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자전거, 자유 - 자립의 도구, 불확실성을 다루는 기계,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관문
마리아 E. 워드 지음, 이민경 외 옮김, 앨리스 오스틴 삽화 / 유유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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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1학년 때, 자갈이 깔린 비포장 국도를 중학교 1학년이던 둘째 형이 몰던 자전거 뒷 짐받침대 위에 탄 기억이 자전거에 관한 내 첫 추억이다. 마을 리 단위 동네 하나에 텔레비전이 겨우 한두 대 있었던 때, 자전거는 그보다 한두 숫자를 더해 있었을 것 같다. 형은 아버지 자전거를 몰래 타고 학교에 가던 길에 나를 태웠다가 자갈길에 바퀴가 삐끗하면서 자빠졌다. 나는 얼굴을 조금 긁힌 것 같았다. 학교 양호실에 들어서니 3학년 세째 형, 5학년 다섯째 누나가 달려왔다. 오후에 둘째 형은 빗자루로 아버지께 맞았다. 아이고야, 벌써 50년 전 일이구나.

<여성, 자전거, 자유>는 정희진 님의 추천사를 읽고 보았다. 자전거로 왕복 25km 출퇴근을 한 지 4년 차다. 출근해서 씻고 옷 갈아입는 일이 번거롭지만, 운동한다는 생각에 견딜만 하다. 무엇보다 퇴근 길, 천변 자전거길에 내려서서 페달을 밟는 가벼운 기분을 느끼는 일은 중독에 가깝다. 이 덕에 마리아 E. 워드가 '언제나 독립적으로 이동할 수 있다. 자전거 타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절대적 자유'라고 쓴 말에 조금 공감할 수 있다. 외발자전거를 구매한 지 1년 6개월이 되었는데도 주행을 못 하고 있다. 두 발 자전거도 제대로 타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 살 차이 나는 사촌 여동생은 훌쩍 올라타고 잘도 타는데, 나는 6학년이 되어도 엄두를 못냈다. 우연한 기회에 보조 바퀴 달린 달린 자전거를 타고 균형 감각을 터득했다. 중학생이 되어서도 올라 타지 못했다. 언제 제대로 탔는지 모르지만,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1, 2학년 내내 내 자전거를 갖고 싶었다. 누나집에 얹혀 살면서 사돈 형이 자전거를 타지 않을 때 학교까지 타고 다녔다. 시내버스를 위험하게 추월해서 달렸고, 등굣길에 체인이 빠져서 손가락에 기름 범벅이 되도록 제대로 끼우느라 쩔쩔매기도 했다. 내 소유 자전거는 결혼 후에 아내가 선물로 사줬다. 어떤 자전거든 언제나 타고 싶었던 나는 내 자전거를 열쇠를 채우지 않고 직장 마당에 뒀다. 동료들이 몇 번 이용했다. 어느날, 사라졌다. 이후 아이들 자전거 네 대를 사주었고, 두 대를 얻어다가 고쳐서 사용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자전거를 탈 수 있게 하는 일을 나의 큰 업적이자 자랑으로 여겼다. 내가 지금 타고 다니는 자전거는 큰아이가 중학교 들어갈 때 산 자전거다. 


60쪽. 많이 좌절할수록 새로운 희망을 가질 기회도 커진다.

113쪽. 자전거 타기의 가장 큰 즐거움은 독립성과 자유라는 걸 잊지 말자.  

206쪽. 자전거 타기는 오락이자 스포츠며, 다른 운동을 대신하거나 보완하는 훌륭한 휴식 수단이 될 수 있다.


오늘 오후에 비가 내릴 거란다. 승용차를 끌고 왔다. 오후 퇴근길, 나는 자유를 잃는다. 다음 주에 다시 자유로워질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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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함의 배신 - 은밀하고 정교하게 숨겨온 인간 본성의 비밀
조너선 R. 굿먼 지음, 박지혜 옮김 / 다산초당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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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한병철은 신자유주의란 자유를 착취하는 이념이라고 한다. 개인의 자유를 지상 최고의 가치로 두는 이념이 실제로는 자유를 착취한다는 주장은 은유가 아닌 실재다. 자기를 자유로운 개인으로 치켜세우는 신자유주의 인간은 실제로는 자유를 착취하고 있는, 개인의 자유를 쥐어 짜내면서까지 성과를 만들어낸다. 

<Invisible Rivals>의 저자는 인간 세상에서 착취는 어디에나 존재한다고 단언한다. 자연 세계에서 암세포가 정상 세포를 착취하듯 인간 외의 동물이 다양한 모습으로 같은 종을 착취하듯, 인간도 협력이란 가면을 쓰고 착취를 일삼는 존재인 '보이지 않는 경쟁자'가 착취로 번영을 누린다고 주장한다.


굿먼은 대놓고, 노골적으로 다정함이란 착취를 위한 기만 전술이다라고 쓰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내내 그렇게 읽고 있었다. 문득 <다정함의 배신>이라는 한국어 번역서 제목에 있는 '다정'이란 단어를 <다정함의 배신>이라는 제목 외에 책 본문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다는 느낌이 서늘하게 들었다. 한국어 번역서 제목만으로 나는 굿먼의 '보이지 않는 경쟁', '보이지 않는 경쟁자' 개념을 마지막 장에서 새롭게 눈여겨 보게 되었다. 그 개념은 '보이지 않는 경쟁의 탄생'이라는 1장의 부제로 있었다. 3장에서 보이지 않는 경쟁의 실체가 드러난다. 


인간은 신뢰를 얻고, 타인에게 칭찬을 받고, 기업을 세우는 등 협력적 모험을 통해 이익을 창출하지만 결국에는 협력을 중단할 기회를 만들기 위해 전략을 세우고 있다. 이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경쟁이다. 보이지 않는 경쟁이 주는 최악의 효과는 종종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경쟁을 가장 잘하는 사람에게 보상과 혜택이 돌아간다는 것이다. (113쪽) 


한국어 제목에 내가 낚였나? 작년에 나온 김민섭의 <우리는 조금 더 다정해도 됩니다>는 앞으로 읽을 도서 목록에 있고, 인터넷 서점 장바구니에는  2021년에 나온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와 지난 3월에 나온 <왜 나의 다정함이 당신을 상처 입힐까>가 있다. <다정함의 배신>이 한 주 일찍 나와서 먼저 읽었을 뿐인데.


누군가 숏폼에서 보았다면서, 인류의 0.5%가 칭기스칸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던데, 이 말이 <다정함의 배신>에서 인용한 것이었나? 50여 군데 넘는 부분에 책갈피를 붙여 놓을 정도로 <다정함의 배신>은 협력과 경쟁 간의 논의를 인간 본성 차원에서 전개하는 데 흥미와 재미, 그리고 통찰을 전달해주었다. 말끔한 번역 문장은 몰입을 더 강화하였다. 


<걸리버 여행기> 작가인 조너선 스위프트는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 아니라 훨씬 더 모호하고 어려운, 이성이라는 능력을 지닌 동물"이라고 표현했다. 이 표현을 바탕으로, 굿먼은 인류란 협력적 동물이 아니고 '협력할 능력을 지닌' 동물이라고 주장한다. 협력을 당연시하지 않으면서도 서로 협력하도록 장려할 수 있고, 인간의 결점을 인지한 상태에서도 더 나은 사회를 설계해 나갈 수 있다고 본다. 이 주장이 1장의 마지막 문장이다. 결론인지 불분명하지만, 마지막 장이 7장이니까, 이걸 결론 장이라 본다면, 여기에서 굿먼은 이기심과 기만으로 가득한 세상을 바꾸려면, 그런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무임승차 하는 사람이 있고 그와 공존해야 함을 수용하면서, 보이지 않는 경쟁자와 그의 착취를 인식하고 그의 이기심과 기만에 맞서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이지 않는 경쟁자와 맞서는 일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이런저런 부작용 탓을 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보이지 않는 경쟁자의 이익을 더욱 크게 할 뿐이다. 그들의 전횡을 막고자 강력한 통제 수단을 염두에 둔다면 조지 오웰이 <1984>에서 그린 전체주의 사회로 전락할 것이다. 자연 세계 어디에든 존재하는 착취와 내 안의 이기심을 인정하고 의식하면서 착취당하지 않고 협력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내어 협력의 공간이 더욱 넓어지게 하는 윤리적인 삶을 지향하자는 굿먼의 주장은 결코 순진하지 않다. 


아담 스미스가 '보이지 않는 손'으로 인간 세상을 설명했다면, 굿먼은 '보이지 않는 경쟁' 또는 '보이지 않는 경쟁자'로 인간과 세상을 설명하려 들고 있다라고 독후감을 표현하면 오독 내지 과장일까. 그는 "인간은 모두 보이지 않는 경쟁자이다. 이것이 인간다움의 핵심이다."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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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들 주세요 사계절 중학년문고 2
앤드루 클레먼츠 지음, 이영림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사계절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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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26년 2월 24일자 <세상 읽기> 칼럼에 어린이책 작가인 김서정 님이 "프린들을 살리려고 프린들과 싸운다"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성장'이란 단어에 꽂혀 오려두었던 것 같다. 이 주일 전 방과후수업 시간에 학생들과 함께 읽으면서 어른의 역할이란 '뿌리쳐지고 치받혀야 한다'는 데 밑줄을 그었다. 교사에게 '골치 아픈 말썽꾸러기' 학생은 짜증과 화의 원인 제공자인데, 일반화 할 수는 없지만, 그런 학생에게 교사는 뿌리쳐지고 치받혀야 한다는 것, 성장이란 그 과정에서 일어난다고 글쓴이의 의중을 읽었다. 살짝 부끄러웠다. 도서실 검색을 하니, <프린들 주세요>가 있다. 2011년 초판이었다. 초등학생용 동화책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가는데, 소설로 읽는 언어학 입문서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긴장감 있는 이야기에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레인저 선생님의 편지글, 사전 등재에 이르러서는 가슴이 먹먹해져서 의자에서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곧장 구해서 읽은 <프린들 파일>은 앤드루 클레먼츠의 유작이란 점에서 소중함이 더해졌다. 감동은 그대로 이어졌다. 현실의 학교와 달라보여도 어딘가에는 닉과 조시가 있을 테다. 언제든 뿌리쳐지고 치받혀질 준비를 지금 해도 될까? 너무 늦은 건 아닐까. '프린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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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삶은 누군가에겐 풍경이 된다
이용을 지음 / 좋은땅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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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을 보니 ‘풍경‘에 세 가지 한자어가 있다. 風景, 風磬, 諷經. 셋 다 바람 풍자가 들어 있다. 경치, 작은 종, 경문을 읽음 등, 저자의 글 모음을 세 묶음으로 나누는 일이 저자에게 큰 노고였으니, 독자는 풍경의 세 가지 의미를 되새김으로 보답하고싶다. 날 것의 깊은 맛을 독서로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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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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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2·3 계엄 선포일 밤 11, 두런두런 말소리에 잠에서 깼다. 여보, 계엄을 선포했어, 대통령이. 뭔 헛소리를. TV 켜봐. 사실이었다. 이거 지금 바로 거리로 나가야 하는 거 아냐? 외출복을 챙기다 다시 철퍽 주저앉았다. , 지금 도망가야 하는 거 아냐? ? , 설마. 내일 3일째 치를 2차 고사(기말고사)? 놀람과 두려움, 당혹이 섞인 난감함을 기억한다. 머리 안을 계속 떠다녔던 것은 19805월의 광주였다. 그리고 1991310일 이른 저녁에 들이닥친 사람들. 어째야지? 새벽, 국회에서 계엄 해제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학교 관리자로부터 전화가 오지 않았다. 아침 630. 여느 때처럼 자전거 전조등을 켜고 출근길에 나섰다. 어제와 다름없는 오늘이었다.

독후감 공모 공지문을 접한 두 달 전 저녁, 조금 무거운 마음으로 아래층에 있는 문학책만 꽂아 놓은 방에 갔다. 없다. , 거실 책꽂이에 꽂아두었지? 작년 가을, 설악산 백담사 들어가는 계곡에 있는 민박에서 짐을 푸는데, 옆에서 휴대전화를 보던 셋째 형이 한강이 노벨문학상 받네.”라고 말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발표를 앞두고 몇몇 작가들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잠자리를 정리하고 뉴스를 검색하려고 했는데, 형이 결과를 말해서 살짝 김이 샜다. 잘됐네, 대단한 일이네, 기대 조금 했는데 등 구렁구렁 혼잣말을 했다. 난생처음 설악산 봉정암까지 오른 다음 날, 이른 오전에 책방에서 󰡔소년이 온다󰡕를 꺼내 식구들에게 보이며 노벨문학상 수상자 작품이라고 말했다. 다들 건성으로 들었다. 나는 반년이 다 지나도록 거실 책장에 꽂아 놓은 채 읽지 않고 있었다.

책은 말끔했다. 종이는 바래서 누렇다. 초판 232016531일자. 1쇄가 2014519일이다. 2016년 독서토론동아리연합 토론대회를 준비하면서 예비 도서로 마련했던 책일 테다. 처음 나올 때부터 애써 외면했던 책이었다. 외면? 애써 잊으려는 일들이 있다. 잊었을 것만 같은데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불편하다. 마음이 무거워지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어떤 사회학 연구자가 제주도에 잠깐 살면서 소규모 독서 모임에 나가 4·3 사건을 꺼냈더니 다른 참석자가 좋은 날에, 제주도와 같이 풍광이 좋은 데에서 그런 말을 하냐며 불평하더라는 신문 칼럼을 읽은 적이 있다. 기분 좋게 술 마시고 흥에 겨워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부르는데 한 동료가 무겁고 느릿한 리듬에 실연의 아픔을 담은 노래를 부른다고 비난하는 모양새라고 할까.

19805월 이후의 광주는 내게 진한 어둠과 무거운 바위로 다가온다. 작가 한강은 󰡔소년이 온다󰡕의 에필로그 눈 덮인 램프20131월의 서울 거리에서 예식장 샹들리에의 화려함을 보면서 화사하고 태연한 사람들이 낯설었다고 적었다. 소설집을 보내달라는 선배의 웃음 섞인 항의에사람이 얼마나 많이 죽었는데를 되뇌었다고 한다. 항쟁 마지막 날 전남대학교병원 입원실로 피신한 󰡔소년이 온다󰡕의 은숙이 유월의 도청 앞 분수대에서 물이 뿜어나오는 모습을 보고 도청 민원실에 전화를 걸어 어떻게 벌써 물이 나옵니까. 무슨 축제라고 물이 나옵니까. 얼마나 됐다고. 어떻게 벌써 그럴 수 있습니까.”라는 목소리를 상상했다. 절규, 외침 또는 낮은 목소리의 읊조림으로 따라 읽었다. 나는 󰡔소년이 온다󰡕를 교무실에서, 교실에서 틈틈이 읽을 때마다 비현실감에 휘청대었다. 오월 광주가 현실이고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이 비현실이다. 동호 엄마가 꽃 핀 쪽으로에서목숨이 쇠심줄 같어서 너를 잃고도 밥이 먹어졌제.”라고 말하는 심정에 아주 조금 닿는 마음이 이러한데, 직접 겪은 이는 어쩌겠나.

근래에 속하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을 다룬 소설을 읽으면서 일본군 총칼에 찢기고 잘리는 농민군의 참상을 접한다. 공주 우금치 기념비 앞에 서서 죽창을 들고 돌진하다 끔찍한 고통 속에서 죽어갔을 농민군. 일제강점기 한반도에서, 저 멀리 만주 벌판에서 일본군에 머리를 잘리고 고문당한 독립투사들. 해방 직후 여수·순천과 제주도에서 벌어진 살육, 한국전쟁 전후 지리산에서 벌어진 살상을 상상한다. 매년 그때가 오고 가끔 그 지역에 머물 때 떠올린다. 나의 일상과 안온함이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오월 광주는 그 느낌을 가장 생생하게 전한다.

동호, 왜 애국가를 불러요?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가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다섯 명의 어린 학생들이 두 손을 들고 이층에서 한 줄로 걸어서 내려오는데, 그들을 향해 시민군의 등을 밟고 서있던 군인이 M16 소총으로 조준 사격을 했다. 작은형은 동호가 바로 숨이 끊어진 것 같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작은형과 큰형은 아버지 삼우제 준비할 때 멱살을 잡고 다투었다. 큰형이 왜 동생을 데리고 오지 않았냐고 타박하자 작은형이 짐승의 울부짖음으로 맞받았다. 엄마는마지막 날에 내가 너를 찾아갔을 적에, 네가 그리 순하게 저녁에 들어갈라요, 말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으까이.”라고 말한다. 가슴에 피멍이 들도록 후회와 낙심으로 긴 세월을 보냈다. 동호가 찾으려고 했던 사랑방에 셋방을 산 정대는 죽은 몸으로 자기의 시신 위로 포개지고 포개지던 여러 시신에 석유가 뿌려지고 불태워지면서 누나를 떠올린다. 이 오누이의 아비는 자식을 찾느라 헤맨다. 스물세 살의 교대 복학생은 고문당하면서 몸이 사라져주기를, 지금 제발, 지금 내 몸이 지워지기를그는 도청에 남은 이유를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인 양심에서 찾는다. 김은숙, 선주 누나. 김진수.

20178월에 개봉한 영화 󰡔택시 운전사󰡕를 온 가족이 함께 봤다. 내친김에 방학 끝무렵에 식구들과 함께 망월동 묘지에 다녀왔다. 고교 선배인 조성만 열사가 계신 곳이고, 2015년에 돌아가신 김형근 선생님이 묻히신 데다. 2004년부터 고교 논술 교육에 관한 조언을 얻으려고 선생님을 만나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이끌었던 중·고교 통일 교육에도 조금 참여한 적이 있었다. 선생님은 회문산 빨치산 추모제로 구속, 해임 등을 겪으셨고 꾸준히 통일 운동을 하시다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전주교도소에 계실 때 면회를 갔지만 뵙지 못했다. 부고를 접하고도 조문을 하지 못해 늘 마음의 빚으로 남아 있었다. 구묘역에 묻히신 두 분 앞에서 절을 하고 돌아왔다.

묵직한 돌맹이 하나씩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하는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의 숙명이다. 1980년대를 산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다. 어느 시대이든 무참한 일을 겪은 이라면 특별한 모습이 아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갑오농민전쟁, 일제강점기, 4·3, 한국전쟁, 4·19, 군부독재의 압제,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참사 등을 우리가 들여다보고 논의하고 품고 공감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34년 전 3, 그리고 그로부터 5년 후 일상에 복귀한 지 내년이면 30년이 된다. 잊고 지내다 그날이 오면, 불현듯 마주치면 떠오르는 사람들과 사건들에서 내 삶을 분리할 수 없다. 소설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 전문을 이번에 꼼꼼히 읽었다. 과거와 현재는 늘 서로 돕고 서로 구하는 관계임을 강조하는 말로 읽었다. 󰡔소년이 온다󰡕를 읽은 덕분에 그렇게 내게 읽혔다. 오늘 아침, 식은 밥 위에 냉장고에서 꺼낸 콩나물국 두어 국자를 뜨는데, 콩나물 몇 가닥이 걸린다. 구금 장소에서 식판 하나를 놓고 김진수와 밥을 함께 먹으면서 그가 콩나물을 다 먹어버릴까봐 긴장하던 교대 복학생과 그의 차갑고 공허한 두 눈이 생각났다. 우리는 사람이고 사람이어야 한다. 1980년 오월의 광주가 내게 말을 건네고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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