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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멸종 - 거꾸로 읽는 유쾌한 지구의 역사
이정모 지음 / 다산북스 / 2024년 8월
평점 :
멸종에 관한 진지한 생각은 죽음을 대하는 마음과 비슷한 우울감을 자아낸다. 나는 예외이겠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겠지 하는 허황함도 인다. 그런데 이정모의 찬란한 멸종을 읽는 내내 멸종은 유쾌한 자연사(自然事)로 다가왔다. 내용만큼이나 작가의 문체 덕분이다. 과학책을 이토록 명랑하고 발랄하게 쓸 수 있는 과학자가 몇 명이나 될까. 저자의 풍모·인격·인성이 문체와 얼마나 유사한지 가늠하기는 어렵다.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란 말은 대략 맞지만, 저자와 문체가 거울 관계 같지는 않을 테다. 이정모의 풍채(風采)가 풍기는 명랑·발랄·유쾌한 분위기와 그의 문체는 비슷하다. 나는 작가를 딱 두 번 실물로 본 적이 있다. 독서토론대회 지정 도서 작가로 강연하는 모습, 퇴근길 자가용 안에서 신호대기 중에 힐끗 옆을 보았는데 멜빵 가방을 짊어지고 어떤 고등학교가 있는 데를 향해 성큼성큼 걷는 모습 등은 책에 실린 사진만 봤을 뿐인데도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 같은 느낌을 주었다. 나랑 동갑인 영화배우 고창석 씨가 이정모 선생을 많이 닮았다. 독후감이 시작부터 산으로 간다.
찬란한 멸종은 재밌다. 흥미롭다. 지적 호기심과 허영심, 만족감이 충분히 채워지고 넘친다. 동시에 깊은 성찰의 여운을 준다. 그러니 직장 일을 하면서도 이틀 만에 다 읽을 수 있었다. 작가 말대로 생태계의 모든 구성원이 자신도 모르게 생태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처럼, 찬란한 멸종은 현재 ‘기후 위기’ 시대에 죽음을 성찰하는 것과 같은 자세로 자연을 진지하게 바라보게 한다. 작가가 쓴 문장과 내 생각을 마구잡이로 나열하고 섞으면 다음과 같다.
새로운 것이 등장하려면 원래 있던 것은 사라져야 한다. 자연사 연구는 경외감과 우울감을 동시에 안긴다. 자연사는 멸종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멸종은 자연스러운 생명 현상이다. 멸종이란 생물량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생물 종의 다양성이 떨어지는 것이다. 인간은 그저 자연에 적응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연을 바꿀 수 있는 존재이다. 이 말은 내 어깨를 으쓱하게 만드는 대신에 오싹하게 했다. 다섯 차례의 대멸종은 화산 폭발, 소행성 충돌, 급격한 기후 변화의 결과였다. 여섯 번째 대멸종은 전적으로 인간 활동의 결과로 예견되기 때문이다. 대멸종은 해수면의 급격한 변화, 바다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나는 무산소증, 소행성 충돌, 대기의 산성화, 기온 상승 등과 같은 일정한 패턴이 있다. 인류가 없는 우주·지구·자연을 상상하기, 나는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앞으로 가끔 해봐야겠다. 죽음을 상상하며 생을 이어가는 것처럼 말이다. 2021년에 나온 영화 <돈 룩 업(Don’t look up>,혜성 충돌로 멸종 정도가 아닌 지구의 멸망을 앞둔 인간은 각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종말을 맞이한다. 나는 아직 정하지 못하고 있다.
기회주의는 자연사에서 생존을 위한 핵심 역량이자 진화적 강점으로, 인류가 네 차례의 대멸종에서 살아남은 것도 기회주의적인 적응력에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현실 인간 사회에서 기회주의는 도덕적·정치적 비난을 받는다. 오래전, 어떤 학생이 「윤리학 개론」 강의 시간에 의무론과 공리주의를 설명하는 연세 많은 칸트 윤리학 전공 교수님께 교수님은 어떤 이론을 지지하고 어떤 이론에 따라 행동하시냐고 여쭈었다. 머리는 의무론자, 가슴은 공리주의자가 답이었다. 기회주의는 생존이다. 최고 포식자와 생물량이 가장 많은 생물은 반드시 멸종한다. 이 둘을 동시에 갖춘 종은 호모사피엔스뿐이다. 저자의 문장은 단호하다. 야생동물의 자연사란 다른 동물에게 잡아먹혀 죽는 일이다.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이유 없이 죽는 것은 자연사가 아니라 돌연사다. 길지 않은 병사(病死)가 인류에게 가장 큰 축복이다. 진화와 변화는 필연적이며 변화만이 유일한 살길, 자연의 근본적 진리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결국 변화와 혁신을 강조하는 거의 모든 자기계발서의 저자는 인간도 동물임을 반복적으로 외치는 셈이다. 모든 생물은 생태계 틈새 하나를 맡아 자기 삶을 산다. 하등·고등 동물은 없다. 이는 다윈의 말이다. 작가는 차별과 차등의 부당함을 자연사에서 찾는다. 다윈은 눈의 탄생과 진화를 설명하면서 오랜 기간에 걸쳐 누적된 변화의 힘을 강조했단다. 작은 점진적 개선이 매우 복잡한 구조를 만들어 낼 수 있다. 현재가 혁명이 불가능한 시대라면 기댈 데는 오로지 개혁뿐일 것 같다. 동물의 모든 눈도 그랬을 것 같다. 아득하다.
멸종이란 생태계에 빈자리를 마련해주는 일이고, 다음 세대의 생명체를 위해 자리를 비켜주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빙하기에는 바다로 흘러야 할 물이 육지에 얼음으로 남아 있어서 바닷물이 줄고 해수면은 낮아진다. 돌연변이는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고, 자연은 그 가운데서 생존에 가장 적합한 생명체를 선택한다. 한 종류의 생물이 여러 환경 조건에 적응해 짧은 시간에 여러 계통으로 갈라지고 분화하는 현상을 적응방산이라 한다. 지구는 138억 살, 달은 45억 살, 바다는 40억 살, 최초의 생명인 루카는 모든 생명의 공통 조상으로서 38억 살이다. 되게 나이가 많다. 인류가 자연을 지배하게 된 주된 요인은 직립과 불의 사용에 있다. 직립하니, 골반은 작아지고 뇌는 커지고 자유로워진 손으로 노동한다. 불은 시공간 확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밤에도 활동하고 모닥불에 둘러앉아 대화를 나누면서 유대감을 쌓고 지식을 전수한다. 뒷담화는 집단을 결속시킨다. 작가의 통찰이 돋보인다. 따뜻한 불이 있으니 추운 지역으로 활동 영역을 넓힐 수 있다. 대한민국에서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된 1982년 1월 5일 0시 이후, 대한민국은 딴 세상으로 급변했다. 농사는 자연사에서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지구에 처음으로 환경을 바꾸는 생명체, 곧 인류가 등장하면서 농사는 시작되었다. 나는 퇴직 후 고향인 시골 마을로 갈 계획이다. 농업경영체 등록도 해뒀고 관련 국가전문자격도 취득하려고 한다. 나는 확실한 인류다.
달은 초기 지구 가이아가 원시 행성 테이아와 충돌한 후 지구와 함께 탄생한 천체다. 바다는 주로 혜성과 소행성이 가져다준 선물이다. 바다가 지구 생명의 원천이라면 달은 45억 년 전에 태어나서 40억 년 동안 바다에 밀물과 썰물을 일으켜 생태계를 만들고 진화를 지원하였다. 독일 뒤셀도르프 근처에 있는 네안더(Neander) 계곡(Thal)에서 뼈가 발견되어 ‘네안데르탈인’이라고 이름 붙여졌다는 것, 현대인의 당뇨, 비만, 탈모, 자폐, 약한 사회성은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를 지니고 있어서 그렇다는 것은 아는체하기 딱 좋은 지식이다. 산소가 있는데 썩으면 이산화탄소가, 산소가 없는데 썩으면 메탄이 나온다. 석탄이란 열이 땅속에 갇힌 데 따른 결과물이다. 3억 년이 지나 인간이 꺼내 쓰고 있다. 지구 온난화는 지구 가열화로, 지구 열대화는 지구 비등화로 바꿔야 한다. 나는 여기에, 가짜 뉴스 대신에 ‘거짓 뉴스’라고 이름을 바꿔야 한다는 말을 보탠다.
소설 같은, 그러니까 순전히 상상한 허구의 이야기 같은, ‘그걸 어떻게 알아?’하는 식의 질문이 터져 나오게 만드는 작가의 단정적인 문장은 ‘차도남’이나 ‘차도녀’가 지닌 매력 같은 것을 뿜어낸다고 할까. 예를 들어 네안데르탈인이 40만 년 이상 존재하면서 단 한 번도 총인구가 10만 명을 넘어본 적이 없다는데, 그걸 어떻게 오늘날 도시 인구 통계 결과 발표하듯 적냐고. 100만 년 동안 100만 ㎦의 용암을 내뿜고 50만 ㎢의 땅을 화산지대로 만들어 거의 2㎞ 두께로 화산암이 쌓인 곳, 데칸 트램, 책에 실린 사진을 봐도 가늠이 안 된다. 지구 온도가 2도가량 올랐다는데, 그걸 어떻게 아냐고? 티라노사우루스 눈이 호박색인 걸 어떻게 추론했지?
모든 존재를 ‘나’ 또는 ‘우리’로 지칭하면서 주체적인 입장에서 세상을 보니(서술하니) 저절로 독자인 나는 여러 시선의 주체가 된다. 의인화한 모든 존재, 특히 6,600만 년 전 다섯 번째 대멸종을 지켜보고 있는 티라노사우루스 렉스가 묘사하는 삶은 생생하다. 트리스타를 사냥해서 배를 찢고 내장을 뜯어 먹는 장면은 영상을 보는 듯하다. 그 위를 지나는 거대한 불덩어리 하나, 열 폭풍, 쓰나미, 지진, 화산 폭발이 연이어 있기 직전에 찰나의 평화로운 순간을 느끼자마자 죽음, 멸종. 그리고 이어지는 비대칭형 깃털과 부리가 있는 작은 공룡, ‘새’의 시대가 열린다. 같은 의미라 해도 “우리가 움직인다는 것은 종자와 거름을 새 땅에 공급한다는 걸 의미한다.”라는 문장, 움직일 때마다 환경을 바꾸고 생물 다양성을 높이는 ‘생명의 운반자’라는 명명도 멋지다. 한 편의 서정시 또는 장면 묘사가 뛰어난 산문의 한 문단을 읽는 기분이다. 그리고 밀려오는 우주 자연을 향한 존경 가득한 두려움을 나는 어쩔 수가 없다.
학자가 글을 잘 쓴다는 건, 고도로 전문화된 학문 영역의 이야기를 재미있고 매력적인 문체로 쓴다는 것을 뜻한다. 결코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쓴다는 의미가 아니다.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은 전문 영역의 내용이 어떤 식으로 서술되든, 표현되든‘쉽게’ 이해할 수 없다. 글을 잘 쓰는 학자는 비전문가도 해당 내용을 알고자 하는 흥미와 관심을 끌게 한다. 접근할 수 있도록 울퉁불퉁 또는 매끈하게, 변화무쌍하게 길을 열어 준다. 이정모 선생이 그런 학자다. <찬란한 멸종>은 심심해서 책장에 있는 꽂혀 있는 책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눈에 띄는 대로 펼쳐서 읽을 만한 책으로 최고일 것 같다. 갑자기 지구의 특정 시대가 궁금하거나 사실 확인을 하고 싶을 때 참고할 전문 도서로도 역시 최고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