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기행」은 "무진 Mujin 10Km"에서 시작해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로 끝나고 있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문장에서 하인숙을 버리고 무진을 떠날 수밖에 없는 자신에
대해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라고 서술한다. 우리가 부끄러움을
잊어갈 때, 그 잊어버린 부끄러움이 또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내가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했다는 부끄러움이다. 저자의 부끄러움은 무엇일까.
부끄러움이란 자신의 모습에 대한 자각인데 저자는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려고 하는 것일까 자존심이 있는 이가 느끼는 감정이 부끄러움일진데
저자가 의미하는 자존심은 무엇일까라는 생각에 잠시 멈추어섰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인간만이 성숙할 수 있다.
무진은 인개 무(霧)에 나루 진(津)을 써서 '안개 나루'라는 의미를 가진
허구의 도시이며 저자가 어린시절을 보낸 전라님도 순천이 모티브가
되었다고 알려진다. 솔직히 어렵다. 작가의 언어의 광의적 표현은
머리를 쥐어 짜듯이 고민을 하게 만든다. 문장이 길어 짐에도 지루하지
않고 짧고 간결한 문장보다 더 강한 잔상을 남긴다. 주인공의 심리를
묘사하는 부분에서 저자는 단어를 쌓아 올린다. 허물어질듯 힘겨워
보여도 계속 단어들을 쌓아 올려 문장을 완성하는데 그 문장이 너무
매력적이다. 그러면서 본인 스스로 이렇게 말하는 듯 하다. 아침의
백사장을 거니는 산보에서 느끼는 시간의 지루함과 낮잠에서 깨어나서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이마를 손바닥으로 닦으며 느끼는 허전함과 깊은
밤에 악몽으로부터 깨어나서 쿵쿵 소리를 내며 급하게 뛰고 있는 심장을
한 손으로 누르며 밤바다의 그 애처로운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의 안타까움, 그런 것들이 굴 껍데기처럼 다닥다닥 붙어서 떨어질 줄
모르는 나의 생활을 나는 '쓸쓸하다'라는, 지금 생각하면 허깨비 같은
단어 하나로 대신시켰던 것이다. 이쯤되면 이견이 없을 듯 하다. 책의
곳곳에서 현실과 환상이 교차한다. 무진이라는 허구의 도시가 아닌
우리가 언젠가 돌아가야할 고향과도 같은 그런 향취와 여운을 남긴다.
그러나 우리에게 무진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진기행이 나오고 3년 뒤에 나온 영화가 김수용 감독의 '안개'다. 무진기행은
1967년도, 1976년, 1987년에 영화로 만들어졌고 배우 윤정희는 두번이나
하인숙 역을 연기했다. 김수용 감독은 소위 문예영화의 거장으로 이광수의 소설
'유정', 김동리 현진건의 소설등을 영화화한 특이한 이력을 지녔다. 아쉽게도
2000년 이후 더 이상 작품활동을 하지 않고 배우 신성일 역시 없다. 최근
영화 '헤어질 결심'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해서 다시 회자되는 무진기행. 난
역시 예전에 읽고 보았던 그것이 더 나아 보인다.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깊은 여운을 남긴 대사 한 줄을 옮겨 본다.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나는
순간 내 사랑이 시작됐죠.' - 영화 < 헤어질 결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