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 비용 데버라 리비 자전적 에세이 3부작
데버라 리비 지음, 이예원 옮김, 백수린 후기 / 플레이타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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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 반, 알람 소리에 눈을 뜨면 조용히 몸을 일으켜 침실을 빠져나온다. 원두커피를 내린 잔을 들고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쓴다. 한참 써 내려가다가도 7시 반이 되면 화들짝 놀라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고 아이를 깨워 등원 준비를 시킨다. 아이가 밥을 먹는 틈새를 이용해 지난밤의 설거지를 하고, 옷을 입고 세수를 하는 동안 재빨리 청소기를 돌린다. 사이사이 늑장 부리는 아이를 독려하고 없다는 걸 찾아 챙겨주느라 잰걸음으로 집 안을 오간다. 하지만 괜찮다. 그래야 아이와 남편이 집을 나서는 순간 다시 책상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그렇게 살림 비용을 치러 글을 쓰고 책 읽을 나만의 시간을 마련하는 거니까.



데버라 리비는 50의 나이에내 삶의 기력을 어지간히 바쳐 지은 가정을 내 두 손으로 허무”(20)는 이혼을 경험하고 이후 자기를 되찾아 가는 과정을 <살림 비용>(이예원 옮김, 플레이 타임)에 기록했다. 이혼에 대한 그녀의 표현이 인상적이다. “남자와 아이의 안위와 행복을 우선순위로 두어 오던 가정집이라는 동화의 벽지를 뜯어 낸다는 건 그 뒤에 고마움도 사랑도 받지 못한 채 무시되거나 방치되어 있던 기진한 여자를 찾는다는 의미다.”(20) 그 기진한 여자를 마주하고, 혼자 힘으로 삶을 꾸려나가기 위해 지불해야 할 비용을 감당하면서 다시 자기 정체성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 작가로 꾸준히 활동해왔던 그녀조차글을 쓰거나 가르치거나 이삿짐을 풀지 않을 때는 막혀 있는 욕실 세면기 배관을 뚫는 데 온 주의를 집중해야했으니까. (32)



그녀는 허름한 아파트로 옮겨 새로 집을 꾸미고 친구의 헛간을 빌려 작업실로 삼는다. 낡은 집은 수도와 전기가 수시로 끊기고 배관이 막히기 일쑤. 집과 작업실 사이 언덕길을 오르기 위해 전기 자전거도 마련한다. 그래서 앞머리에 나뭇잎을 매단 채 중요한 미팅에 나가고, 수명이 다해가는 컴퓨터로 생계를 위한 글을 쓰지만, 모든 비용을 스스로 책임진다. 그 와중에 어머니의 죽음을 겪어내기도 하면서, 자신의 삶을 챙긴다. 그러는 사이 식탁에서 오가던 고성은 사라지고, 자신의 소설을 완전히 재구성하듯 삶도 오롯이 자신의 뜻대로 재구성할 자유를 얻는다.



소설이 완성되기까지, 이혼 후의 삶이 안정 궤도로 들어서기까지 지난한 노력과 수고가 필요할 테지만, 그녀가 온전히 해내길 진심으로 응원하게 되는 것은, ‘지난날의 복원이 아닌새로운 구성을 원한다는 그녀의 말처럼 다시 결혼으로 안착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홀로 충분한 삶을 꾸려가는 결말로 나아가길 바라기 때문이다. 요즘 젊은 여성 세대에는 비혼 족도 많고 다양한 방식으로 가족을 꾸리는 인구도 늘어가고 있지만, 중년의 여성, 그것도 결혼으로 삶의 기반을 닦은 이가 다시 자신의 삶을 재구성하는 서사는 흔치 않다. 그런데 우리에겐 그런 모델이 정말 필요하지 않은가. 글 쓰기를 통해 다른 삶으로 나아가는 이야기, 엄마로 지워져 버린 자기 이름을 되찾기 위해 용감하게 나서는 여성의 이야기가 말이다.





“여성성이, 적어도 내가 가르침을 받은 여성성이 끝을 맞은 것일 수도 있다. 문화적 인성으로서의 여성성은 이제, 적어도 내 경우엔, 아무것도 표현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남자들이 쓰고 여자들이 연기해 온 이 여성성이 21세기 초입을 여전히 기웃거리는 기진한 유령이라는 점만은 명백했다. 내 배역에서 벗어나 이야기를 중단시키는 데는 어떤 비용이 따르려나?”

(77)



‘인내하는 어머니, 너그러운 어머니는 내가 마지막까지 버리지 못한 여성성이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아내의 역할은 많은 부분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것까지 해내기엔 넉넉한 아량은 고사하고 시간과 체력조차 부족했으니까. 내게 남은 시간과 체력은 온전히 아이를 돌보는데 투입되었고, 그런 몇 해를 지나면서 엄마 역할에 의문이 드는 지점에 다다랐다.



어디까지 참고 희생할 수 있을까.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서 아이와 나 사이 여백이 생기기 시작했지만, 아이가 완전히 독립하기 전까지는보살핌의 노동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이혼한 리비 또한 글을 쓰다가도 저녁 시간이 되면 고등학생인 딸아이의 저녁을 차려주러 부리나케 가방을 꾸리니까. 깊숙이 뿌리 박힌 모성 신화는 아이를 잘 키워내야 한다는 압박이 되었고, 아이의 요구에는 늘 너그러워야 하며 그런 삶을 인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요한다. 누구도 내게 드러내 놓고 그렇게 요구하지 않는데도, 스스로 자신에게 그런 잣대를 들이밀고 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이인내하는 어머니, 너그러운 어머니란 완벽하게 해낼 수 없는 역할임이 분명하다. 또한 그런 어머니만이 최선일까 하는 의구심도 지울 수 없다. 한 사람의 삶을 위해, 또 한 사람의 삶을 희생하는 불균형 속에 만들어지는 관계란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그래서 누군가는 일정 부분의 회한을, 또 한 사람은 부채감을 갖게 되는 관계, 한 사람이 행복한 동안 한 사람은 불행을 감내하는 게 당연시되는 관계를 괜찮다고 여길 수 있을까. 조금 부족하고 불만족스럽더라도,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각자의 삶을 일궈나가는 것이 더 합리적인 게 아닐까. 그래서 불완전할 테지만 누구를 탓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그런 삶이.



그러니내 배역에서 벗어나 (가부장제와 모성 신화의) 이야기를 중단시키고 싶다. 이야기를 중단시키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다른 배역을 맡고 싶다. 아이 대신 모든 걸 챙겨주며 인내하고 희생하는 어머니가 아닌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꾸려 나가는 한 여성으로 아이 곁에 있고 싶다. 그러려면어떤 대가가 따르려나?”(77) 어떤 비용을, 어떻게 지불해야 할까? 고민은 여기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자정부터 다음 날 이른 시간까지 진하고 향기로운 커피를 홀짝이다 보면 지면에서도 어김없이 흥미로운 일이 벌어진다. 글쓰기용 의자에서 한 발도 안 움직이고 밤을 거니는 방랑자가 된다. 낮보다 부드럽고 조용하고 슬프고 차분한 밤, 그리고 그 밤을 채우는 소리들.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 소리, 배관에서 올라오는 소리, 엔트로피 법칙에 따라 삐그덕 대는 바닥 마룻장과 유령처럼 오가는 야간 버스 소리, 그리고 도시에 사는 한은 어디서건 들려오기 마련인 바닷소리를 닮은 희미한 소리, 바다를 닮았지만 실은 그저 삶일 뿐인, 더 많은 삶의 소리.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그게 내가 원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더 많은 삶.”

(114~115)



“모두가 즐거이 누리는 가정, 순조롭게 기능하는 가정을 짓는 일은 수완과 시간과 헌신과 공감 능력을 요한다.”(20) 끝없는 헌신과 공감 능력을 쏟아붓느라 비어버린 내 안의 자릴 다시 채울 방법마저 잊어버린 지경이다. 아내로, 엄마로만 기능하느라 삶의 가능성은 희박해졌고 집과 가족이라는 하나의 서사에 갇혀버린 것 같다. ‘더 많은 삶이라니, 그런 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조차 잊고 있었는데. ‘더 많은 삶’, 천천히 또박또박 힘주어 소리 내어 읽어본다. 더 많은 소리, 사람과 세상과 이야기가 넘실거려 가변성을 만드는 열린 서사가 내게도 가능할까.



“파탄한 건 가정이 아니라 가부장제가 지어낸 이야기다.” (23) 나와 아이, 남편이라는 세 개의 삶이 누군가의 희생 없이 조화롭게 엮이어 공명하는 이야기는 여전히 지켜보고 싶다. 내가 원하는 건가부장제가 지어낸 이야기에서 벗어나 삶을 재구성하는 것. “다른 사람이 우리 대신 상상해 온 인물”(106)로 연기했던 삶에서 빠져나와 내가 원하는 배역, 내게 맞는 배역을 만들고 싶다. 주연 같지만 조연인 역할이 아니라 빛나지 않고 조명받지 않더라도 무대에서 진짜 주연이 되는 그런 역을. 물론, 거기에는 상당한 비용이 따를 것이다. 대가 없이 얻을 수 있는 건 없을 테니까.



“우리가 거짓을 멈출 때 더 많은 진실이 창조되고 또 가능해진다.”

<가능성의 예술들> 아드리엔 리치



거짓을 멈추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다. 거짓이었음을 알아채고, 진심을 찾아내려는 노력, 그리고 익숙한 거짓의 몸짓에서 벗어나려는 의식적인 연습. 그 과정 속에 있다고 느끼는 요즘, 나를 만족시키는 글을 넘어 원고료를 벌 수 있는 글을 쓰고자 애쓰고 있다. 살기 위해 쓰기 시작했는데, 쓰기 위해 살고 있는 것 같다. 나로 존재하기 위해 썼지만 나로 존재하기 위해 살기도 한다. 앞선 두 문장을 매끄럽게 연결해 줄 접속사를 찾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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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러쉬 - 어느 저명한 개의 전기
버지니아 울프 지음, 지은현 옮김 / 꾸리에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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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플러쉬>에는 시인 엘리자베스 바렛과 정서적 교감을 나누었던 개 플러쉬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플러쉬는 자신을 바렛과 동일시 여겼고 지극히 사랑해 로버트 브라우닝을 질투하고 경계했다. 엘리자베스 바렛 또한 플러쉬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어 브라우닝에게 쓰는 연애 편지에도 플러쉬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적어 보냈다. 또한 플러쉬가 납치되었을 때는 모두의 만류를 무릅쓰고 직접 빈민가로 찾아갈 정도로 열의를 드러냈다. (바렛은 건강이 좋지 않아 대부분의 날을 집에서 칩거하며 보냈고, 당시 사회상으로는 여성이 자유롭게 외출할 수 없을 뿐더러 빈민가를 가는 일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는 행위였다.)




“개를 좋아하는 사람이 쓴 게 아니라 개가 되고픈 사람이 쓴 이야기”라는 부제처럼 울프는 플러쉬의 관점에서 글을 써 나갔다. 버니지아 울프가 반려견에 대해 내밀하고 깊은 애정을 지녔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녀는 <플러쉬>를 통해 반려견에 대한 애정과 그들이 주인과 나누는 충직하고 섬세한 감정을 재치있고 유머러스하게 드러내고자 했다. 그래서 <플러쉬>는 우화의 인상을 띠며 가볍고 재미있게 읽히지만 그 속에서도 울프가 문학을 통해 반복했던 메시지를 감지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 바렛이라는 여류 시인의 삶(플러쉬를 되찾기 위해 빈민가를 찾아가고,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브라우닝과 결혼해 이탈리아로 도피)과 플러쉬의 생각을 드러내는 에피소드를 통해 경계를 지우고 무너뜨리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는 <올랜도>나 <자기만의 방>에서 다루었던 주제와 연결되어 세상의 구분을 지우려는 시도로 읽히기도 한다. 플러쉬라는 동물에게 사람과 동등한 인격을 부여한 점이나 서로를 동일하다고 느끼는 엘리자베스 바렛과 플러쉬의 관계 또한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강력한 진실의 영혼인 듯했으며, 속삭이며 비웃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그것은 결국 온 세상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상태가 아니던가? 그는 다시 보았다. 목둘레에 갈기가 있었다. 자신이 좀 특별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거드름을 희화화하는 것-그것은 그 나름의 이력을 쌓는 길 아니던가? 어쨌든, 문제의 해결책으로서, 그가 벼룩에서 해방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는 목둘레 털을 흔들었다. 그는 가늘어진 다리와 알몸으로 날뛰었다. 그는 활기가 솟았다. 대단히 아름다웠던 한 여인이 그렇듯, 병상에서 일어나 영원히 손상된 자신의 얼굴을 발견하면서 옷과 화장품을 태워버리고는, 이젠 다시 거울을 들여다볼 필요도, 연인의 냉정함이나 연적의 아름다움도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기쁘게 웃을 수도 있다.

(…)

그들 모두가 마차 안에 앉았을 때 플러쉬는 그들 위에 한 번의 도약으로 가볍게 뛰어올랐다. 베니스로, 로마로, 파리로-그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제 그에게는 모든 나라가 동등했다. 모든 사람들이 그의 형제였다.”

162~163쪽, <플러쉬>, 버지니아 울프, 지은현 옮김, 꾸리에




혈통을 중요시 여기는 영국 사회의 계급문화에 물들어 생활하던 플러쉬가 이탈리아로 옮겨와 털을 깎아버리는 경험을 통해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에피소드는 인상적이다. 긴 털은 그의 혈통을 증명했고 그래서 “자신이 좀 특별하다”고 느끼게 해주는 요소였다. (글에서 잠시 플러쉬가 지닌 '속물성'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이는 당시 영국 상류층이 지닌 '속물성'과 연결지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벼룩이 극성을 부리는 이탈리아에서 털은 해충이 서식하기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얄궂은 것이 되어버린다.




벼룩 때문에 괴로워하는 플러쉬를 위해 브라우닝은 어느 날 털을 깎아 버린다. 그로인해 골치덩어리였던 벼룩의 문제는 해결되고 플러쉬는 자신의 몸이 가뿐해 졌음을 느끼며 활기에 차오른다. 사회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보여주던 털을 지워 버림으로써 플러쉬는 오히려 해방감을 느낀다. 당시 무명의 시인 지망생이었던 브라우닝을 따라 런던을 떠나왔던 엘리자베스 바렛이 이탈리아에 정착하며 느꼈던 감정이 그런 게 아니었을까. 귀족과 상류층 중심의 형식과 격식에 치중된 런던의 삶에서 벗어나 경험하게 된 자유롭고 활기찬 이탈리아의 삶은 그녀에게 어떤 해방감을 주었던 게 아닐까 짐작해본다.




플러쉬의 이야기 뒤로 병상에서 앓다 일어난 여인이 외모에 대한 신경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느끼는 부분에 크게 공감했다. 하이힐과 몸을 조이는 정장, 매일 정성껏 하던 화장에서 벗어나면서 내 삶의 한 부분은 몹시 홀가분해졌다. 소유욕으로 사들인 물건이 어느 날 나를 누르는 짐처럼 느껴졌고, 채우기보단 비우는데 열중하게 된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집착하거나 더 좋은 것을 얻으려 얽매일 때 삶은 거추장스러운 갑옷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털이 잘려 나간 플러쉬가 “가늘어진 다리와 알몸으로 날뛰었다”는 대목에서 내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을 잘라내고 싶다는 유혹을 느꼈다. 그리고 익숙하고 자연스러워 갑갑한 줄도 모른 채 나를 가두고 있는 건 무얼까 하는 고민으로 옮겨갔다.




자신만의 섬세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던 작가 버지니아 울프에게 반려견이 어떤 존재였는지 이 책은 말해준다. 사람과도 진정한 교감을 나누는 일은 어렵다. 그런데 말이 통하지 않는 동물과 지극한 감정적 교류를 나누는 삶이란 어떤 걸까 상상해보게 된다. 충직함을 속성으로 가진 동물이라 가능한 걸까. 오직 한 대상에게만 충실한 마음을 유지하는 삶이라니, 새삼 경이롭다.




"크게 벌어진 입과 커다란 눈과 구불거리는 곱슬머리를 가진 그녀의 얼굴이 기묘하게도 그의 것과 닮아 있었다. 두 동강났지만 한 틀에서 만들어진 그들은 아마 각자에게서 휴면상태인 것으로 서로를 완성시켜 주었을 게다. 그러나 그녀는 여자였고, 그는 개였다."

189쪽, <플러쉬>, 버지니아 울프, 지은현 옮김, 꾸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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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삽니다 - 어른을 위한 그림책방, 카모메 이야기 소소 그림책에세이 시리즈 1
정해심 지음 / 호호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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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에는 작은 그림 책방이 하나 있다. 그림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꽤나 유명한  카모메 그림책방이다. 아이를 데리고 그림책을 사러 여러 번 들르기도 했지만, 사장님과 본격적인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그림책방에서 진행된 글쓰기 수업에 참여하면서부터다. 각자가 써온 글은 어김없이 삶의 내밀한 부분에 닿았고, 매 수업은 눈물바다가 되기 일쑤였다. 그 수업을 통해 글쓰기로 깊숙이 들어선 나처럼 몇몇 참여자들이 출판을 준비하며 글쓰기를 지속했다.




카모메 그림책방 사장님도 그중 한 분이었는데 지난 8월 초 출간 소식을 접했다. <오늘도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삽니다>, 그림책방을 대표하는 파란색에 선명한 노란색이 더해진 예쁜 책이 나왔다.




<오늘도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삽니다>에는 10년 가까이 아이를 키우며 전업 주부로 생활하다 책방지기로 변신해 삶의 균형을 맞춰가는 정해심 사장님의 진솔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저자는 아이를 키우면서도 그림책을 늘 곁에 두었고, 책을 읽으며 배움을 지속하고, 글 쓰는 일을 놓지 않으면서책방이라는 삶의 연결고리를 찾아냈다. 하지만 책방을 운영하는 현실은 꿈의 실현과 별개로 어려움이 있다. 생활과 직결되는 수입에 대해 책임져야 하고 운영에 필요한 자질구레한 일에 압도되어좋아하는 마음을 해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매 순간 그런 조율 속에서 책방을 열고 지키는 날이 지속되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오래도록 걷기 위해 저자는 하고 싶은 일과 하기 싫은 일을  구분했다고 한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기 위해 나는 '하고 싶은 일을 분명히 했다. 처음에는 글쓰기, 다음은 책방지기로 점차 영역을 넓혔다. 우선 책방을 시작하자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일상에서 서서히 덜어냈다. 가사노동, 양육, 목적 없는 공부와 만남을 간소하게 정리했다. (…)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우선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알아야 한다. 또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아도 될 만큼 균형 잡힌 일상을 가꿀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이 먼저인지 알 수 없으나 나의 하루가 내 의지대로 흘러갈 때 비로소 ''이 생겼다." 

62~65 <오늘도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삽니다> 정해심, 호호아 출판사




하기 싫은 일에 자신이 소모되는 것을 줄이고, 덜어내어 마련한 빈자리에 원하는 일을 채우는 방식으로. 그렇게 하루를 자신의 의지대로 꾸려가면서을 만들었다. 그 힘이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삶으로 이어졌다. 책과 그림책을 읽으며 내면을 마주하고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애썼던 저자는 그 과정을 통과하면서그림책방이라는 꿈을 발견했고, 자신의 몸에 맞는 크기로 실현해냈다.




작은 책방에서 좋아하는 그림책을 읽고, 사람들을 만나며 자기만의 숲을 풍성하게 가꾸어 가는 날도 책 속에 담겨있다. 각자가 좋아하는 그림책을 나누는 낭독 모임, 그림책 작가의 생생한 이야기를 듣는 저자 강연과 글쓰기 모임을 통해 작은 책방이 숲으로 자라나는 과정은 따스하다. 저자는 그림책을 사러 오는 사람들과 출판사 관계자들을 만나며 그림책이 만들어낸 넉넉한 숲을 거닐고 나라는 세계를 넓혀갔다. 그리고 햇수를 넘겨 책방을 운영하며 맞닥뜨리게 되는 갈등과 충돌의 상황에 적절히 거절하고 요구하는 내공까지 쌓였다.




“삶의 뿌리를 단단하게 지탱하는 일들로 하루를 채우고 있습니다.” 저자는 오랜 시간 자신의 생활 속에 녹여낸 요가와 명상, 그림책과 글쓰기로 삶의 뿌리를 단단하게 내렸다. 그걸 바탕으로 덜어내고 잘라내면서좋아하는 일이라는 수형 좋은 나무를 키워냈다. 매일이라는 일상에서 중심을 잃지 않으려 했던 노력이 책방으로 연결되었고, ‘좋아하는 일에 몰입하고자 했던 힘이 삶의 균형을 잡아주었다. 그런 저자의 삶과 글에서는 긴 시간 꾸준히 실천한 사람이 쌓아낸 견고함이 느껴진다.




누구나 가슴속에한 번쯤 해보고 싶은 일을 품고 산다. 그냥 생각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마음에 어떻게 물을 주고 싹을 틔워 나무로 자라게 할지, 키만 키우는 게 아니라 덜어내고 가지 쳐 원하는 수형으로 만드는 방법을 저자의 글을 통해 배웠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면의 진실한 소리에 귀 기울이며 일상을 다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속에서 얻은 자기 믿음이 삶의 변화로 이어지는 힘이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언젠가 작은 책방을 운영해보고 싶은 꿈을 지닌 이들에게 이 책은 꿈의 세계로 안내하는 지도가 될 것이다. 아직 찾지 못한 인생의 꿈을 발견하고 삶의 균형을 찾고자 하는 일들에겐 작지만 귀한 비법을 알려줄 테고.




마흔 중반을 넘어선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지난 인생을 돌아보면 알게 모르게 찍힌 점들이 있을 거라고. 그 점들을 이어 보면 무언가 뚜렷해지는 모양이 보일 것이다. 꿈을 발견하고 싶다면 그 점들을 연결하여 만들어진 선을 따라가는 일에 집중해보라고 조언한다. 그렇게 발견한 길로 들어선다면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을 구분하고, 중요한 것에 더 집중하는 단호함을 가지라고 충고한다. 내 삶을 지탱하는 뿌리를 단단하게 해주는 일을 찾아 매일의 일상에서 반복하자. 좋아하는 삶은 좋아하는 일을 추려내고 그걸 실천하는 매일이 쌓여 만들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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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빌라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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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끝났다. 눈 앞의 계절은 덧없이 가을로 넘어가, 겨울, 봄, 다시 여름의 과정을 거치며 변할 것이다. 하지만 지난 여름의 어떤 기억만은 우리 안에 남아 되살아나고 재구성되길 반복할지도 모른다. 백수린의 단편소설집 ≪여름의 빌라≫에는 어긋나거나 실패한 서사를 복기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작가는 평범해 보이는 일상이나 극적이지 않은 순간에 생기는 기척을 통해 이전까지 포착되지 못했던 조용하고 미세한 균열을 우아하게 그려낸다. 우리는 어째서 그런 기척에 끌리는 걸까?



왜 그런 일이 생기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만이 알 수 있는 작은 생채기가 마음 한 구석에 생긴 것처럼,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선을 건넌 게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당신과 나 사이에 또렷하게 선 하나가 그어지는 걸 목격했고, 이제 예전과 같은 마음으로 당신을 볼 수 없겠다고 깨달았던 순간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데도 그 일의 이전과 이후 나는 미묘하게 달라졌다는 걸 자각한다. 그러면 어쩔 수 없는 그 마음을 나조차도 알 수 없어 자꾸 되돌아보게 되는데, 거기에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는 이상한 끌림 때문이다. 그 끌림은 경계를 감각하는 일일 것이다. 나와 타인의 경계를 감각하고 무언가를 의심하면서 맴돈다. 하지만 어떤 서성거림은 조금씩 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기도 한다.



"같은 장소를 보고도 우리의 마음을 당긴 것이 이렇게 다른데, 우리가 그 이후 함께한 날들 동안 전혀 다른 감정들을 느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라요. 무(無). 당신의 집 거실에 적혀 있던 글자처럼, 사실은 우리 사이에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음을 그저 받아들였으면 좋았을 텐데. 사람은 어째서 이토록 미욱해서 타인과 나 사이에 무언가가 존재하기를 번번이 기대하고 또 기대하는 걸까요."

56쪽 <여름의 빌라>




표제작 <여름의 빌라>는 관계의 어긋남을 다룬다. 주아는 스물한 살 배낭여행에서 만나 친분을 맺어온 독일 여성 베레나에게 지난여름 시엠레아프에서 함께 보낸 날에 대해 편지를 쓴다. 박사 학위를 따고도 임용에 미끄러지면서 어려운 시간을 보냈던 주아와 지호, 테러로 딸을 잃고 손녀를 데리고 캄보디아에 머물고 있던 베레나와 한스. 서로의 내밀한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여름 휴가지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미묘한 갈등과 충돌을 겪는다. “타인과 나 사이에 무언가가 존재하기를 번번이 기대하고 또 기대하는” 미욱함이 이해를 바라고 오해를 부른다.



<여름의 빌라> 앞에 실린 <시간의 궤적>에서도 타국에서의 한 시절을 함께 한 언니에게 이해를 바라던 마음이 상처 입고, 그로 인해 자신 또한 언니에게 상처 주는 말을 던지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충분히 알고 있다고 믿었던 관계, 또는 더 밀착되길 바랐던 관계가 “삶의 각도가 미세하게 어긋남”으로 어떤 단절로 미끄러지고 만다는 걸 우리는 안다. <고요한 사건>과 <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 속 ‘나’는 무호, 해지, 다미와 같은 친구와 어울리지만 그들과 결코 맞닿을 수 없는 삶의 뒤틀림을 알고 있고, <폭설>과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에서 주인공은 엄마나 남편처럼 아주 가까운 이들과의 관계에서 조차 서로를 영원히 알 수 없는 어떤 지점이 존재함을 깨닫는다. 균열은 작고 사소한 것에서 비롯되는데 되돌릴 수 없게 치명적이라 우리는 좌절하고 씁쓸해한다.



하지만 백수린의 소설 속 인물들은 균열의 찰나와 기억 앞에서 문을 열고 나갈까 말까 망설이며, 무언가를 말할까 말까 고민한다. 미지의 세계가 지닌 매혹과 아름다움에 끌렸지만 어긋나 버리고만 기억을 되짚어보고 재구성한다. 그것은 알지 못했던 무언가를 찾고자 하는 시도이며 다음에는 “늦지 않게 돌아가기 위”해 들이는 노력이다. 멀어진 관계이지만 “마침내 반대편 도로에 무사히 닫는 걸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용기를 내어 보내지 못할 것 같은 편지를 쓰고, 언젠가 편지를 부치게 되길 희망할 것이다. 그 모든 시도와 노력이 자기 앞에 등장한 피부색이 다른 소년을 보고 자신과 그 사이에 그었던 선을 지워 소년까지 포함하는 새로운 선을 긋는 레오니(<여름의 빌라>)를 향해 가는 과정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소설 속 인물들은 지극히 평범하고 조심스럽지만, 자신과 다른 세계에 마음을 빼앗기는 연약함을 지니고 있다. 자신과 완전히 다른 성격과 배경을 지닌 인물에게 끌려 낯선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가까운 이들의 오해를 무릅쓰며 과거와 단절해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도 한다. <폭설>에서 사랑을 쫓아 자신의 삶을 선택한 엄마와 <흑설탕 캔디>의 노년에 연애 감정을 경험하는 할머니가 그렇다. 할머니는 브뤼니에 할아버지와 한낮의 시간을 보내다 어린 시절 맛보았던 흑설탕 캔디의 ‘황홀하도록 달콤한 맛’을 떠올린다. 그리고 무너질 걸 알면서도 각설탕으로 탑을 쌓으며 웃음을 터뜨린다. 사랑은 허물어질 걸 알면서 쌓는 각설탕 탑 같은 것일 테다. 끝을 알면서도 또 하나, 또 하나, 각설탕을 올려놓는 그 마음은 삶이 “어그러진 순간에만 찾아오는 특별한 기쁨” 또한 발견할 줄 안다.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아무도 모르게 꼭 움켜쥐고 있겠다는 그들의 마음은 조약돌처럼 작지만 아주 단단하다. 소리 없이 밤새 내려 하얗게 세상을 뒤덮은 눈이 발하는 희붐한 빛처럼 희미하지만 경이롭다.



우리와 타인, 우리와 세계 사이의 미세한 뒤틀림이 인생을 불가해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 불가해함이 우리를 미혹한다. 상처 받고 멀어지게 될 것을 알면서도 그 세계에 이끌리고, 사랑하고야 마는 것은 영원히 닿을 수 없는 미세한 각도 때문일 것이다. 그 알 수 없음이 우리를 유혹하고 덧없이 타인의 세계로 한 발 내딛게 한다. 무지(無知) 또는 미지(未知)가 서로에게 상처가 되고 오해를 부르지만 우리는 그것 때문에 사랑을 시작한다. 불가해함이 우리를 움직이고 움직이려는 시도 속에서 나의 굳건했던 경계가 흐려지기도 하는 것이다.



차이와 어긋남을 인식하고, 그 경계에서 실패했던 기억을 떠올리는 일은 슬프다. 하지만 되돌아보는 마음속에는 사소한 찰나에 진실이 있다는 믿음이 있다. 우리를 둘러싼 경계를 완전히 지우지 못하더라도 찰나의 기척을 감각하고, 숨어 있는 진실을 찾으려는 마음이 미세하게나마 경계선의 위치를 옮기게 하지 않을까. 그러면서 우리의 세계는 타인을 향해 조금씩 확장하고 있을 거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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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 기획 29주년 기념 특별 한정판 버지니아 울프 전집 2
버지니아 울프 지음, 박희진 옮김 / 솔출판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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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에서 "등장인물은 여섯 사람이면서 한 사람"이라고 울프는 말했다. 여섯 사람이자 한 사람인 등장인물은 울프의 친구들이기도 하지만, 울프 자신들이기도 하다. 울프가 일기에 썼던 말을 하기도 하고, 간간히 울프의 목소리로 말하기도 한다. 수전은 몽크스 하우스 정원의 울프를 닮았다. 고전문헌학 교수 네빌은 울프가 마다한 기득권층의 인생을 사는 인물이지만, 네빌이 주머니 속의 '이력서'를 만지작거리면서 자기의 가치를 불안한 듯 가늠하는 모습은 울프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우리는 저마다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는 이 의미심장한 생각은 클러리사 댈러웨이의 생각이기도 했다.


"이 사람은 지금 이러니까 이런 사람이고 저 사람은 지금 저러니까 저런 사람이라는 말을 하지 말아야지."

-<댈러웨이 부인> 중에서


울프가 자신의 작가 인생의 상당 부분을 바친 작업은 그런 라벨들을 해체하는 작업, 곧 누군가를 '이런 사람' 또는 '저런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데 수반되는 허위를 폭로하는 작업이었다.


<파도>의 등장인물들이 어느 차원에서 "모두 하나"라면, 화자가 바뀌는 순간을 정확하게 포착하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모두의 목소리가 하나로 합쳐진다는 것이 바로 이 소설의 핵심이다. 말하는 내용은 달라도 말하는 리듬은 똑같다.


"내가 쓰고 있는 글은 플롯을 따르는 글이 아니라 리듬을 타는 글이다."

-1930년 8월 28일 에설 스미스에게 쓴 편지.


p153~154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으로> 알렉산드라 해리스, 김정아 옮김, 위즈덤하우스





버나드, 수잔, 로우다, 네빌, 지니, 루이스, 여섯 인물의 독백으로 이루어진 소설 <파도>는 독자들에게 버지니아 울프의 높은 장벽을 마주하게 하는 작품이다. 전통적 소설 요소인 플롯, 시간, 배경, 사건 없이, 오롯이 여섯 인물의 내적 독백으로 이루어진 소설은 무대 위에서 여섯 명의 배우가 관객을 향해서만 대사(방백)를 던지는 묘한 연극을 보고 있는 기분이 들게 한다. '영혼의 자서전'이라고 불리는 이 소설은 소설보다는 희곡을 연상시키고, 그러면서도 대사의 뉘앙스와 함축적인 의미에서 시를 떠올리게 한다.






또렷하게 그려지는 서사없이 인물들이 던지는 방백을 쫓아가는 일은 힘겹다. 하지만 울프의 작품에서 종종 느끼듯 소설의 후반부에 다다르면 인생의 시작에서부터 끝, 유년에서 죽음에 이르는, 지난하면서도 거대한 생의 발자취를 더듬더듬 짚어낸 듯한 감동에 사로잡힌다. 하나의 인생을 살아내고 그 의미를 어렴풋이 알아차린, 죽음에 다다른 인물의 심정이 되어. 해가 떠올라 중천에 이르고, 서서히 기울어 어둠에 잠겨버리듯, 월요일 다음에 화요일, 화요일 다음에 수요일이 오듯, 해변으로 달려온 파도가 부서지는 순간 뒤이어 또 다른 파도가 달려오듯,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 삶이고,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 그 끝에 있음을 소설은 색다른 방식으로 보여준다.




"인생은 즐겁고 좋은 것이다. 월요일 다음에는 화요일이 오고 그다음에는 수요일이 온다.

그런 식이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면 차이가 생긴다. 뭔가 방의 모습이, 뭔가 의자의 배열 방식이 어느 날 밤 그것을 넌지시 알려올 것이다."

p.286



"‘늙었군’이라고. 그러나 그녀는 잘못 알았다. 나이 때문이 아닌 것이다. 물이 한 방울 한 방울씩 떨어졌기 때문인 것이다. 시간이 사물의 배열을 한 번 더 흔들어놓았던 것이다. 우리는 까치밥나무 잎의 아치에서 좀 더 넓은 세계로 기어나온다. 사물의 진정한 질서가-이것은 우리의 영원한 환상인데-이제 와서는 분명해진다. 이리하여 일순간에 거실에서 우리의 삶은 하늘을 가로지르는 태양의 당당한 행진에 순응하는 것이다."

p.286~287



"화요일이 월요일에, 수요일이 화요일에 이어진다. 어느 것이나 꼭 같은 잔물결을 퍼뜨린다. 생존은 한 그루의 나무같이 연륜을 더한다. 나무같이 잎을 떨어뜨린다."

p.298





길게 이어지는 독백은 자주 누구의 것인지 잊어버리게 한다. 때로는 다른 인물의 것으로 착각한 채 읽혀지기도 한다.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으로>에 실린 해석처럼, 누가 한 말인지 헤아리는 게 중요하지 않은지도 모르겠다. 여섯 인물의 목소리는 버나드의 목소리로 통합되니까. "인생은 하나가 아니니까, 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버나드인지 네빌인지 루이스인지 수잔인지 지니 혹은 로우다인지 늘 확실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버나드의 말처럼, 한 사람의 내면에는 여러 개의 페르소나와 정체성이 뒤엉켜 존재한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서로 연결되고 관계를 맺으면서 지속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의 인간은, 그 자신 한 명, 단 하나의 정체성으로 이루진게 아니라 그를 둘러싼 주변의 주요 인물들과의 불협화음, 협화음 속에 형성되기 마련이다. 우리의 정체성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그 영향 속에서 변형, 통합하며 축소와 확장을 거치는 유동체에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풍성하고 창의적인 삶이란, 하나의 정체성으로 확정짓는 게 아니라, 다양한 정체성을 오가며 향유할 수 있는 데서 가능한 게 아닐까.




"나는 도대체 뭔가? 라고 묻는다. 이것인가? 아니야, 나는 저것이야. 특히 지금 방에서 나오고, 사람들은 계속 이야기를 하고 있고, 자갈길을 혼자서 발소리를 들으며 걸어 나아갈 때 오래된 예배당 꼭대기에 숭고하고 초연하게 달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나는 단순한 하나가 아니고 복잡다단한 여럿이라는 사실이 확실해져. (…) 내가 몇 개의 전이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지. 버나드의 역할을 번갈아 대신할 몇 사람 사이를 들락날락해야 하는 것을."

p.82



"(수잔) 도대체 나는 누구란 말인가, 이 문에 기대어 세터 종의 개가 원을 그리면서 냄새를 맡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나는? 때때로 생각하지(나는 아직 스무 살도 안 되었어). 나는 여자가 아니라 이 문 위에, 이 지면 위에, 내리쪼이는 빛이 아닌가 하고. 나는 다양한 계절이라고 생각해, 일월, 오월, 아니면 십일월이라고, 진흙, 안개, 여명이라고. 나는 여기저기 던져지고, 부드럽게 표류하거나 사람들과 잘 섞이질 못해."

p.104



"나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똑똑히 써놓자) 타인의 눈이 비춰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나 자신이 무언지 도통 알지 못하겠는 거다.(...)

그들과 함께 나는 다면체가 되는 거야."

p.124~125



"인생은 하나가 아니니까, 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버나드인지 네빌인지 루이스인지 수잔인지 지니 혹은 로우다인지 늘 확실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 상호 간의 접촉은 이렇듯 불가사의한 것이야."

p.296



"이제 묻노라,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라고. 버나드, 네빌, 지니, 수잔, 로우다, 그리고 루이스에 관한 이야기를 해왔지만 나는 그들 모두인가? 별개의 존재인가? 모르겠다. 우리는 다 같이 여기에 앉아 있었지만 퍼서벌은 죽었고, 로우다도 죽었다, 우리는 흩어져서 지금 여기에 없다. 하지만 우리를 갈라놓는 어떤 장애물도 찾아볼 수 없어. 나와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경계도 없어.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너다’라고 느꼈다. 우리가 그토록 대단하게 생각하는 차이도, 그렇게나 열정적으로 소중히 여기는 개성도 정복되었다."

p.303~304





소설의 전체적인 윤곽은 여섯 인물의 유년기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삶을 다룬다. 버지니아 울프가 전작들에서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천착했던 주제들- 순간에의 몰입(어떤 순간을 고정시키려는 노력), 시간의 흐름과 존재의 의미, 삶과 죽음-에 대한 깊고 너른 사유가 인물의 독백, 특히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버나드를 통해 흘러나온다. 그러한 사유를 태양이 뜨고 지는 하루라는 자연의 흐름에 빗대어, 유년기에서 이십대, 삼십대, 중년에서 초로로 이어지는 삶의 주요 장면을 이미지로 쌓으며 풀어낸다. 한 장, 한 장에 그려져 한 권의 책 속에 쌓인 이미지의 산은 삶이라는 총체를 담고 있다.



하지만 태양은 지고 어둠에 잠기고 마는 하루의 흐름처럼, 서서히 떠올라(유년기) 찬연하게 빛나다(청장년) 빛이 길게 드리우는 오후를 거쳐(중년), 이그러져(노년) 지고 마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태양의 흐름에 순응하듯 누구나 죽음이라는 마지막에 닿는다. 하지만 버나드의 죽음 이후에도 "일식 이후의 햇빛이 세계에 돌아"온다. 또 다시 내일의 태양이 솟아오르고, 파도의 흐름은 지속된다. 하나의 존재가 죽음을 맞더라도 인류 전체의 삶은 지속된다. 거기에 삶의 영속성과 재생성이 있다고, 부단한 삶과 죽음이 반복되는 것이 인류 전체의 거대한 삶이라고 저자는 말하는 것 같다. 소설 속에서 그 통합적인 삶이 '파도'의 이미지로 멈추지 않고 달려온다.





"파도는 해변에 부서졌다."



소설의 마지막에 남겨진 한 문장에 대한 해석은 두 갈래로 나뉘어진다. 죽음에 "정복당하지 않고, 굴복하지 않고" 몸을 던지겠다는 버나드의 다짐처럼 부서져도 다시 살아나는 파도에서 죽음을 넘어선 무언가, 영속적인 무언가를 떠올려볼 수 있다. 그런데도, 하나 하나의 파도는 결국 부서지고야 만다는게 기정사실이다. 거기에는 인간 개개인의 운명은 하나의 파도처럼 해변에 다다라 부서질 수 밖에 없다는 쓸쓸함이 드리운다. 개인의 삶이란 부서지는 파도처럼 유한하고 허무하지만, 과거와 미래, 관계 속으로 이어지며 영속되는 것이라고 울프는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버나드의 것으로 응집된 목소리는, 죽음을 지나 버나드 영혼의 읆조림으로 나아간다. 그렇다, 이 소설은 '영혼'의 목소리가 풀어내는 이야기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 목소리의 회상이었을지 모르겠다. 모든 독백이 실은 영혼의 목소리였을지도. 죽음 이후 남게 될 '영혼'이, 지나온 삶의 발자취를 내려다보면 이렇게 하나의 책으로 집약될 수 있을까. 소설에서처럼 영혼이 죽음 이후 즉시 소멸하는게 아니라, 잠시 머물며 삶을 더듬는 '영혼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나만의 책에는 어떤 독백이 들어설 수 있을까.



"숲은 사라져버렸다, 대지는 그림자의 광야였다. 겨울 풍경의 조용함을 깨뜨리는 소리는 단 하나도 없었다.

(…)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일식 이후의 햇빛이 세계에 돌아오는 걸까? 기적적으로. 약하게. 얇은 줄이 되어. 그것은 유리 새장같이 매달려 있다.

(…)

이렇듯 풍경은 내게 돌아왔다, 그리하여 색이 있는 파도 같은 들판이 눈 아래에서 흔들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차이가 있다, 즉, 나는 보지만 내 모습이 남에게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그림자도 드리우지 않고 걸었다, 예고도 없이 왔다. 옛날의 외투, 옛날의 반응은 모두 떨어뜨려 버렸다. 소리를 되돌려 보낼 힘도 없는 손을 떨어뜨려 버렸다. 망령같이 야위고, 걸어도 발자국을 남기지 않으며, 그저 느끼기만 하면서 나는 아무도 발아보지 않는 세계를 혼자 걸었다, 새로 피어난 꽃들을 스치고 지나가며, 어린애처럼 한 음절밖에 말하지 못하면서, 문장을 만들어 숨을 장소도 없이-그렇게나 많은 문장을 만들어온 내가, 항상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과의 교제를 꾀했던 내가, 덩그러니 혼자서, 언제나 텅 빈 난로나, 금색 손잡이가 흔들리고 있는 찬장을 누군가와 함께 해온 내가."

p.300~302



"이 식탁에 앉아 나의 인생 이야기를 양손 사이에서 만들어내어 하나의 완전한 물건으로 당신 앞에 내어놓으려고 할 때 아득하게 멀리 지나가 버리고, 깊이 묻혀버린 여러 가지 일들을, 이 인생 저 인생 속으로 파고 들어가 그 일부가 된 일들을 회상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꿈, 나를 에워싸고 있는 것들, 동거인들, 밤낮으로 머리에 떠오르는 늙고, 생기없는 망령들도, 자면서 몸을 뒤척이고, 혼란스러운 절규를 내뱉고, 환영의 손가락을 내밀고 도망치려 하는 나를 부여잡는 망령들-자신이 그렇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그림자들, 태어나지 않은 여러 개의 나 자신들도."

p.304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여섯 인물이 읊조리는 방백이 밀려온다. 파도의 리듬에 잘 섞여들지 못하면 파도의 타격에 정신을 잃기 쉽다. 하지만 순간, 순간, 운 좋게 파도의 리듬에 올라탄다면 대사가 풀어내는 풍성한 이미지와 사유 속에 빠져들어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힘을 빼고, 때로는 소리내어 읊조리며, 천천히 파도에 올라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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