 될 때까지 아무런 변화의 조짐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항상 그게 문제지. 상대방은 순간순간 흔들리고 생각이 변하는데, 그동안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보면 남자라는 족속은 시작이 바로 결과라고 유추하는, 현실에 대해 총체적으로 방심하는 한심한 군체였다. 희철이 그랬고 무군이 그랬다."
무군은 남다르게 성실하며 상아에 대한 순수한 사랑을 간직한 사람이지만, 상아는 더 나은 미래를 향해 적극적인 삶을 개척하려는 포부가 없는 그를 초라하고 답답하게 여기게 된다. 어쩌면 무군과 계속 함께하는 삶은 그녀가 누릴 수 있는 신분상승의 기회를 놓친다고 생각했을까? 누군가를 경유하지 않고는 도시의 취직이나 접근이 어려웠던 시절임을 생각해 볼 때 상아의 선택은 여성이 주체적인 삶을 개척하기 어려운 상황을 드러내 안타깝다. 현재의 삶을 살면서 과거의 기억은 강물처럼 흐르다가 돌연 수면 위로 떠오른다.
어떤 기억이 우리를 급습하게 될까? 아련한 사랑의 추억 한켠을 떠올리게 하는 소설이었다. 순진무구했던 무군의 사랑이 오랜 잔상으로 남는다. 비록 추억과 사랑이 나의 생각과 다르게 기억된다해도 퇴색되지않을 만큼 소중하게 떠오를 수 있기를 바라게된다. 지난 사랑에 대한 예의를 진실하게 표현한다는 건 무얼까? 상대를 존중하는 사랑으로 완성됨을 알게 되려면 어떤 시간을 견뎌내야 가능해지는 감정일까. 떠나온 사람과 남겨진 사랑들에 뭉클해지는 부분이 따스하고 애틋해서 겨울에 읽기 좋은 소설이었다.
"나는 누군가의 시선 속에 잡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걸으면 그 시선도 따라왔고, 내가 멈춰 돌아보면 시선은 숨어버렸다. 나는 종시 그 시선과 마주할 수 없었다.
그는 위협적이지도, 악의나 분노, 조소같은 것을 품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은밀한 곳에서 나와 함께 걷고 싶어할 뿐인것 같았다. 그것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친절함과 따스함이었다. 누군가의 심장이 툭툭 뛰고 있다는 것만 느껴졌다. 그것은 끝난 사랑에 대한 예의를 표하는 진실한 고백이었다. 한번도 사랑을 해본 적이 없었지만, 나는 이제 안다. 무군, 그만큼 사랑을 잘하는 사람은 사실 흔치않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