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러쉬 - 어느 저명한 개의 전기
버지니아 울프 지음, 지은현 옮김 / 꾸리에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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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플러쉬>에는 시인 엘리자베스 바렛과 정서적 교감을 나누었던 개 플러쉬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플러쉬는 자신을 바렛과 동일시 여겼고 지극히 사랑해 로버트 브라우닝을 질투하고 경계했다. 엘리자베스 바렛 또한 플러쉬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어 브라우닝에게 쓰는 연애 편지에도 플러쉬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적어 보냈다. 또한 플러쉬가 납치되었을 때는 모두의 만류를 무릅쓰고 직접 빈민가로 찾아갈 정도로 열의를 드러냈다. (바렛은 건강이 좋지 않아 대부분의 날을 집에서 칩거하며 보냈고, 당시 사회상으로는 여성이 자유롭게 외출할 수 없을 뿐더러 빈민가를 가는 일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는 행위였다.)




“개를 좋아하는 사람이 쓴 게 아니라 개가 되고픈 사람이 쓴 이야기”라는 부제처럼 울프는 플러쉬의 관점에서 글을 써 나갔다. 버니지아 울프가 반려견에 대해 내밀하고 깊은 애정을 지녔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녀는 <플러쉬>를 통해 반려견에 대한 애정과 그들이 주인과 나누는 충직하고 섬세한 감정을 재치있고 유머러스하게 드러내고자 했다. 그래서 <플러쉬>는 우화의 인상을 띠며 가볍고 재미있게 읽히지만 그 속에서도 울프가 문학을 통해 반복했던 메시지를 감지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 바렛이라는 여류 시인의 삶(플러쉬를 되찾기 위해 빈민가를 찾아가고,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브라우닝과 결혼해 이탈리아로 도피)과 플러쉬의 생각을 드러내는 에피소드를 통해 경계를 지우고 무너뜨리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는 <올랜도>나 <자기만의 방>에서 다루었던 주제와 연결되어 세상의 구분을 지우려는 시도로 읽히기도 한다. 플러쉬라는 동물에게 사람과 동등한 인격을 부여한 점이나 서로를 동일하다고 느끼는 엘리자베스 바렛과 플러쉬의 관계 또한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강력한 진실의 영혼인 듯했으며, 속삭이며 비웃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그것은 결국 온 세상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상태가 아니던가? 그는 다시 보았다. 목둘레에 갈기가 있었다. 자신이 좀 특별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거드름을 희화화하는 것-그것은 그 나름의 이력을 쌓는 길 아니던가? 어쨌든, 문제의 해결책으로서, 그가 벼룩에서 해방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는 목둘레 털을 흔들었다. 그는 가늘어진 다리와 알몸으로 날뛰었다. 그는 활기가 솟았다. 대단히 아름다웠던 한 여인이 그렇듯, 병상에서 일어나 영원히 손상된 자신의 얼굴을 발견하면서 옷과 화장품을 태워버리고는, 이젠 다시 거울을 들여다볼 필요도, 연인의 냉정함이나 연적의 아름다움도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기쁘게 웃을 수도 있다.

(…)

그들 모두가 마차 안에 앉았을 때 플러쉬는 그들 위에 한 번의 도약으로 가볍게 뛰어올랐다. 베니스로, 로마로, 파리로-그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제 그에게는 모든 나라가 동등했다. 모든 사람들이 그의 형제였다.”

162~163쪽, <플러쉬>, 버지니아 울프, 지은현 옮김, 꾸리에




혈통을 중요시 여기는 영국 사회의 계급문화에 물들어 생활하던 플러쉬가 이탈리아로 옮겨와 털을 깎아버리는 경험을 통해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에피소드는 인상적이다. 긴 털은 그의 혈통을 증명했고 그래서 “자신이 좀 특별하다”고 느끼게 해주는 요소였다. (글에서 잠시 플러쉬가 지닌 '속물성'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이는 당시 영국 상류층이 지닌 '속물성'과 연결지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벼룩이 극성을 부리는 이탈리아에서 털은 해충이 서식하기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얄궂은 것이 되어버린다.




벼룩 때문에 괴로워하는 플러쉬를 위해 브라우닝은 어느 날 털을 깎아 버린다. 그로인해 골치덩어리였던 벼룩의 문제는 해결되고 플러쉬는 자신의 몸이 가뿐해 졌음을 느끼며 활기에 차오른다. 사회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보여주던 털을 지워 버림으로써 플러쉬는 오히려 해방감을 느낀다. 당시 무명의 시인 지망생이었던 브라우닝을 따라 런던을 떠나왔던 엘리자베스 바렛이 이탈리아에 정착하며 느꼈던 감정이 그런 게 아니었을까. 귀족과 상류층 중심의 형식과 격식에 치중된 런던의 삶에서 벗어나 경험하게 된 자유롭고 활기찬 이탈리아의 삶은 그녀에게 어떤 해방감을 주었던 게 아닐까 짐작해본다.




플러쉬의 이야기 뒤로 병상에서 앓다 일어난 여인이 외모에 대한 신경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느끼는 부분에 크게 공감했다. 하이힐과 몸을 조이는 정장, 매일 정성껏 하던 화장에서 벗어나면서 내 삶의 한 부분은 몹시 홀가분해졌다. 소유욕으로 사들인 물건이 어느 날 나를 누르는 짐처럼 느껴졌고, 채우기보단 비우는데 열중하게 된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집착하거나 더 좋은 것을 얻으려 얽매일 때 삶은 거추장스러운 갑옷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털이 잘려 나간 플러쉬가 “가늘어진 다리와 알몸으로 날뛰었다”는 대목에서 내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을 잘라내고 싶다는 유혹을 느꼈다. 그리고 익숙하고 자연스러워 갑갑한 줄도 모른 채 나를 가두고 있는 건 무얼까 하는 고민으로 옮겨갔다.




자신만의 섬세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던 작가 버지니아 울프에게 반려견이 어떤 존재였는지 이 책은 말해준다. 사람과도 진정한 교감을 나누는 일은 어렵다. 그런데 말이 통하지 않는 동물과 지극한 감정적 교류를 나누는 삶이란 어떤 걸까 상상해보게 된다. 충직함을 속성으로 가진 동물이라 가능한 걸까. 오직 한 대상에게만 충실한 마음을 유지하는 삶이라니, 새삼 경이롭다.




"크게 벌어진 입과 커다란 눈과 구불거리는 곱슬머리를 가진 그녀의 얼굴이 기묘하게도 그의 것과 닮아 있었다. 두 동강났지만 한 틀에서 만들어진 그들은 아마 각자에게서 휴면상태인 것으로 서로를 완성시켜 주었을 게다. 그러나 그녀는 여자였고, 그는 개였다."

189쪽, <플러쉬>, 버지니아 울프, 지은현 옮김, 꾸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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